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5

하나님의 드라마 The Unfolding Drama of God

마가복음 14:12-21

보스턴 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로 있었던 버나드 앤더슨 (Bernhard W. Anderson, 1916-2007)이 1953년에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제목이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펼쳐지는 성경의 드라마’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 66권을 6개의 막 (scene)으로 설정했습니다. 1막 ‘A Way into the Future (미래로 가는 길)’ 2막 ‘The Discipline of Disaster (재난을 통한 훈련)’ 3막 ‘The New Exodus (새로운 출애굽)’ 4막 ‘The People of the Torah (토라의 사람들)’ 5막 ‘Victory through Defeat (패배를 통한 승리)’ 6막 ‘The Church in the World (세상 속의 교회)’ 이 책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저는 신학교 영어 시간에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앤더슨의 드라마에 의하면 오늘 읽은 말씀은 제 5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는 장인데, 지금부터 예수님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게 전개가 됩니다. 하나님의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무교절 첫 번째 날, 즉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시작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했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Passover)’이라는 말은 ‘넘어간다’는 뜻인데, 이 말 자체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문 틀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집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는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결국 이 심판을 견디지 못해서 이집트의 바로 (Pharaoh)는 모세에게 네 백성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히 이집트를 떠나면서 누룩 (leaven)을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빵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무교절’은 그 때를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무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양을 잡고 만찬을 먹는 하루 축제이지만, 그 다음 날부터 일주일은 ‘무교절’로 지킵니다.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혼동합니다. 오늘에도 두 절기를 혼동해서 ‘유월절’을 ‘무교절’이 시작되는 날로 기록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문틀에 피를 바르고, 고기는 저녁 식사 때 가족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만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을 어디에 가서 준비할까요?” 하고 질문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 두 사람을 예루살렘 성으로 들여 보내시면서 “성으로 들어 가면 물 항아리 (a jar of water)를 들고 오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를 따라가거라.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이 어디냐고 물으십니다’ 라고 말씀 드려라. 그러면 집주인이 너희에게 준비해 놓은 커다란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다. 그 곳에서 음식을 준비하여라.” (13-15절)

이 말씀도 예사로운 말씀은 아니지만, 더 놀라운 것은 두 제자가 성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항아리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났고, 그를 따라 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또 한번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시기 직전에 올리브 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Bethphage)와 베다니 (Bethany) 마을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마을로 들여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러십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하여라. ‘우리 주님이 필요하시답니다. 곧 이리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3) 그래서 두 제자가 마을로 들어갔는데, 정말 어느 집의 문에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 사람이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을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두 말하지 않고 나귀 새끼를 데리고 가라고 허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가가 기록한 두 이야기가 보여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설교자인 저의 눈에는 뭔가 이 이야기 속에 특별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지금 예수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도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제자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 문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해서 끌고 온 일,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물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난 일, 그리고, 유월절 만찬 장소를 구한 일들은 그냥 신기하고,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 그리고 예수님의 신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 메시지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집중하는 40일 동안의 기간입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는 사순절을 위해 특별히 선택한 복음서의 말씀들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말씀,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신 말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신 소문이 멀리 시리아에까지 전해졌다고 하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도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지 않은 말씀이 없습니다.

유월절 만찬 중에 예수님께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18절) “One of you eating with me here will betray me."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씩 “설마 전 아니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Greatly distressed, each one asked in turn, ‘Am I the one?’” (19절) NASB에는 “They began to be grieved”라고 나와 있습니다. 근심했다, 슬퍼했다, 힘들어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열 둘 중 한 사람이며,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다. 인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0-21절)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부분을 더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예수님께서 누구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 요한이 예수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자이다’ 하시면서 빵 조각을 집어서 접시에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 거기 앉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명절에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알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21-30)

예수님은 제자 유다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 아무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눈치를 챈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요한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배반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지금까지 “과연 대통령이 탄핵이 될 것이냐? 아니면 기각될 것이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서도 그랬습니다만, 아마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탄핵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탄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0일 안에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헌법에 대통령이 탄핵될 경우 그렇게 하도록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급격하게 “누가 다음 번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도 그렇거든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반자는 내부에 있었습니다. 유다 이야기를 좀 더 한다면, 유다는 열 두 제자 중 돈을 관리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유다는 열 둘 중 한 사람 이상의 의미가 있는 제자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관리했는지는 모르지만, 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임이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가 돈은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종종 돈주머니에서 돈을 제 마음대로 꺼내 쓰곤 하였습니다.” 오직 요한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이 말씀이 나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가 좋아했던 돈의 유혹을 못이겨서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줄 좋은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 14:11)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것이 돈에 대한 욕심이 되고, 탐욕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돈이 그 사람에게 우상이 됩니다. 돈이 우상이 된 사람은 결국 돈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의 공식입니다. 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그 사람이게 우상이 되면,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망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5)

