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2022 |

하늘의 예배 The Heaven’s Worship

요한 계시록 5: 1-10

2022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하늘의 예배’입니다. 이땅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복된 일이 없습니다.

새해 첫시간를 맞이하며 예배를 향한 ‘창조적 갈망’이 더 깊어 지기를 바랍니다. 존 웨슬리는 1755년 언약예배(Wesley Covenant Service)를 시작하여 1778년에 이르러 모든 교우들과 함께 새해 첫주일과 새해를 맞이하는 밤에 지금처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갱신하기 위한 시간을 갖었습니다.

그 언약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저를 붙들어 매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저를 붙이소서. 저를 행하게 하시고, 저에게 고난을 주소서. 저를 주님께서 고용하소서. 주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높이시고 혹은 저를 낮추소서.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기도 하시며, 또한 제게서 모든 것을 가져 가기도 하소서. 제 모든 것을 주님의 기쁨을 위해 쓰시도록 기꺼이 그리고 마음 다해 드립니다. 오, 영광스럽고 복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저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도 확증하여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을 드리며 감리교도들의 믿음은 증진시키기 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언약을 두루마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1:5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지 말고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은 어느 시대속에서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고의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의 핵심은

‘세상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당시는 거대한 로마제국이라는 박해의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상태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이단의 거짓 가르침과 영적 타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로마의 법 앞에서 말씀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박해 상황속에서 복음은 아주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 되었습닌다. 그런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사도 요한의 눈에 보여주시는 것은 ‘하늘의 예배’였습니다.

5:1 나는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씌어 있었고, 일곱 개의 도장이 찍혀 봉해져 있었습니다.  2 힘 있는 한 천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가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겠는가?  3 그러나 하늘에도, 땅에도, 지하에도 그 두루마리를 펴서 읽을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4 나는 그 두루마리를 펴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울고 말았습니다.  5 그러자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분은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분께서 일곱 군데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상징인 보좌에 앉으시고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계시는데, 그 두루마리가 일곱 인(Seal)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그 안에 ‘완전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루마리 안팎으로 글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하늘에도 땅에도 지하에도 두루마리를 펴서 읽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도요한이 애통하며 울기 시작합니다.

예배자들은 현실적인 삶에 부딪히고, 시대마다 절망의 현실을 만날때에 최대한 울어야 합니다. 요한도 아무런 위로를 얻을수 없는것처럼 크게 울고 말았습니다. 요한의 마음에 로마의 핍박과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기다리던 성도들이 스쳐 지나갔을까요?

요한은 성도들이 실망할 모습에 깊이 낙담합니다. 주제할 수 없는 슬픔에 크게 울었습니다. 울음 가운데 그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울고 있을때 하늘의 장로 중 한사람이 ‘울지마시오’라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기에 그가 봉인된 일곱인을 풀어 계시할 것이니 ‘울지말라’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가 독자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때 그녀를 찾아가 ‘울지 말라’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문화속에서 과부였던 여인이 그녀의 독자까지 잃었으니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이 일로 많은 무리가 그녀를 위해 독자의 죽음의 행렬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비통함에 젖어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죽은 자의 행렬을 향해서 예수께서 다가옵니다. 주님은 죽음의 행렬을 마주하며 독자의 관에 손을 대시고 장례의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의 행렬에 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의 죽음의 행렬을 멈춘 분이 계십니다. 죽은 자를 향해 외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라 하십니다.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깨어났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케임브리지 교우 여러분 예배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다 들으시며, 생명의 행렬을 이뤄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자리 중요한 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배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다시 찾으십시요.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갈망해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행위는 아름다움과 연결되는데, 인간은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영적인 본능입니다. 예배의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영성이 깊어 질수록 하나님은 ‘하늘의 아름다움’을 밝히 보여줄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될때에 세상속에서 주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영적인 삶을 채워가실 것입니다.

