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016 | 졸업 예배 / 어버이 주일

끝까지 지켜야 할 것 두 가지 Two Things That You Should Never Forsake

잠언 3:1-10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유명한 한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풀이하면, “나무는 잠잠이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한대(漢代)의 학자였던 한영(韓嬰)이라는 사람이 한시외전 (韓詩外傳)이라는 시경 (詩經) 해설서를 썼는데, 그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혹시 여러분, 송강 정철이 쓴 훈민가 (訓民歌)를 알고 계십니까? “어버이 사라신 제 셤길일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잘 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시들입니다.

성경에도 부모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에베소서 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중에 이 계명을 잘 지키면 이런 저런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는 첫 계명이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부모님 생각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화도 한 통 넣고, 편지도 한 통 쓰십시오.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들이라도 오늘을 있게 하신 그분들의 수고와 사랑을, 그리고 그분들의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영국의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오 나의 어머니(O Mother of Mine)」라는 시를 썼습니다. “내가 높은 산에 목이 매달린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올지를. 오 나의 어머니! 내가 깊은 바다에 빠진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눈물이 나에게 흘러올지를. 오 나의 어머니! 내 영혼과 몸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기도가 나를 구원할지를, 오 나의 어머니!”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과 기도 덕분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키플링은 그의 시에 “Dedication to The Light That Failed (꺼진 불에게 바치는 시)”라는 부제(副題)를 붙였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 아닙니까? 자신의 것을 모두 자식에게 내어 주고 자신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꺼진 불과 같은 존재 아닙니까? 키플링은 그런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한편의 시를 바쳐서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의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공부 잘 하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런 부모님의 소박한 소원을 한 차원 높여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의 사람들은 잘 되는 것을 ‘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고 했습니다. 효경(孝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전에 나오는 말들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입신양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읽은 잠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잠언은 Proverbs입니다. 흔히 쓰는 말로는 속담이나 격언 혹은 금언입니다. 성경의 잠언 속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얻은 지혜로운 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교훈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내 아들아(My son)” 하면서, 마치 자기 아들에게 들려 주는 교훈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잠언을 쓴 솔로몬은 아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인근 각처에서,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까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큰 지혜와 슬기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그 어떤 사람의 지혜보다 컸으며, 이집트의 모든 백성의 지혜를 합한 것보다도 더 컸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습니다. 예스라 사람 에단보다도,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도, 더 지혜로웠습니다. 솔로몬의 명성은 모든 나라에 널리 퍼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평생 동안, 지혜로운 가르침을 삼천 가지나 말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돌담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도록 세상의 모든 왕들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4:29-34).”

이런 솔로몬이었지만 말년에는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지나친 명예심으로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습니다. 이방 나라의 여자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우상숭배에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부귀영화에 탐닉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았던 솔로몬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전도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잠언 역시 그가 말년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쓴 것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 3장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음 세대에게 크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실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faithfulnes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무도 “왜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 착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을 대할 때, 누구를 대하든지 성실하게 주님을 대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눈가림으로 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어디서든지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로 편지를 쓸 때는 꼭 끝에 “Sincerely yours”라고 쓰고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쓰고 싸인을 합니다. “sincere”라는 말이 라틴어 “sincerus”에서 온 말인데, 원래 이 말은 “양초를 먹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는 대리석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대리석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제 값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리석을 파는 사람들이 흠집을 감추기 위해서 양초를 먹여 진짜인 것처럼 속여 팔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은 양초를 먹이지 않은 순수한 대리석입니다” 라고 말할 때 sincerus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양초를 먹이지 않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인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love”라고도 나와 있고, “mercy”라고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11)”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꾸 사라져 가는 시대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 잘 알아 두세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이것을 잃어 버리면 여러분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무슨 법을 하나 만들어도 항상 그 밑바닥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나 바꾸어도 그 밑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특히 약한 사람, 불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무력(無力)한 사람들 편에 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속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제사장 아히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히멜렉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못해 충격적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상황이 어찌나 급했던지 수행하는 부하들도 없었고, 손에 무기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한 밤중에 아히멜렉를 찾아 갑니다. 다윗을 알아 본 아히멜렉은 깜짝 놀라면서 “아니, 이 밤중에 웬 일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다윗은 왕의 특명이 있어서 이렇게 부하도 없이 급히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면서 뭐라도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합니다. 그 때 당황한 아히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제 손에 장군에게 줄 떡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에서 물려낸 거룩한 떡은 있습니다” 하면서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내 줍니다. 이 일이 나중에 사울에게 알려져서 아히멜렉은 죽습니다. 거룩한 떡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떡입니다. 다윗은 그 떡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히멜렉은 그 떡을 다윗에게 줘서 먹게 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아히멜렉은 수 만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합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분명하다. 지금 이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내가 떡을 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한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거룩한 떡을 내 줍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떡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다윗이 떠날 때 아히멜렉은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칼 한 자루를 줍니다. 그 칼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칼이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멜렉 덕분에 목숨을 구했지만, 아히멜렉은 이 일 때문에 사울의 손에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히멜렉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히멜렉 이야기를 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 (마가복음 2:27)”고 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율법의 어떤 규정보다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았던 아히멜렉 덕분에 다윗은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아히멜렉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사십시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ie them around your neck as a reminder. Write them deep within your heart. Then you will find favor with both God and people, and you will earn a good reputation.”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에도 입신양명에 대한 말씀이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입신양명이 아니라, 성실과 사랑을 가지고 삶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입신양명입니다.

