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0/23/2022 |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 The perfect law that sets you free
야고보서 1:22-27
C.S 루이스(1898-1963)가 쓴 ‘헤아려 본 슬픔’ 은 그가 59세에 결혼하고 4년 뒤에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후 마주한 슬픔을 글로 풀어낸 책입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나서 개인의 실제적인 고통을 마주하는 순간 이성적인 신앙은 가벼운 이론적인 혼란이 아니라 완전히 산산 조각이 나는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무게는 헤아릴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절망과 고통의 시간에 슬픈 마음의 틈 사이로 영원한 세계의 빛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구원의 의미를 더 자세히 깨닫게 됩니다. 고통을 참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은 고통 속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새로운 존재로 빚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신비’를 추구하는 일입니다. 그 ‘신비‘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며, 이전에는 본질상 죄로 가득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떨어져 살다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통한 실천적 변화의 첫 단계는 언어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세대 마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MZ세대들은 줄임말을 사용합니다. ‘꾸안꾸’가 무슨말인지 아시나요? ‘꾸민듯 안 꾸민듯’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꾸꾸꾸’는 어떤 뜻일까요? ‘꾸며도 꾸질 꾸질’이랍니다. 한 단어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알잘딱깔센’는.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임말입니다. 이것 말고도 Z세대들이 쓰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감정을 전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여 이 시대 앞에 서 있을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신앙적 언어로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을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전공을 언어를 통해서 엿볼수 있게 됩니다. 공대생들과 대화할때 느껴지는 공학적 대화들이 있구요, 음대생들과 대화할때 느껴지는 예술적 감성적 언어의 표현이 있습니다. 언어는 그의 마음과 살아온 배경을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프랑스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쟈크엘를(1912-1994)은 ‘뒤틀려진 기독교’란 책에서 실천이 빠진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것이 믿음생활인데, 우리에게 말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가 없다면 믿음의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예수의 동생 야고보에 의해 쓰여졌다고 추정합니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가 지상에 계실 때 그의 말을 들었어도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5절에 보면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야고보가 예수라는 형과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냈겠습니까? 그러나 야고보에게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고 난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게 되니까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고 나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야 1:1)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자랑하지 않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 더 영광됨을 알게 된것이지요. 이것이 믿음의 변화이고, 입술의 변화입니다.
야고보서는 부활하신 주님이 20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쓰여졌습니다. 당시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로 인해 유대 기독교인들은 흩어져 있었지요. 야고보는 당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가 주는 매력에 빠져 믿음의 실천이 상실되고 재물의 축적에만 관심을 쏟고 살아가는 자들이 많이 있었기에 살아있는 믿음은 삶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상할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10년에 비해 더 빠른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남들보다 더 빠르게 사는 것은 물질과도 연결됩니다.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인생을 무한 질주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뚫고 오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22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행하십시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앉아서 듣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는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 있어서 묵상이 중요합니다. 묵상의 원어적 의미는 ‘곱씹는 것’인데, 묵상을 통해 일상을 살아내고,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 갈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설교의 홍수 시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지요. 그러나 홍수가 나면 물은 넘쳐나지만 정작 마실물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말씀의 지식은 풍부해지나 깊은 성찰이 없으면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많이 듣고 공부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성경적 지식은 많아졌습니다. 듣는 귀도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의 지식을 높이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이 내 삶으로 들어와 변화되는 삶을 만나야 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지식은 아무리 쌓아도 내 마음에 온전한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끊임없이 교만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게 됩니다. 말씀이 들어올 자리가 없도록 말이지요.
예수님은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을 합니다. 너희의 마음이 썩고 부패해서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남의 얼굴은 잘보는데 자신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에 빠져 말씀이신 주님을 알아 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 7:3-5)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리새”라는 말의 히브리어 어근은 “파르쉬”인데, “갈린 사람, 분리주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마음에 있는 죄를 먼저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이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묵상이 없으면 겉 사람과 속 사람이 멀어지는 이중생활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죄의 본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나의 마음을 지켜낼 실력을 믿는것이 아니라 부족함을 주께 올려드리고 주님의 마음을 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만을 절대 의존하는 존재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23 하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그는 자기 얼굴을 들여다 보고도, 일어나면 금방 자신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잊어 버립니다.
성찰이 없는 세상은 무질서로 인해서 많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자기를 속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내면에 두려움과 불안의 감정은 더 깊어 질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심도 커지지만 불안감도 더 커져만 갈 것입니다. 더 큰 기대감이 주어질수록 더 큰 불안감이 찾아오는 것이죠. 사람들의 기대심리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인간의 연약함 아닙니까? 말씀의 거울 앞에 날마다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실수하게 되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쉬운데 자신을 고치고 일은 어렵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힐끗 비추기만 한다면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오류에 빠져 비난과 비판에는 능숙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비난에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이 고립되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25 그러나 사람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살피는 사람은 들은 것을 잊어 버리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은 첫째가, 하나님의 완전한 법을 잘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예수의 복음’입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1세기 유대 기독교인들이었기에 그들에게 익숙한 단어로 복음을 소개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흩어져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잊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환란과 핍박을 인간의 노력으로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실천도 하나님의 구원에 의하여 감동을 주셔야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은 철저하게 죄악뿐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법’은 철저하게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을 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동행하고 인도해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완전한 법이신 그리스도만이 옛사람의 껍질을 벗고 속사람이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해 보일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 열심입니다. 선행과 공로로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은 없앨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말씀이신 주님께서 그 율법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26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길> 스스로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경건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개역개정으로 보면 1장 26절 “누구든지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재갈을 물린 말을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야생말들을 길들이게 되면 주인이 당기는 줄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아무리 빠르게 달리는 말이라 해도 재갈을 물린 말은 양손으로 줄을 당기면 멈추게 되고, 주인이 당기는 방향으로 뛰게 됩니다. 사진을 한번 보시지요. 말의 입에 2개의 금속막대를 연결해서 입속에 물리고 말을 컨트롤 하게 됩니다. 기수는 이렇게 잘 길들여진 말들과 교감을 이루며 말을 타게 되는 것입니다.