토론토 큰빛교회를 섬기시며 20여년간 북한을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돕는 사역을 하셨던 임현수 목사님이 계십니다. 2015년 1월 평소와 같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는 최고존엄 모독죄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북한에 억류되셨다가 2년 7개월 9일 동안의 종신 노동역을 하며 독방 생활을 하다가 풀려났습니다. 수감된 첫날밤 두렵기도 하고 억울해서 잠이 오질 않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묵상하게 하시며 예수님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깨닫게 하시니 성령님께서 억울한 마음을 풀어 주시는데 ‘하늘의 평안함’이 임하더랍니다. 그리고 첫날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풀려지게 될 것을 보여 주시더랍니다. 끝이 없는 노동 종신형이 시작된 둘째날 아침에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지는데 디바인 스케쥴이라 말씀 하시더랍니다. ‘이제 네게 거룩한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마음을 주셨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2년 7개월 9일 동안 캐나다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요셉처럼 북한감옥으로 부터 구출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분의 일을 해나가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린 성도들 곁으로 돌아오신 목사님을 뵌 그날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생하신 흔적이 그분의 모습에서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단위에 서신 목사님의 모습을 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두려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 앞에서는 이길수 없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적 표현에 초점을 맞추면 아름다워 보여도 그 예배는 결국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 영적인 갈망을 추구해야 합니다. 보스턴에는 분야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초점을 두도록 깨워야 합니다. 군대에서 총기를 0점 조준하듯이, 창조성을 주시는 분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창조적 행위와 능력은 껍데기일뿐이며 철저하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의 능력과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움하면 우리는 외적인 아름다움, 보여지는 풍성함을 생각하는데, 내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데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에 맞춰 기도했습니다.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에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을 divine office라 불렀습니다. 거룩한 기도, 거룩한 일은 예수께서 오시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며 새해에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가장 좋은 시기를 누리길 원합니다.

찬송가 143장에 보면 ‘웬말인가 날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죄로 부터 스스로 구할 능력이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면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벌레와 다른 것 없음을 보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넌 벌레가 아니란다. 존귀한 나의 자녀야.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감리교 예배학자 돈 셀리어스는 그의 책 ‘거룩한 예배’에서 예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자기주심’이기에, 인간이 자기만을 드러내려는 정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져 진다고 지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어야 하고,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며, 거룩성을 채워가는 신적 예술이라고 표현합니다.

2.어린양 되시는 예수가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펴셨습니다.

5 그러자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분은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분께서 일곱 군데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실 것입니다.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릴때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특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유월절 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에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대문 기둥에 발랐더니 언약의 피로 인해 죽음의 천사가 유대인의 집을 지나치고, 그 흔적이 없는 이집트인들 집만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예배’의 광경을 왜 보게 하셨을까요? 하늘의 영광을 본 자라야 이땅의 수고와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경험하게 될 때 세상의 실패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늘의 예배’의 주인은 오직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도요한 당시에는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신격화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황제의 보좌는 통치, 권위,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위 마지막날 심판과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에 ‘죽임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이죠. 주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상에서 드려야 할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늘과 땅을 잇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리스도를 향한 관심이 시들어져 간다면 예배의 본질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예수를 하늘 높이 올리셔서 하늘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히셨습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환상을 보고 구원의 계시가 풀려진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로마 황제 도미티안을 ‘주’ 라고 부르라는 명령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고, 정한 날에 ‘사자’와 같은 권세와 권능으로 오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이땅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예수님과 일체된 사역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현실의 두려움을 이기고, 현실의 문제를 뛰어넘게 도와주십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과의 오랜 싸움으로 고통과 실의에 빠져 몸져 누워 있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의 방으로 들어 왔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누가 죽었소?”하고 묻자 카타리나는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라고 슬피 울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나무랐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돌아가시지 않소.” 그러자 카타리나는 이렇게 맞받아치며 말했습니다.“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당신의 오늘 이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같이 맥이 빠져 누워 있지 않습니까?” 이 말에 루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시를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한해의 마지막 예배에 우리가 버려야 할 마음은 무엇이며, 잃어버린 마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믿음의 대로, 은혜의 대로, 시온의 대로를 걷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어린양을 잠잠히 털 깍는 자 앞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지만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양은 더이상 종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의 권위를 이어받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어린 양’은 이제 힘없고 약한분이 아닙니다. ‘어린 양’ 되시는 예수의 피만이 모든 백성과 모든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기도와 찬양은 예배의 향기입니다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세상은 지금도 전쟁과 공포, 전염병, 분쟁과 다툼, 불의와 부정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성도들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을 마주하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이 아파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허락하실 새하늘과 새땅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으로 부터 억압당하고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해 하는 성도들에게 사도요한이 바라본 ‘하늘의 예배’는 용기와 위로였습니다. 어려움이 없던 시대는 인류 역사속에서 없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들과 핍박은 늘 존재했지요. 그러나 끈질긴 기도는 노년의 때에도 청년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 안에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하늘의 백성들은 예배의 영성이 흐트러지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주어진 예배를 통해서 예배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매일마다 구원의 말씀이 계시되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도 절망의 긴 터널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최후승리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깊은 구렁에서도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십니다. 영국 속담에 “사랑하면 천 개의 눈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 개의 눈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기도의 향기입니다. 기도는 잠자는 예배를 깨어나게 합니다. 금대접 위에 담긴 성도들의 기도의 향기 외엔 처해진 시대를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본질을 강화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찬송하게 하시려고 인간을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라는 그의 책에서 거룩한 공동체는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 두어야 한다. 성경을 다시 중심부로 이끌어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복은 설교를 준비하며 성경의 말씀을 매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날마다 저의 부족함을 비추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도 케임브리지 교회가 44년동안 걸어 온 것처럼 말씀과 기도, 새노래 위에서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2/25/2022 | 성탄예배 메시지2

