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10/2023 | 대림절 두번째 주일
기다림 시리즈 2 "이제 만나러 갑니다 : 수가성의 여인" On the way to meet you : Village of Sychar Woman
요한복음 4:6-14
대림절기 기다림의 두번째 여인은 라합에 이어 수가성의 한 여인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왜 자신의 마을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긷지 않고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 여인은 불행한 과거를 지닌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다섯명의 남편과 헤어지고 여섯번째 남편과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물 한모금 달라는 요청에도 까칠하고 야박한 대화속에서 다른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픔과 상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들로부터 받은 공허함과 인간적인 배신감이었을까요? 지역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였을까요? 이 여인은 인생을 살면서 벼랑 끝에 서는 기분을 수차례나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태양이 뜨겁게 내려째는 낮 12시 무렵에 물을 길러 온 것 아니겠습니까. 이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설교나 찬양으로도 한번쯤 다 들어 본 것입니다. 영원히 목 마르지 않는 참 샘물을 마실 때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대림절기를 보내며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속에 담겨진 은혜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갈증이 없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어느 깊은 경지의 단계에 올라 무소유로 삶고 살고 계신가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소유의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를 내려놓기 보다 지나친 욕망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는 비워 내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거룩한 갈증과 거룩한 목마름으로 세상의 욕망을 대체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요한복음의 전체적인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일곱가지 표적 및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대한 보도입니다. 2장에서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한 기적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지체 높고 존경받는 대법관 니고데모가 한밤중에 예수를 찾아와 거듭남에 대해서 질문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태앙이 내려 쬐는 한낮에 천대받고 부도덕한 여인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해 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이 먼저 우물가에 계셨습니다.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뜨러 옵니다. 예수께서는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신앙의 신비는 예수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셨구나. 주님이 먼저 이곳에 계셨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구원의 신비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한 인생 시간표를 만들어 놓으시고, 나를 향한 인생의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영적인 눈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매일 살아가는 것이 영성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보자이시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어 주셨습니다.
(1) 예수께서는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역과 유대지역을 왕래 할 때에 가장 빠른 경로인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우회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에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으로 혈통적으로 혼합되어 부정한 민족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금기를 깨시며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빨리 가고자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기록한 ‘예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말씀안에는 유대인들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의 자리는 우리와 같이 피곤함을 느끼는 완전한 사람의 몸을 지닌 자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경험하고 사셨다는 것입니다.
4:6 이 동네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예수께서는 여행길에 피곤하셨으므로, 그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다. 때는 낮 12시 무렵이었다.
여러분은 목마름의 자리까지 내려오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지십니까? 추운날 따뜻한 차 한잔이 얼었던 몸을 녹여주듯 , 지쳐 있던 마음에 진정한 사랑의 지체들의 위로가 마음이 힘이 되는 것처럼 믿음은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고 예수께서 우리의 삶의 구석구석을 함께 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아십니다. 우리의 목마름과 갈증, 아픔과 고뇌를 친히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의 자리, 두려움의 자리, 낙심의 자리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이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날이 갈수록 건조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은 다른 행성이나 우주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더 알기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마음에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감각은 모조리 잃어 버리고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더 편리하고 물질적인 대상은 열렬히 추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는 의심도 많고 냉소적입니다. 작은 소자를 보면서 주님이 보여지고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을 볼 때에 우리와 함께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이 보여 지기를 소망합니다.
7 ○ 그때, 한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오자, 예수께서 그녀에게 말을 거셨다.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
‘나에게 물을 좀 주겠소?’라는 요청에 ‘내가 목이 마르다’라고 하신 십자가의 장면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사이에서 목이 마르다고 외쳤습니다.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현실 사이의 간격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애타는 목마름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나아갈 수 있게 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하고 있으신지요?
대림절기에 주님의 탄생을 기억하고‘주의 다시 오심'을 깨어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2) 경계를 너머 만나는 것은 서로 하나가 되는 장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는 곳’입니다.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면서 하늘문이 열리고 친히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만나는 곳입니다. 유대인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이른 대낮에 물을 좀 달라고 하는 요청할 때에 이 여인은 마음을 닫은 채 묻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찌하여 저 같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까칠한 반응이지요. 이에 예수님은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사를 알고, 또 당신에게 물을 청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당신이 그에게 생수를 청했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오.” 대답합니다. 이 여인은 다시 퉁명스럽게 되묻습니다.