가룟 유다의 배반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가룟 유다의 배반 때문에 예수님은 체포되어 넘겨집니다. 제자 중 아무도 이 일을 제대로 눈치 챈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유다를 지명해서 말씀하셨는데도,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 하면서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에 체포되고, 이 후에 일들은 빠르게 진행됩니다. 바보 같은 제자들을 원망스럽게 생각하는 분이 계시나요? 그렇지 않고 반대로. 제자들이 똑똑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은 유다가 그런 일을 못하도록 집 안 어딘가에 감금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시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될까요?

유다의 배반이 있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급격하게 옮겨 갑니다. 마치 탄핵을 말하던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는 대통령 선거로 옮겨 진 것처럼,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은 후에, 무대의 스포트 라이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추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가 정말 멋지게 전개 되지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배반을 이용하셔서 오히려 구원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로 무대를 옮겨 놓으십니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의 도움을 물리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한심하게도 잠을 잡니다. 하지만, 그 시간 만큼은 오직 예수님 혼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힘든 밤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사순절은 이스라엘의 40년 간의 광야생활이 연상이 될 만큼 긴 시간입니다. 결코 40일은 짧지 않아요. 40일을 보내는 동안 눈이 오기도 하고, 갑자기 추워 지기도 합니다. 예보가 자꾸 바뀌고 있습니다만, 바람 불고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도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다른 것들로 우리 마음을 채우고 살았던 시간들을 회개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예수님에게 생각을 집중하는 축복의 기간입니다. 40일 간의 여정 속에 춥고, 바람 불고, 눈이 오고 하는 일들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우리는 즐겁게 이겨 나가야 합니다.


3/5/2017 |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는 마음 2

거룩한 삶이 주는 유익 The Benefits of Living a Holy Life

디모데전서 4:4-6

지난 주 설교에 이어 오늘은 ‘거룩한 삶이 주는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영적 각성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영적인 문제 (spiritual matters)’가 아니라 ‘다른 문제 (physical matters)’에 몰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머리에 돈, 물질, 세상 살아가는 문제들이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가지 마음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길 (footpath)과 같은 마음 밭, 돌로 뒤덮인 (rocky places) 마음 밭, 가시 덤불 (thorns)과 같은 마음 밭, 좋은 땅 (good soil)과 같은 마음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중에 가시 덤불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이 중에 가시 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거나 (마태복음 13:22),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다져진 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은 이런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 엎어서 좋은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호세아 10:12). 그동안 무디어졌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영적인 문제가 우리들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살아왔던 시간들을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분입니다. 우리와 같은 personality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해 주면 상대방도 나를 존중해 줍니다. 우리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면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나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 사실이 야고보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purify your hearts, for your loyalty is divided between God and the world.”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 손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double-minded’ 사람들은 회개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하나님도 그런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실 때 나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indeed it was very good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손수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창세기 1:31)

