4/16/2017 | 부활주일 메시지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

고린도후서 5:14-18

‘우리 때문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영어로 된 찬양 제목은 ‘We Are The Reason (https://youtu.be/YPbzvCuMl90)’입니다.

잊을 수 없네 하나님의 사랑 날 살리시려고 주신 생명
내 십자가지고 오르신 갈보리 언덕 날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나는 보았네 피 묻은 십자가 날 구하시려고 흘린 사랑
나를 바라보시며 흘리신 용서의 눈물 날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찾았네 나의 삶을 모두 주께 드리는 것
그가 날 위해 모든 것 주셨듯이 나의 삶을 주께 드리리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갈보리 오르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바로 우리 때문에 십자가 지셨고 우리 때문에 죽음 당하셨네
우리 때문에 물과 피 쏟으셨네 무지한 우리 때문에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4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hrist’s love controls us①. Since we believe that Christ died for all, we also believe that we have all died to our old life.”② / ①Or urges us on ②Greek Since one died for all, then all died 이 말씀 한 절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가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 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우리 믿음 생활의 모든 것이 달려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믿지 않는데,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 장’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하는데, 여러분 중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한 복음도 헛되며 여러분 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믿음은 공허한 것이 될 뿐더러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사람들 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12-20)

그러므로, 우리 믿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믿으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같이 죽은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경기에 앞서 선수 대표가 정정 당당하게 스포츠맨십을 지켜 공정한 경기를 하겠다고 선서를 합니다. 그 선수는 경기에 참가한 모든 선수를 대표해서 선서를 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선수들이 정정당당한 경기를 하겠다고 선서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 들으세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들도 부활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성경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가 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라고 했습니다. 순서상 '첫 열매'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읽은 말씀 15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ose who receive his new life will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Instead, they will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them.”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이 말씀에 나오는 ‘New Life (새 생명)’란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로운 생명’이 내 속에 들어 오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서 내가 전에 느껴보지 않았던 ‘생명의 의미’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새 생명’은 전에 내가 살았던 ‘옛 생명 (old life)’과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old life’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살기 전에는 누구나 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삶을 삽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참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아요. 이 사람의 말도 달라지고, 행동에도 변화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한 단계를 넘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no longer live for himself or her-self)......”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미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 ‘새 생명’ 가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안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이 쉽지 삶의 방식를 바꾼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 성’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죄 성’은 우리를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듭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인간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로마서 5:8)’ 우리의 인간성을 완전히 바꾸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고, 그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에 못박혀 죽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죄 성'도 십자가게 못 박힌 것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에게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집니다. 그 사람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부활생명’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조금 더 보충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나는 나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 “For even I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my life as a ransom for many."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대속물’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ransom’이라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몸값’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노예 시장이 있었습니다. 노예마다 몸값이 매겨져 있습니다. 노예를 사는 사람이 그 값을 치르면 그 노예는 그 사람 것이 됩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쓰면서 ‘ransom’ ‘몸값’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의미상 우리는 모두 죄의 노예로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의 ‘몸값’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싼 값을 치르시고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고린도전서 6:20, 7:23) 이 말씀이 The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were actually purchased with the precious blood of Jesus and made His own. So then, honor and glorify God with your life.”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우리가 자신을 사랑 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를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오늘 말씀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 시키시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18절) “God, who reconciled us to himself through Christ, gave us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에게 맡기신 ‘화목의 직분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reconcile’이란 말은 라틴어 ‘reconcilare’에서 온 말입니다. re-(again)+concilare (make friendly)라는 뜻 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만들고, 서로 적대적인 인간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친구가 되게 하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유는 간단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ransom’이 되셔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 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와 똑 같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과 우리는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었으니,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친해지도록, 사람과 사람끼리 서로 친구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생명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 당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때문에 갈보리에 오르셨고, 무지한 우리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압니다. 조금만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 이라면, “이제 나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는데,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제 내 안에 '새생명'이 자라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하고 질문합니다.