완벽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The Perfect Drama of God's Salvation

누가복음 2:1-12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 이야기’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들의 이야기’를 가리켜 ‘The First Christmas Story(첫 번 크리스마스 이야기)’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되고, 믿을만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Antioch)’에 살던 그리스 사람으로 역사가로서 소양(素養)을 갖춘 사람이었고, 직업은 의사였다고 합니다. 누가가 살던 안디옥에 크리스천 디아스포라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크리스천들이 피신함으로써 생긴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안디옥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렸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이방인들에 대한 입장도 정해진 것이 없었고, 이방인 선교에 대한 준비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당황한 예루살렘 교회는 급히 ‘바나바(Barnabas)’라는 사람을 보내서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24). 이 말은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서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낸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계속 머물면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데려와 함께 일년 동안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덕분에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때 안디옥에 살던 누가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그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때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 때 이미 자기처럼 예수님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most excellent Theophilus)’라는 최고위직 그리스 관리에게 헌정(獻呈, dedication)하는 형식으로 예수님의 일대기(一代記, biography)를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자기가 모은 자료들을 ‘순서대로(in consecutive order, 누가복음 1:3)’ 배열하여 읽는 사람이 예수님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누가복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역사가 답게 누가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무렵의 세계 정세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 이야기는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아구스도 황제’는 세계사에 나오는 로마제국의 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입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의 양아들로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이기고 권력을 잡은 장악한 사람입니다. 황제가 되기 전 그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였습니다. 로마의 원로원에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The Exalted)’라는 이름을 줬다고 합니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습니다. 그가 통치했던 시대를 ‘Pax Romana(로마의 평화)’라고 합니다. 

‘아구스투스’ 황제는 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을 몇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인구조사를 하라는 칙령(Creed)을 내렸습니다. 그 때 ‘구레뇨(Quirinius)’라는 사람이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구레뇨가 호적 등록을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나 ‘구레뇨’는 모두 실존 인물들입니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B.C. 4년경의 역사적인 상황을 설명한 누가는, 이제 갈릴리의 나사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요셉,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누가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으므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지방에 있는 다윗의 마을로 갔습니다. 이 마을은 베들레헴이라고 불렸습니다(So Joseph also went up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Bethlehem the town of David).” (4절, NIV)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누가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went up)’고 기록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나사렛보다 지대가 높습니다. 고도 차이가 430m정도 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90마일(14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요단강 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예루살렘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5마일 정도 가야 합니다. 약 일주일은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출산 날이 임박한 마리아에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인구 수가 50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호적 등록일 마감 직전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여관에 빈 방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자야 했습니다. 바로 그 날 밤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를 누일 자리가 없어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그 밤에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한 밤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려워 마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0-12) 목자들은 ‘다윗의 마을(the city of David)’이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태어난 아이를 찾다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것이 천사가 말해 준 그대로인 것을 목격(目擊)한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버나드 앤더슨(Bernhard W. Anderson, 1916-2007)이라는 구약성서 학자가 있습니다. 구약학의 대가(大家)입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드류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보스턴 신학교에서도 가르쳤습니다. 대표작은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구약성서 이해)’라는 책입니다.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는 책입니다. 이분이 책을 많이 썼는데요. 주로 일반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공헌을 한 분입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펼쳐지는 성경의 드라마, 1956)’이라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구약과 신약을 한편의 드라마로 구성하여 독자들이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쉽게 이해하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요즘 K-팝, K-드라마가 인기입니다. 외국인들이 K-드라마에 열광합니다. 어떤 외국인들은 K-팝이나 K-드라마를 보다가 한국말을 익힐 정도입니다. 스탠퍼드대 대학에서 한국 문학과 영화, 대중문화를 가르치는 다프나 주르(Dafna Zur)라는 사람은 K-드라마의 인기 비결을 “예측성과 독창성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독창성이 가미된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영상미와 한국의 문화와 예절, 전통이 가미되고, 주인공들의 유모어와 한국식 반전(reversal)이 들어간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어떨까요? 이 하나님의 드라마가 얼마나 완벽한 지 한번 보시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구약성경 미가 5:2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 말씀을 확인해야 합니다. 미가(Micah)는 기원전 735-700년에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one whose origins are in the distant past).” (미가 5:2)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던 신실한 믿음을 가진 여자라는 것밖에 따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고대 경전을 연구하는 한 학자는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성전, 제사장, 부자가 모인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나사렛의 평범한 소작농의 딸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마리아는 어머니와 마을의 여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옷감을 짜며 음식을 하고, 땔감을 모으고,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긷고, 들판에서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을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 등록 마감 시간에 쫓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해산할 날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하필이면 그 때 칙령을 내렸을까요? 조금만 늦게 ‘칙령’을 내렸더라면 요셉은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에서 낳았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요셉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빈 방이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말구유에 누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일 요셉이 다윗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이 아니라 다른 마을로 가야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미가의 예언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게 미가의 예언과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말이 맞아 떨어집니다. 정말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700년 전에 있었던 미가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도 이루어졌습니다. 보세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이사야 7:14)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virgin(처녀)’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학자들 중에도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virgi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마(almah)’라는 말을 ‘젊은 여자(young wom-an)’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꾸준하게 ‘알마’라는 말을 ‘virgin’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도 ‘처녀’라는 뜻을 가진 ‘파세노스(παρθένος)’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의 예언 속에 나오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말은 ‘징조(sign)’입니다. 징조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 말도 안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였습니다. 미가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누가가 잘 기록했고,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잘 기록했습니다(마태복음 1:23). 