Erwin Lutzer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ose who have failed miserably are often the first to see God’s formula for success (처참하게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성공에 대한 공식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formula를 가지고는 실패 했잖아요? 이제는 눈을 하나님의 formula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formula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자와 진리를, love와 faithfulness를 목에 매고 잊어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나 사람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거나, 사람을 속이지 않고, 눈가림으로 하지 않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진실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formula입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모든 일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formula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에 눈을 팔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He shall direct your ways., NLT).”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NIV) 우리가 우리 자신의 formula를 따라 가지 않고, 하나님의 formula를 따라서 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지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을 순탄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졸업 (graduation)”이라는 말을 Webster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to pass from one stage of experience to a usually higher one”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보다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해 한 계단을 올라 선 것입니다. 이제 성실과 사랑을 reminder로 목에 걸고, 가슴에 깊이 새기고,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세상이 더 밝아지고, 아름다워지는 삶을 사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베드로전서 3:14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But even if you should suffer for what is right, you are blessed. Do not fear what they fear; do not be frightened (때로는 옳은 일을 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마십시오).”


5/1/2016 | 부활절 여섯째 주일

너는 나를 따르라! You Follow Me!

요한복음 21:18-25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냥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거룩한 신의 섭리 (divine providence)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의 삶은 그냥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연히 에베소서 1:11-12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이 말씀이 Eugene Peterson이 번역한 The Messag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t's in Christ that we find out who we are and what we are living for. Long before we first heard of Christ and got our hopes up, he had his eye on us, had designs on us for glorious living, part of the overall purpose he is working out in everything and everyone.” 번역하면 이런 말씀이지요? “우리가 누구인지, 또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그리스도 안에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희망을 갖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도는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큰 목적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영광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설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전제(前提) 밑에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는 네 혼자 힘으로 옷도 입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네가 팔을 벌리겠고 다른 사람이 네게 옷을 입힐 것이며, 다른 사람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18절) “When you were young, you dressed yourself and went wherever you wanted to go.”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어서 어디든지 원하는 곳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뭐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스스로 옷을 입지 못해요. 엄마가, 아빠가 옷을 입혀 줍니다. 그 때는 엄마, 아빠 말을 들어야 하고, 또 밖에 나갈 때도 혼자 아무 곳이나 갈 수 없습니다. 꼭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따라서 가야 합니다. 가끔 길을 가다 보면 미국 유치원 아이들이 20-30명 선생님을 따라 어디를 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아이들 손을 줄로 묶어 놨습니다.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옷을 혼자서 입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밖에도 혼자 나갈 수 있습니다. 꼭 엄마, 아빠를 따라가지 않아도 혼자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은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네가 젊었을 때는 혼자서 옷을 입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이제 나이가 들게 되면, 네 혼자 옷을 입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옷을 입힐 것이다. 너는 네 마음대로 아무 곳이나 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 갈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행히 성경에 이 말씀의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9절) 간단히 말하면, “지금까지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보면 30살까지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기 때문에, 아버지 따라서 목수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사렛에서 6km 떨어진 곳에 세포리스 (Sepphoris)라는 큰 도시가 있었습니다. 세포리스의 별명이 ‘갈릴리의 보석’이었습니다. 그곳에 큰 공사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요셉과 예수님은 그곳에 가서도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0살이 되면서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접습니다. 세례를 받으시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적인 삶 (public life)을 살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을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지금 공부하는 청년들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얻고, 사회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현재의 삶에 대한 의미가 약화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삶을 준비의 삶이라고만 이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요한복음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라고 했습니다. 제물은 죽어야 하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완전한 화목제물 (an atoning sacrifice, NIV)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는 시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1절) 자기를 따라오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 대한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묻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제 제가 제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제가 그렇게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게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러면, 저기 따라오고 있는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요한이 어떻게 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독특한 (unique)’ 삶의 계획이 있습니다. 