"We Are The Reason" 찬양 가사가 잘 말해 줍니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 찾았네. 나의 삶을 모두 주께 드리는 것! 그가 날 위해 모든 것 주셨듯이 나의 삶을 주께 드리는 것!”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오늘 말씀에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 나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 하는 삶, 이것이 곧 ‘화해의 사역 (the ministry of reconciliation)’입니다. 이 성경 말씀이 이번 부활절에 여러분이 드리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4/9/2017 | 종려주일 메시지

온 세상이 그를 따르고 있다. The Whole World is Following Jesus

요한복음 12:12-25

오늘 말씀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12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유대나라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는지, 사람은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13절)” 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 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17-18절)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적(表迹)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곱 개의 표적이 나옵니다. 각 표적마다 요즘 말로 하면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여 주셨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한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쳤을 때는 사람들 사이에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어 갔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라고 했고, 예수님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예수님을 옹호했습니다. 그의 부모를 불러서 심문했고, 본인을 불러서 심문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그냥 덮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예수라는 사람이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회당에서 추방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회당에서 추방하는 것을 전문 용어로 ‘ex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ex-’는 ‘추방한다 (put out)’이라는 뜻이지요? ‘communica¬tion’이란 말은 라틴어 ‘커뮤니카티오 (commūnicātiō)’에서 온 말입니다, ‘공동체 (community)’ 혹은 ‘교제 (communion)’이라는 말 뒤에 명사형 어미가 붙은 것입니다. ‘공동체’로부터, 혹은 ‘교제’로부터 추방하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조기(早期)에 진정 시키기 위해서 예수가 눈을 뜨게 했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에게 가장 큰 형벌을 내렸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먼저 눈을 뜬 당사자를 회당에서 추방했습니다. 가장 큰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을 만나 주시는 감동적인 장면을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9:35). 사실 이 사람은 눈은 떠서 보게 되었지만, 그를 고쳐 주신 예수님을 자세히 본 적도 없고, 예수님과 얘기해 본 적도 없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회당에서 추방 당한 사람을 ‘excommunicate’라고 하거든요? 예수님께서 ‘excommunicate’를 만나 주십니다. 눈은 보게 되었지만, 졸지에 유대 사회에서 격리된 불이익을 당한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막으려고 음모를 꾸미고 자기들의 지혜를 동원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눈을 뜬 사람의 표적 이야기가 좀 사그라들 때, 또 다시 엄청난 표적 이야기가 유대 사회를 강타합니다. 이번에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려냈다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도 보고 나사로도 보기 위해서 모여 들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러 나온 것은 이런 배경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아직 한 번도 사람을 태워 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여러분, 이 때 광경을 머리에 연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개선 장군처럼 말을 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한번도 태워 본 적이 없는 나귀를 타셨으니까요. 그 나귀가 뒤뚱뒤뚱 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에는 그 말씀이 없습니다만, 공관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나귀 새끼 등에 자기들을 옷을 벗어 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환영 나온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을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잘라 길에 깔았다고 합니다. 우습잖아요? 위용 있는 말 안장에 앉으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벗어 준 옷을 안장 삼아 나귀 새끼 위에 앉으셨습니다. 무슨 레드 카펫이 그 앞에 깔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을 벗어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자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존의 왕의 입성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요한에게도, 다른 제자들에게도 이 광경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성경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너의 왕이 오신다. 그분은 어린 나귀를 타셨다!’” (15절).” 이 말씀은 구약 스가랴 9:9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요한이 기록하지 않은 사실 하나를 강조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겸손하셔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5.  ‘호산나 (hosanna)’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이런 뜻입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기대를 이루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선장군의 모습으로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레드 카펫을 밟고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옷을 벗어 깐 길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입성하셨지만, 예수님은 힘으로, 권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나는 내 생명을 많은 사람들을 위해 대속물 (ransom)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 예수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대로 겸손한 섬김의 왕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환영하는 것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계획은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온 세상이 저 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Common English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ee! We’ve accom-plished nothing! Look! The whole world is following him!” 모든 사람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인 저의 눈에 들어 온 말씀은 요한이 ‘the whole world’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모든 사람 (everyone)’ 이렇게 말해도 될 텐데, 요한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고 ‘the whole world’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분히 의도적으로 ‘the whole world’라는 용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Greek 성경에는 이 단어가 ‘코스모스 (κόσμος)’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세상 (world)’ 혹은 ‘우주 (universe)’라는 말로 번역되는 말이지요? 지금 요한의 머리 속에는 비록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주고 받고 있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은 온 세상, 온 우주를 구원할 그리스도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코스모스’라는 말을 다분히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여기서만 ‘코스모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한복음 3:16)” 이 말씀에도 ‘코스모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복음 9:5)”라는 말씀을 기록할 때도 ‘코스모스’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구원 (salvation)’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나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구원, 전 우주의 구원입니까? 저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생각을 온 세상에까지, 온 우주에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에 대한 좁고, 이기적인 편협한 생각이 아니라, 온 세계까지, 온 우주까지 여러분이 가진 구원의 개념이 확장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교회에 미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요한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 사실을 기록한 것을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한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유월절에 예배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 중에 그리스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20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 사람들은 유대교로 개종 (conversion)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 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3-25절) 예수님은 자기가 하는 말이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진리를 듣는 사람,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진리가 가진 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 말씀이 진리이다. 너희가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산다면 이 말씀이 너희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자유를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밀 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한 알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밀 알이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예로 들어 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더라면, 비유적인 의미에서 밀알이 죽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면, 그래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많은 열매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형제나 자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 많은 형제와 자매가 생겼습니다. 이 얘기가 그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서 8:29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이제 오늘 설교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 단순히 몇 몇 열심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유럽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온 우주’가, ‘코스모스’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오래 살았다고 하지요? 신학자들은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때를 A.D. 85-9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요한은 허리가 굽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코스모스’가 들어 있는 거인(巨人)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머리, 우리의 마음에도 ‘코스모스’가 들어와야 합니다. 분주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는 우리 머리에 요한이 품었던 ‘코스모스’가 들어와야 합니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르는 ‘코스모스’의 비전을 마음에 품는 사람은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 알처럼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는 ‘코스모스’를 마음에 품을 수가 없습니다. 설령 ‘코스모스’를 마음에 품는다고 해도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가지고는 ‘코스모스’의 비전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는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이라야 ‘코스모스’의 비전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4/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8

