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2023 | 사순절 시리즈 I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 One Body with Many Parts

고린도전서 12:18-27, 골로새서 1:18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의 국경마을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에 있는 대성당까지의 거리가 대략  800㎞라고 합니다. 이 길은 하루에 20~30km를 걷는다고 가정해 보면 약 30~35일이 걸리게 됩니다. 긴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이 길을 걸으며 많은 이들은 성찰의 여정을 갖게 됩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 아마도 그 걸음에는 자신들의 삶의 다양한 스토리가 함께 하고 있을 겁니다. 삶의 낙심과 가지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구, 끝없는 외로움, 허전함의 마음들은 그 길을 걸으며 또 다른 여유와 평안함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존번연(John Bunyan1628-1688)은 침례교 목사이자 천로역정의 작가입니다. 영국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서 대장장이 일을 하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청교도 혁명에 의회군으로 참여하며, 내전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왔지요. 이때 번연은 동료가 전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천로역정 안에 구원받기 위해 괴로워 하는 기독교인들이 아름다운 집을 향해 언덕 꼭대기 십자가에 도착하자 마자 짊어졌던 무거운 짐은 아래로 떨어지고 그들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안에 있는 은혜의 개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놀라운 선물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사순절기에 매년 지키는 40일 영적 순례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기도의 자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자리에 친히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사순절기를 통하여 우리의 무거워진 짐을 내려놓고 말씀으로 평안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사순절기를 준비하며 제 마음을 두드린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데요.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땅끝에 있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교우들이 생각났습니다. 교우들을 위한 기도가 마칠때즘에 교회는 고통 당하는 지체들이 마음껏 울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 제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갈 길을 찾지 못해 지쳐있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줄 수 있어야 하고, 삶에 거친 풍랑이 불어와 위기를 만난 지체들이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곤고한 날도 찾아 오고, 근심과 걱정에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날들도 찾아오기도 합니다. 밤이 깊은 긴터널을 통과하다 보면 몸이 피곤하고, 영혼이 낙심 되면 길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때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힘은  믿음으로 서로가 떠 받쳐 주는데서 나옵니다. 믿음은 고난 당한 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땅끝에 이르러 비로소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하게 됩니다. 사순절 십자가에 우리의 영혼을 걸 만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도 짐이 될 것입니다. 이 시기를 통해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바로보는 이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삶의 문이 열어 주실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교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고, 부모의 품을 잃어버린 지체들이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주며, 낯선 땅에서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아름다운 여정을 향해서 다시 걸을 있는 힘이 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하나의 몸과 많은 지체즉 그리스도의 몸을 비유하며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편지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받은 은사를 가지고 자기 이름을 높이는데 사용하거나 또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두고 등급을 메기며 교만의 방편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받은 은사가 분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다른 은사를 가진 이들에게 기도의 깊이를 모른다고 무시한다면 공동체는 분열이 되는 것이죠. 예언을 하는 이들은 방언만 하는 이들을 열등하다고 말하고, 병을 고치는 사람은 섬기는 은사를 받은 분들을 낮게 평가한다면 은사는 분열의 도구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사는 주신 은혜에 따라서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는 도구입니다. 은사를 분열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성령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고 공동체를 흔들리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루어야 한다고 편지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양한 지체들이 통일성을 이루며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는 지체들입니다.

18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몸 안에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19 모든 것이 하나의 지체뿐이라면 몸은 어디 있겠습니까? 20 그러나 지금 그런 것처럼 지체는 많아도 몸은 하나입니다.

인간의 몸은 여러 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피곤한날에는 어깨가 뻐근하고 머리가 아파옵니다. 잠시 쉬면 금새 또 괜찮아집니다. 교회의 모든 교우들이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십자가 보혈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혈액순환이 잘 되어야 건강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겨 주셨고 한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지체들이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서로 신비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를 위해 섬기고, 마음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매주일 함께 모여 예배하고, 기도하며, 성찬을 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고백하는 세계 모든 교회는 공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공교회는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통의 분모를 지닐 때에 서로에게 속하게 되고, 그리스도께 기대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거룩한 공동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또한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죽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살아나셨으므로 모든 것의 으뜸이 되십니다. ( 1:18) 교회의 으뜸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는 이들은 새로운 삶을 살며,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사랑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들은 세상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살게 됩니다.

가나안 혼인잔치에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든 것을 보시고, 성전 안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을 치워버리고. 3일 만에 다시 성전을 세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에 비로소 제자들은 이 말씀을 기억했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건강한 세포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망가지게 하는 세포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영적으로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순결한 마음은 분열하는 마음을 들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지요. 외적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몸을 해치는 세포들이 많이 생기면 결국은 교회공동체의 질서가 파괴됩니다. 유기적 생명의 관계가 유지되려면 공동체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세포들이 왕성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판단과 정죄, 분열과 분리, 위선과 형식주의 신앙 안에는 생기가 없습니다. 생기가 없는 것은 몸속에서 병이 자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특성을 지녀야 할까요?

첫번째 특성은 사랑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야 합니다. 참된 것이란 부족한 지체들을 사랑으로 설득하며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눈이 손 더러 필요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손이 칼에 베이거나 다치게 되면 입은 자연스럽게 그 아픔을 표현합니다. 눈에서도 눈물이 나오게 되지요. 이것이 사랑 안에서 서로가 참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몸 전체가 아픔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반응도 없다는 것은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두번째 특성은 개개인의 성도들이 다른 영적인 은사를 풍성하게 계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들이 자기의 이름으로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사는 뜻에 맞게 덕을 세우며 주님을 높이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지체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뤄가는 것이기에 다양성 가운데서도 교회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세번째 특성은 교회는 강력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1세기 지중해 연안은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자유인도 있고, 종들도 있었습니다. 헬라어는 사용하는 사람들과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피부색도 출신과 고향도 달랐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월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지요. 그런데 교회는 한사람을 사회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 소유된 백성이지요.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비를 얻는 사람들입니다.(벧전2:10) 성령의 역사를 통해 문화, 신분, 인종, 성별, 지위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야 합니다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교제를 통해서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속의 교회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반대로 교회속에 세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흥미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포용하지 않는 것은 한 몸인 지체들이 몸에 붙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 있어서 자기 비판의 능력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속의 구별된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무교회주의자처럼 행동합니다. 이것도 교회속에서 세상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독립적으로만 행동하는 신앙도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둘째로, 교회는 부족한 지체가 더 존귀해져야 합니다.