그런데, 이렇게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들이 타락했습니다. 물론 사람도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들이 그 선한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 잃어버린 선한 목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니까 아주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됩니다.” (5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거룩 (holiness)’에 대한 개념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silent night, holy night’라고 합니다. 그 밤은 거룩한 밤입니다. 그 밤은 보통 때와는 구별된 특별한 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bible’이라고 하는데, ‘bible’은 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책은 ‘거룩한 책’ ‘holy bible’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책들과는 구별된 책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 (holy people)’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성도’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구별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베드로전서 1:15) “But now you must be holy in everything you do, just as God who chose you is holy.” 이 말씀은 레위기 11:45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For I, the LORD, am the one who brought you up from the land of Egypt, that I might be your God. Therefore, you must be holy because I am holy).”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불러낸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특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에 ‘코드 (cord)’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코드가 맞는다고 합니다. 혹은 저 사람하고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는 재미있고, 같이 있기가 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위에서 야고보서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 가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신다고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서로 코드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의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5절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①Or made holy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acceptable (받으실 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거룩한 삶이 주는 유익’인데요.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있더라고요. 이 말은 반대로, 우리의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the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Wash your hands and purify your hearts”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깨끗한 손과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에게 다가 오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디모데후서 2:20-22 말씀을 보세요.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그릇과 흙으로 빚은 그릇 또한 있습니다. 그 그릇 가운데 특별히 귀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평범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악을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이 쓰기에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죄들을 멀리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이어서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In a wealthy home some utensils are made of gold and silver, and some are made of wood and clay. The expensive utensils are used for special occasions, and the cheap ones are for everyday use. If you keep yourself pure, you will be a special utensil for honorable use. Your life will be clean, and you will be ready for the Master to use you for every good work.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그의 삶에 ‘거룩함’이 없는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깨끗하게 닦여 있는 그릇이 아니면 당장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특별한 주문을 했습니다. “Enjoy the companionship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라고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셋째로, ‘거룩함’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influence’라는 말이 우리 시대에는 참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말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던 때가 지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말로 전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크리스천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점을 가볍게 보고 간과했던 것을 반성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런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태복음 5:16) 또 하나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전서 2:9인데요.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As a result, you can show others the goodness of God, for he called you out of the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귀한 제사장들이며, 그분이 다스리는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을 어둠 속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의 세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이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거룩하게 되는 통로 (channel)입니다. 누구도 이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꼭 거룩해 지는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거룩해 지고,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삶이 됩니다. 사도행전 4:12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아주 강력한 말씀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 지는 길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저의 간절한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일에 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의 자만(自慢)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서 나오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잘못된 생각인가요?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40일 동안 (정확하게는 36일 동안) 집중적으로 ‘말씀’을 듣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거룩함을 얻는 통로를 40일 간 통과합니다. 이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의 손이 깨끗해지고, 우리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될 것입니다. 이 40일 동안 우리의 삶은 거룩한 삶이 되어서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40일 간의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함께 ‘companionship’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담임 목사로서 이번 사순절에 이런 저런 생각도 있고, 계획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회를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기도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사순절 기도회가 우리들 만의 잔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순절의 은혜가 우리 교회 위에,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2/26/2017 |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는 마음 1

영적인 훈련이 주는 유익 The Benefits of Practicing Spiritual Disciplines

고린도전서 9:23-27

여러분은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중간에서 조금 뒷 부분을 읽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 밖에 몰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있습니다.”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New International Version)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면, 우리 중에 누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인정사정 없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마가복음 8:35)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주는 ‘축복 (blessings)’을 ‘share in (함께 나눈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주일 후면 사순절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원래는 이번 주 수요일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우리교회에서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특별한 절기를 앞두고 있으면 설교자에게는 고민이 생깁니다. 교인들에게 어떤 도전적인 (challengeable) 설교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입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그 말씀을 읽다가 “와우!” 하면서 제 눈이 확 떠졌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25절 말씀입니다. “경기를 하려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자기 절제를 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이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하는지 아시지요? 평소에 근육을 키워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체중 조절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운동이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보다는 적게 나가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참아 가면서 체중 조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최상의 몸 컨디션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세요. “All athletes are disciplined in their training. They do it to win a prize that will fade away,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경기에 나가는 운동선수가 트레이닝을 열심해서 자신을 단련 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 (we)’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든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상을 받기 위해서, 메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하지만, 그 상은 영원한 상이 아닙니다. ‘a prize that will fade away (없어질 상)’입니다. 며칠 전에 일본의 삿보로에서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렸었는데, 이제 막 끝이 났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합니다. 쇼트트랙 선수들이 잘해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이승훈이라는 선수가 금메달을 무려 4개를 따서 이 부문에서 한국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대회에 나가서 3개 금메달을 딴 것이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 최다빈이라는 17살 먹은 고등학생이 한국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고 합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인데, 선수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상은 영원한 상이 아니라 곧 ‘없어질 상’이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상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열심히 자신을 훈련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운동선수들처럼 열심이 훈련하는데, 우리가 훈련하는 목적은 ‘없어질 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an eternal prize)’을 얻기 위해서 훈련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렇게 훈련을 강조합니까? 그 이유가 2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했으나, 정작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I discipline my body like an athlete, training it to do what it should.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NLT) “운동선수들이 몸을 단련 시키는 것처럼, 나도 내 몸을 훈련합니다. ‘to do what it should (내 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런 뜻 아닙니까?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I beat my body and make it my slav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나의 노예로 만든다”는 뜻이 잖아요?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이 나를 따르도록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하니까 그가 쓴 편지들을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영성을 가지기까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자신을 훈련 시켰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훈련은 자기 몸을 훈련 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도록 훈련 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훈련의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에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몸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몸과 영혼의 구원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구원 (holistic salvation)’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몸이 좋아하는 것을 끊고 영혼의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훈련해서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구원을 얻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몸은 게으른 것을 좋아하고, 편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하고요. 먹는 것을 좋아하고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잖아요? 시험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옵니다. 지금 자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잠이 옵니다. 내 몸이지만,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영성 훈련은 우리의 몸을 훈련 시켜서 내 말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에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훌륭한 크리스천들이 이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disqualified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몸을 훈련 시켜서 자기에게 복종 시키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disquali¬fied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아요. 인품도 좋아요. 교회에서 존경도 받아요.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훈련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disqualified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을 감동 시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교의 업적을 많이 남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막상 자기 자신은 disqualified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다음 주부터, 우리는 40일 동안의 새벽 기도에 들어갑니다. 벌써 20년 넘게 해 온 일입니다. 우리교회 사역 가운데 제일 크고 의미 있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습니다. 광야 (wilderness)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제대로 된 풀한포기 자라지 못하고,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잘 곳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지식이 있어도 쓸모가 없는 곳이 광야 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지내면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을, 낮에는 구름 기둥을 보고 따라가면서, 밤에는 불 기둥을 보고 따라 가면서 확신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역에 들어가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내용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의 세가지 시험 (temptation)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께서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하셨더라면,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과 내용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안락하고 편한 길을 따라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드렸던 40일 간의 기도가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했고, 사역의 내용을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40일 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40일 간의 기도야 말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거든요? 우리 모두가 잘 살고 싶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가치 있게, 보람 있게,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利己的)인 인간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자기 것을 나눌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보스턴이 낳은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칭송을 받는 월터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What is success? To leave the world a little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성공이란 무엇인가? 건강한 아이를 낳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사회 환경을 개선하거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남겨 주고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성공이다.”