배반의 입맞춤 The Kiss of Betrayal

마가복음 14:43-52

돈 리처드슨 (Don Richardson, 1935, 캐나다)이 쓴 뉴기니아 사위 (Sawi) 부족 (tribe)에 대한 선교 보고서 ‘화해의 아이 (PEACE CHILD)’라는 책을 알고 계시나요? 이 책은 27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을 정도로 선교학에서는 교과서처럼 통용되는 책입니다.

사위 부족은 적의 머리를 사냥하여 해골을 베고 자는 야만적이고, 전투적인 부족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위 부족은 배반(背反, betrayal)을 덕목으로 알고 사는 특이한 부족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상대방을 배반하는 방식은, 먼저 상대방과 우정을 쌓아서 상대방을 안심 시켜 놓고, 때가 되면 상대방을 배반하고 죽인다고 합니다. 이것을 그들의 용어로 '투위 아소나이 마카에린 (tuwi asonai makaeri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우정으로 살해 대상을 살찌운다는 것입니다.

리처드슨이 이 사위 부족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이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기는 장면에서 환호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룟 유다야말로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그만하면 됐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보아라!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겨진다. 일어나자! 가자! 나를 넘겨 줄 사람이 오고 있다 (41-42절)” 이렇게 말씀하실 때, 유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성전 경비원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과의 마지막 만찬 도중에 밖으로 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 때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자이다’ 하시면서 빵 조각을 집어서 접시에 찍어 가룟 사람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가 빵 조각을 받자마자, 사탄이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 거기 앉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26-30)

예수님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시면서 올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을 때, 밖으로 나간 유다는 성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온 것이 분명합니다. 유다는 경비원들에게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내가 다가가서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란 사람이오.”