22 이와는 반대로 몸에서 더 약해 보이는 부분이 오히려 요긴하며, 23 몸에서 고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지체를 우리는 더욱 고귀하게 대하고 볼품없는 부분들을 더 품위 있게 꾸밉니다. 24 반면에 우리 몸 중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부분들은 특별히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의 지체들을 함께 모아 부족한 지체들에게 더욱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25 그래서 우리 몸에 나뉨이 없게 하시고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돌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회사나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갑을관계나 상하관계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은혜 아래에서 형제 자매가 동일한 인격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는 사회적인 지위로 판단하거나 우열을 가려서도 안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들이 서로이 든든한 토대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절망의 무게를 지닌 지체들이 하늘의 희망을 노래하도록 힘이 되어 주고, 그들의 고된 삶에 주님의 빛을 비춰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연약한 사람들, 유약한 사람들이 오히려 ‘요긴하며’라고 말씀합니다.

몸에서 고귀하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지체를 더욱 고귀하게 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내게 부족한 신체 부위를 더 아름답게 꾸미게 되지 않습니까? 볼품없는 부분들은 더 신경이 쓰이고 몸의 여러 지체들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까? 아름다워지는 것은 날마다 부족한 부분을 꾸미기 때문입니다. 몸의 일부분 중에 아픈 부위가 생기면 의사를 찾아가 도움을 구하고 치료를 받는 이유도 아픈 부위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이의 허물이 보인다면 사랑으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연약한 지체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모든 사람은 타인을 배려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은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하나님의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루며 연약한 지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도록 섬기십시요. 섬기는 당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몸속에 오장육부라는 장기는 약하기 때문에 몸의 안쪽에 배치하셨습니다. 대부분 기관들은 약한 것들은 몸속에 있습니다. 귓속에 있는 작은 달팽이 관 한개의 이상만 생겨도 어지러워서 몸 전체가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신비롭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몸의 기관들은 서로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서로에 대한 헌신 위에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교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25 그래서 우리 몸에 나뉨이 없게 하시고 몸의 여러 지체들이 서로 돌보며 살게 하셨습니다. 26 몸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몸의 지체입니다.

몸의 한 지체의 고통을 함께 당하라는 말씀 안에는 고통받고 있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늘의 백성은 순례의 길에서 서로가 도와주고, 떠받치고 부축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교회로 받아 들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는 개개인이 전체라 주장할수 없지만 각각의 소중한 존재입니다

교회안에서 우리는 지치고 고된 인생을 사는 지체들에게 하나님의 품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노크를 하고 문밖에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디. 아픈 마음을 곁에서 이해해 주고, 때로는 기다림 가운데 선한 영향력으로 곁에 있어주면, 몸의 한 지체들이 공동체 안에서 홀로가 아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서로를 향한 배려와 공동체의 질서에 자신을 맞추는 일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숙한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교칙을 배우며 사회성을 습득하는 것처럼, 교회는 하나님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은혜의 통치 아래 공동체성을 배워나가도록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삶의 자리에서 진정한 작은 교회가 되어가는 과정을 감당하게 될때에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아는데 기도의 힘은 아는데 기도해도 말씀 안에 있어도 여전히 우리의 연약한 본성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대로 살때에 나의 삶의 모습이 누군가를 지켜낼 힘이 되고 연약한 이들이 딛고 올라갈 언덕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여러분의 삶을 응원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가 함께 동행하기 위해서 존재 자체를 먼저 인정해 주시고, 교제하는 모든 지체들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점점 고독해지고 외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짐으로 인해 우리의 가슴을 훈훈하게 했던 정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지만 죽은 물고기는 물결따라 흘러갑니다. 케임브리지 교우들은 세상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수없이 많은 만남과 삶의 현장에서 작은 교회가 되어가는 은혜를 누리시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지체들과 사순절 기간의 깊은 영적 순례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인생의 깊은 밤이 정말 길다고 느껴지고 삶이 너무 고되다고 느낄때마다 내가 선택한 믿음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끌어내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들이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수 있도록 함께 사랑으로 이 길을 걷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19/2023 | 기도시리즈 V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Give Us Today The Food

마태복음 4:1-4, 6:11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입니다. 이번주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에 이르기까지 40일동안 그리스도의 빛이 가장 어두워지는 영적 여정을 걷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 위한 영적 순례의 여정으로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두 가지의 양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말씀이고 또 하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어떤이들은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무익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죄를 회개하기 위해 음식을 삼가며 금식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서 욕망과 욕구를 죽이고 십자가를 더 가까이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주님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선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마음 안에 머무를 때에 식탁의 자리도 떡을 떼며 소중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일상의 변화로 이어지며, 예배는 삶의 자리와 분리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문의 간구 중에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날은 기도하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이 넉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도 쌓아 둘 만큼 넉넉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의 기도가 어떻게 느껴질까요? 이제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우리의 삶과는 편차가 너무 크게 느껴지기에 이 기도는 배고픔을 겪는이들에만 필요한 기도일까요? 아니면 가난에 굶주리고 있는 빈민국가의 사람들에만 해당되는 기도일까요? ‘

 

