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18/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3
주님이 내 삶에 들어오시면 If The Lord Comes Into My Life
요한복음 2:1-11
여러분, ‘The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사인들)’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구글에서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을 찾아보면 이에 대한 많은 글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만큼 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지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인’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σημείων(세메이온)’입니다. 이 말은 ‘a sign (typically miraculous), given especially to confirm, corroborate or authenticate(확인, 확증 혹은 인증을 위해 주어진 기적적인 사인)’라는 뜻입니다. 공관복음서를 읽어보면 ‘기적’ 혹은 ‘이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기적’이라는 말 대신 ‘세메이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이 말을 ‘표적’으로 번역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즉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인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곱개의 사인 중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인’이 첫 번째 사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첫 번째 사인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첫 번째 사인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첫 번째 사인(표적)이 나타난 것은 갈릴리 ‘가나(Cana)’에서 열렸던 한 결혼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나까지 직선거리로는 약 8Km 떨어져 있지만 구불구불한 로컬 길로 가면 약 10Km 떨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약 2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근동지방 사람들에게 결혼식은 특별한 것입니다. 그들은 잦은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결혼식만큼은 크고 성대하게 열었습니다. 성경에 결혼식에 대한 말씀이 여러 번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혼 잔치에는 지나가는 나그네도 갈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지역에 단기선교를 갔다가 두 번 결혼식에 참석했던 기억이 납니다. 테이블 중앙으로 안내되어 귀빈 대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 결혼잔치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남편 요셉은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혼자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손님들의 상에 무슨 음식이 더 필요한 지 살피는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잔치 전체를 관장하는 ‘연회장(the master of the banquet)’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잔치 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단순히 곤란한 일이 아니라 때로 예상치 않았던 절망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존 플라벨(John Flavel)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시아 지방에서 당한 환난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감당하기 어려운 환난을 당해, 삶의 소망조차 없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서운 죽음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앞으로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8-10)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절망을 우리 삶에 불필요한 것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들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선명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에서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침 예수님도 제자들과 함께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얘야,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겠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118:8-9이 오버랩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실제적인 것입니다. 유사시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낫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힘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더 낫다고 믿고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닙니까? 침착하게 기도하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해결책을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마리아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어머니,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저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Dear woman, that's not our problem. My time has not yet come, 4절)” 이렇게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여자’에 해당하는 그리어는 ‘γύναι(gynai)’입니다. 성경 번역 전문가인 빌 마운스(Bill Mounce)는 ‘γύναι’라는 말은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 불가능한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나마, 이 말을 ‘dear woman’이라고 번역한 New Living Translation이 제일 낫다고 했습니다. 절대로, ‘여자(woman)’라는 말로 번역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경멸하는 것 같은(pejorative)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번역성경 중에 Weymouth New Testament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제일 잘 된 번역 같습니다. “(Dear Woman) Leave the matter in my hands, the time for me to act has not yet come(어머니, 이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행동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결혼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이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자신이 행동할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고 보신 것입니다. 이 해석이 맞다는 것은 마리아의 다음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그분이 무슨 일을 시키든지 그대로 하여라’ 하고 말해 두었습니다.” (5절)
우리는 여기서 요한이 매우 의도적으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말씀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훈련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문제입니다. 보세요. “그 집에는 돌로 만든 물 항아리 여섯 개가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는 유대인들이 정결 예식에 사용하는 항아리들이었습니다. 그것은 각각 물 두세 동이를 담을 수 있는 항아리였습니다.” (6절)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정결예식(Jewish ceremonial washing)’에 대한 말씀입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는 반드시 손과 발을 씻어야 합니다. 식사 전에 손도 반드시 씻어야 했습니다. 이런 용도로 물 항아리가 집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위생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몸을 정결하게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밖에서 ‘부정한(unclean)’것과 접촉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물로 씻어서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먹는 ‘코셔(kosher)’ 음식도 자신을 ‘부정한’ 음식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무엇이 ‘정결한(clean)’ 것이고 무엇이 ‘부정한(unclean)’ 것인지 모두 율법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 잔칫집에 정결예식에 쓸 물 항아리가 모두 여섯 개가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숫자를 사용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섯’이라는 수는 불완전한 수입니다. ‘셋’ ‘일곱’ ‘아홉’ ‘열 둘’은 완전한 숫자입니다. 유대인의 정결예식에 따라 돌 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몸을 씻어서 깨끗하게 하고, ‘정결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율법적인 노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좀더 확장해서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가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절망할 일도 많고, 실망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법으로 정해 놓고 그 법을 지키려는 율법적인 노력을 해도, 우리가 그 법을 모두 지킬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법을 지켰다고 해서 우리의 속 사람(양심)까지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말씀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Don't misunderstand why I have come. I did not come to abolish the law of Moses or the writings of the prophets. No, I came to accomplish their purpose, 마태복음 5:17)”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완전하게 해 주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것도 연회장이 이 포도주 맛을 보고 칭찬할 정도로 최상급의 포도주로 바꿔 주셨습니다. 물이 최상급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면 평범하고, 가치 없는 것이 변하여 특별한 것이 되고, 무의미한 것이 의미있는 것으로, 무익한 것이 유익한 것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 오스트리아)이라는 사람이 ‘죽음의 수용소에서(1946)’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의미를 찾는 인간)’입니다. 빅터 플랭클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그는 수용소 안에서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부분 주어진 상황 속에서 끝까지 삶의 의미를 붙들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Life is never made unbearable by circumstances, but only by lack of meaning and purpose(삶은 상황에 의해서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의미와 목적의 결여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난 설교에서 저는 보스턴에 꿈을 안고 찾아온 청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러분의 보스턴 생활이 순탄하기를 바라지만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빅터 프랭클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요.