모두 같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지 않고 다른 것처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각각 다릅니다. 저는 목사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저는 정말 어쩌다가 목사가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가 목사로 부름을 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부담입니다. 영어에 ‘undeserved’라는 단어가 있는데, 저에게 꼭 맞는 단어입니다. 자격이 없다는 뜻이 잖아요? 설교자로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하지 못하는 일을 설교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말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참 힘든 일입니다. 이번에 KMC 연회에 가서도 어떻게 목사들이 저런 말을 할 수 있고,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충격적인 일들이 많았습니다. 협박, 회유, 거짓말, 말 뒤집기, 목사들의 세계에 이런 일들이 난무(亂舞)합니다. 어느 목사가 그런 말을 하데요. 정치(政治)는 다 그런 것이라고요.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교회 정치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라는 말로 목사들의 그런 말도 안 되는 모습들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유니크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목적에 따라 살면 됩니다. 나에게는 나에게 맞는 하나님의 유니크한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찾아서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훗날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 생활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자취 (Jesus’ steps)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발자취를 남겨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발자국을 따라 가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예전에는 모르는 길 가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지도가 잘 되어 있으니까 누가 옆에서 지도를 봐 주면 되지만, 저도 이것 가지고 많이 싸웠습니다. 갑자기 갈라진 길이 나오는데, 옆에서 빨리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황하게 되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출발 하기 전에 주소를 먼저 입력하면 모르는 길이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Go Home’ 버튼만 누르면 집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발자취는 네비게이션과 같습니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가면 힘들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향이 잘못되고, 목적지를 벗어나서 엉뚱한 곳에 도착합니다.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가치들을 나의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을 나도 옳다고 하면 되고,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도 아니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 두 사람,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마가복음 10:38) 이 말씀에 나오는 ‘잔 (cup)’과 ‘세례 (baptism)’는 모두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 (suffer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으면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길을 잘못 배우거나, 아니면, 이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지금의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죄와 악이 가득한 것을 보고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6:5-7). 이 세상을 홍수로 쓸어 버리고 의로운 한 사람, 노아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의 어른들은 다음 세대 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400m 릴레이에 비유하자면, 1번 주자는 그런대로 잘 뛰었습니다. 그런데, 2번 주자가 잘못 뛰었습니다. 여기에 목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소위 번영신학(繁榮神學)에 물이 들어 복음을 변질 시켰습니다. 목사들은 대형교회를 이루기에 여념이 없었고, 교인들에게 성공에 대한 야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여파를 지금 세대가 그대로 물려 받고 있습니다. 이제 3번 주자인 여러분에게 배턴이 주어졌습니다. 만약 3번 주자인 여러분이 잘못 달리면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3번 주자인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잘 따라 달리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국을 잘 따라서 달리면 꺼졌던 희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 주면 됩니다.

어느 축구 해설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은 결정적인 장면에서 그만 ‘개 발’을 차고 만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수들은 그런답니다. “아니, 이 볼이 왜 내게로 오지? 큰 일 났네. 잘못 차면 비난을 받을 텐데?” 하면서 결정적인 찬스가 와도 “옛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하면서 공을 ‘뻥’ 차버리고 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골을 잘 넣는 선수들은 그 찬스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나에게 오다니? 이건 행운이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공을 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3번 주자의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큰 일 났네? 이 책임이 왜 나에게 왔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에 희망의 불꽃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분에게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과거와는 달리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러면, 희망이 있습니다.


4/24/2016 | 부활절 다섯째 주일

주님의 부탁 The Lord's Request to Serve

요한복음 21:15-25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와 예수님, 두 사람이 어색한 조우(遭遇)를 합니다. 조우라는 말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편에서 보면 주님과의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베드로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만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계획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은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마태복음 26: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재판을 받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스위스 화가 유진 버난드 (Eugène Burnand)가 그린 그림이 유명합니다. 그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두 제자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림 제목이 좀 깁니다.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Sepulchre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제임스 거니 (James Gurney)라는 사람이 이런 평을 썼습니다. “Burnand pointed out the complexity of emotions on each man. You can literally see their thoughts chasing across their faces—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on John’s face, and the hope against hope tempered with sorrow and regret on Peter’s face. In disbelieving shock, they run. Not knowing what they will find, they run. In hope against hope they run. They run (그는 두 사람의 감정의 복잡함을 그리려고 했다. 당신은 두 사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얼굴에서는 불안과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베드로의 얼굴에서는 슬픔과 후회로 뒤섞인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충격을 가지고 두 사람은 달렸다. 무덤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 채 그들은 달렸다. 결코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을 달리고 또 달렸다).”