유다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셔서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accompanied by the disciples, Jesus left the upstairs room and went as usual to the Mount of Olives.” ‘as usual’이란 말이 ‘늘 하던 대로’라는 뜻이 잖아요? NKJV에는 ‘as He was accustomed’ ‘그에게 익숙했던 대로’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소에도 저녁 식사를 하시면 올리브 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가는 그런 예수님의 습관이 자신이 본받아야 할 습관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훗날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베드로전서 2:21) 그가 받으신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We must follow in his steps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인 것처럼,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도의 습관도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따라 가야 합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습관이 배신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의 습관을 알고 있었던 유다는 (요한복음 18:2), 겟세마네 동산으로 성전 경비대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을 넘겨 주는 자가 사람들과 신호를 정했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체포하여 데리고 가시오.’ 유다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라고 말하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에게 손을 대어 체포했습니다.” (45-46절)

복음서마다 조금씩 이 장면에 대한 기록에 차이가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곧바로 유다는 예수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하고 묻자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마태복음 26:49-50)

제가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유다가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인사했을 때, 유다의 목소리가 어떤 목소리였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①아무 일 없다는 듯한 능청스러운 목소리였다. ②매우 긴장된 목소리였다. ③조금은 과장된 흥분된 목소리였다. ④자기 선생님을 경멸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제가 생각한 정답은 3번입니다. NASB에 보면 유다가 이렇게 예수님께 인사했다고 합니다. “Hail Rabbi!” 굳이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선생님, 여기 접니다.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왕 퀴즈를 낸 김에 하나 더 낼까요? 유다의 키스를 받은 예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①모든 것이 끝났다는 표정이었다. ②유다를 불쌍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③조금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④불쾌한 표정이었다. 여러분의 정답은 몇 번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배반의 입맞춤’ ‘배반의 키스’입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장면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뉴기니아의 사위 부족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환호했다고 하는데요.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 선생님을 배반할 수가 있느냐 하면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모두 유다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장차 예수님을 배반할 가룟 유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냐고 하면서 저마다 자기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 식탁에 앉아 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받은 돈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 “난 아닙니다”고 말하듯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은 그 놈이 누군지 알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손에 단도 (칼)를 들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귀를 잘랐습니다.” (47절) 요한복음에는 그 제자가 베드로였다고 합니다 (18:10) 베드로가 그 종의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8:10, 누가복음 22:50). 그 종의 이름이 말고 (Mal-chus)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만져 고쳐 주셨다는 말씀도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2:51). 이렇게 구체적이고 detail한 것들이 성경에 나오는 이유는, 그 때 일어났던 일들이 facts였다는 것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의 배반에 흥분했고, 칼을 휘두르면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대항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뿐이었습니다. 5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갔습니다.” “‘But these things are happening to fulfill what the Scriptures say about me.’ Then all his disciples deserted him and ran away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나에게 대하여 한 말들이 모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떠나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끝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맨몸에 홑이불을 걸친 채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청년을 붙잡았습니다. 이 청년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 청년이 틀림 없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붙잡은 것입니다. 이 청년은 상황이 다급하게 되자 몸에 걸치고 있었던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벌거벗고 도망쳤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청년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가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밝힐 작은 단서가 나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서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다른 공관복음, 즉 마태나 누가복음의 기초 자료가 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이 되었고, 마태나, 누가는 마가복음을 참고하여 그들의 복음서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예수님의 직접 제자라고 나오고, 요한복음을 쓴 요한도 예수님의 직접 제자라고 나오는데, 마가는 어떻게 그의 복음서를 기록을 할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거든요. 물론 예수님의 직접 제자가 아닌 누가는, 자기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4).