에머슨의 말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에머슨의 말을 뛰어 넘는 그 이상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감동 시키는 삶을 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설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내용을 확정하셨습니다. 기도가 주는 유익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쩌면 2017년 사순절에 여러분이 새벽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순절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상쾌한 기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크리스천의 삶에 주는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쳐 주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 데 유용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우리를 바르게 잡아 주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코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었더니, 사람이 ‘living being (살아 있는 존재)’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2:7). 그 하나님의 숨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신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숨 (breath)’을 불어 넣으심으로, 우리를 ‘living being’으로 살게 하십니다.

40일 동안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의 자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모이는 자리가 광야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회개와 눈물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 몸이 새벽에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몸을 단련 시켜서 나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내 몸을 복종 시켜서 기도하는 자리에, 말씀 듣는 자리에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8을 함께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을 주지만,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축복도 약속해 줍니다.”

 


2/19/2017 |

영혼을 잘 되게 하라 Let Your Soul Be Blessed

요한삼서 1:1-3


2/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4

옥합을 깨뜨린 여자 A Broken Alabaster Jar

마가복음 14:1-9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 속에 나오는 이 여자가 누구냐 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뒤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여자의 아름다운 헌신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1-2절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은 음모와 흉계 속에 피어난 한송이 꽃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해방 시키신 역사적인 날입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을 말합니다. 이 때 누룩 (leaven)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습니다. 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고 빵을 만들면 곧 딱딱하게 굳어서 먹기도 힘들고 맛도 없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으면서 과거 조상들의 고난의 삶을 기억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되기 이틀 전’이라는 말씀이 상황의 급박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시계는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긴박하게 모임을 갖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이 일에 가담했고, 율법학자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이 일에 가담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흉계를 꾸며, 예수님을 아무도 모르게 잡아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2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신성모독죄 (blasphemy)를 범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는 것도 이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위협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대한 시기심도 있었습니다. 유월절 축제만 아니었으면 금방이라도 예수님을 체포할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했다가 혹시라도 유월절 축제에 온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戰慄, thrill)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유월절을 결정적인 타이밍으로 보고 계셨습니다. 모든 유대인 가정에서 어린양을 잡고 유월절 식사를 하는 때를 맞춰서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하는 세력들도 이번 유월절을 결정적인 기회로 보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사람들은 혹시 예수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이번 유월절 축제에 참석하실까요?’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한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를 체포하려고 누구든지 예수를 보거든 즉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1:56-57) 과연, 누구의 계획대로 될까요?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For the foolishness of God is wiser than man's wisdom, and the weakness of God is stronger than man's strength).” (고린도전서 1:25) 맞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깥의 상황은 이렇게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시간에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에 있는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시몬은 전에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만일 시몬이 그 때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더라면, 영영 기회가 없을 뻔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것을 드리는 일, 헌신하는 일, 섬기는 일은 절대로 뒤로 미룰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을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은 사람들 (누가복음 12:20)’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결정하시는 분은 따로 계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 가운데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그 곳에 머물며 사업을 벌여 돈을 벌어 보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안개와 같아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야고보서 4:13-14)