여러분, 미가가 예언했고, 이사야가 예언했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큰 그림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기원이 ‘in the distant past(아주 먼 과거)’ ‘from the days of eternity(영원의 날부터, NASB, ABPE, HCSB)’인 것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시고, 시리아 총독 ‘구레뇨’를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들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잠깐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確信)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700년 전에 있었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언이 이루어진 과정을 꼼꼼하게 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매우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책망을 받을 행동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처음 말씀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며, 또한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것이 진실이라고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So what makes us think we can escape if we ignore this great salvation that was first announced by the Lord Jesus himself and then deliver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speak).” (히브리서 2:3) 

셋째로,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사야 49:16) “나는 너를 이름으로도 안다. 너는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I know you by name, and I look favorably on you).” (출애굽기 33:12)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업어서 데리고 왔다.” (출애굽기 19:4)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We are God’s masterpiece).” (에베소서 2:10) ‘masterpiece’는 대가들이 그의 혼을 불어넣어 만든 명작들을 말합니다. ‘에밀레종’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新羅)의 경덕왕은 선대(先代) 왕을 기리는 ‘신종(神鐘)’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기술자들은 여러 번을 실패한 끝에 한 어머니가 시주한 아이를 쇳물에 녹여 마침내 천상(天上)의 소리를 내는 ‘신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우리를 ‘다시 창조하기 위해(에베소서 210)’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한 구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완벽한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탄탄한 스토리와 그 구성(plot)에 있어서 한치의 빈틈이 없습니다.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한복음 19:30)” 하고 외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두폭으로 ‘찢어지는(마태복음 27:51, 마가복음 15:38, 누가복음 23:45)’ 장면입니다. 우리 앞에 막혀 있던 ‘새로운 생명의 길(a new and life-giving way, 히브리서 10:20)’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12/18/2022 | 대강절 넷째 주일 메시지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요한복음 3:14-18

오늘은 사랑의 촛불을 켰습니다. ‘사랑의 촛불을 켠다’는 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행위(metaphorical action)’입니다. 깜깜한 곳에 촛불을 켜면 주변이 밝아지듯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1894)라는 영국의 시인이 ‘Love Came Down at Christmas(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부르고 있습니다.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
Love all lovely, Love divine; 모두가 사랑스러운 사랑, 신성한 사랑 
Love was bor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네
star and angels gave the sign. 별과 천사들이 그 표적을 보였네

Worship we the Godhead, 우리는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예배하네
Love incarnate, Love divine; 사람의 몸을 입은 사랑, 신성한 사랑
worship we our Jesus,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하네 
but wherewith for sacred sign? 하지만 무엇으로 성스러운 표적을 (예배할까?)