“당신에게는 두레박도 없는데다, 이 우물은 굉장히 깊지 않습니까? 어디서 생수를 길어다 주신다는 말입니까? 이 우물물은 우리 조상 야곱은 물론이고, 그의 자녀들과 가축들이 즐겨 마시던 물입니다. 이 우물물을 우리에게 주신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한 분이란 말입니까?” 그러자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은, 사람 안에서 끊임없이 솟구쳐 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참 샘물이 될 것이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정색을 하고 “선생님,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러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후에 예수님은 뜬금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당황했는지 아니면 마음이 불편했는지 나에게는 남편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시치미를 땐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17절 18절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소. 남편이 없다고 말한 당신의 말이 옳소.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도 사실은 당신 남편이 아니오. 그러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맞소.” 우물가의 여인은 눈이 열려지고 예수가 메시아임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과의 대화 끝에 여인은 예배하고 싶은 열망에 질문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 마음에서 끓어 올라오는 마음은 하나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열망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우리 마음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은 경험하는 만큼 알게 됩니다. 배고픈 경험이 없는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사람들의 마음을 어찌 알겠으며, 타는 목마름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물의 소중함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환대는 배고픈 자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의 삶은 상품이 아닙니다. 다 쓰고 나서 일의 가치가 떨어지면 버려지는 소모품도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친 주님은 거룩한 삶의 변화의 자리까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특징은 과거에 비해 바쁘게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여인의 다섯 남편처럼 사회적인 업적과 취미생활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만 마음은 더 공허해져만 갑니다. 소비주의문화는 예배까지도 행위로만 여기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행위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수고해서 길러내는 물이 아니라 실제적 삶으로 먼저 찾아 오신 주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우물물은 우리의 노력과 공로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참 샘물은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씻겨 주시고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힘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은 종교일 뿐입니다. 그 길은 수고와 고통 뿐입니다. 열매가 열리는 것 같아도 영원히 지속되지 못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은혜로 구원을 유지시켜 줍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 세상을 보면 많은 아이들이 헤롯 왕의 손에 아무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에 위협을 느끼고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이고 명령했습니다. 그의 권력욕과 거친 성격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죽어가는 갓난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예수가 성장해서 자신이 태어날 때에 일어난 이 비극적인 일들을 알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 느꼈을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슬퍼하고 탄식하는 이들을 찾아가는 원동력이 되었겠지요. 우리가 잘 알듯 세상은 불의와 폭력에 의해 언제나 선한 사람들이 희생량이 되는 일들을 적잖게 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말로 할 수 없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시고 온전하십니다. 때로는 우리 앞에 절망의 파도 근심의 파도 두려움의 파도가 몰려 올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진행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세상의 시스템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량이 되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속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차가워져 가고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심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홀로 고립된 채 내몰리는 연약한 이들에게 찾아가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의 삶을 추적해 보면 삶의 면면에 따뜻함이 묻어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상처는 우리의 상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곱의 우물은 인생의 상처와 멸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자리였고, 남편과의 헤어짐 이후 새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을 반복하고 지속하면서도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가는 여인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갈증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메시아로 만난 여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증언합니다. 그분을 만나 보라고 전도를 합니다.
대림절기의 기다림을 어떻게 보내시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에서 있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의 자리가 더 깊어질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과 선행은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하기 위한 자극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모르게 홀로 고립된 채 물을 길러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늘 가족이 되어 함께 동행하니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만남은 숨기고 가리던 것이 드러나는 자리이고 마음이 열리는 자리입니다. 주님과 더 깊이 사귀십시요. 그리고 우리를 만나러 이미 와 계시는 주님과 교제하시기 바랍니다. 메말라 무뎌져 있던 나의 마음과 삶에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복음이 전해지면 희미하게 느껴졌던 삶의 방향이 선명해짐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덮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에 물질이 있으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결과와 성과만을 위한 길을 걷게 되면 그 안에 무수히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면 우리가 만나는 일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대림절의 기다림 속에서 삶을 화해하게 하는 평화의 주님을 따라가기를 소망합니다.
12/3/2023 | 대림절 첫번째 주일
구원의 약속을 기다린 여인 : 라합 The woman who was promised salvation: Rahab
여호수아 2:8-21
대림절의 영성은 기다림입니다. 대림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곁에 계신 주님을 더 깊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마음을 닮기 원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자리에 주님의 마음으로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저의 스톨의 색깔도 보라색으로 바뀌었습니다. 보라색은 정결한 마음과 새마음을 상징합니다. 이제 대림절 소망의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신 이 촛불은 하나님 나라의 첫번째 빛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원의 약속을 기다린 한 여인이 나오는데 이방인 출신이었으며 기생의 신분임에도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여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라합이라는 여인이 어떻게 기생이 되었는지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이유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세계관, 구조적인 차별과 편견, 출신에 따른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선 사이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극, 신앙의 보수와 진보, 정치적으로는 좌파나 우파의 성향으로 나눠집니다. 성향이 다를 수 있지만 극단적으로 치우칠수록 그 경계선에 위에 선 사람들의 삶은 참 고달픕니다. 경계선에 위에서 균형을 잡고 걷는 길은 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중심부에서 밀려나 경계선 위에 있던 이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소외되고 헐벗은 이들을 품어 주셨고, 다름의 차이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방인들을 용납해 주셨습니다. 이 신비의 은총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주님의 ‘오심과 다시 오심 사이’에서 어려운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너무 쉽게 잊어 버리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본향집을 찾아가는 길과 방향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대림절기는 서로 어울려 사는 의미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데 새롭게 눈을 뜬 사람들은 한 형제 자매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본문은 라합의 집을 소개하는데 ‘그녀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다’라고 기록합니다.(15절) 당시 요새였던 여리고 성은 아래 쪽에 돌로 된 기초 성벽을 가지고 있었고, 거대한 토벽으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이 벽의 높이가 4-5미터의 높이였습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기초 성벽 안쪽으로는 내벽이 있는데 외벽에 비해서 14미터나 높았습니다. 여리고 성은 당시에 이중 벽으로 되어 있던 요새인 것이지요. 라합의 집은 도성 안에 있던 것도 아니고 도성 밖도 아닌 이중벽 사이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라합은 경계선에서 거주하며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아마도 성안의 여인들은 창녀로 살아가는 라합을 조롱하기도 하고 멸시하기도 했을 겁니다. 라합은 남자들의 멸시와 인격적 무시를 당하는 삶속에서 꿋꿋하게 자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강 동편에서 아모리 왕들을 격파했다는 소문이 이미 가나안에 까지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여리고 성안에 사람들은 바짝 긴장하고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들 때문에 두려움에 짓눌려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는지,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의 두 아모리 족속의 왕들을 어떻게 파멸시켰는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심장은 얼어붙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신이 나갈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곧 가나안으로 진격할 것이란 사실이 명백했기에 여리고 성을 비롯하여 가나안 일대의 성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여리고 왕은 성안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기생의 집에 유숙했던 것입니다. 대략 3500백년전이니까 당시 술집은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을 것이고, 술을 마시며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를 얻는 장소이기도 했겠지요. 여리고 성을 살피러 온 정탐꾼은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정보도 얻어야 했고, 군사적으로는 자신들의 몸을 숨기기에 적절한 곳을 찾아 라합의 집에 유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읍안에 수상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가 여리고 왕에게 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 사실을 2장 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여리고 왕에게 이런 보고가 들어왔다. 몇 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늘 밤 이 땅을 정탐하려고 왔습니다.”