그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can discover this meaning in life in three different ways: (1) by creating a work or doing a deed; (2) by experiencing something or encountering someone; and (3) by the attitude we take toward unavoidable suffering (우리는 이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법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무엇을 창조하거나 행동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고난에 대처하는 태도를 결정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삶에 들어오셔서 물로 최상급 포도주를 만드신 분,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무의미한 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사인을 보여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너희가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I have come in order that you might have life—life in all its fullness).” (요한복음 10:10, Good News Translation) 여기 사용된 ‘생명’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ζωὴ(zōē)’라는 말인데요. ‘both physical and spiritual life’를 모두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한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저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에 들어오실 때, 나의 삶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온전해지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가 일하시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혁진이라는 분이 가사를 썼는데, 참 가사를 잘 썼습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빈 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내. 힘으로 안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이 찬양 가사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님, 여러분의 인생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9/11/2022 |
하나님 백성의 품격 The dignity of God's people
스가랴 4:1~7
이번주는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상에 앉아 설교를 준비하는데 마음안에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이 하나님 나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하나님 나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누려야 하는 나라’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스가랴서는 성전 재건을 위한 하나님의 꿈을 보여주시는 서신입니다. 절망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 포로기 이후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을 주시기 위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환상은 하나님이 스가랴에서 주시는 5번째 환상이지요. 순금으로 된 등잔대, 등대 곁에 있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 나무를 받치는 기름 그릇을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회복되고 다시 세워짐을 상징하고 있는 환상입니다. 올리브 나무 좌우의 기름 그릇은 성전 예배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였으며, 이스라엘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인데, 학개서는 무너진 성전 재건을 촉구하는 현실적인 부분을 다르고 있는 반면에, 스가랴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1 <다섯 번째 환상: 등잔대>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가 내게로 돌아와서 나를 깨웠는데, 나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2 천사가 내게 물었다. “무엇이 보이느냐?” 내가 대답했다. “순금으로 된 등잔대가 보입니다. 그 꼭대기에는 그릇이 있고 등잔이 일곱 개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 받침도 일곱 개 있습니다.
등잔대(메노라:Menorah)는 가지가 일곱 등대인 성막시대부터 유대인들의 상징입니다. 히브리어로 촛대라는 뜻인데,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타지 않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회당안에 들어가면 제단 위에 일곱 등대의 모습을 한 메노라가 있습니다. 아치를 이루는 모습은 두 천사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지성소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보고 계시는 메노라는 1956년 영국 통치하에 있던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회가 이스라엘국가에 기증한 작품입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성전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순금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상징하지요. 순금은 고난을 이겨낸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깊은 고난을 이겨내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엡 2:20-21) “너희는 사도들과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계시록에 사도 요한의 환상을 보면 일곱촛대가 일곱교회를 상징하는데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스가랴서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스가랴서에 나오는 8개의 환상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 찾아보시며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묵상하는데 큰 흥미가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 우리 교회 곳곳을 둘러보며 교회의 역사를 느끼고 기도의 자리를 가슴 깊이 느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졌을 당시 보스턴 지역은 영적 부흥이 물결치던 시기였습니다. 부흥의 물결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지게 했고,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로 파송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던 많은 이들은 뜨거움을 주체 못해 거리로 나와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지역 케임브리지 지역만 해도 메인 교단의 교회 건물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당시의 부흥의 물결 가운데 함께했던 성령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을 보십시요. 많은 교회들은 관광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이름의 교회들도 화려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관광지가 되어버린 교회를 보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가 걸어가신 길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팬데믹 이후 교회가 답답하고 막막한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가 더 어려워지고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지요. 현실에 보이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을 보면 더 절망하게 되고 답답해 집니다.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염려와 근심이지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다시 회복하고 세워 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꿔야 합니다. 팬대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많은 것이 변한 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어찌보면 이 변화의 물결속에 나의 마음이 가장 많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을 보기 전에 실패를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회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보고 절망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가랴의 말씀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안고 하나님의 꿈을 다시 그려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 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4: 7 어떤 산도 스룹바벨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모든 산이 낮아질 것이다. 그러면 그가 꼭대기 돌을 가져올 것이며, ‘은혜, 은혜!’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다시 살게 하고, 절망 가운데서 있는 자들을 일으키십니다. 내 사랑이 너희를 포기하지 않겠다. 나는 깨어지고 부서지고 낮아져도 내가 너를 포기치 않고 사랑하겠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 위해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 내버려 두셨습니다.