몇해전 어느 선교사님이 자신의 책을 선물해주시면서 메세지 한줄을 써주셨는데, 그 글귀가 제 마음에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기쁨으로 안고 가는 부담’이라는 글귀입니다.
참 어렵지요 기쁨은 가능한데 부담이라는 단어가 주는 묵직함이 있었습니다. 보통 슬픔이라는 감정 뒤에 부담이라고 표현되어지는데, 기쁨과 부담이 어떻게 함께 갈수 있을까? 이 한줄이 저는 경건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기쁨으로 안고 가는 부담’ 그 부담은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내가 지켜야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는것은 주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람들의 삶의 무게, 외로움의 무게 아픔의 무게를 생각하며 기쁨을 나눠야 합니다.
이제 현대 기독교는 금욕주의의 위험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영향으로 구원을 위해 몸부림쳤지요. 웨슬리는 규칙주의자였습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엄격하게 규율을 지키며 열심을 다해 고행을 했지요. 이러한 모든 것은 종교적 열심인데,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수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세속주의, 편리주의, 물질 만능주의로 인해 교회 안에도 편리주의 복음, 번영복음, 세속화 복음이 넘쳐납니다. 이러한 때에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경건의 원천이 누구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맺는 열매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7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경건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을 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안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돌보고 외면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의 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믿음은 이 시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온유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으로 부터 떨어진 고아된 미성숙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릴 위해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시고 자녀 삼아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마음으로 깨어진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여져야 합니다.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삶 안에 들어오면 이전에 느낄수 없었던 설레임과 기쁨이 나를 가득 채우는것입니다. 어떤 일을 만났을때 머리로 해석하는 것은 정말 쉽습니다. 분석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삶은 때론 이론적으로 뚜렷하게 설명되지 않더라도 그 사랑 안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로마 제국의 가혹한 핍박으로 인하여 이미 참된 사랑과 교제를 상실한 유대인 성도들에게, 환난 가운데서도 인내할 것을 권면하고 믿음을 실천하라고 교훈합니다. 개혁이 아니라 로마 사회의 폭력적 대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랑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당시 어리석어 보였지만 이 사람들에 의해서 300년이 지난후 로마 제국이 기독교 복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지금도 복음을 듣고 삶의 변화된 자리에서 살아내는 삶은 작고 초라해 보일수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느리고 답답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이 비록 작아 보이고 없어지는 것 같았지만 로마 제국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은 중독성이 강합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에 중독이 되면 믿음이 파산하고 구원으로 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며, 잃어버린 예배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미래 사회는 보여지는 것들 가운데 자신을 속이는 일들이 더 빈번해 질것입니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구분도 어려워 질터이고,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을 구별하는 일도 더 어려워 질 것입니다. 이런 때 일수록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이 눈이 열리는 복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깨달아지는 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의 자아 그리고 나의 마음속 깊이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통제하지 못하는 생각과 마음은 언제든 위험이 따릅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인생의 주인으로 주님을 받아들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 쓰러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면 넘어져도 일어날 힘 회복할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한구절이라도 나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한주도 그 말씀 붙들고 살아 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전과 나의 일상에 큰 변화는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말씀의 나의 삶에 찾아 올 때에 분명 나의 마음이 이전과 다를것입니다. 삶의 실천과 함께 갈때 느끼는 그 온전한 기쁨이 우리의 삶속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10/16/2022 |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GOD Makes the seed grow
고린도전서 3:1~13
예일대학교 기독교 역사학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1923~2006) 교수는 세계 역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 나라의 안정과 행복이 달려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는 ‘역사, 예수와 만나다’라는 책에서 예수라는 인물이 역사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시대마다 예수가 어떻게 조명되었는지를 역사적 식견을 가지고 고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강한 빛과 예수의 음성을 듣고 이방인을 향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이방인을 향한 ‘환대의 복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바울을 사용하여 복음이 유대교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으로 뻗어 나가도록 하셨지요.