일용할 양식의 원어는 헬라어로 πιούσιος, ‘에피우시오스입니다. 로고스 주석에 보면 에피우시온단어의 뜻은 날마다의 것을인데, 이 단어는 에피우시아의 합성어입니다. ‘우시아에 대한 단어의 의미를 추적해 보면, 첫째는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이란 뜻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날마다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겠지요. 둘째는 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내일의 위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다가오는 날을 위하여 공급되는뜻으로 일용할 양식을 받아들였습니다. ,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앞으로의 24시간을 가리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루 동안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두가지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서 보면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우리의 인식 차원이 아니라 다차원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가지 해석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시간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되지요.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거하시려면 우리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행하실 하나님의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억하고 기념하라 말씀하고 있는ㄴ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고 기억합니다. 예배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예배자가 현재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영원한 시간과 교차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다른 상황과 다른 시대에 쓰여진 책인데 모든 책이 마치 한 사람이 쓴 것처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알게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를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많은 성서의 기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2천년 전 그리스도가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주셨구나 믿어지는 일도 성령께서 해주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간섭하시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시간이 우리의 시간 안에 뚫고 들어 온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쉼을 경험하게 해 주십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 힘이 들고 불편한 일이라면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알아가는 일과 봉사하는 일들이 불편하고 고생스럽다는 것은 이미 믿음생활이 누림이 아니라 의무가 되어 형식, 위선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이러한 개념에서 보면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들어오심간섭하심은 인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이루어 졌고,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한몸을 이루었습니다. 마치 밀가루들이 하나로 모여서 빵이 되듯이 떡을 떼는 교인들은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한몸이기에 연약한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됨을 기억하며 일용할 양식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기도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떡도 포함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인간이 육체적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래서 음식으로 인해 몸을 해치면 안됩니다. 몸이 아프면 밥맛을 잃게 됩니다. 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소화기관이 정상이어야 하고, 식욕이 있어야 되는데 일용할 양식을 잘 먹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도들은 식탁의 교제속에서 이 은혜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요.

 

디너처치(dinner church)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평범한 저녁그리고 교회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인데, 말 그대로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먹으며, 비기독교인들을 초대해서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이러한 교회를 디너처치(dinner church)라 이름한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문헌인디다케에 보면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에서 그 기원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교회의 건물이 없었으니까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떡을 나누고(성찬제사(예배)를 가정에서 드리며 생명의 교제를 나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갈릴리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십니다. 제자들은 다시 고기 잡은 일로 돌아가서 밤새도록 잡지만 고기 한마리 잡지 못하고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물고기를 구우시고, 떡까지 준비하셨습니다배고픈 제자들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을 알고 마련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21교회마다 공동체를 위해 식당에서 섬기시는 분들의 손길을 보면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왜 헌신하는 것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준비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교회 안에 가족모임, 팀모임,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이런 일들이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모임 가운데 믿지 않는 이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믿음이 자라가고 섬김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자주 만나서 식사를 함께하면 그 사람과 친밀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학교에서 배운 것은 밥을 주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는 훈련입니다. 오늘날 일용할 양식의 개념에는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가 필요하고, 집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는 렌트비, 그 밖에 하루 동안의 사용하게 되는 모든 양식이 충당이 되어야 합니다. 이뿐입니까? 소비문화는 소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대중매체를 통해서 특정상품이 유행이 되면 소유하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을 지니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입학시킨 것입니다.

 

광야라는 죽음의 땅에서 매일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40년이라는 방랑생활 동안에 매일의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주시며 그들을 낮추시고 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합니다. 학교가는 자녀에게 일주일 전에 지었던 밥을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라면 매일 새밥을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광야의 시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새로운 양식을 주시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시대는 밥만이 아니라 일용할 마음, 일용할 삶의 활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삶의 의미와 새마음, 정결한 마음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공급하시는 삶의 너머에 하나님이 계심을 보아야 합니다. 시간도, 건강도, 물질도 주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만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불확실함 가운데 하나님이 매일 공급해 주시는 것에 대한 훈련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만나가 하늘에서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안되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배가 고프다고 불평한 것이 문제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새밥을 해주시며 출애굽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사는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가십니다. 예수님 정도면 광야를 거치지 않고 하나님 사역을 하셔도 되었을텐데, 주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십니다.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를 하셔서 배가 고프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때 시험하는 자가 와서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을 떡으로 바꿔 보라고 하니 주님은 처해진 현실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떡속에 담긴 삶의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와 같은 고통의 시간을 하나님은 언제든지 거둬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광야의 시간은 자신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의 관점을 바라보며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다루심입니다. 예수님은 시험하는 자를 쫓으실때에 신명기 83절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십니다.

 

“8:3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낮추시고, 굶기셨다가 만나를 먹여 주셨소. 만나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조상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신 까닭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오.”

 

예수님은 성도들이 세상속에서 단지 떡 하나에 의지해 사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육체적 생존방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에서 진리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일용할 양식을 내가 열심히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라고 착각합니다. 식당에 가서 내가 번 돈을 지불하고 먹었으니 내가 이룬 것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생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에 우리가 살아 있고, 매일 생명력을 지닌 채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교회 역사학자가 알렌크라이더가 쓴 초대교회 교인들의 일상을 보면, 초대 교인들은 도시의 음식을 먹고, 시민으로서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거주하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초대교인들은 도시 문화속에 들어가서도 당시 로마 문화를 비판하며 시대 흐름에 도전하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거주하는 나그네들이라 불렸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힘이 없고 경제적 능력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해 억눌린 자들을 자유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새하늘과 새땅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성도들은 일용한 양식을 채우는 일이 삶의 목적이 아니라 400년 종살이에서 출애굽 시켜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예배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루라도 잊어 버리시면, 이스라엘 전체가 굶게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용할 양식에 담긴 공동체의 과업을 발견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기도문의 구성을 보면 하나님께 대한 기도의 간구가 나오고 우리를 향한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위한 첫번째 간구가 일용한 양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를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라는 말 안에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단지 먹을 것만이 아니라 어려움으로 하루를 살아갈 힘 조차 없는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양식은 단지 먹을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 모든 자원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일용할 양식이 넘치는 사람은 이웃과 나누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는 존재들이기에 일용할 양식을 더 누리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취하고 부당하게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을 드리는 성도들은 우리에게로 시작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의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어릴때 내 아빠 내 엄마 하지 않고 우리 엄마 우리 아빠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릴때부터 자연스럽게 우리의 개념이 내 자녀, 내 가족, 내 식구가 먹을 양식이라는 개념에 익숙합니다. ‘우리에게라는 수식어는 형제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만나를 남겨 두면 다음날 다 썩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탐욕에 물든 마음, 욕망의 노예로 살게 되는 삶은 부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허기진 마음을 채우려고 소유하고 또 소유해도 배고픔이 없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가요?