성경속으로 들어가 보면 당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갑니다. 여리고 왕은 라합의 집으로 군사들을 보냈고 이제 정탐꾼은 들통나면 죽게 될 것입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였습니다. 그런데 라합이라는 여인이 2명의 정탐꾼들을 발견되지 않도록 지붕에 숨겼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여리고 군사들이 도착하자 그들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경로를 알지 못하나 예상되는 방향으로 급히 따라가면 잡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건 보고였습니다.
라합이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라합은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들었습니다. “당신들의 주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구원을 향한 기다림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가 보낸 2명의 정탐꾼이 라합의 집에 유숙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을 보게 됩니다.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 듣든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의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라합의 사건은 열린 마음을 지닌 이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입니다. 그녀는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한 여인이 됩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은 기다리는 자에게 차별이 없습니다.
구원은 비천함과 풍요함에 있지 않습니다. 라합이 비록 술을 팔고 자신의 몸을 파는 비천한 인생이었지만 구원을 기다린 여인에게 하나님은 정탐꾼들을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그의 행동을 믿음으로 인정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에 라합과 그녀의 가족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복음의 수용은 이처럼 뜻밖의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멸시와 소외를 당하고 죄인이라 취급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복음이 수용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영적교만은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지만 믿음의 겸손함은 영적인 흐름을 타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구원역사 뒤에는 인간의 선행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매주일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고, 성도는 믿음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38년 전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발길을 되돌렸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낸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적인 보고로 인해서 20세 이상의 성인이 모두 광야생활을 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파견되었던 정탐꾼들의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보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민 13) 그러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음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제적 경험으로 체득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파견하는 위치에서 2명만 보냈다는 것은 군사적 전략도 있지만 구원이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공간의 영역에 있어서 경계선을 자유롭게 넘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나라와 나라를 넘고, 일터와 가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의 장소도 제한적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으면 지리적 공간을 넘어 교회의 모임을 할 수 있습니다. 긴밀하게 연결만 되어 있으면 경계선을 넘어서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중요한 마음은 기다림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의 모든 공간을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2) 하나님을 아는 믿음은 들음에서 났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것이고, 전인격적인 삶을 통한 믿음의 응답입니다. 라합은 소문만 듣고도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10절을 보면 ‘우리는 당신들에 대해서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정탐꾼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라합을 설득한 것이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들의 입으로 들었을 때에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지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3)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듣기 위함입니다. 설교를 듣는 이유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깊어지기 위함입니다. 설교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일상에서 잊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더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고,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변하여 경외심이 된 것입니다. 일상에서 우리는 마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완악해지기도 합니다. 여리고 성의 사람들처럼 두려움에 짓눌리고 불안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가운데 자신의 신세만 한탄하며 세월을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믿음이 부쩍 자라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더 실제적으로 더 확실하게 경험하게 될 겁니다. 신앙은 저절로 깊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영적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대한 인간의 인식과 이해는 모든 지식을 동원한다고 해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라합이 낯선 이스라엘 정탐꾼을 환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신앙고백이었습니다.