Love shall be our token, 사랑은 우리의 징표이며
Love shall be yours and love be mine, 사랑은 당신의 것이며 나의 것
Love to God and to all men, 사랑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 간청과 선물과 표적을 위한 사랑을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야는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곳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식물은 키가 작고 가시가 난 엉겅퀴 같은 것들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합니다. 인간이 가진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인간성의 바닥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오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었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否定)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신속하게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with thanksgiving)’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에 대한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그 때 내 삶의 주인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빌립보서 4:6 말씀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불뱀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물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모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모두 치유된 것입니다. ‘구리뱀’에서 무슨 치유의 능력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던 믿음이 이 사람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린다(lifted up)’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린다(lifted up on the Cross)’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Good News)’, 그리스 말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코스모스(κόσμος)’라는 말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고, ‘the whole of creation(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 세상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Live clean, innocent lives as children of God, shining like bright lights in a world full of crooked and perverse people(구부러지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들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빌립보서 2:15) 2,000년 전에 이 말씀을 쓴 바울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perverse people’은 단순히 ‘삐뚤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사람들(로마서 1:26-27)’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이런 사람들과 소통을 끊고 침묵하셨겠습니까? 누가 이 400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기간’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끝에 죄로 물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면 독생자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들을 미워하면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행전 10:15)”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속되다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사랑이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별처럼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라(로마서 12:2)”고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가끔 기도할 때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본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음 세대’ 걱정하기 전에 ‘지금 세대’인 여러분 자신들을 먼저 걱정하십시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은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pass on)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가상(假想)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universe)를 의미하는 ‘버스(verse)’의 합성어입니다. ‘확장 가상 세계’ 혹은 ‘가상 우주’라고 번역합니다. 현실 세계를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메타버스’가 우리의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 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도 있고,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피하지 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莫重)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난 ‘리뉴(ReNEW)’에 좋은 세미나가 많이 열렸습니다. 저는 김연준 목사님의 세미나에 들어갔습니다. 세미나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는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메시지의 선포가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제시한 것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었습니다. 새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스토리텔러들(storytellers)’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내가 복음의 능력으로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각자의 ‘스토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시대는 일방적인 교회의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쓴 ‘스토리(삶의 메시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concrete love)’입니다. 하나님은 ‘His only begotten Son (독생자, NASB)’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신적인 특권들(divine privileges)’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 혹은 ‘humiliation of Jesus(예수님의 굴욕)’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이야기 배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와 ‘창피’와 ‘굴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누가복음 2:7).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잠을 자게 된 마리아의 요셉은 그날 밤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요한은 “그분이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11)”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탄생 이야기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것을 보여 주는 ‘징조(sign)’였습니다. 이 ‘징조’를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그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요한복음 1:12)

Christina Georgina Rossetti의 시 구절 중에 ‘사랑은 우리가 가진 징표(Love shall be our token)’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의 ‘징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말에 ‘징표’라는 뜻이 있지만,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같은 것들을 ‘토큰’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우리는 주머니 속에 ‘토큰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Rossetti는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간청과 선물과 사인을 위한 사랑)’ 이렇게 그의 시를 마칩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을 나누어 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사랑의 선물을 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토큰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사인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2/11/2022 |

크리스마스의 빛 The Light of Christmas

히브리서1:1~7

 

 

 

1930년에 로버트 (RobertKing) 작곡한 곡으로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가 콜로라도 강을 비추는 달빛 아래 향수에 젖어 그리운 마음을 담은 노래말입니다.1937 박영호 선생이 번안해서 이미자 씨가 부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세상의 곳곳에 정착하며 이민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주간 성탄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베들레헴 말구유를 비친 그 빛이 세상 곳곳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분의 교회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브리서의 배경을 보면 저자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런데 2세기 동방 교부 오리겐은 저자에 대해서는 ‘하나님만 아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걷는 길을 아시고, 마음 깊은 곳까지  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밀실에도 주님의 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빛들이 꺼진다 해도 주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인공적인 불빛을 모두 제거하고 세상에 어둠이 내린다면 지상에서 가장 밝은 빛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빛은 하늘에 있을 것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빛으로 오셨습니다.

 

1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여러 차례, 여러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2 이 마지막 시대에 이르러서는,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나간 시대 구약의 역사를 보면 여러시기와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계시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모습을 담은 스케치만 그렸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구원의 그림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 마지막 시대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부터 재림 때까지 모든 날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살아가는 시간은 이미 시작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감춰져 있던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고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천년 같은 주의 시간으로 볼때에 그때는 속히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의 시간안에 우리의 고난도 속히 지나갈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으니 우리의 잠깐의 고난은 속히 지나가는 것입니다.

시대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이 빛이라 자처하며 살아갑니다. 빛을 받아야  존재임에도 이성으로만 빛을 찾을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계몽주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그리스도가 구원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머리와 지식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어둠만 짙어  뿐입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빛이 되려는 믿음은 결국 어둠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  구원의 빛을 과학으로도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과학을 숭배하는 것이니 과학도 완전한 빛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과학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1 독자들은 팔레스타인을 떠나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고 개종을 했는데 시대적으로 과격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위협을 당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유대교는 로마 정부가 허가된 종교였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64 폭군 네로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의 대박해가 시작되었으니 유대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강렬한 요구를 받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성도들은 유대교의 울타리 속으로 다시 들어가가만 하면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배교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 생활에서 ‘자기의 섬기는지 아닌지 구별도 안됩니다. 그러니 상처 받았다고 해서 ‘내뜻데로  된다 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 저버리면 안됩니다. 믿음은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심을 굳게 붙들고 최후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셋째주일입니다. 성탄예배로 드리며 그리스도로부터  빛이 우리의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깨트리고 우리의 지성을 파고 들어와 마음속에 크리스마스의 불꽃이 식어진 마음을 사랑으로 지펴지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전에 혼돈과 공허함, 분쟁속에서 살아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다고 ( 9:2) 말씀합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한 길을 떠난 동방의 박사들이 그리스도께 오던 때에도 세상에 폭력과 불의, 헤롯왕의 압제와 두살 미만의 유대인 아이의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시대도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젊은이들은 공허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희망의 주로 오신 분을 모르고 깊은 절망과 흑암속에 있지요.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나간 젊은이들은 삶의 의미를 찾아 나갔지만 한순간에 주검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은 공포, 두려움, 혼돈과 깊은 어둠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한 실제적 고백을 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새로운 길을 열고 나가게  이들의 고백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은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는 생명의 빛이라 말씀합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은 공허함과 깊은 절망뿐입니다.