 

<부시맨Bushmen>이라는 영화를 보셨지요? 원제는 ‘The Gods Must Be Crazy’인데 , 영화속 배경은 아프리카 덤불 속에 사는 부시맨들입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 상공을 낮게 비행하던 백인이 콜라를 마시고 빈 병을 비행기 밖으로 던졌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병이 부시맨 마을에 떨어지게 됩니다. 부시맨들에게 하늘에서 내려 주신 그 병은 신비로운 요술 방망이 같기도하고, 밀가루 반죽을 밀어 보기도 하고,  과일을 놓고 내려치니 과일 즙이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장난감이었지요. 용도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문제는, 하늘이 내려 주신 그 신비한 콜라병을 서로 독차지하려다 부시맨들이 그만 원수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침내 족장은 자신이 아는 세상 끝까지 가서 콜라병을 절벽 아래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시맨들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콜라병 하나 때문에 온 부시맨이 원수지간이 된 이유는, 하늘이 내려 주신 것을우리가 함께 쓰려 하지 않고 저마다혼자 독점하려 하니, 콜라병 하나를 놓고도 분란이 생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은 빵을 저축하고 싶어합니다. 성공하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고, 유명해 지고 싶고, 세상속에서 거장이 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먼저 지녀야 합니다. 성공과 축복만을 향해서 기도하는 일은 자본주의적 가치일 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의 메시지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청지기의 삶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바르게 모으고 사용하겠다는 기도입니다. 양식을 왜 모으는지, 쓴다면 왜 쓰는지,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명확한 기준과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내 2024년 하계올림픽 개최 후보지로 선정된 보스턴시가 유치 신청을 철회했다고 합니다. 보스턴 시의 발전 보다 다음세대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마틴 월시 보스턴 시장은  “올림픽을 다시 유치하는 것이 미국에도 좋고 보스턴에도 장기적 혜택을 가져오리라 믿는다 하지만 어떠한 혜택도 우리 시의 재정적 미래를 넘겨줄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고 밝혔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제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물질의 축적과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보다 좋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 같지만 하나님으로 떠나게 만듭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매일의 기도는 우리가 가진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이 거둬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바른 생각과 옳은 기준으로 하나님 앞에 있음을 매일 기억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로, 일용할 양식은 쉼을 주시는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먹는 것을 앞두고 매일 식사 기도를 드립니다. 이 기도의 영성은 매순간 노동을 하며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일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안식도 필요한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기도를 드리며 죄, 불안, 경쟁, 불평, 정죄, 불확실함으로 부터 안식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식탁에는 죄인들이 자주 초대되어 왔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나누는 자리에 주인이시고, 그 자리에 온 모든 죄인들은 떡을 나누며 교제를 즐겼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에 장래에 예수님의 식탁 앞에서 믿음의 교우들이 둘러 앉을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때에는 십자가에서 우릴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손수 떡을 떼어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예배는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들을 마시며 생명을 누리지만 언젠가 우리에게 임할 날을 기다리며 일용할 양식의 기도는 안식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선교사들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지 않는 것을 죄라고 여기며 조선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이 떡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1901년 한국 이교의 심장 속으로 오랫동안 잊어버린 노래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파고들어 갔습니다. 그 멜로디는 무교의 정령숭배에 있는 두려움의 중얼거림을 삼켜버리고, 조상 제사에 있는 절망적인 실망의 속삭임과 불교의 윤회 사상에 내재된 고뇌의 신음 소리를 그리스도 십자가 영생에서 부르는 즐거운 승전가로 변화시켰습니다. 그 옛날 뱃길을 따라 전해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기도는 한국땅에 수많은 십자가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 형성사라는 책에 실린 카우퍼의 장시 자비’(Charity)의 일부분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한국에도 옛날 항로를 따라 전해진 주님의 떡은 하늘과 소통하는 어떤 이가 순수한 강물이 발원하는 곳에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미천한 우리의 물과 다시 섞었는데 이는 마치 천사가 날개를 치는 것과 같았다. 불멸의 향기가 순례자의 길을 가득 채우고 그의 보물을 어디서 구했는지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보물을 가득 실은 범선은 태양이 인도의 향신료 해안에서 이글거릴 때 서구 세계의 어떤 안전한 항구에 그 닻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그 배가 어느 항구로 갔는지 묻는 것은 헛되다고 향기에 젖은 바람이 우리에게 알려 준다.