모든 사람들이 유다의 배신을 말합니다. 참 드라마틱한 이야기이지요?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이 내부에서, 열 두 제자 중에서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 보면, 가룟 유다를 그렇게 비판할 것도 아닙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칼을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게 휘둘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려 두고 모두 도망갑니다. 한 청년은 맨 몸으로 도망 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이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태복음 26:33)” 이렇게 큰 소리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공개된 자리에서 난 예수님을 모른다고, 난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

이 베드로가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는 지도자가 됩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는 지도자가 되었을까요?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박해를 피하기 위해 지중해 연안 도시들로 피신을 했을 때도 박해자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교회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결코 우리의 감정(感情)에 따라 좌우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려도 전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 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고 볼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이 만남을 확인해 주는 것이 성령 체험입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否認)했던 베드로에게 성령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 말고는 베드로의 변화의 삶을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Kiss of Judas’라는 말은 ‘배반의 입맞춤’으로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 문제는 ‘Judas’ 이름대신 우리의 이름이 들어갈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우리가 예수님을 배반할 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나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때, 내가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할 상황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아야 할 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칠 지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사순절이 곧 지나가고, 고난 주간이 오고, 부활주일이 옵니다. 부활주일이 지나면 다시 50일만에 성령강림절이 찾아 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했던 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와 축복을 주실 지 여러분의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남은 사순절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주간, 부활절, 그리고 성령강림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일들에게 마음을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3/26/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7

일어나라! 가자! Up, Let’s Be Going!

마가복음 14:32-4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는 올리브 산의 작은 동산에서 기도하셨다는 말씀과, 배신자 유다가 성전 경비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오기 직전의 긴장된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겟세마네에 가면 예수님께서 그 밑에서 기도하셨다는 오래 된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를 한번 보실까요? 굉장하지요? 원래 올리브 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하셨다면 이 나무 수령이 적어도 2,000년이 훨씬 넘지 않았겠습니까? 그 밑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위에는 마태복음 26:39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은 그 고뇌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신뢰의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전 당신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합니다.’”)

맞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의 ‘겟세마네 동산 (the Garden of Gethsemane)’으로 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여기 앉아 있어라.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32-34절) 예수님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제자들에게 모두 열어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은 “나와 함께 기도하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하셨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sympathize)’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서도 함께 겪으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은 이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괴로운 심정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이 괴로운 심정을 같이 나누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싶은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같이 나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서 할 수만 있다면 이 때가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이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힘들고 괴로운 시간에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만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누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외출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는 것입니다. 제일 안 좋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하면서, 스스로 힘든 시간을 이겨 나가는 타입의 사람들은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힘든 시간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모두 쏟아 놓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시험은 누구나 겪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시험을 견디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He will show you a way out so that you can endure).” (고린도전서 10:13)

“He will show you a way out!” 우리에게 피할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고,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피하고, 두문불출하고, 혼자 있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 사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잠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연약하구나 (For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38절) 우리 몸의 discipline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전 육신이 연약해요!” “전 새벽형 인간이 아니예요!” 우리가 지금 이런 사치스러운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몸의 연약함을 이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의 공동체가 있는 이유입니다. 혼자도 믿음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옆에 기도를 요청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믿음생활에 큰 손실을 가져 오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할 공동체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요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는, 그래서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의 기도가 나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에베소서 6:19) 누가, 누구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역사도 짧고, 아직 믿음이 약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기도나 제대로 할 줄 알까요? 그런 초보 크리스천들에게 바울 같은 믿음의 사람이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누가 언제 교회를 세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바울은 아직 로마에 한번도 가 보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9-10) 신실하신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마중 나와 그를 환영해 주었던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28:15).