2천년 교회사를 보아도 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을 통해서 교회가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스스로 고난을 겪으며 교회를 지켜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론의 핵심은 ‘고난’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 중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세상속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서는 우리를 평화의 도구로 삼아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 시키려다가 우리가 먼저 세속화되고 변질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핍박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후 교회는 가슴 아픈 분열의 역사를 담고 있지요.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분열을 거듭합니다. 397년 카르타고 공의회 분열,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 분열, 451년 칼케돈 공의회 분열, 11세기 필로오케 논쟁으로 인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인한 분열, 그 이후에도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분열이 되었습니다. 이면에는 여러 논쟁과 개혁, 다름과 불신으로 인한 갈라짐인데 그 역사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흘림이 있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교회론은 Ecclesiology라고 하는데, 이는 Ecclesia 와 Logos 의 합성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Ecclesia는 "시민들의 모임 혹은 총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사귐을 얻고, 로고스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을 에클레시아로 불렀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교회론의 핵심은 유대교의 ‘예식’과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는 부활후 승천하시기 전에 유대교에서 벗어나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의 오심은 모든 민족이 한소망을 바라보며, 그들의 다름이 분열의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헬라어로 민족을 의미하는 단어는 ‘에토스’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구성하는 세가지 요소에 있어서 첫째는 좋은 성품이요, 둘째는 실천적 지혜이며, 셋째는 사심없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열과 불신이 넘쳐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수많은 거짓 뉴스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서로를 두려움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거룩한 에토스’를 형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격과 영성과 성품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 뭐든지 자기 좋을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분열의 담장을 높이 쌓아 올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분리의 담은 절대로 허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담을 허무는 사람은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낮은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수레바퀴 안에 자신을 몸을 던졌습니다. 예수의 몸이 찢기며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이 되어 주셨습니다. 욕망으로 돌아가던 역사의 수레바퀴의 방향을 거꾸로 돌리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기독의 신앙의 신비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로마시대 4대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상업도시로 성장하며 각종 문화가 혼재해 있었고, 물질 문명이 발달했으며, 세속 문화가 도시의 발전과 함께 왕성해져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신들을 숭배하며 성도덕이 문란했고, 지식층들은 철학적 종교들을 신봉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도시 슬로건(Slogan)이 “하나의 도시, 하나의 시민” (Cosmopolitan) 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추구하는 “하나의 공동체”와는 목적이 다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oneness) 안에서 모든 민족을 ‘받아들임’(openness) 으로 세상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각종 우상숭배를 다 받아들이는 혼합주의와 우상숭배와는 그 결이 다릅니다.
본문 1절로 3절에서 바울은 ‘성령에 속한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을 대조하며 말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시기와 다툼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성령에 속해서 자기를 낮추고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결혼한 두 사람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마 19:6) 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가정 뿐 아니라 교회인 공동체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Augustinus,354~430)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알기에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 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른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는 곳마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 사랑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속에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사랑이 심기면 구원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육으로 사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예수께서 길을 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속한 사람은 새로운 자아가 자라나고 속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혈기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녹이고 은혜가 넘치도록 하는 것이지요.
바울이 고린도 지역의 타락을 보고 절망하고 떠났다면, 어떤 역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중에 이 지역에 머물다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바울이 교회를 개척하고 난 후에 고린도 교회에는 아볼로라는 사람이 교회를 맡아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울은 개척한 목사이고, 아볼로는 2대 후임목사입니다. 목회자들도 어떤 분은 심방의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찬양의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행정의 은사가 있고, 어떤 분은 제자훈련을 잘하는 분도 계십니다. 한사람이 다 잘 할 수는 없지요. 문제는 고린도 교회가 이로 인해 여러 파가 생기고 분열이 생겼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4 어떤 사람이 “나는 바울파다”라고 말하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13에 보면 “도대체 그리스도가 나뉘었습니까?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여러분 누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셨지요? 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끼?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편지하는 것입니다..
5 도대체 아볼로가 무엇이고 바울이 무엇입니까? 나나 아볼로나 여러분을 믿도록 하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6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 부름 받은 목회자는 받은 은사대로 충성하며 섬기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들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사들이 다 다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목회자는 오직 심고 물을 주기 위한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만이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일 뿐이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목회자도 임원도 직분자도 교사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꾼들일 뿐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낮아짐의 자리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 8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의 목적 때문에 일을 합니다. 각 사람은 자기가 한 수고만큼 보수를 받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위대한 일인 구원은 오직 주께만 있습니다. 구원만큼 더 크고 위대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는 쓰임 받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와 보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면 되는 것이지요. 찬양과 존귀와 영광은 하나님만 받으시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는 신실한 예배자가 되어진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상은 현재 나와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보다 더 큰 보상이 있겠습니까? 실제적 삶의 능력을 통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현실에서 보게 되는 것만큼 큰상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내 인생이 받아드려지는 것은 인생의 큰 기쁨이고 축제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서 누리는 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날을 어떻게 소망하며 살아간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10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대로 유능한 건축가처럼 기초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위에 건물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 사람은 이 기초 위에 어떻게 건물을 세워야 할지 주의해야 합니다.11 아무도 이미 놓여 있는 기초 외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한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건물의 기초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년수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 얻으면 다 얻은 것이고 모든 것을 다 얻어도 예수 잃어 버리면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예수가 없는 곳이라면 내가 서있는 어디라도 선교지임을 기억하십시요.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안에서 각 지체들에게 주신 은사를 인정하며 함께 예수의 몸을 이루며 성숙한 신앙을 향해 걸어갑시다. 교회의 기초가 되시는 주의 이름만을 높이며 그 안에 거하시기를 훈련합시다..
여기에 모인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주목한다면 하나됨은 가능하지 않을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됨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의 교회와 지체들을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길때에 내 마음에 진실한 눈물도 주시고 뜨거운 마음도 주셔서 세상의 기쁨보다 주안에서 함께하는 기쁨을 느끼게 되는것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민족들이 여호와의 전에 모여들 그 날이 장차 있을 것을 바라봅니다(사 2:2).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사 56:7)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 이니라”(사 60:1) 외칠 때, 이어지는 비전은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는 것에 대한 한 장 전체의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반석이며 요새가 되시는 구원자가 누구입니까? 교회의 방패가 되시고 힘과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주님께서는 슬픔 중에 부르게 될 노래가 되시고, 우리가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고 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12 어떤 사람이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또는 나무나 풀이나 짚 등을 이용하여 건물을 세울 것인데 13 각 사람이 일한 성과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에 일한 것이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한 일을 검증할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교회에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 좋겠습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은 고난의 불이 임하면 금방 무너지고 타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어떤 시험과 환란 가운데서도 버티고 지켜낼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모여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내 힘으로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런것입니다 . 나의 마음을 지켜낼 실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내기 위해 진실하게 살아내야합니다.