 

 

 


2/12/2023 | 기도시리즈 IV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요한복음 10:7-1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마칠 때 똑같은 말로 기도를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인데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는 것은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16: 2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양성으로 인해 화합과 포용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빼고 기도를 마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난 20211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때 기도를 맡은 흑인 목사는 기도를 마칠 때에 “In the strong name of our collective faith, Amen”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의역하자면,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사회 안에 여러 종교와 민족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행사이며 공적인 자리였기에 다양한 종교를 지닌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알라나 브라만 등 여러 종교의 신에게 드린 기도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미 오랜전부터 북미 캐나다 연합교단에서도 종교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는 분쟁을 줄이기 위해서 기도를 마칠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단안에서 보수주의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두려움과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진보주의적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배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공공선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사전적 의미로는 개인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선을 의미합니다.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새하늘과 새땅의 회복은 예수의 구속을 흐릿하게 해놓아야 화합이 이뤄질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회복도 선교의 관점에서 유일한 중보자를 드러내지 않아야 종교간의 화합이 이뤄진다는 것이죠. 유일한 중보자는 내적으로 인식만하고 겉으로는 고백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은 양과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112절을 보면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당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스라엘의 땅은 바벨론 제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목자가 없으니 흩어져서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양들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게 된 중심에는 죄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죄로 인해 내양들이 흩어졌지만 목자는 내 양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찾아오시겠다는 것이죠. 대략 600년 후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지만 새로운 생명을 얻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찾고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지워 버리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영혼들은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오신 것입니다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의 구속이 없으면 화합하고 수용하는 것은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 자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하실 때에 에스겔 34장을 염두에 두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에 익숙했지요.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선언을 하시는데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양의 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첫째로, 주님은 양의 문입니다.

 

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다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양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양들에게는 위험이 닥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지진만 해도 양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해입니다. 생각지 못했던 삶의 위기, 말없이 찾아오는 질병들, 인간 관계의 상처로 인한 고통 등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이 있는데, 주님은 양의 문 앞에서 지키시는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키시는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부터 해방되는 사건을 넘어서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의 피가 없었으면 출애굽도 일어날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갈때에 애굽 사람의 집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구분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어린양을 죽이지 않아도 문 앞에 양 한마리 묶어두면 되었겠지요.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피가 문 앞에 뿌려져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27:37, 마가복음 15:26절에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그분의 죄명을 적은 글'이 있었습니다. 그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쓴 죄패를 붙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양의 문이 되기 위해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재판관인 빌라도 역시 그분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으셨습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의 깊이를 알지도 못한 채 기독교 교리에만 문자적으로 매달리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양의 문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죄인를 살릴 방법이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이 설정해 놓은 기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죄와 죽음을 부터 놓여지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어린양 대신 주님이 대신 죽고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에 대한 깊은 경험은 오직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 생명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의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주님을 거부하는 일도 없습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양의 문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목자에게 운명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이 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온순하거나 의존적으로 보이는 게 싫은 것입니다. 분명한 주관을 세우며 자기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100세에 얻는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모리야 산에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를 이를 독자 였는데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스스로 파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네 자손이 밤하늘에 별들처럼 번성할 것이라 약속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그럼에도 시험조차 부당한 요구이고, 부조리한 하나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리야 산에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놓으라는 말에 순종할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도 100세에 귀하게 얻는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내게 이럴 수 있을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닥쳐온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드린 것은 자신의 뜻과 고뇌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번제단 앞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드리려는 아브라함을 2번이나 부르시며 더 친밀한 경험을 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하며 믿음안에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인간의 본성이 제단에서 태워지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등한히 여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를 꼽자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부족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묵상하는 일에 쉽게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며 돈과 권력에 지배를 받다 보니까, 하나님의 경험은 부족해지고, 기도할 힘은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오늘날 전세계에 인구 숫자가 79억명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있는 양들은 얼마나 될까요? 코카콜라를 전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회장은 유명한 말들을 남겼는데요. “나의 꿈은 내 세대에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코카콜라를 한 잔이라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훗날 사업 성공의 비결을 물어보는 기자에게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대답했지요. 우드러브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열정과 마음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오염되어 있어서 그대로 두면 죄를 향한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속에 흐르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성장 시키시는 양분을 얻는 것입니다.

 

신생아가 처음에는 엄마와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경험적으로 엄마를 알지 못합니다. 엄마의 음성도 익숙치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품에서 모유를 먹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가 부르는 소리와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구분하게 되지요. 아이가 엄마의 소리에 반응하게 되는 것은 엄마의 음성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매일 엄마의 모유를 먹으며 아기는 엄마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읽고 성전에 있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쳤다 해서 예수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사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본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마음 깊이 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죄를 저지를수 있고, 문밖에 서 있다가 어느날 흐리고 캄캄한 날을 맞이 할수 있습니다. 기도의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주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양의 문이 되시는 주안에 머무르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14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8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내놓는다’는 단어가 11, 15, 17, 18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선한목자는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인지 삯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길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가 아니면 달아나는가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고백은 할수 있으나 누군가를 위해 실제로 목숨까지 내놓은 일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누구나 삯군이 될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믿음생활 오래 하신분들이 지식은 커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삯군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그 길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한목자가 되어야 양들이 생명을 풍성하게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널 위해 죽었어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족을 잃고 형제를 잃고 아파하는 이들도 선한목자를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이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죄인임을 깨닫고 선한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속에서 목숨까지 내려놓지 못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섬기고 희생하며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서둘러 죄를 회개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르는 일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선한 목자가 삶을 지키시며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기 위해 삶속에서 믿음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로, 예수의 이름안에 풍성한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0) ‘풍생초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풍성한 생명으로의 초대라는 말을 줄여보았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마음 위에 풍성한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1978년 시작된 교회의 역사 앞에서 우리 모두가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새 옷을 매일 입어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복은 현재에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묵묵히 오랜시간 헌신의 자리를 지켜오신 분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 매일 삶의 자리에서 은혜를 구하는 교우들의 기도가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줍니다. 말씀데로 살아보자고 삶을 고백하는 모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과 함께 울며 위로하는 성도들을 보며 풍성한 생명이 더 깊이 느껴집니다. 아직 이런 말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 주님이 필요해라고 매일 고백해 보십시요. 지체들을 볼때에는 교회야 사랑해라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풍성한 생명은 목자와 양의 바른 관계 안으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도 아들 예수를 잘 알았습니다. 양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존웨슬리의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설교를 보면 완전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무지, 실수, 연약함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사람이 완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경험, 지식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매일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전세계 모든 사람이 호흡하기에 충분한 영입니다. 성령으로 부터 흐르는 생기는 계속적으로 불어옵니다. 주님안에서 우리는 그 호흡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드려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 우리 가정과 삶의 자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온전히 드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께 삶을 내어드리면 식었던 사랑도 회복이 되고, 형식과 틀에 매여 있던 마음에 알지 못했던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삶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기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복된 일임을 기억 하십시요. 아브라함도 모리야 산을 오르며 고민과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번제단 앞에 내려 놓을 때 비로소 풍성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십시요.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슬퍼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을 통해 잃어버린 양떼들이 선한 목자되시는 주의 문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한주도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시는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5/2023 | 기도 시리즈3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누가복음11:9-13