(3) 기다림은 약속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묶을 약, 묶을 속’으로 이뤄진 단어입니다. 마음을 굳게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체가 약속의 말씀이지요. 구약은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이고, 신약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약속들로 가득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약속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라합은 정탐꾼에게 나와 내 부모 형제를 죽음에서 건지겠다는 구원의 증표를 요구합니다.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구원의 증표를 남겨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땅으로 들어올 때에, 당신이 우리를 탈출 시켜 준 창문에 진홍색 밧줄을 매어 두시오.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과 온 가족과 친척을 모두 당신의 집에 모여 있게 하시오. 누구든지 당신의 집 밖으로 나가서 변이라도 당하면,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지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과 함께 집 안에 있는 사람이 혹시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책임이 있소…그러자 라합은 그들의 말대로 하겠다고 대답하고, 그들을 보냈다. 그들이 간 뒤에, 라합은 진홍색 밧줄을 창문에 매달았다”
진홍색 밧줄은 라합과 정탐꾼이 맺는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 임하게 됩니다. 언약적 삶은 인생의 소유가 누구인지를 매일 확인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시며 ‘새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지친 이들의 품이 되어 주시고, 상처받은 이들을 감싸 주십니다. 진홍색 밧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상징입니다. 이 언약은 생명이 걸린 중대한 일이기에 거룩한 성도는 반복적으로 새언약을 확인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세상속에서 씨름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배우라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언약백성은 마음의 자리에 누군가 앉을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번주 새벽예배 오늘의 양식에 실린 예화입니다. “아홉 살 난 댄 길은 가장 친한 친구 아치와 함께 같은 반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습니다. 그러나 생일을 맞은 친구의 어머니는 아치를 보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 “의자가 모자라”라고 하며 안 된다고 했습니다. 댄은 같이 온 흑인 친구 아치를 앉히고 자기는 바닥에 앉겠다고 했지만 그 어머니는 계속 거절했습니다. 낙심한 댄은 둘이 가져온 선물을 친구 어머니에게 주고 아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댄의 가슴에는 친구가 문전박대 당한 것이 아픈 상처로 남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이 된 댄은 그의 교실에 늘 빈 의자 하나를 둡니다. 학생들이 이유를 물으면, “교실에 언제나 누구든 와서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잊지 않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어릴적 자신의 친구가 문전박대를 당한 모습을 보고 아픈 상처를 받은 댄은 성인이 되어 선생님이 되었을 때 교실에 누구든지 앉을 수 있는 빈 의자를 두었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빈 의자를 남겨 놓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주님의 계실 자리가 있어야 하고, 서로가 함께 따뜻함을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고백과 실천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 자라가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보혈이며, 죄가 없으신 분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마26:28)
교회 같은 가정, 가정 같은 교회는 가정과 교회의 문패에 그리스도가 흘리신 언약의 붉은 줄이 달려 있는지 확인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사명자의 자리를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참고 인내하는 자가 복 있는 자입니다.(약 5:11)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 하셨습니다.
대림절의 기다림은 막연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시대적 영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여러분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여러분을 끝까지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고전1:8) 대림절기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에 흠잡을 데 없는 사람으로 설수 있도록 기다리며 기도하는 소망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26/2023 |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
위대한 기적 A Great Miracle
사도행전 28:1-10
오늘은 성령강림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성령강림절 스물여섯번째 주일이 지나고 나면 교회력으로는 한해가 또 다시 시작됩니다. 12월 첫째 주일이 한해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순환은 매년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고, 사순절 기간에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며, 부활주일을 거쳐 승천하신 주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로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 생애에 대한 주기는 우리에게 예수의 옷을 입혀 주고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클에 삶을 조율해 나갈 때 그리스도와 한몸의 원리로 연합되어지게 됩니다.
지난 주일 바울과 그 일행은 죽음의 유라굴로 강풍을 만나 갈 방향을 잃어 버린채 800km를 표류했습니다. 14일이 지나고 난 후 아침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한 섬에 상륙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풍랑에 의해서 800km를 표류한 배가 로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있는 멜리데 섬에 걸렸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멜리데 섬 근처 뻘에 배 앞부분이 걸려서 배가 파손되자 수영할 수 있는 사람들은 먼저 헤엄을 쳐서 육지로 나가고 이후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과 부조물을 의지해 헤엄쳐 지상으로 나왔습니다.
인생이 그렇지요. 풍랑을 만나고 역경속에 놓여 질 때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오늘 그리고 내일의 시간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믿음의 길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부르심을 따라 응답하며 믿음으로 걷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다 한 가운데 항해하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으로 부르심에 응답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해도 달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살 소망 조차 잃어 버렸던 이들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은 배가 파선 되는 위기속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육지에 상륙했으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게 해 줍니다.
2절을 보면 때마침 비가 오고 날이 추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가 11월이니까 겨울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낮은 기온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노년의 때가 되어 육체가 쇠약해진 바울을 비롯해 겨울 바다를 헤엄쳐서 상륙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불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섬에 살던 사람들이 불을 피워 주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며 맞이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찌 보면 276명은 배가 난파되어 구조된 난민들입니다. 14일 동안 먹지 않았으니까 몸은 극도로 쇠약해 져 있었을 것이고, 몸에 비축했던 당분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어진 환경속에서 섬에 준비되어 있는 사람들 통해서 환대를 받게 하시고 3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바울에게 쉼을 주십니다.