사람이 계획을 세워도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교회의 역사를 써가는 일에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케임브리지 교회에 오직 주인이신 주님만이 존귀와 영광 받으시고, 우리는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어려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교회, 무너진 그 자리에 그저 묵묵히 함께 걸어감으로 힘이 되어줄수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합니다. 세속의 물결이 틈타지 못하는 교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의 지체들을 찾아가 안부할수있는 교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지만 묵묵히 걷는 그 길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신자들을 위한 메세지 the way only way 를 소개합니다.
인생은 세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때 갈등하고 방황하고 고민하는것 같습니다
첫째는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길을 가고 싶었는데 막상 가 보니까 그길이 아니었거나 또는 그 길에서 계속 방향을 찾지 못하고 맴맴 돌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이 아닌길을 가려하고 길이 없는 길을 뚫어보려고 애쓰는것입니다.
두번째는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거짓이었고 사랑인줄 알았는데 배신이었고 진실인 줄 알았는데 허위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가짜를 붙들고 진짜처럼 목말라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잃어버린 생명입니다. 모양은 있는데 생명은 없고 형태는 있는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죽은 나무 붙들고 꽃이 피기를 바라는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날때 잃어버린 길에서 등대를 발견하는 것이고
거짓과 허위속에서 맴돌고 살았떤 자기 자신에게서 진실한 진리와 빛을 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도저희 희망도 없고 도저히 갈 길도 없었던 죽음 앞에서 생명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없는 거짓말과 위선속에 살다가 진실한 사람 하나를 만나면 눈물이 나는것이지요. 우리는 수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억압 되어 있습니다. 소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눔이 중요합니다
그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새가 알을 까고 나오듯이 우리의 영혼은 모든 죄와 허물과 죽음의 세계를 깨고 생명으로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꽁꽁 얼어 붙었던 대지에 꽃이 피듯이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돗듯이 당신의 인생에 꽃이 피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마음에 모셔보십시오. 그분의 이름을 불러보십시오. 당신의 영혼은 그 순간 변하게 될것입니다.
우리의 교회와 공동체가 이 고백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더 깊은 교제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10/9/2022 | 창립 44주년 기념예배 메시지/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5
팬데믹 이후의 우리 교회 Our Church for the Post-Pandemic Era
에베소서 3:7-1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4주년 되는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버드 스퀘어 근처 11 Garden Street에 있었던, 아주 오래 전 일입니다. 새벽 기도를 드리기 위해 교회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교회 들어가는 입구의 있는 철책을 정성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한눈에 한국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누구시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김장호라는 사람인데, 이곳에 있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를 세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2003년 6월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해 10월이 되어 창립 25주년 기념 예배를 준비하면서 그 분께 이번 창립기념주일에 초대하고 싶다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분은 감사하지만 참석은 못할 것 같다고 하면서 대신 교인들에게 인사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25년 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 케임브리지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 쓰신 여러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70년 전에 미국교회는 선교사를 한국으로 파송하였고 그 선교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미국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미국 사회에 선포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미국에 온 한인 학생, 직업인, 관리, 그리고 지역사회의 한인교포를 섬기며 서로 의지하고 돕고 살아가는 선교적인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5-6명의 신자가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중에 최기일 교수, 하버드 대학 학생이었던 김용옥(도올) 박사, 강희천 박사(전 연세대학교 신학 대학장) 등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의 케임브리지한인교회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진리를 좇는데 게으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따른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며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2003년 10월 13일, 그리스도의 종, 김요나단 (장호)
“교회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생각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주십시오(Greet also the church that meets at Priscilla and Aquila’s house).” (로마서 16:5, NIV) ‘그들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the church that meets at their house)’라고 했잖아요? 이 말씀을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τὴν κατ’ οἶκον αὐτῶν ἐκκλησίαν’ 그들의 집(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이 예배하는 장소였고, ‘그 집에서 모이는 사람들’이 교회였음이 확실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말은 ‘to call out, summon(불러내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교회입니다. 요즘에 자주 말하는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You are the Messiah, the Son of the living God).” (마태복음 16:16)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곧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름을 부으신 분(the anointed one)입니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장소는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라는 곳이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약 50km 떨어져 있습니다. 여기에 분봉왕 빌립이 그 지역의 통치권을 준 로마 황제를 찬양하기 위해 세운 신전이 있었거든요? 여기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다(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마태복음 16: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바위(rock)’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교회는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셋째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에베소서 1:23). 이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몸은 ‘유기체(organism)’입니다. 몸의 각 부분들은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되어 있습니다. 한 부분이 기능을 상실하면 금방 몸에 이상이 생깁니다. 몸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기관이 없습니다. 몸 속에 보이지 않는 많은 기관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기능을 잘못해도 건강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몸의 각 기관들은 서로 도와서 제 기능을 발휘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팬데믹은 이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금 서서히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한 개인이나 한 국가가 아니라 세계를 한 공동체로 보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정보는 소수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일의 결정 과정에 있어서 민주적인 의사 결정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행위는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으로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지금 러시아는 서방 세계로 가는 전기와 가스 공급을 끊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로 세계의 지탄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제는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이 반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팬데믹 이후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요? 첫째로, 우리 교회는 더욱 더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부름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the Lord)’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 이 고백이 얼마나 위험한 고백이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지금 편안하게 ‘주님’이라는 말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퀴리오스(κυριος)’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대에 로마 황제 ‘네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네로는 자기가 ‘퀴리오스’로 불려지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우리의 주님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그 시대를 향해 선언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들이 황제숭배를 거부한 사람들로 몰려 박해를 받은 이유입니다.