누가복음 11장은 기도의 장이라고도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에게 먼저 주기도문을 알려주신 후 기도의 핵심인간청을 설명하시기 위해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기도의간청은 무엇입니까? 떼를 쓰는 것일까요? 소원이 이뤄질 때까지 기도의 양을 채우는 것일까요?

성경에 보면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라는 것이지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기도를 드리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낙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더디 응답될 때 낙심되기도 하고 조급해 지기도 합니다. 물론 기도의 응답이 안될 때 낙심되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낙심되는 마음을 이겨내고 인내하도록 해줍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방인이었던 누가가 볼 때 기도하는 것이 익숙치 않았을 것입니다.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의 시선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이 기도의 가르침은 새롭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누가는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시며 하신 예수님의 비유를 기록했습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인데요.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 이 사람은 다른 친구집을 찾아가 떡 세덩이를 꾸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한밤중에 피곤하고 힘들었을텐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다른 친구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립니다.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이기적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절실한 필요를 안 친구는 그 밤에 찾아온 친구의 간청을 들어줍니다. 이것이 한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살아온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는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 직무를 수행하며 수천만명의 장애인을 대변한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의 삶에는 예수님의 기도의 간청이 담겨 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중학교 3학년 때, 축구를 하다 친구가 찬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8시간 만에 뇌출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납니다. 믿고 따랐던 누나마저 공장에서 일하던 중 과로로 숨져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맙니다. 모든 것이 절망스러워 보였던 그 시절 눈을 고쳐 달라고 기도 했을때 하나님은 ‘No’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그는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기 위해서 중학교 시절 점자를 배우기 시작했고, 끝임 없는 노력으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1972년에 장애가 유학의 결격조항으로 있던 시절에, 장애가 있는 사람이 미국 유학을 못 가는 불평등한 조항을 없애 달라는 청원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여, 당시 민관식 장관으로 부터 승인 받아 한국 장애인 최초로 유학생으로 도미 유학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각 장애인으로 유학을 가서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탄생하게 됩니다. UN 세계 장애위원회 부의장,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강영우 박사는 세상의 장애인들이 함께 어우러진 세상을 만드는데 밀알의 삶이 되었습니다.” 그가 유학을 왔을 때 LA공항 그를 맞아준 사람은 미국 양부모였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기여가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눈을 뜨지 못했더라면,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놓으신 사람들의 만남은 불가능 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그의 인생에 닫힌 문을 열어 주었고 많은 이들에게 희망의 도구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11:9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문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다.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문이 열릴 것이다

 

멕시코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여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친아버지에게 학대 받던 아이였는데, 하나님이 그 아이를 입양하라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선교사님이이제 너는 내 딸이야,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말해라고 했지만 아이는 어떤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도 울지 않고, 뭘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고 버림 받을까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아이가 선교사님에게 다가와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신발 끈이 하나 필요해요. 선교사님이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합니다. 아이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는데 감사하더랍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간청하지 않는것입니다구하고, 찾고, 두드려라를 원문으로 보면아이테이테’, ‘제테이테’, ‘크루에테라고 되어 있는데, 모두현재 명령형 동사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영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의미가 더 자세히 보여집니다.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기도는 지속적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녀들에게 숨겨진 하나님 나라를 밝히 드러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부터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줄기차게 다가 오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예언자적 상상력을 갖는 것은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이며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prophetes인데, 이는 예언자의 기본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다른 이를 위하여 말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중심 개념은 신적(神的) 교제를 나타냅니다. 기도란 단순히 듣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자기 일을 전부 하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을 뜻합니다. 온몸을 바쳐 기도 드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대부분의 삶을 마칠 때까지 자기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황폐해 있는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욕망의 벌판위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알수 없습니다.

기도가 단순히 내 소원을 구하는 간구가 되어내 뜻이 무조건 이뤄지이다라고 요구하는 도구쯤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해가 될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간청의 입을 닫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이 드린 기도의 간청을 드릴때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즉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고 야고보서를 결론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기도와 행동을 사용하시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시작과 끝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움직이신다면 인간의 행위는 의지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도의 소리도 듣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기도의 힘이 강력하게 영향력이 있고 일정부분 기도의 힘이 세상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기도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여호와께 바라는 일 한가지 일을 구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성전에서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기도의 바른 출발을 한 다윗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다윗을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 1절에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예수님의 족보를 보게 되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 다음으로 다윗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말씀하십니다. 3,000년 이상 되는 구약의 긴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 혈통에 관계되는 족보에 아브라함과 다윗이 언급됩니다. 구약의 역사속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사람을 제외하고 오직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길을 닦아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매일 옷장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것처럼 새로운 마음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어제의 기도가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기도를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일평생 고아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했던 죠지뮬러가 있습니다. 평생 고아들을 돕는 일을 위해 그가 드린 기도는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옵고였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1938 11 28. 오늘 아침 기도할 때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상황이 암담하였지만 주님께서 도와 주시려는 확신이 들었다. 평상시와 같이 형제들과 기도모임을 가졌다.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을때 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말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편지 한통이 눈에 띄었다. 그 편지는 기도중에 배달된 것이었다. 그 안에 고아들을 위해 쓰라고 10파운드가 들어 있었다

이 일기는 죠지물러의 기도의 응답의 일부분입니다. 죠지물러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해 주셨둣이 고아들을 돕는 일에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11 너희 가운데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생선을 주지 않고 뱀을 주겠느냐? 12 또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더라도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려고 한다.