셋째로,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기도가 참된 기도란 어떤 기도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 (communication)입니다. ‘소통’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우리가 리더십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데, 좋은 리더십을 위한 qualification 중에 하나가 소통입니다. 그 리더가 팀원들과, 직원들과,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bba is an Aramaic term for father’ 또,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bba is an Ara-maic word used by young children when addressing their fathers, but not used by Jews in prayer be-cause of the word’s implied familiarity. Jesus’ use of the word emphasized his Father-Son relationship with God.” ‘아바’라는 말이 하나님을 너무 가깝게 부르는 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아바’라는 말을 사용한 최초의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최고로 친밀하게 부를 수 있는 용어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상투적인 말, 형식적인 말, 아무 의미 없이 사용하는 말, 습관적인 말들을 가급적 많이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을 가지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 나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기도는 비록 내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올리브 나무 밑에 씌어진 글처럼 “아버지, 전 당신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Please take this cup of suffering away from me. Yet I want your will to be done, not mine.” ‘yet’ ‘but’ ‘however’ 등의 단어들은 앞의 말에 대한 반전(反轉)을 가져 오는 접속사들입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서 4가지 탄핵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고 말하면서 4가지 탄핵 이유 중에 3가지는 탄핵의 이유로 볼 수 없다는 판결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도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반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에는 반전이 없습니다. “Please take this cup of suffering away from me” 우리의 기도는 항상 이렇게 끝이 납니다. ‘But’이라고 말하는 반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에 이 ‘반전’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참된 기도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반전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기도하지 않고 모두 잠을 잤습니다. 우리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기도하면서 보내셨고, 내가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드니,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주님의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시나요? 그 날 밤 예수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받아 들이셔야 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예수님은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요.

예수님은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가자! 나를 넘겨 줄 사람이 오고 있다 (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우리들의 연약함, 우리들의 불순종과 관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립니다. 저는 “일어나라! 가자!”는 말씀을 읽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요청을 들어 드리지 못했던 아쉬움이 아닐까요? 그것은 주님과 함께 그 밤에 깨어서 기도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아닐까요?

5년 후, 10년 후에 우리는 지난 날들을 돌아 보면서 이런 아쉬움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 때 기도하지 않았지? 그 때가 내 인생의 가장 critical time이었는데, 왜 나는 그 때 기도하지 않았지?” 이런 아쉬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일어나라! 가자!” 이런 주님의 음성이 있기 전에 주님의 요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3/19/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6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마가복음 14:22-31

오늘 말씀은 유월절 만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유월절 만찬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다빈치는 요한복음 13:22-30을 소재로 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깁니다. 이 그림은 가로 910cm, 세로 420cm의 매우 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다빈치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Ludovico Maria Sforza)의 요청으로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의 옛 수도원 식당의 벽면에 꽉 차게 그린 그림입니다. 유월절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저는 아니지요?” 하면서 말을 주고 받고 있는 장면을 포착해서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의 제자들이 식사하다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는 표정들이, 아주 역동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서 1498년에 완성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은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서 진행이 됩니다. 먼저 촛불을 켜고, 포도주 잔을 돌립니다. 식사 사이 사이에 세 차례 더 포도주 잔을 돌립니다. 먹는 음식으로는 희망의 상징인 파슬리 (parsley)를 쓰라림과 눈물의 상징인 소금물에 찍어서 먹고, ‘마로르’라는 쓴나물을 ‘하로셋 (haroseth)’라고 하는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습니다. ‘쓴나물’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았던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고, 쓴나물을 달콤한 하로셋에 찍어 먹는 것은, 자유의 달콤함을 알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짜’라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과 ‘구운 양고기’를 먹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틀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식구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식사 중에 제일 어린 자녀에게 네 개의 질문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질문1) “왜 오늘밤은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나요?” (질문2) “다른 날은 맛있는 나물들을 먹는데, 왜 오늘 밤은 쓴 나물을 먹나요?” (질문3) “다른 날은 음식을 어디다 찍어 먹지 않는데, 왜 오늘 밤은 두 번, 쓴나물은 하로셋에, 파슬리는 소금물에, 찍어 먹어야 하나요?” (질문4) “다른 날은 간단하게 먹는데, 왜 오늘 밤은 특별한 잔치를 하나요?” 매년 똑 같은 질문을 하게 되어 있고, 매뉴얼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의 요점은, 과거의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에 감사하면서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은 ‘할렐’ (시편 115-118편)과 ‘대할렐’ (시편 136편)을 노래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26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 불렀던 찬송이 바로 ‘할렐’과 ‘대할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다빈치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예술가의 영감 (inspiration)에 감탄했습니다. 다빈치가 이 그림 제목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생각 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식사가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빈치는 이 그림을 통해서 유대교의 전통으로서 지켜 왔던 유월절 만찬이 이제 끝이 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지막 만찬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했다.” (누가복음 22:15)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유월절을 준비하여라 (누가복음 22:8)” 하고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은, 그 식사가 세상에서 드시는 마지막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식사를 통해서 뭔가 말씀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만, 유월절 음식이 제대로 준비된 것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구운 양고기를 준비한 것 같지 않습니다. 쓴나물도 준비한 것 같지 않고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마짜’를 준비해야 하는데, ‘마짜’를 준비한 것 같지 않고 보통 먹는 빵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포도주는 제대로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식사가 정말 유월절 만찬이 맞느냐 하는 논쟁이 있을 정도입니다.