여자들의 말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의 말대로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로 갔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고향에 돌아 온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같이 해변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식사하시는 이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은 똑 바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처음 확인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확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또 ‘시몬’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이 왜 나옵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성의 약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이라고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의 연약함에 대하여 이해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4:15 말씀을 알고 계시지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 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참 sympathy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sym’이라는 접두사는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pathy’는 ‘pathos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이 단어도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단순히 이해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연약함을 자신의 연약함처럼 느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베드로의 눈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난 너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로 걱정하지 말아라.”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로마서 8:1) 왜 그렇습니까?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s set you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of death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랑의 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틀에 얽매이지 않고 번역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지금까지 베드로를 묶고 있던 죄의식을 깨뜨리고, 베드로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탓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연약하다고요? 그래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 했다고요? 누가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 번이 아니라 수 백 번도 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나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죄의식이 있나요? 이 guilty feeling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내적 치유 세미나 이런데 좇아 다니는 사람들 있습니다. 제가 그런 세미나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세미나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무슨 technique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저는 치유되지 않고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많은 증상들을 유발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병원에서는 원목 (chaplain)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심리치료요법들 (psychotherapies)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My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마가복음 2:5, NASB)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때,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자유함’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물질로부터의 자유함, 명예와 권력에 대한 자유함, 그리고 관계로부터의 자유함이 없이는 올바른 사역자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까 제임스 거니 (James Gurney)의 그림 해석을 들었잖아요?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다릅니다.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니, 설마 그런 일이 있을라고? 그렇다면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이런 얼굴이었습니다. 제임스 거니가 이렇게 표현 했잖아요? ‘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on John’s face’라고요. 그런데, 베드로의 얼굴은 또 달랐습니다. ‘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tempered with sorrow and regret on Peter’s face’라고요. 이런 베드로를 그냥 내버려뒀더라면, 그는 평생 슬픔과 후회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guilty feeling’입니다.

주님과 베드로가 주고 받은 대화를 한번 들어 보세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Yes, Lord, you know I love you).” “그렇다면 됐다. 내 양을 먹여라 (Then feed my lambs)!” 그 뒤에 조금씩 뉘앙스가 다르게 “내 양을 돌보아라 (Then take care of my sheep)” “Then feed my sheep” 이렇게도 나와 있지만 이 말의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거의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해서 하셨는데, 세 번째 물으셨을 때는 베드로가 거의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17절)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ter was hurt that Jesus asked the question a third time. He said,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hen feed my sheep.’” 이 모든 과정은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돌보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을, 이제 제자 베드로 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베드로만 주님의 용서를 받고, 베드로만 주님이 받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이 용서해 주셨고, 우리도 주님이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돌보고,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탁은 섬김의 삶에 대한 부탁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 것처럼, 나의 제자들인 너희는 내 양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 양 (my lamb, my sheep)’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하는 양은 우리 (fence) 안에 얌전하게 들어 있는 착한 양들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친구가 없고, 대화 상대가 없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 ‘나의 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하고 많이 달라요. 우리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착한 양들에게 가고 싶은데,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인다’는 뜻을 가진 ‘feed’라는 단어가 엄마가 아기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뜻이 있잖아요? 저는 교회 식사 시간에 엄마들이 숟가락에 밥을 떠서 아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먹여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요? 그렇게라도 먹어야 아이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 주변에 있는 나의 어린양들 (my lambs)을 그런 마음으로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탁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우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베드로의 경우처럼, 우리가 회복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되는 것이 사역보다 먼저입니다. 내 양을 섬기라는 주님의 부탁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하는 이유는 평생 주님과의 관계 회복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섬기는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1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일에 준비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평소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준비된 사람들이 되십시오.