‘주님(Lord)’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권위(authority), ‘절제(control), ‘힘(power)’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합니까? 인정한다면 왜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의 삶을 절제하고 있습니까?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포기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이름(a wonderful name)’이 되고 있고, ‘능력있는 이름(a powerful name)’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에서 크리스천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우리의 정체성이 회복됩니다.
둘째로, 우리 교회는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예언자적 공동체(prophetic community)’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만물을 창조하신 한 분, 곧 하나님 안에 숨겨진 진리에 관한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임무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I was chosen to explain to everyone this mysterious plan that God, the Creator of all things, had kept secret from the beginning. God's purpose in all this was to use the church to display his wisdom in its rich variety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엄청난 말씀 아닌가요? 교회가 ‘예언자적 공동체’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는 불필요한 것들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에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이 있듯이 교회에도 내려 놓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고 합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들만 남겨 놓아 삶을 단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예민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지극히 본질적인 것들만 남기고, 그 나머지 것들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설교자는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처럼 소명의식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 정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에 대하여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기 때문에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요한복음 13:34-35). 중요한 것은 교회는 우리끼리 모였다가 흩어지는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우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팬데믹 이후에 우리가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넷째로,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서로 ‘연대(solidarity)’해야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듯이, 교회는 정보를 독점하지 말고 다른 교회와 공유해야 합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회는 각자 알아서 생존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얻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서 교회 간에 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교파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함께 팬데믹 이후의 교회의 사명과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교회 연구 전문가인 해롤드 퍼시(Harold Perc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People who move toward the church do so for two major reasons: to learn about God and to find some guidance and direction for living(교회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은 두 가지 주요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 삶의 지침과 방향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다른 교회들과 연대하여 팬데믹 이후 교회의 길을 찾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는 세상에 대한 ‘선한 영향력(good influence)’을 회복해야 합니다. 지금 ‘influencer(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교회는 세상에서 ‘good influencer’ 역할을 감당했었습니다. 저는 이 ‘good influencer’라는 말을 교회들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이 말을 유튜버들이나 연예인들, 정치인들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튜버 팔로우어가 100만이 되면 그 유튜버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영향력이 엄청나게 커집니다. BTS의 팬 클럽인 ‘아미(the A.R.M.Y)’도 사회적인 ‘influencer’들입니다. 도대체 ARMY가 전 세계에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의 팔로우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단순히 BTS의 팬이 아니라 ‘fandom’ 현상을 일으키는 influencer들입니다. ARMY가 몇 명이냐 하는 질문에 “The ARMY is everywhere(이 세상 어디나 아미들이 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good influencer’들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Facebook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198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People influence people. Nothing influ-ences people more than a recommendation from a trusted friend. A trusted referral influences people more than the best broadcast message. (사람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믿을 수 있는 친구의 추천만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습니다. 신뢰할 수 있는 추천은 최고의 방송 메시지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저커버그는 비즈니스 영역에서의 영향력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의 말이 우리에게 영감을 줍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뢰를 회복하는 일들을 시작해야 합니다. 한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이 방법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10/2/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A New Commandments I Give to You
요한복음 13:34-35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Woman is weak, but mother is strong)”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세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Hamlet)’에 나오는 “Frailty, thy name is woman(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이 말에서 연유된 말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두로(Tyre)’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지중해를 끼고 있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페니시아(Phoenicia)’지역에 있는 도시 국가입니다. ‘두로’는 그 위에 있는 ‘시돈(Sidon)’과 함께 페니시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무슨 이유로 그곳까지 가셨는지 그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로’에 가신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어느 집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지역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제 딸 아이에게 ‘더러운 나쁜 영(an unclean evil spirit)’이 들어갔습니다. 제발 불쌍한 제 어린 딸아이를 고쳐주십시오.” 그 여자는 그 지역에 살고 있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개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여자는 이런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주여! 하지만 개들도 식탁 밑에 떨어진 부스러기는 주워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마가복음 7:28)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떠났다(Good answer! Now go home, for the demon has left your daughter)”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여자다!” “이 여자는 어떤 창피와 굴욕을 당해도 자기 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서 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두로’에 가셨던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중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희생된 어느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과 건물이 무너진 현장에서 구조대가 한 여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여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여자가 마치 절을 하듯 굽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구조대장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여자가 몸을 굽혀서 만든 공간에 손을 집어넣었습니다. 그 순간 그 안에 아이가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이다! 아이가 있다!” 모든 구조대원들이 달려들어 무너진 집의 잔해를 치우고 아이를 구조했습니다. 아이는 담요에 싸여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구조대가 아이를 덮고 있던 담요를 벗기자 그 안에서 어머니의 휴대폰이 나왔습니다. 휴대폰을 켜자 화면에 다음과 같은 문자 메시지가 찍혀 있었습니다. “만약 살아 남는다면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렴!” 그 메시지를 본 구조대원들은 모두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2004년에 영국 문화협회가 세계 102개 비영어권 국가를 상대로 4만 명에게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 70개를 묻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장 아름다운 단어 1위에 선정된 단어가 Mother(어머니)였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선정되었는지 궁금하시지요? 