 

찬양 중에 하늘 소망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영혼  하늘을 디디며 사네  주님 계신 눈물 없는   하늘에 숨겨둔  소망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아버지 너른   맞으시는

 하늘에 쌓아둔  소망있네 주님  나라에 이를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길에

 

제레미 워커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라는 그의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 생을 시작하지 않는다. 타고난 혈통이나 유산이 하나님 나라에서 당신의 자리를 확보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사도요한도 혈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지위를 보장할  없다고 말했습니다.(1:13) 하늘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이름을 믿음으로써 얻게 되는 한줄기 빛의 은총입니다.

 

2.     하나님의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게 하셨습니다.

 

3 그 아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고, 하나님의 본체 그대로의 모습이십니다. 또한 그 아들은 자신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만물을 굳게 붙들어 보존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 후에, 하늘에 오르셔서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하나님의 본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보여주는 분이십니다. 형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라크테르’는 ‘각인이라는 뜻인데, '같은 모양의 복제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그대로 반영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대로 드러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는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실로암 연못에서 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있도록  주셨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곳으로 끌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버지께서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시다”(10:38)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아람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아빠’입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아빠라는 호칭에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 계신데 바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10:30) 말씀하셨고, “나를  사람은  아버지를  것이다”(14: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분의 장례식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장례식 앞에서 손님으로  있지 마십시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로 살면 안됩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주의 말씀과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고 예수와 함께 걷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사람은 그분의 장례식장에서 서로 헐뜯고 분쟁하지 못합니다. 마음의 상처도 아픔도 주님이 죽으심으로 함께 못박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길에서 주님께서 이루신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벗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인격의 품이 넓어졌는가입니다. 몸된 교회를 위해 내가 구경꾼이 아니라 ‘부르심 받는 자로 헌신하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  없습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없는 것입니다.( 8:34)

 

 그러나 사단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도들을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로 부터 멀어지도록 위장해서 다가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은 계시지 않고 이성이 진리임을 믿게했고, 문명의 발달로 인해 과학과 의학은 창조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돈은 하나님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가운데 허덕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고 싶고, 자신의 것을 드러내고 싶어합니다. 문명은 발달은 편리하게 해줄 뿐이지 하나님의 창조를 대신할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의 결과는 죽음이고 파멸일 뿐입니다.

 

가룟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모습은 예수님의 제자였으나 그의 마음은 부패해 있었습니다.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것을 보고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옳다고 분을 내었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주인은 주님이 아니라 물질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 6절에 보면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그의 말은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훔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제자들도 메시아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위세를 높여줄 메시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게만 들릴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람이 되십시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해결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깊은 사랑으로 하나님과 하나됨을 이뤄가시기를 바랍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으니  이상 죄와 상관이 없으며, 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를 바랍니다.

 