(1) 환대의 기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갑자기 몇 백명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섬에 상륙했다면 경계하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2023년 세계난민의 날 국제구조위원회에서는 유엔난민기구(UNHCR)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전 세계적으로 난민들이 많아져서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된 이주민이 1억 1천만명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 숫자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인데요. 아무래도 계속되는 전쟁과 여러가지 전염병으로 인해 세계경제도 불안정하다 보니까 안타깝게도 안전을 찾아 헤매는 난민들이 환영 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입니다.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현대사회속에서 낯선 이들에게 배타적인 태도는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섬사람들이 보여준 모습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게도 인상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은 구조된 사람들을 환대했던 섬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믿음의 태도는 세상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구원은 자기중심적 죄의 뿌리가 뽑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다시 뿌리 내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내가 원하는 것만 요구하지만 믿음이 성숙해 지면 나만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말하는 생각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게 할테지만 기적의 시작은 환대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환대하는 사람입니까? 경계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연약한 우리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시고 두팔로 감싸주심으로 십자가를 참으사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3절을 보면 바울이 주변을 다니며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섬사람들이 피워 놓은 불 속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습니다. 불에 내려 놓을 때 나뭇가지에 숨어 있던 뱀이 뜨거우니까 튀어 오르며 바울의 손을 문 것입니다. 그 뱀은 분명히 독사였습니다. 섬 사람들은 독사에 물린 바울이 살인죄를 지어 정의의 여신의 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죽을 때만 기다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바울에게 아무런 이상도 나타나지 않자 섬사람들은 바울을 신으로 오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어제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바라보고 믿고 있는지에 따라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섬에서 독사의 물린 사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하나님의 사람 바울을 주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 일 후에 바울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 섬의 가장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지게 됩니다. 보블리오는 친절하게도 사흘씩이나 자신의 집에 유숙할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독사에 물린 사건으로 인해서 섬 전체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서 뱀은 인간의 원죄를 가져 오게 한 간교한 동물입니다. 죄의 기원도 뱀이 간교함으로 인간을 미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뱀을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뱀은 피조물 가운데 한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리함을 선물 받은 피조물이었는데 슬기로움에서 간교함으로 변질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악용한 것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뱀은 오히려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아니하며..”주신 권세를 기억해 보면(막 16:18)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이끌릴 때에 주께서 주신 권세를 성취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는 선과 악의 양면성이 누구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할 때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권고하셨지요. 뱀처럼 슬기롭게 세상속에 살아가며 비둘기처럼 거룩함을 더하라는 뜻일 겁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의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자 하나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치셨고, 구리뱀을 만들어 쳐다보는 자들을 낫게 하십니다. 구리뱀은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예표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주의 피로 씻김을 받게 됩니다. 지친 마음을 위로 받게 되고요. 그 사랑은 바닷물과 같아서 평생을 마셔도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회복될 때까지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마치 마음의 성전에 새로운 가구가 들어서는 것과 같이 새로운 마음으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무엇보다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섬기고 환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들에게는 '독(毒)도 약(藥)이 됩니다. 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잘 활용하여 약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벌의 침은 독이 있지만 봉독을 소염 진통제로도 사용하고, 그 안에 멜라틴이라는 성분은 혈액순환과 면역기능을 강화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뱀에 있는 독에서 추출한 ‘캡토프릴’도 고혈압 치료제로 사용한다고 하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독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머튼은 ‘현대사회에서 돈은 성령이 교회에서 차지해야 할 역할을 악마적으로 찬탈해 버렸다’라고 했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어두운 면과 좋은 면인 양면성을 다 지녔습니다.
돈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돈의 풍족함은 신앙생활을 잘했다라고 하는 축복의 표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대상은 언제나 가난하고 상처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뜻은 돈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보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젊은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었을 때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돈의 힘을 거부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를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고, 죄의 유혹으로 끌고가는 힘입니다. 인간은 경제적인 사회 구조를 벗어나서 살아 갈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출세를 하고 공적인 위치에 있다면 그 이유는 부와 권력까지도 선한 영향력을 위한 일로 사용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배고픔과 풍족함이라는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땅에서 재산, 후손을 얻었지만 그는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들일 때 하루 먹을 분량 이상의 것은 썩게 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매일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는 법을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물질적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신뢰를 배워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격려 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교제 안에서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이 하나님의 품을 느낄 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삶의 현장에서 노동을 통해 재정을 채워 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며 감사를 배우는 것입니다. 매일밤 뒤척이며 잠못 이루던 날들을 보낸 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일은 하나님과 깊어지는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되어 간다면 이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3) 기적은 값없이 받은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멜리데 섬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신앙은 미신적이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뱀에 물렸으니 신에게 벌을 받는 자로 여기고 몸이 이내 부어올라 당장 쓰러져 죽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자 생각을 바꾸어, 바울을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울을 숭배했다는 언급은 없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신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여겼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소문이 멜리데 섬의 추장이던 보블리오에게 까지 알려졌던 것입니다. 보블리오의 아버지가 의학적으로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던 점을 감안해 볼 때에 매우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입니다. 의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이 병을 쉽게 치료하지만 당시에는 이질이 걸린 환자로 인해 세균이 전염되어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생명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병들어 있는 보블리오 아버지에게 겁 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갑니다. 고열과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알고도 손을 얹고 기도한 것은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보블리오의 부친이 병에서 치유된 소식은 온 마을에 삽시간에 퍼졌을 것입니다. 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자신들의 병도 고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로 가는 길에 거쳐가는 작은 섬이었지만 복음이 필요한 그곳에 바울을 보내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병에 대한 이유를 묻지도 않고 기도해 줍니다.