4/17/2016 | 부활절 넷째 주일

세 번째 The Third Time

요한복음 21:1-14

오늘로 부활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 오늘 말씀 중에 어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저에게는 맨 마지막 절에 나오는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14절)” 이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굳이 ‘세 번째’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카운트한 세 번이라는 것은 어떤 일들을 말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카운트를 해 봤습니다.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 중에 도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8일 후에 다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도마가 없었으면 그만이지, 도마가 그 때 없었다고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마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구약 이사야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For just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my ways are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higher than your thoughts).” (이사야 55:8-9)

우리는 다수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다수가 원하면 소수의 의견은 묵살됩니다. 열 한 제자가 있었을 때, 도마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나타나셔서 부활을 확신 시켜 주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라고 외친 것은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절) 시몬 베드로를 위시해서 7명의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 부근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가 밤이었던 모양입니다. 우리하고 문화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도 밤에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갈릴리 호수는 밤에 고기를 잡는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난 물고기나 잡아야 하겠소” 하고 말하자 나머지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배에 올라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깊게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3년 전에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 나의 제자가 되면 너희들의 삶을 바꾸어 놓겠다는 말씀입니다.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들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겠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제자가 되면 너희들은 새로운 생의 목적을 갖게 되고, 지금과 전혀 다른 생의 미션 (사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모두 고향에 내려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것을 증명해 주셨지만, 제자들은 모두 자기 고향에 내려와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했던 히브리서 13:13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outside the camp (성문 밖)’인데,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 눈물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의 현장, 그곳이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인데, 지금 제자들은 모두 ‘inside the camp (성문 안)’로, 자기 고향으로 내려와 있습니다. 지난 3년 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일들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마당에 제자들의 꿈도, 희망도 모두 내려 놓아야 했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기대했었습니다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save Israel).” (누가복음 24:21) 제자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들의 꿈도, 그들의 미래도 모두 걸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꿈도, 희망도 모두 접어야 했고, 제자들은 지금 고향에 내려와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 번째 (the third time)’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면서 제자들의 앞을 막아 서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제자들은 그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오늘 제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3년 전에 있었던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같은 일이 반복 되었을까요? 아니면? 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뭔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뒤에서 연출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친구들, 한 마리도 못 잡았느냐?” (5절) 뭐가 이런 말이 있습니까? 우리가 고기 잡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그렇게 묻습니까? 아니잖아요? “고기 많이 잡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정상 아닙니까? NIV 성경에는 이 말이 “Children, you do not have any fish, do you (얘들아, 한 마리도 못 잡았지? 맞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을 알고 확인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백 투 더 퓨우쳐(Back to the Future)’라는, 마이클 J. 폭스(Michael J. Fox)가 주연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타임 머신을 이용해서 미래로 가는 내용을 재미 있게 그린 영화입니다. 스포츠카를 개조해서 타임 머신을 만듭니다.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도 돌아가고, 몇 십년 후 미래를 여행한다는 모험적인 내용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된 것이 1985년입니다. 그때 제작비가 19 million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10 million을 벌었다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3년 전의 일들이 똑 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호수 가에 서 계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고기 없어요. 밤 새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봐요.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겁니다.” 신기하게도 제자들은 3년 전처럼 호수 가에 서 계시는 분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을 배 안으로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그물을 끌어 올리던 요한이 “주님이시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 호수 가에 서 계시는 분에게도 헤엄쳐 갔습니다.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베드로를 성급한 성격을 가졌다고 평가합니다.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베드로가 성급했기때문에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베드로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눈이 확 떠지는 생의 경험 (eye-opening experience)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시지요? 금으로 만든 왕관의 금의 순도를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B. C. 287-212년)가 금의 순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우연히 목욕탕에서 그 방법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Eureka)! 유레카(Eureka)!’ 하면서 옷을 벗을 채로 목욕탕을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유레카’라는 말은 “I have found it (나는 발견했습니다)”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지금 베드로에게 이런 엄청난 “eye-opening experience”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 일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생의 미션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굳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비롯해서 이방 세계에 세워진 교회들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Headquarter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해변에 숯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 큰 고기를 세어 보니 모두 153마리였습니다. 이 153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발한 해석들을 많이 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고기의 종류가 모두 153종류 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1에서부터 17까지를 모두 더하면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고 합니다. 17은 10+7인데, 10은 이방인들에게 완전을 의미하는 수이고, 7은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그물은 교회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저는 이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그날 새벽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큰 고기가 이렇게 많이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밤 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는데, 이렇게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고기가 많이 잡혔다더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잡은 고기를 셀 정도로 제자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훗날 누가 “에이,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누가 꾸며낸 이야기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 때 그 자리에서 이 일을 경험했던 제자들은 “무슨 소리야? 우리가 집적 잡힌 고기를 세어봤다니까?”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제자들 중에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그 분은 예수님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요한의 증언(證言)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위에서 말한 7도 완전 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나타나신 이 일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번이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기록했을 때, 아무 의미 없이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몇 번이고 그들이 믿을 때까지 증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인내심이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證人)들로 만드셨습니다. 자기들의 꿈과 희망을 접고 고향에 내려 온 제자들의 앞길을 막아 서신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outside the camp'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증인이라는 말 속에 ‘순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라는 말이 어원이 같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교할 각오로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베드로에게 ‘eye-opening experience’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주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금의 순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도 목욕탕을 뛰쳐나가면서 “유레카!”라고 소리쳤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우리들이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의 증인들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4/10/2016 | 부활절 셋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오늘 읽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 말씀은,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이 “성경 한 장 한 장 다 찢어 없애 버린다고 해도 이 말씀만 있으면 상관이 없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1779)’ 가사를 쓰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 자신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 갔을 때 그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찬송 가사입니다. 아마도 이 찬송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질 찬송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2002년에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영국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영국)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나왔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윌버포스는 21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는 1787년에 노예무역폐지 법안을 영국 의회에 제출합니다. 숱한 반대와 모함을 당하다가 마침내 1833년에 이 법안이 영국 상원의원을 통과합니다. 무려 46년만에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된 것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이런 윌버포스의 집념이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존 뉴톤 목사는 윌버포스의 멘토 역할로 나옵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마을입니다. 걸어서 3시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끝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바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았다는 소식까지 듣고,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이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보아 이미 예수님를 따르던 제자들이 흩어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12제자는 그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제 머리 속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과 성경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가?”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딱히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아니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이런 이유들도 저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히브리서를 강해했습니다. 저에게는 히브리서를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를 들으면서 지루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의 제사 제도와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구원의 길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어 가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에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히브리서 13:13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 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라고 나와 있습니다.