3.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4 ○ 그리하여 그 아들은 모든 천사들보다 훨씬 뛰어난 분이 되셨으니, 곧 천사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빼어난 이름을 물려받았습니다.5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천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적이 없고, 또는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적도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이름 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구약성서에 하나님을 가르키는 명칭은 많습니다. 그리스어로는 Theos, 히브리어로는 (EL)입니다. 여기서 파생된 엘욘, 엘샤다이, 엘올람, 엘로힘  많은 이름이 파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고대 히브리 사람이 하나님에게 붙인 명칭들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이름을 밝힌 구절은 한구절도 없습니다. 그분은 존재 위에 존재이시고, 이름으로 규정할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이름이 없어야 맞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뿐입니다. 하나님을 이름으로 규정하면 이름 안에 가두는 존재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시에는 천사숭배사상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반응하는 일꾼일 뿐입니다. 천사는 성도들의 기도를 수종하는 영입니다. 갯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실때에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셨을때 (마태복음 26:38).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천사를 보내셔서 힘을 더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3). 천사들이 예수의 기도를 도왔습니다. 천사는 경배와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날  시대는 성탄절이 기독교의 기쁨의 축제가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축제이다 보니 기독교인의 성탄절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어려워진 시대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특별한 경배의 의미인 메리 크리스마스 보다 해피홀리데이인 세속명절로 여겨집니다. 성탄절은 예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기 위해 보내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열으신 문을 헤롯왕은 막을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탄생하시며 마지막 시대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사람에게는 열린 새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지만 만민의 깃발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영화  이야기인데요. 어느날  기자가 런닝머신에서 운동하다 사망한 사건을 보도하면서 다이어트에 집착하다가 비극적 사건을 초래한 여인의 사망이라 제목으로 기사를 쓰게 됩니다. 사람들은  기사를 보며 오늘날 사람들의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며 죽음을 당한 외모 집찹증에 중독된 여인들 비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사인은  여인은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가 아파서 장기를 이식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이죠.  여인은 장기기증을 하기 위해 자신의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런닝머신 위에서 목숨을 걸고 뛰게 됩니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자신의 장기를 주기 위해서 달리고  달리다가 결국 죽게  것이었음이 밝혀지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죄와 고통의 자리에 오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크리스마스 불꽃으로 삼으셨습니다. 어두운 실내에서 물건을 찾으려면 불부터 켜야 합니다. 세상에 참빛이  사람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이목을 끌기 위한 자극적인 기사와 사건들에 현혹되지 마십시요. 믿음은 허황된 것이 아니라 사실적 경험을 통해서 믿음이 더욱 견고해 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흠뻑 빠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의견을 지지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마시고 예수의 이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시기 바랍니다.

 

7 또 천사들을 두고는 성경에 기록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자기 천사들을 바람처럼 부리시고, 자기 일꾼들을 불꽃으로 삼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일꾼들을 불꽃으로 삼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을 드러내는 전시품일 뿐입니다. 보통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소멸 시킵니다. 그런데 떨기나무 가운데 임한 불꽃은 떨기나무를 태우지 않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불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모세의 인생 120 중에 성경은 떨기나무 앞에서 부르심을 받는 80 이후의 삶만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르시기 위해 80 세월을 보내게 하십니다. 자기를 죽여야 하는 세월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기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성도들도 자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경찰이 외부인이 집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고 출동해서는 집에 있는 보석에 눈이 멀고, 귀중품에 눈이 멀어 탐욕으로 자신의 것을 채우고 있다면 부르심을 잃어버린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흰색 촛불이 켜지는 날을 맞이하게  것입니다. 망망대해 같은 세상을 살아가며 전쟁과 경제의 불안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많이 불안하고 공허해 합니다. 성탄의 주인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에게 소망, 평화, 기쁨, 사랑, 그리고 세상을 밝히는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빛은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라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빛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촛불에 세번째 불이 켜졌습니다. 성탄의 빛이 화해와 사랑, 회복과 나눔의 빛이 될수있도록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빛의 삶을 잘 살아내시기를 바랍니다.