오늘날 우리는 결과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문화속에 있습니다. 결과에 따라서 믿음도 평가합니다. 믿음을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까 원인을 규명하게 되지요. 그런데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예기치 않은 문제 앞에서 한결같이 질문합니다. 주님,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부족하고 잘못된 일들을 밝히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인해 섬에서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 한켠에는 소외된 마음이 있었을텐데 바울의 치유사역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줍니다. 이것이 다시 한해를 살아가기 위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권세입니다.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창조되었음을 믿고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멜리데 섬에서의 뱀에 물린 사건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 섬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었던 보볼리오가 멜리데의 섬에 세워진 바울 기념 교회의 최초 감독이 되었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멜리데 섬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피해 예배를 드리던 장소인 지하 묘지 카타콤(Catacomb)'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말타섬에는 90%가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삶의 위기는 단순히 시련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값없이 받은 그 은혜를 전하는 자의 삶은 나의 만족과 유익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한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붙들어야 합니다. 척박한 삶의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탄생을 기다리며 대강절기를 보내게 되는데 성탄의 기쁨을 사모함으로 기다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마쳐졌지만 이제부터는 각자에게 허락하신 거룩한 사명으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사도행전 29장을 써 나가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은혜를 만나게 하셨지만 이제 다음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부어지는 기적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기적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11/19/2023 | (성령강림후 제 25주, 추수감사주일)
바울의 감사 Paul’s Thanksgiving
사도행전 27:33-38
올해 5월부터 시작된 사도행전 강해가 다음주일이면 마치게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말씀은 누가가 정밀화를 그리듯 로마로 가는 바울의 항해 여정을 세밀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으로 부터 떠나온 청교도인들이 신대륙에 와서 드린 추수 감사 주일 유래를 생각나게 합니다. 27장 본문의 말씀을 추수감사 주일에 전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항해하는 배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를 만나기도 하지만 거대한 풍랑을 만나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항해하시며 어떤 날을 보내고 계시는지요?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바울이 탄 배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타 있었습니다. 여러 죄수들, 바닷길에 대해서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 로마 군대 장교인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 장사하기 위해서 물건을 갖고 탄 상인들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출발한 그들은 그레데섬 미항이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됩니다.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났으니 더 이상의 항해를 만류하고 미항에서 겨울을 머물다가 출항하자고 했습니다. 유대력으로 속죄일이 7월 10일이니까 오늘날로 9월 10월경에 해당합니다. 당시 지중해는 9월 중순 이후에 항해하는 것이 위험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항해를 멈춰야 했는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충고 보다는 바닷길의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의견대로 무리한 출항을 하게 됩니다. 한 죄수의 말보다 선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겠지요. 결국 얼마 가지 못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는 선장의 경험과 지식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조금 더 빨리 가려고 했던 백부장 율리오와 선장과 선주의 교만이 부른 역경인 것입니다. 겨울에 출항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선장과 선주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에 빨리 가고자 하는 조바심이었을까요? 아니면 바울보다 자기들의 지식이 더 풍부하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교만이었을까요? 결국 수많은 곡물과 276명의 인원을 싣고 출발한 알렉산드리아호는 풍랑 앞에서 표류하게 됩니다. 방향을 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앞둔 제 눈에 들어 온 말씀은 35절입니다. 바울이 빵을 들어 사람들 앞에서 감사 기도를 드린 후에 떡을 떼어 먹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이 감사기도를 드린 시점은 유라굴로 광풍으로 인해 14일 동안 대략 800km를 떠밀려 온 때였습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 쳤고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니까 살 소망을 잃어 버리고 최후의 순간만을 기다리며 있었습니다.
한번 말씀속으로 들어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디베랴 호수가에서 풍랑을 잔잔케 했던 예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만 점점 더 깊어 졌습니다. 거센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계속 몰아 칩니다. 어둠은 깊어져 가고 흔들리는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뒹굴며 상인들의 물건은 배 안에서 부서지고 배의 돛은 이미 찢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성경은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해와 별도 보이지 않은 채, 사나운 폭풍만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보고 완전히 소망을 잃었다.”
온 세상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와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풍랑을 만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멈추지 않는 전쟁의 소식과 재난의 소식들은 희망조차 사라져 광풍을 만난 모습들입니다. 사실 인생의 짐을 지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 배 안에서 바울이라고 두렵지가 않았겠습니까? 아마도 자기 앞에서 죽어간 스데반 집사님의 모습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주님의 음성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틀림없이 황제 앞에 서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에게 맡겨 주셨다.’
바울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그대로 되리라 믿었습니다.(24절) 그 평안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믿음이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 본 것입니다.
(1) 감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누가가 바울의 항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이유는 바울의 회심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는 회심이 끝이 아니라 온전한 제자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라는 것은 회심되는 것보다 더 큰 의미의 영역을 담고 있습니다. 인생의 주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회심의 시작이라면 변화의 삶은 지속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인생을 맡기기 시작했다면 세상의 것을 내려 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 뜻과 내 경험을 내려놓는 연습입니다. 불안과 두려움, 세상의 욕심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제껏 쌓아 올린 경험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니라 유대인과 헬라인, 애굽인 등 많은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 사람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것 자체가 전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대지역과 사마리아를 넘어서 로마에 까지 이동하고 있지만 바울이 거쳐 갔던 모든 지역에서 동시적으로 하나님 나라는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선교의 대표성을 띠는 것이지 하나님이 바울만 통해서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거쳐 간 전도여행의 여러 지역에는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동시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적 용어 중에 Glocalization이라는 합성어가 있습니다. 글로벌(Global)+로컬 (Local)를 합쳐서 지역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일하는 선교적 교회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지역의 한계를 넘어 공존의 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한 지역의 예배를 한국과 여러 나라에서 동시적으로 함께 참여하여 은혜를 받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한 사람의 신앙을 넘어 공동체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지상의 교회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어디서 부터 변화를 시켜야 하고, 어떤 방법으로 선교를 해야할까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 되게 하시는 섬김과 사랑으로 일치해 나아갈 때에 교회는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게 됩니다. 우리는 매년 추수감사주일 헌금의 일부를 지역의 목회자를 돕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루어가며 걸어가고 있는 귀한 사역이지요.