다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실까요? 식탁 어디에도 구운 양고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군데 군데 놓여 있는 빵도 누룩 없는 ‘마짜’가 아닙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납작 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는 양고기 대신 뜻밖에도 생선이 놓여 있습니다. ‘구운 양고기’ 대신 다빈치는 그림의 한 중앙에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했습니다. 다빈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가져왔던 유월절 만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한 것입니다. 그런 의에서 그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드신 만찬은 유대교의 유월절 만찬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먹는 새로운 만찬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먹었던 그 날 저녁 유월절 만찬은 여러가지 면에서 색다른 것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떼 주시면서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먹는 빵은 누룩 없는 ‘마짜”입니다. 이것은 고생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의미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빵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빵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또 우리가 나누어 먹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빵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hen we break the bread, we are sharing in the body of Christ. And though we are many, we all eat from one loaf of bread, showing that we are one body.”

유월절 만찬에 모두 4번의 포도주가 나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단순히 축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포도주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24절) 이제 포도주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맺는 ‘새로운 언약 (The New Covenant)’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포도주 잔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between God and his people-- an agreement confirmed with my blood.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이 잔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은 새언약이다. 나의 피로 합의를 확인한다).” (고린도전서 11:25) 그리고,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생의 미션 (mission)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누가복음을 보면, 주님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기념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하라, 되풀이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세요.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are announcing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again (이 빵을 먹을 때마다, 그리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해야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26)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로 피를 쏟아 부은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이라는 말 속에 저의 여러분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에 ‘빚 (debt)’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빚은 우리가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인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에 드러내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식사를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이 찬양을 하면서 올리브 산으로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불렀던 찬양이 무슨 찬양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식사 후에 부르는 찬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시편 136편을 노래로 불렀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주는 선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주들의 주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홀로 위대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1-4절) 이 시편이 26절까지 있는데요. 매 절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는 가사가 후렴처럼 반복됩니다. 제자들은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날 저녁 식사가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인 것을 아셨던 주님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럴 때 가슴이 울컥한다고 하잖아요? 아마 주님도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가슴이 울컥했을 것입니다.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말할 것이다.” (30절) 참 신기하게도 닭은 새벽에, 매일 일정한 시각에 두 번 ‘꼬끼요' 하고 웁니다. 시계가 없던 때에도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이 말은 ‘짧은 시간 안에’ 이런 뜻입니다. 닭이 한 번 울고, 약간의 짬 (interval)을 두고 또 한번 웁니다. 그 interval이 길지 않습니다. 기껏 길어야 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이 짧은 시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31절) 옆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자고, 주님과 같이 먹고, 주님이 일하시는 동안 늘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먹었습니다. 주님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빵을 떼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주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내가 그럴 리가 없다 고 하면서 펄쩍 뛰었던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 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크리스천의 담대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담대하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난 죽어도 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거야!”  이렇게 큰 소리친다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먼저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다 이길 수 있다는 명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장 나약할 때는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죄 성을 모르고 큰 소리 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장 강할 때는 자신의 나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이 말씀이 사순절에 드리는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