12/4/2022 | 대강절 메시지

길을 내는 삶 A Life Preparing The Way For The Lord

마가복음 1:1-8

오늘 대강절 둘째 주일에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400년 동안 침묵을 지키시던 하나님께서 이 역사 속에 희망의 촛불을 켜 주시고, 평화의 촛불을 켜 주심으로 자기 백성들과 소통(疏通)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밤, 하늘에서 들려온 천사들의 음성을 기억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누가복음 2: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쁨을 받으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또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는 이 말씀이 “Praise God in heaven! Peace on earth to everyone who pleases God(하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땅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무렵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때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25) 또 같은 시기에 살았던 안나(Anna)와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누가복음 2:36-37).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those who were looking for the redemption of Jerusalem, 누가복음 2:38)’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주신다는 말씀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하나님의 복음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good news for all the people, 누가복음 2:10)’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라오스(λαος)’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신 말씀에 나오는 ‘민족(ἔθνη)’과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같은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언어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옵니다. 이 의는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We are made right with God by placing our faith in Jesus Christ. And this is true for everyone who believes, no matter who we are).” (로마서 3:22) 복음은 그가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조슈아 리브만(Joshua L. Liebman, 1907-1948)이라는 유대인 랍비가 쓴 ‘Peace of Mind(마음의 평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청년이 어느 날 한 현자(賢者)를 만났습니다. 그 현자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청년은 “첫째는 건강, 둘째는 사랑, 셋째는 재물, 넷째는 아름다움, 다섯째는 재능, 여섯째는 권력, 일곱째는 명예라고 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나열했습니다. 그 청년이 나열한 목록을 본 현자는 “아주 훌륭한 목록이구만! 중요한 것부터 잘 나열을 했어! 하지만 자네는 아주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라고 하면서 그 청년이 만든 목록을 펜으로 벅 긁어버리고 거기다 ‘마음의 평화(peace of mind)’라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This is the gift that God reserves for his special protégés, talent and health he gives to many. Wealth is commonplace, fame not rare. But peace of mind he bestows charily(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재능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네. 재물을 주신 사람들도 많이 있고, 명예를 주신 사람들도 적지 않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자비하심으로 마음의 평안을 주신다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청년이 조수아 리브만이었습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가지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듯이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의 내면 세계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마음의 평화’가 없으면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조수아 리브만은 그 책에서 이런 유대인들의 기도 하나를 소개합니다. “O God, Lord of the universe, heap worldly gifts at the feet of foolish people. Give me the gift of the untroubled mind(온 우주의 주님이신 하나님, 세상적인 선물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발 아래 쌓아 주시고, 저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평화’를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구약성경 이사야 9:6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는 기원전 8세기경 유다 왕국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계산하면 2,8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그의 예언 속에 메시아 탄생에 대한 말씀과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시대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특히 주목을 받는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가 ‘한 아기(a child)’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에게 다섯개의 이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름 중에 ‘평화의 왕(Prince of Peace)’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사르 샬롬(Shar Shalom)’입니다. 그 뜻은 ‘the one who removes all peace-disturbing factors and secures the peace(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원인들을 제거하고 평화를 지켜주는 분)’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의 탄생이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오래 전에 한 예언자가 가지고 있던 꿈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가사를 보세요. “(1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2절)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여러분,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하나의 주제(theme)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과 신약은 두 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일정한 패턴으로 주어집니다. 오래 전에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사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했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선포한 예언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땅을 사고 매매증서를 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하라고 했습니다. 그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땅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레미야는 비록 지금은 조국이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다시 돌아와 무너진 조국을 일으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의 역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사르 샬롬’ ‘평화의 왕’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해 주시고,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분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말의 표현이 참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 ‘밖에서’는 하나님의 ‘샬롬’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샬롬’은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네가 오늘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하지만 너무 늦었다. 평화의 길이 네 눈에 보이지 않는구나 (How I wish today that you of all people would understand the way to peace. But now it is too late, and peace is hidden from your eyes)” (누가복음 19:42)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안타깝게 말씀하신 ‘평화의 길(the way to peace)’은 ‘사르 샬롬’이신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의 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남긴다. 곧 나의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복음 14:27)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계속 하나님의 ‘샬롬’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데, 뜻밖의 성경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안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빕니다.” (에베소서 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와 평안을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안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강절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이 ‘사순절에 드리는 기도’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기도하며 금식하며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그리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시간입니다(It is a time to be with you, Lord,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and thus to follow you on your way to Jerusalem).” 나우웬은 사순절이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을 따르는 시간이라고 했습니다. 대강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을 반성하면서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대강절에 생각해야 하는 ‘특별한 방식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은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 뒤에 나보다 훨씬 강한 분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십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샬롬’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기는커녕 하루 하루 살기에 급급합니다. 웬 일인지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했던 말 그대로입니다. “For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2:21) 우리가 때때로 교회에서 필요한 일에 봉사하고 헌신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좀 생소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것이 지속적인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Martin Luther King, Jr.(1929-1968) 목사님을 잘 아시지요? 그는 조지아 아틀란타에서 태어나서 1968년, 39살의 젊은 나이에 테네시 멤피스의 한 호텔 발코니에서 제시 잭슨(Jesse L. Jackson)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저격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보스턴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침례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로서 그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1955년 3월에 평범했던 그의 삶을 바꾸어 놓은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알라바마의 몽고메리에서 15살 된 클로뎃 코빈(Claudette Colvin)이라는 당시 임신 중이었던 흑인 여학생이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위원회가 고민하는 동안에 몽고메리에서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로자 팍스(Rosa Parks)라는 42살 된 흑인 여자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그 유명한 Montgomery Bus Boycott 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African-American Community의 문제를 다루는 한 작은 위원회의 멤버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클로뎃 코빈의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몽고메리 버스 보이코트 운동을 이끄는 주요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간디(Mahatma Gandhi)에게서 배운 비폭력 저항 운동을 그의 투쟁 방식으로 채택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줄 곳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던 성경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사야 40:4-5 말씀이었습니다. “골짜기들을 메우고, 산과 언덕들을 낮춰라. 굽은 길들을 곧게 펴고, 험한 땅들을 평야로 만들라.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고 모든 사람이 함께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Fill in the valleys, and level the mountains and hills. Straighten the curves, and smooth out the rough places. Then the glory of the Lord will be revealed, and all people will see it together).”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예수님을 위해 ‘특별한 방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삶’이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렇게 ‘길을 내는 삶’을 살았기에 흑인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지속적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삶을 생각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위해 ‘길을 내는’ 특별한 방식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하나님은 때가 되어 그를 부르셨고,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사르 샬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God blesses those who work for peace, for they will be called the children of God).” (마태복음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