한창 식사가 진행 중일 때, 한 여자가 매우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labaster jar)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아이구, 왜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하는 거지?” 하면서 향유를 아까워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몇 몇 사람들이 화를 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먼저 이의를 제기했고, 다른 제자들도 유다의 말에 동조했습니다. 유다의 계산에 의하면,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시가로 계산하면, 적어도 30,000 불 정도 되는 큰 금액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마가복음 말씀에서는 이 여자가 예수님께 부어드린 향유의 가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면서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에 팔 수 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면서 이 여자를 호되게 나무랐습니다 (So they scolded her harshly).


재미있는 것은,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7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말씀에서는 향유를 부은 이 여자의 신분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식사에 초대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지금 자신을 만지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woman is touching him. She's a sinner!" (누가복음 7:39) 이 여자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이 찬송가 가사에도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 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 이 여자의 이름이 마리아라고 나와 있지만, 이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한 인물이라는 증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향유의 가격에 초점을 맞춰 문제를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향유가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아깝다고 하지 않고 슬쩍 듣기 좋게 포장을 합니다. “Why waste such expensive perfume? It could have been sold for a year's wages and the money given to the poor!" “이렇게 낭비하지 말고 이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았을 텐데.”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들의 속 마음이 들킬까 봐 포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향유를 주님께 드린 여자의 신분을 문제 삼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죄인의 신분으로 식사 자리에 갑자기 뛰어든 이 여자에 대한 불쾌감이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예수님은 이 여자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식사에 예수님을 초대했던 시몬은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예언자가 아니라고 단정합니다. 예언자였다면 이 여자가가 누군인지 알았을 것이고,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제지했을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런 생각 역시 예수님을 놓치고 있습니다.

두 사람들의 공통점은, 말씀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깨뜨린 옥합 속에 든 향유가 300데나리온이 나간다는 것을 이 여자가 모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이것입니다. “왜 이 여자는 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을까?” “향유를 부어 드린 대상인 예수님은 과연 누구냐?”

다행히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잘 기록해 놓았습니다. “용서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용서 받은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 증거로 이 여자는 나를 많이 사랑하였다." (누가복음 7:47)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왜 그 여자가 예수님께 그렇게 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즉석에서 이 여자에게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누가복음 7:50)”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은 질문에 질문을 낳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는 분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경에 이해가 안 가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또 바디매오는 어떻게 알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 라고 불렀을까요? 갈릴리의 어부들은 무슨 생각으로 즉시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을까요? 성경은 이 모든 문제를 속 시원하기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분인 것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만이 나의 많은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분이 어느 식사 자리에 와 계시다는 얘기를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옥합을 집어 들고, 예수님께 갔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옥합은 결혼을 앞 둔 여자들이 결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모아 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에게 옥합은 그의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가면서 고이 모아 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자는 이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 여자는 옥합보다 자기의 죄를 용서 받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삶을 청산할 수만 있다면, 옥합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만 있다면, 옥합은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런 결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옥합이 무엇입니까?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여러분의 옥합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그 옥합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깨뜨릴 것입니까?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깨뜨릴 것입니까? 질문을 바꿔 볼까요? 여러분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깨뜨렸습니까? 주님은 많이 용서를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고, 적게 용서를 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많이 용서를 받았습니까? 아니면, 적게 용서를 받았습니까?

주님은 이 여자를 편들어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므로, 원하면 언제든지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죽기 전에 내 장례를 위해 내 몸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이다.” (6-8절) 유대의 장례 풍속 중에 죽은 사람의 몸에 향유를 발라주는 절차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니고데모가 ‘몰약과 알로에를 섞은 향유 (mixture of myrrh and aloes)’를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9).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발라 드리기 위해서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

예수님은 “이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내 머리에 향유를 부어 준 것은 나의 죽음을 미리 알고 그렇게 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의 행위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도, 예수님 주변의 어떤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고 준비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일이 된 것처럼,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도 그렇습니다. 더운 날,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찬물 한 잔을 대접한 일, 외로운 사람을 방문한 일,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 일, 주님은 이런 일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 하시면서 “이런 일들이 곧 나에게 한 일이었다 (마태복음 25:40)”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질 때, 이 여인이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9절) 예수님께서 최고의 찬사를 이 여자에게 보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칭찬과 찬사를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아름답고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은 주님을 위해 나의 옥합을 깨뜨리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