 

어떤 부모가 자녀들에게 뱀과 전갈을 그 손에 들려 주겠습니까? 성경에 뱀과 전갈은 악한 세력이고 자녀를 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죄를 짓는 악의 씨가 있는 것을 아십니다. 그런 까닭에 악에 빠져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 내 손에 들린 것이 나를 해치는 것인지 내게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일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더듬더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 보면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 시대는 삶의 방향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향할 때입니다. 마음을 돌이켜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 고통으로 인해 기도를 잃어버린 성도들입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아버지가 집을 나간 아들을 얼마나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기다렸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아들이 용기 내어 아버지께 다시 돌아왔을때 아버지는 어떻게 맞아주십니까? 멀리서 부터 오는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겼습니다. 달려가 목을 안아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제일 좋은 옷으로 내어 다가 입혀 주셨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 주셨습니다. 발에는 신발을 신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아버지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기도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매일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요. 하루의 시간을 들여 진실한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천년의 사랑과 애정을 부어 주실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바다를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망가진 몸보다 크고, 말하는 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가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으로 나아갈때에 십자가 사랑을 확증해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보화를 찾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그것을 다시 숨겨두고 집에 돌아가 자기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입니다. 보화를 발견했으면 원래의 밭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윤리적인가? 도덕적인가, 근면한가에 관해서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간청함으로 역동적으로 누리는 나라임을 설명합니다.

 

소비주의 사회는 기도가 세상의 기준에서 필요한 걸 마땅히 조달해 주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애통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게 중요합니다. 삶의 문제를 만나서 비관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애통하며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시기에 우리는 애통해도 됩니다. 일어설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에게 기뻐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위선적인 신앙으로 갈 경향이 높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할 때에 인생의 상실감, 고통과 상처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은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 주십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간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눈을 뜨지 않는 이들에게는 스스로 눈을 감고 있으니 보이는 것은 사방이 어두움 뿐입니다. 시편의 기자는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 40:1-3

 

칼빈은 성령께서 인간의 정욕을 바라 잡아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정욕은 우리를 웅덩이와 수렁으로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게 하시며 우리의 정욕을 통제해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빚어 가십니다. 우리 안에 죄를 죽이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넘치게 하고, 육체의 열매에 반하는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게 함으로 죄를 이기게 해 주십니다.

 

이번 주간에 팔복에 대한 새벽 설교를 준비하며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 1926 –2015)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책을 읽다가 제 마음에 다가 온 간증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1820년 생후 6주밖에 되지 않은 한 여자 아이의 눈에 염증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뜨거운 찜질약을 바르는 바람에 각막이 타버렸고, 아기는 그만 영영 앞을 볼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자라 아홉살이 되었을때 그 아이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비록 볼수 없으나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요. 만족하며 살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수많은 복을 누리고 있어요. 눈이 멀어서 눈물을 흘릴수도 한숨을 쉴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이 소녀는 나중에 찬송가 615장 그 큰일을 행하신,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찬송가 275장 저 죽어 가는 자 다 구원하고를 비롯해 8천 편에 달하는 찬송가를 썼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 1820-1915)입니다. 9살된 소녀가 어린 나이에 받는 것 보다 주는 것이 더 기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령께서 그 소녀의 애통함을 복으로 바꿔주신 결과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고통이 복이 되는 위대한 교환이 이뤄지는 장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밝은 면만 있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도 있다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삶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부인하는 것은 스스로 진실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프지 않고 힘들지 않은 척하고 살게 되면 반드시 누려야 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누릴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진실하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 마지막 숨을 내시게 될 그 날을 향해 용기 내어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는 생명줄입니다. 기쁨보다 슬픔을 겪고 있는 이들을 찾아 가십시요. 어려운 시기를 걷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요.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주님의 길로 돌봄의 사람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환대의 문을 활짝 열고 쉴 수 있도록 안식처가 되는 기도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에게 문을 열고 접촉할때에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생길 것입니다한주도 사람들의 닫힌 마음에 기쁨을 실어 나르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29/2023 | 새해 메시지3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 God's Mysterious Plan Revealed to Us

에베소서 1:7-11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A.D. 62년경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에서 대 화재가 일어난 것이 A.D. 64년이니까요. 크리스천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2년 전에 쓴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모두 5절인데요.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말미암아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7절),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가지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8절), 셋째로, 그 비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9절), 넷째로, 그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10절), 다섯째로,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오래 전에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11절)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우리(we)’라는 말은 바울과 동시대를 살던 크리스천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히브리서 4장 말씀을 읽다가 놀라운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와, 이런 말씀이라니!”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Since those who first heard this good news failed to enter because they disobeyed God, God's rest is there for people to enter.......God's promise of entering his rest still stands, so we ought to tremble with fear that some of you might fail to experience it(구원의 소식을 처음 들었던 그 사람들은 불순종했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처에 들어가 안식을 누릴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그러므로 모두 조심하여 우리 중에서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4:6, 1)