2위는 Passion(정열), 3위는 Smile(웃음), 4위는 Love(사랑), 5위는 Eternity (영원)이었습니다. 신기하게도 Father(아버지)라는 단어는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69위가 Gum (껌)이었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라는 단어는 70위 안에 선정되지 않았습니다. 레바논이 낳은 위대한 시인이자 작가인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other is the most beautiful word on the lips of mankind(어머니라는 말은 인간이 입술로 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다).” 어머니에게 돌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Never! Can a mother forget her nursing child? Can she feel no love for the child she has borne? But even if that were possible, I would not forget you(절대로 내가 너희를 잊는 일은 없다!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잊을 수 있겠느냐? 어머니가 자신의 몸으로 난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비록 그런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9:15) 여러분, 이 말씀이 이사야 49장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힘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이 포로생활의 의미를 잘 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포로생활이 하나님이 너희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너희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너희를 회복시켜 다시 고국 땅으로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머니의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은 참 험하고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광야 생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보았다(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출애굽기 19:4)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한 말씀 더 볼까요? “야곱 백성아, 내가 너희를 창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너희가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며, 불 사이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1-3)
우리는 아무리 이런 말씀을 성경에서 읽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그렇게 깊이 와 닿지 않습니다. 맞습니까? 네가 힘들어할 때 하나님께서 너를 업어서 날랐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네가 깊은 물속을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별로 마음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나에 대하여 이처럼 관심을 갖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마음에 큰 감동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새 계명’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as I have loved you)’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우리보다 이 질문을 먼저 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입니다. 요한은 제자들 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이 말은 요한이 제자들 중에 가장 많은 사랑의 감화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래 요한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좁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보아너게(son of thunder, 마가복음 3:17)’였을까요? 우리 말로 하면 ‘천둥의 아들’이 잖아요? 목소리를 컸고, 성격은 급했으며, 편협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사랑을 옆에서 보고, 직접 경험함으로써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요한일서 1:1에 아주 감동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We saw him with our own eyes and touched him with our own hands(우리는 그를 우리 눈으로 보았고, 우리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습니다).”
그 요한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See how very much our Father loves us, for he calls us his children, and that is what we are! But the people who belong to this world don't recognize that we are God's children because they don't know him(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보십시오. 그는 우리를 그의 자녀라고 부르셨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1)
여러분,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로 삼아 주신 데에는 요한이 미처 다 얘기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읽었던 풀턴 아워슬러(Fulton Oursler, 1893-1952, 미국)가 쓴 ‘The Greatest Story Ever Told(가장 위대한 이야기, 1948)’라는 소설 제목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데에는 한 위대한 스토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의 ‘화목제물(an atoning sacrifice, 요한일서 4:10)’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보다 전문적인 용어로는 ‘the propitiation for our sins’라고 합니다. 죄 때문에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사랑을 머리로 이해해야 하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크리스천의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지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랑에 아주 익숙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이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is much, we must love each other).” (요한일서 4:11,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만큼(this much)’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가슴에 사랑이 식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생길 때, 우리는 다시 이 말씀으로 돌아가서 사랑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 계명(A New Commandment)’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구약 레위기 말씀을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레위기 19:18) “외국인들을 너희 동포처럼 여기고, 너희 몸을 사랑하듯 그들을 사랑하여라.” (레위기 19:34)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새삼스럽게 ‘새 계명’이라고 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는 법이기 때문에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했습니다. 속으로 내키지 않지만 법이니까 사랑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us, 고린도후서 5:1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자기 속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새 계명’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용하신 말은 ‘ἐντολὴν καινὴν (entolén kainēn)’이라는 말입니다. ‘ἐντολὴ’이라는 말은 율법, 계명 혹은 명령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ἐντολὴ(계명, 율법)’이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모든 사람들이 다 깨달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제 설교를 듣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말을 ‘새 계명’이라고 하셨는지 깨닫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든, 깨달아지지 않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 페이스북(Facebook)에 올라온 말씀 카드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Love is not an option for a church(사랑은 교회에게 선택 사항(옵션)이 아닙니다.” 교회는 무조건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by this)’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것이나, 성경공부하는 것이나, 전도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지키는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9/25/2022 |
물문 앞 광장에서 The place in front of the Water Gate
느헤미야 8:1-12
설교 본문을 묵상하며 제 마음이 머문 곳은 총독 느헤미야도 학사 에스라도 아닙니다. 물문 앞 광장에 나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복받쳐 울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곳 보스턴에 와서 매주일 제단에 올라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제 마음 한켠에 울컥한 마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익숙한 지역과 환경을 떠나 낯선 곳에 있어서도 아니고,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도 아닙니다. 현재의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제게 주시는 마음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스 1:1) 여호와의 손길을 증거하며 성전을 재건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때에도 느헤미야에게 은혜를 주셔서 이방나라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본문의 말씀 안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초대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지만 역사속에서 세상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우리를 도우심을 믿음으로 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다르고 사람마다 각자의 처한 상황에 맞는 은혜가 다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늘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끝까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문을 통과한 사람들을 동문이라고 합니다. 같은 학교를 졸업 한 사람들, 한 스승에게서 배운 사람을 이르는 말이죠. 우리는 선생이 되시는 그리스도가 통과한 문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주님의 DNA를 닮아가며, 주의 바른 교훈을 듣고 실천하며, 주님이 걸어가신 문을 함께 통과해야 합니다. 