(2)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은 감사의 선물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만이 마지막 순간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됩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침울하다고 해도 성도는 구원의 소망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38장을 보면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플라워 아담즈(Flower Adams, 1805-1848)) 는 25세에 연기자로 무대에 설수 없게 되자 연기를 그만두게 되고 어느날 창세기를 읽다가 야곱이 벧엘에 있었던 이야기를 묵상하며 이 찬송의 가사를 작사하게 됩니다. 그 후 이 찬송은 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 호가 침몰한 날 주일 저녁에 영국 감리교회 성도였던 바이오리니스트 하틀리(Wallace Hartley, 1878-1912) 악장이 생애 마지막 찬송으로 노래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울려 퍼진 이 찬양을 듣고 이어서 8명의 악사들이 함께 참여했고, 잠시 후 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함께 마지막 찬송을 노래했다고 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속으로 들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두팔 벌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 손은 우리를 가장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괴롭고 지칠때 주님께서 구원의 손으로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침몰하는 갑판 위에서 마지막 감사의 찬양을 부른 이들의 고백이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인생 항로에 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선장으로 있습니까? 주님의 손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그 손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한 사람의 삶은 무엇을 믿고 바라보고 살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매순간 인식되어 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기도가 고백됩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 주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예배를 드리는 교우들의 숫자만큼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내옆에 계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 물, 빛 조차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온 인생임을 깨닫고 살아갈 때에 조바심을 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소명에 집중하게 됩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안에 의심과 불안,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이 방황하는 이들을 주님은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십자가에서 부둥켜 앉으셨고 하늘로 승천하시며 지금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손끝과 발끝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흘러나오는 고백입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 시작하매 라고(35절) 기록합니다. 쉬운말 성경은 35 이렇게 말하고, 바울은 빵을 들어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다음, 떼어서 먹기 시작했다. 36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용기를 내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3)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회복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으니 바울의 감사기도에 반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고백한 감사의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입니다. 14일이라는 시간동안 배 안에 일행들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는데 그제서야 다른이들도 안심하며 받아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떼어 먹은 것은 떡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이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성만찬을 하듯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떼듯이 떡을 떼는 모습이 상상이 됩니다. 감사의 고백은 예배 드릴때에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행함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구별되었고 윤리적으로 볼때에도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 마음 안에 거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전통이 중요했고 형식이 중요했기에 주님은 그들 곁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형통해 보이나 하나님과 멀어져 있을 수 있고, 유라굴로 인생의 광풍을 만났지만 바울처럼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배는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한일은 배에 남은 식량을 버리는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했다면 마지막 비상 식량만큼은 끝까지 배에 남겨 두려 하였을텐데 배안에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비상 식량을 다 바다에 버립니다. 무사히 육지에 내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두려움과 죽음의 바다에서 견져 주신 주님으로 인해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배에 탔던 276명의 사람들이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었습니다.
백부장은 죄수들과 군사들이 한 사람도 도망가거나 실종되지 않도록 파악한 숫자일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선에서 276명이라는 사람들의 숫자는 한사람의 생명과 그 영혼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유라굴로 광풍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지식과 경험은 참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 되지 않을 때 나의 방법을 내려 놓기가 더 쉽지 않지만 내가 열고자 하는 문이 닫힐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문이 열려져 있음을 보게 될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우리를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하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겸손히 느낄수 있게 합니다. 1918년 미국의 미네소타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엔스트롬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백발이 무성하고 몹시 지쳐 보이는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노인은 사진관에 들어와 잠시 쉬면서 차 한잔 얻어 마실수 있는지 묻습니다. 그에게 빵과 스프를 주었더니 그 앞에서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진사 엔스트롬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고 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누추하고 연약해보이던 그의 모습이 큰 사람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구나를 느낍니다. 노인의 겉모습은 삶에 지쳐 있고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기도속에서 누구와도 비교할수 없는 마음이 부유한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혹시 우리의 마음에서도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를 나누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진사가 찍은 노인의 사진은 후에 유화로 그려져서 작품이 되었습니다. 바로 ‘감사 기도’ 하는 노인의 ‘은혜(The Grace)’ 입니다. 감사기도 드리는 저 깊은 마음의 사진이 우리의 삶에도 남겨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감사의 고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은혜를 담은 감사여야 합니다. 추수감사 주일에 사도 바울의 복음의 전도 여정을 통하여 그가 전하고자 하는 분명한 복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 항상 함께 했던 감사의 기도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동일한 은혜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11/12/2023 | 성령강림후 제 24주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Just like Jesus loves us
사도행전 26:23-32
I like Jesus, but I don't like his Church.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디가 오랜 전에 교회의 타락을 예언이라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당시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대영제국의 가혹한 식민지 정치를 비꼬며 한 말이었을까요? 간디의 자서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를 보면, 그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인도사회를 변화시켰던 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루 매분마다 신을 깨닫기 위해 동지들이 일어나기 전에 새벽 4시에 잠을 깨워 일을 시작했고, 때로는 기름이 떨어진 작은 등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달빛에 의지해 편지를 썼는다. 나는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참이 아니라는 확신이 날마다 자랐다.“ 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적으로 상대적 진리냐? 절대적 진리냐? 의견이 갈리겠지만 본질은 진리의 힘은 삶의 변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1) 진리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완전하지 않아도 교회를 통해서 일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지배 통치 구조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섬기고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있다면 신학적 지식을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실제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포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그날이 “Good Friday”가 된 것입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맺어진 친밀한 관계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의 이익과 욕심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으로 든든히 서가는 것 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의 착각은 예수가 자신들의 전통을 위협하는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이단의 두목이라고 말했겠지요.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전통을 폐지하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얻는 구원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뚜렷한 경계선이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무너졌습니다. 감춰져 있던 하나님 나라가 바울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전에는 바울에게 한민족의 하나님이셨는데 이제는 모든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속사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 이 변화의 사건이 다메섹에서의 회심입니다.