처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말이 아닙니까? 만일 처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순종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더라면 오늘 우리에게 안식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오늘 읽은 에베소서 말씀에 적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울은 2,000년 전에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신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위해 그들을 도구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구원받은 사실에만 집중했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집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제가 2주 전에 소개했던 톰 라이트(N.T. Wright)의 말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하지 못한 덕분에 오늘 우리에게 그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 말이 어려울 수도 있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God’s mysterious plan)’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하여 흥미가 있으신 분들은 로마서 11:13-27 말씀을 읽어 보시면 저의 오늘 설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별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000년 전에 자기와 동시대 크리스천들에게 이 말을 했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 우리에게 이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는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기회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때에 살고 있습니다. 위기감을 느껴야 합니다. 시대적이 사명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합니다. 바울은 “At the right time he will bring everything together under the authority of Christ(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모이게 할 것입니다, 10절)”라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때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the right time’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대적인 사명’을 느끼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로마서 12:2 말씀을 보십시오.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은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라는 말입니다. ‘새 사람(a new person)’은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바꾼 사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꼭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새 사람’의 상대적인 말은 ‘옛 사람’입니다. ‘옛 사람’이 사는 방식은 ‘세상의 일(earthly things, NIV, 빌립보서 3:19NIV)’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는 ‘하늘의 일(heavenly things)’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옛 사람’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습니다. ‘땅의 일’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의 일’을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라는 유대의 랍비에게 하신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So don't be surprised when I say, `You must be born again.” (요한복음 3:7) ‘거듭나다(born again)’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 ‘γεννηθῆναι ἄνωθεν (gennēthēnai anōthe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γεννηθῆναι’이란 말은 ‘to be born(태어나다)’이라는 뜻이고, ‘ἄνωθεν’이란 말은 ‘again(다시)’ ‘from above(위로부터)’ 혹은 ‘from God’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라는 말은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ἄνωθεν’을 ‘다시’라는 뜻으로만 알았던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따라야 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사람이 됩니다. 더 이상 전과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18, 현대어 성경)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if anyone is in Christ)’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새 사람’은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뀐 사람입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이 말씀에서 ‘a human point of view(인간적인 관점)’라는 말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엔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고대 그리스어 ‘παράδειγμα(paradeigm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토마스 새뮤얼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이라는 과학자가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과학 혁명의 구조, 1962)’라는 책을 썼는데, 그가 그 책에서 처음으로 ‘paradigm shift’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책을 쓸 당시 쿤은 UC Berkeley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쿤은 그 전에 하버드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프린스톤에서 가르쳤고, 마지막으로 MIT에서 가르쳤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철학자 리차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는 ‘과학 혁명의 구조’에 대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장 많이 읽혔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영문 철학서라고 평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타임(TIME)’에서는 이 책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100권의 도서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그만큼 ‘과학 혁명의 구조’라는 책이 20세기 후반 지성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쿤은 탁월한 학문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버드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을 때, 당시 하버드대 총장이던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는 인문계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학부에 과학사(The History of Science) 과목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는 촉망받는 인재로 주목받고 있던 쿤에게 과학사 강의를 맡겼습니다. 그 때가 1948년, 그의 나이 26살 때였습니다. 이후 쿤은 1956년까지 8년 동안 하버드에서 조교수 자격으로 과학사를 강의합니다. 그 때의 강의 경험을 바탕으로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과학 혁명의 구조)’를 썼습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전환에 의해 혁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를 ‘과학혁명’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쿤 덕분에 ‘패러다임’ 혹은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패러다임’이라는 말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패러다임’은 사물을 보는 방식, 관점, 혹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해석과 판단의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는 이 관점과 틀이 바뀐 것입니다. 다시 이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병아리가 막 알을 깨고 나온 그림입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사방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병아리는 세상은 캄캄하고 답답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패러다임 쉬프트’입니다. 또 이 사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어항에 금붕어 네 마리가 살고 있습니다. 먹이가 생기면 서로 먹으려고 싸워야 하고, 좁은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금붕어 한 마리가 자기가 살고 있던 어항을 박차고 뛰어올랐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 있는 큰 어항에 들어가 살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서 뛰어오른 것입니다. 큰 어항에 무사히 뛰어들 수 있다면 이 금붕어는 자유로운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뛰어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따르는 위험을 무릅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더 이상 그 어떤 사람도 ‘세상적인 관점(a human point of view)’을 가지고 보지 않는다고했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관점의 변화,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통적인 용어로는 ‘회심(conversion)’입니다. 청년들에게는 ‘회심’이라는 말보다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이 훨씬 마음에 와 닿습니다. ‘패러다임 쉬프트’ 이후 바울의 삶이 어떠했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는 회심 후에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갈라디아 1:18). 그리고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했습니다(사도행전 9:30). 그 기간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외면당했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사도행전 9:23). 제자들에게 외면당했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외면당했습니다(사도행전 9:26). 금붕어가 죽을 각오를 하고 앞에 보이는 어항으로 뛰어오른 것처럼 ‘패러다임 쉬프트’를 원하는 사람은 이런 고통의 시간들을 무릅쓸 각오를 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패러다임 쉬프트’을 경험하지 못하고 예전에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여리고의 삭개오가 자기가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 절반도 누구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이 생각나면 네 배로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누가복음 19:8). 삭개오에게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의 돈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는 그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의 것을 나누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Matthew Fox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system is not working. That is how a paradigm shift begins: the established way of seeing the world no longer functions(기존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이 패러다임 쉬프트가 시작되는 방식이다. 곧 기존의 세상을 보는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 사람’에게는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자신과 화목하게 하고 또한 우리에게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대사입니다(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So we are Christ’s ambassadors).” (고린도후서 5:17, 20) 실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나와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이 말씀을 읽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시대적인 사명’을 느껴야 합니다.

“너희의 직분은 세상에 나가 화목의 메시지를 너희들의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이 ‘시대적인 사명’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까? 이 사명의 말씀을 외면하고 실천하지 않았던 사람들 덕분에 이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이 변화되어 ‘새 사람(a new person)’이 되어야 합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대사로 세상에 내보내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마이크를 입에 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큰 소리로 외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저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고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화해의 메시지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