주님이 인생의 문을 여시지 않으면 내 앞에 닫혀진 문은 벽에 불과한 것이지요.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구원의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주일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오는 여러분의 마음에 거룩한 갈망이 솟아나기를 축복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황금문으로 불리는 동쪽문을 통하여 성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황금문에는 두 개의 문이 나란히 있는데, 하나는 ‘자비의 문’ 또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으로 불리는 문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동쪽 문(황금문)으로 들어간 뒤 문이 닫혀 다시는 열리지 않으며, 메시아가 올 때 에야 문이 열린다고 생각했습니다.(에스겔, 44:1-3). 그래서 문제는 유대인과 무슬림은 지금도 메시아가 예루살렘 성전 동문을 통해 온다고 믿고 있기에 에루살렘을 점령한 무슬림은 801년 이후 예루살렘 성 동문을 폐쇄했습니다. 그러다가 1102년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의 승리로 다시 이 문을 열었지만 무슬림에 의해 다시 폐쇄되었지요. 현재는 무슬림들이 예루살렘 성 동문 앞을 공동묘지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부른 비극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히브리서 10장 19. 20절을 보면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휘장이 찢어졌습니다.(히 10:19-20) 하나님은 그 곳을 떠나 다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거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도행전 17:24).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주께서는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놓으셨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문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문은 닫을 자가 없고, 그 길은 막히지도 않는 길입니다. 그 문은 누군가를 짓밟고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부르심을 받는 청지기들이 사명을 완수하고 들어가는 문입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는 문은 10개가 있었습니다. 10개의 문들 가운데 ‘물문’은 예루살렘 성문 가운데 하나로 물을 실어 나르던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느 3:26) 이 문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었고, 이 광장은 성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는 10개의 문을 소개하고 있는데, ‘물문’을 7번째 소개하고 있습니다. 7번째 언급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전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1 일곱째 달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죄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경외감이 사라지면 가던 길에서 방향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경외감은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하는 친밀감이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성밖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느헤미야를 통하여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다른 선지자들 처럼 제사장의 가문도 아니었고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개인적인 경건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던 인물입니다. 느헤미야 1장부터 7장에 보면 그는 기도로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8장부터는 영적 회복의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2 그래서 제사장 에스라가 무리를 위해 율법책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루였습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듣고 깨달을 만한 사람은 다 모여들었습니다. 3 에스라는 ‘물 문’ 앞 광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한낮까지 율법책을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에스라는 듣고 깨달을 만한 모든 사람에게 율법책을 읽어 주었고, 그들은 율법책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깨달을 만한 모든 사람이 모였습니다. 말씀은 삶으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한계상황에서도 말씀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살아납니다. 말씀은 information(지식전달)이 아니라 formation(변화)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지식은 태양계에 점에 불과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면 먼지 같은 존재인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spiritual formation’(주의 성품으로 닮아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가 살아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설교자도 말씀을 연구하다 보면 깨닫게 해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 이해 할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말씀을 갈망하다 보면 말씀의 신비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른 아침부터 한낮까지 읽었으니 대략 잡아도 한 6시간 이상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깨달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말씀을 향한 목마름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게 되면 새역사가 시작되지요. 목마른 예배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갈망하는 예배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지는 것이고, 찬양은 부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표현이며, 기도는 생수의 강이 입술을 통해 넘쳐나는 것이지요.
인류역사에 있어서 물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인류의 기원에 있어서 물은 생존이며 생명입니다. 물에 담긴 성서적, 신학적 의미는 정화(Wash)시키는데 있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가 됩니다. 주의 보혈이 흐르는 곳에는 항상 깨끗함이 있지요. 그래서 세례수에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홍해의 사건인 ‘구원’과 노아의 방주때 40주야 비를 내리시며 물로 의인과 악인들을 가려 내시는 ‘심판’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정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구원받는 백성들에게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으로 접속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물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생기가 넘치고 (Refreshment) 생명의 물을 마시는 자는 성령 안에서 새 삶을 발견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비싸도 더 깨끗한 물을 마시고 싶어 합니다. 과거에 물을 사 먹게 될꺼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은 웃었지요. 그러나 요즘은 좋은 물을 사서 마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누릴 수 있는 것의 한계가 없습니다. 더 편리함을 찾는 세상이지요. 채우고 가져도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보게 되어 있지요. 그러나 채울수록 결핍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면 영적으로는 주님을 더 사랑하고 갈망하지만 우리를 자녀삼아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차고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4 에스라는 높은 나무 단 위에 섰습니다. 그 나무 단은 이번 일을 위해 따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제사장 에스라는 임시로 만든 높은 단 위에서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들은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게 되고, 매일의 양식을 통하여 영적 굶주림과 배고픔이 채워집니다. 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중에 ‘프리츠 크라이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기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기를 찾아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한 악기 상에서 자기가 정말 원하는 악기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래서 악기상 주인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악기를 팔지 말라고 내가 돈을 모아 오겠다고, 그런데 그 금액이 너무 커서 수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돈을 다 모아서 악기 상에 왔더니 그 악기가 바이올린 수집가에 팔리고 없는 겁니다. 수소문 하여 그 사람 집에 찾아가 악기를 자기에게 팔라고 하니 거절합니다. 그래서 한 번만 연주를 할 수 있겠느냐, 청을 하고 연주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 부자의 얼굴이 점점 변하더니 마침내 눈물을 글썽입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바로 이 바이올린의 주인이셨군요. 제가 이 악기의 행복을 위해 주인에게 이 악기를 돌려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완벽한 연주자이십니다. 내 삶을 연주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신앙을 조율하십시요. 하나님은 인생을 통해 놀라운 음악을 연주하실 것입니다. 저는 매주 성가대의 찬양을 들을 때마다 각자가 자신의 삶의 전부를 드려 노력하고 공부한 것을 드리는 자리이기에, 믿음을 표현하는 자리이기에 기쁨과 은혜가 차오릅니다. 우리의 교회도 그렇게 걸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각자가 살아온 환경과 배경은 다르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이 같아서 그 마음으로 서로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나의 소리가 커지는 것을 줄이고 함께하는 동행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며 걸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6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말하면서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아멘은 하나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면 경배의 모습, 예배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아멘으로 응답하는 것은 영적으로 나를 변화시키도록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초대하며, 지속적으로 동행하는 삶입니다.