‘outside the camp’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성 밖을 말합니다. ‘inside the camp’는 예루살렘 성 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outside the camp’는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그 자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도 그 자리로 가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수치를 함께 당하자고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현장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라는 것입니다. ‘inside the camp’가 성공과 야망과 출세와 인기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outside the camp’는 고난과 희생과 수치를 당하는 자리입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 봐도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런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로 가서 예수님처럼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서 말씀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은 지금 ‘outside the camp’를 떠나 ‘inside the camp’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보이는 두 제자의 모습이 저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보였습니다. 헨리크 샌케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가 ‘쿼바디스 (Quovadis)’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51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다시 2001년에 폴란드의 영화 감독 에르지 카발레로비치가 이 영화를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네로 시대에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때 당황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제자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서로 주고 받고 있습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습니다 (17절). 두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십니까?” (18절) 예수님은 그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기대했었습니다. 지금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오늘 아침 일찍 무덤에 갔었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제자들이 무덤으로 갔었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참 답답하십니다. 어찌 두 분은 예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십니까?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의 글과 메시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Jesus took them through the writings of Moses and all the prophets, explaining from all the Scriptures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글들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 그렇지만, 메시아는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을 일일이 말씀을 찾아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이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다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말씀해 주실 때에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32절) 이 두 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경험했던 일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설교자인 저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33절) 한 시간이 못되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참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저녁 식사 후였으니까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제자들은 그 밤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내 생각대로 살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이기적인 삶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으로, 예전의 생활 (the old life)에서 새로운 삶 (the new life)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대로 하면, ‘inside the camp’에서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가 없이, 그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로 ‘inside the camp’에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outside the camp’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편안한 곳이 아니라 고난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거기는 성공이 보장된 곳이 아니라, 수치와 모욕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바뀌어진 이 새로운 삶의 방향이 아직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께 두고 있던 희망이 꺾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이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 생활을 접고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듭니다. 위험한 곳을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의지할 곳 없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나름대로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입니다. “아니,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너희가 떠나 온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 골고다 언덕,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내가 고난과 수치를 당한 곳, 바로 그 자리가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두 제자의 삶의 방향을 다시 돌려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되어 있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되어 있구나! 무덤이 비었다는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로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Anyone who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follow me, because my servants must be where I am., 요한복음 1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inside the camp’에 계시지 않고, ‘outside the camp’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inside the camp’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과 성공과 출세를 보장해 주는 자리, 그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나와 함께 수치를 당하자!”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 말씀에 응답할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소망이 생기고, 우리 교회에게 소망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