그런 바울을 보는 베스도 총독은 너가 미쳤구나 여겼습니다. 예수로 인해 미쳤다는 것입니다. 비단 바울 뿐이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무엇가에 빠져 살아갑니다. 구원을 이루려는 또 다른 삶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을 부르십니다. 그가 들은 주님의 음성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는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자리에만 있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도록 주의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며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기심의 본성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회복의 상태로 이르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하셨습니다.
(2) 십자가로 인해 인간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바라 보는 인간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고 관계하지 않으려는 죄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영적으로 죽은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영이 죽으면 육체가 영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거룩한 산제물이 되셨음을 깨닫고 죄의 종노릇 하던 죄의 뿌리에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에 두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이 일어난 사건 앞에서 성도는 겸손해 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스펙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성숙해지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 보고, 내 삶에 높이 쌓여진 산적한 문제 앞에서 번지점프를 하듯 구원의 줄에 매달려 뛰어 내려 보기도 해야 합니다. 경험해 보아야 구원의 줄이 끊어지지 않는 안전한 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의 줄을 붙잡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경험과 힘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웠던 사람을 사랑하는 일,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 남에게 대접하는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이끌린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부요한 환경에 있으면 부요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부족한 환경에 있으면 부족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에 붙들리면 그 사랑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반복되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9장에서는 다메섹에서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뤘고 22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죽을 만큼 맞고 난 후에 영내로 들어가며 천부장에게 연설할 기회를 얻은 후 바울은 이 회심을 간증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는 바울의 반복되는 회심 간증입니다. 그의 간증을 보면 먼저 유대교인으로 살 때를 회상합니다. 철저히 유대교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고 나사렛 예수를 대적하여 복음을 핍박하던 자였다고 지난날 자신의 실수를 고백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도를 죽이는 일에 어김없이 앞장 섰고, 모든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죽이는 일에 어김없이 찬성 투표를 했으며, 격분하여 외국의 성까지 찾아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들였기에 나에게 죄목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박해하러 가는 중에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바울은 이 간증을 한 후에 자신이 결박된 것 외에는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로마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고 전하니 베스도는 바울을 향해서 너가 미쳤다고 외쳤고, 아그립바 왕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두 고백은 십자가 전의 우리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3)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26: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9 바울이 대답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저는 왕 뿐만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이, 쇠사슬에 묶인 처지인 것만 제외하고는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아그립바 왕은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서 세상 권세를 다 누리고 있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결박된 이것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재판 심리는 아그립바 왕에게 큰 감명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가는 훗날 AD70년 유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그립바가 그리스도교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때는 2년 동안 결박된 죄수복을 입고 있는 초라한 바울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전했던 말들이 아그립바 왕에게 인상 깊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몇해전 한 사진 작가분과 교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일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색약임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 주님을 향한 믿음은 그의 발걸음을 하나님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작가이기에 토론토의 랜드마크를 사진에 담아내 실 줄 알았는데 그분의 카메라 초점은 화려한 건물이나 지역의 랜드마크가 아니라 거리의 작은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이땅 구석구석 하나님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으로 애쓰고 힘쓰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 사람들과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누리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며칠 동안 함께 대화하면서 작가님의 내면의 따뜻함은 시간이 흘러도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한 힘은 화려한 것을 바라보고 동경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냄의 겸손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 지역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고생한 흔적으로 가득했고 마음은 지쳐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바울이 당시 풍토병에 걸렸거나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몸이 성하지 않았을 거라 추측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 역사가 일어나고 갈라디아 지역 사람들은 바울을 천사나 되는 것처럼 대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완벽한 환경과 조건에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해져 있을 때 복음은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롬 5:6)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있는 부정적인 일들을 다 맛보셨습니다. 외로움과 수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배신감과 상실감, 그렇게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고 청년의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삶을 보면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약함을 숨겨야 하는 문화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적당히 오픈하고 적당히 나누고 숨기는 것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약함을 드러낼 때에 역사합니다. 우리가 강하면 예수님이 필요 없지요.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그 감격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편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함께 기뻐했었는데 또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식어질 때에 껍데기에 집착합니다. 형식과 틀 안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바울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다고 한 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야 하고, 학문에 능통하고, 종교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태워 산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새마음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이해가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해가 달라집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간증은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아그립바 왕도 바울의 무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죄를 확인했으니 바울을 풀어 주어야 하나 그가 로마에 상소를 했기에 바울은 로마에 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호송되게 됩니다. 바울이 만약 이때 석방되었다면 집요한 유대인들의 암살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음주에 설교하게 될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항해여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장입니다. 설교의 본문도 오묘한 섭리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청교도인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오게 된 것과 이미 1500년전 하나님의 섭리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의 항해가 오버랩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가이사로 가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억울함도 불행함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주신 기회입니다. 한해도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합시다. 성도는 세상속에서 이미 빛입니다. 소금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연약한 존재에게 부어 주시는 끊임없는 사랑 때문에 주의 빛을 비추는 것이고, 소금이 되어 부패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며 한주도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