9 그런 뒤에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이자 학자인 에스라, 그리고 백성들을 가르치던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의 거룩한 날이오. 울거나 슬퍼하지 마시오.” 그들이 이 말을 한 것은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마음을 회복시키시니 백성들의 마음에 감정의 반응이 일어납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눈물 속에서 그 동안의 아픔도 상처도 흘러 나갑니다. 눈물을 통해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 눈물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눈물이었습니다. 크리스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요. 주일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대받아 누리는 기쁜날 인것입니다. 기쁜날 사랑의 교제를 하실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더없는 기쁨의 자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슬픈 감정들은 내려놓고 기쁨으로 살아가라고 그 눈물을 자제 시킵니다. 말씀에 기초해 은혜를 받으면 감정의 변화가 찾아오고, 회개하고 은혜를 받으면 이제는 순종함으로 삶의 자리로 나아가서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10 느헤미야가 말했습니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주의 거룩한 날이오. 슬퍼하지 마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이오.” 11 레위 사람들이 백성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조용히 하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 마시오.” 12 그러자 모든 백성이 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었고, 크게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들이 마침내 들은 말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라. ‘힘’이란 단어의 원어는 ‘마우제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그 뜻이 ‘방파제’라는 뜻입니다. 숲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면 아름답지요. 하지만 숲속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곤충, 벌레들, 부러진 가지들, 버려진 쓰레기도 눈에 들어옵니다. 꽃들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땅속 밑은 거칠고 어둡습니다. 그런데 태풍과 비바람으로 부터 지켜주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땅속에 심긴 뿌리들입니다. 캐나다 산림 생태학 교수 수잔 시마드(Suzanne Simard)는 20년 이상 연구해온 결과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뿌리들이 어둡고 거친 땅 깊은 곳에서 균을 통해 서로가 연결되어 있어서 양지에서 자란 큰 나무들의 뿌리들이 음지에 있는 작은 나무들에게 뿌리를 통해 탄소를 나눠주며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땅속 밑에서 뿌리를 통해 물과 영양분을 교환하며 서로 소통하는 것이죠. 이 힘이 해충으로 부터 지켜내며, 숲을 보존해 주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지만 땅을 디딛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이길 진정한 방파제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말씀에 깊이 뿌리 내리며, 서로가 돕고 베풀며 연약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생존에 밀려 낙오된 이들이 다시 일어 설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말씀의 권위에 깊이 뿌리 내리며 거친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하나님의 신비속에서 서로 공생하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비드가 시작되고 락다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시간을 마주했습니다. 늘 가던 곳이 닫혀 있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마음도 서로를 향한 관심도 차츰 멀어지기 시작했지요. 저도 그 시간에 늘 토론토에서 걷던 길이 있었습니다 매일 그 길을 걸으며 자연속에서 주시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추운 겨울 성탄절이 다가오던 즈음에 언제나 걷던 그 길가의 큰 나무에 누군가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기뻐합니다. 어제는 그냥 걷던 산책길이었는데 누군가의 사랑과 섬김으로 따뜻한 산책길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곳곳에 그런 사랑의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환경과 역경들 가운데 진정한 교제 가운데로 나와서 아픈 삶을 드러내시며 말씀으로 위로 받고 깊이 뿌리 내리십시요. 하나님의 집은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연결되어 유지되고 건강해 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영혼이 기쁨을 누리시기 축복합니다. 서로를 바라보시며 행복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케임브리지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 기사를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채교수는 시카고 노스웨스턴대 종양내과 의사입니다. 그는 말기암 희귀암 전문의인데, 실제 병실에서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Can I pray for you?)’라고 묻는다고 합니다. 이 말이 책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는 환자의 손을 잡고 하는 기도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자신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사랑이 없는 마음에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 주셔서 아프고 피곤한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진료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주님께 매달린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겸손, 이 가난한 마음이 없이는 나에게 소망이 없었다. 주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나는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어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우쭐해 하고 잘난 사람을 보고는 우울해 했다. 배후에는 엘리트들이 놓 지 못하는 자기사랑, 자기연민이 있었다. 자아가 없어진 공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고, 비로소 병원에서 환자들을 위해 손을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통을 받고 있는 환자들 옆에서 끝까지 옆에서 마라톤을 함께 뛰는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완주할 것을 다짐했다.”
나의 자아가 깨어진 곳에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사랑이 필요한곳에 나를 도구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될까요? 우리가 만나는 지체들에게 많은 말보다 이 한마디로 마음을 전할수 있는 귀한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