제 생각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정돈 되지 않을때 기도하며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큰 꿈은 없습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들 세상을 뒤덮지 않아도 여전히 충분합니다
큰 꿈은 없습니다 맡겨주신 영혼들 그들을 사랑하며 섬기면 그것만으로 난 충분합니다
그래도 한꿈은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안고 푸른 들판을 사는 이들 그 안에 꿈을 봅니다
하늘 보좌 버리고 낮아져 이땅에 오신 주님 주님만이 나의 꿈이십니다. 주님 만이 내 사랑입니다
세상을 내려놓고 엎드리오니 그런 나를 사용하시는 주님만이 나의 꿈이십니다”
이 찬양을 부를때마다 분주한 생각들이 멈추어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하려는 일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일인가 나의 열심인가,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나의 만족을 위함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가. 내가 하려는 말이 하나님의 뜻인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는 참 많은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찬양의 가사를 들을때 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내 마음을 드리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우리의 예배 안에서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꿈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4:3 그 곁에는 올리브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하나는 그릇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릇 왼쪽에 있습니다.” 4 내가 나와 이야기하던 천사에게 물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5 천사가 말했다. “이것들이 무엇인지 모르느냐?” 내가 대답했다. “내 주여, 모릅니다.” 6 그러자 천사가 내게 말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네 능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영으로만 된다’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4:14 천사가 말했다. “그것들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섬기도록, 주께서 기름 부어 거룩히 구별하신 두 사람을 나타낸다.”
올리브 두 그루의 나무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스가랴에게 천사가 알려줍니다. 주께서 기름 부어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이다. 성전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지어가는 거룩한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올리브는 지중해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요. 지중해 사람들의 필수 음식입니다. 하나님께는 거룩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품격을 갖춰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품격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등잔을 비추려면 기름이 필요한데요. 이 기름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공급되는 성령의 영입니다. 히브리어로 ‘루아흐’는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숨결입니다. 성전의 완공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전 3:6) 농부는 거름을 주고 병충해로 부터 곡식을 보호하지만 자라게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 인격이 성품이 마음의 성전이 하나님의 품격으로 갖춰지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된다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맺는 성령의 열매가 우리 마음과 성품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함 앞에 서는 일이고, 성령의 존재를 계속적으로 기도를 통해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숨을 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하지요. 물고기는 헤엄을 치기 위해 물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기도의 호흡이 필요한 것이지요. 촛대를 통해 나타나는 권능의 영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령님은 마음의 성전을 회복시키시고, 주저 앉아 있는 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분입니다. 절망의 입술을 희망의 입술로, 분쟁과 시기의 입술을 사랑의 입술로, 거짓과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분입니다.
포로 생활하고 마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포로로 학습된 습관으로 인해 당당함을 잃어 버리고 낙심과 절망의 마음이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스가랴에게 환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복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길 원하십니다. 세상은 교회가 문제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합니다. 죄가 있다고 회개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은혜를 주셔야 회개가 됩니다.
성경은 “너희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청년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행2:17)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로 부터 청년들 노인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께서 회복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교회를 다닌 년수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꿈을 꾸는 모든 세대는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회복의 공동체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을 세워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성전을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요 2:19) 이때 예수가 말씀하신 성전은 그리스도로 인해 세워지는 마음의 성전을 가르켜 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일은 돈과 힘이 있으면 수월하게 할 수 있고 잘 해 낼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네 능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영으로만 된다’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배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참된 예배를 드릴수 있던가요? 마음의 성전을 짓는 일이 우리의 힘으로 능력로 되던가요? 주님의 겸손함을 닮아가고 싶다고 생각데로 닮아지던가요?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고 싶다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임하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꿈을 보며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꿈의 사람하면 요셉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며 살았던 요셉은 절망과 죽음에 직면해서도 꿈을 간직하며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꿈을 지닌 이에게 모든 만남은 축복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꿈을 품고 있는 자에게는 삶이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 사이에서 계속되는 만남 가운데 신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백성의 품격을 지닌 사람들은 일상의 작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욕망의 한복판에서 그분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우리는 어둔 세상에서 주의 뜻을 선택하며 갈라진 마음 틈새에서 그리스도의 꽃을 피워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찬들은 세계의 여러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백성으로 부름을 받는 것이며, 시간을 거슬러 역사 가운데 존재했던 믿음의 사람들과 영적인 관계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무엇보다 믿음이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꿈을 잃어버리고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이에게 그 품이 사라지면 얼마나 두렵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꿈이 사라지는 것은 정말로 두려운 일입니다.
지난 주일 청년 수련회 말씀을 인도하며 청년들이 흘리는 기도의 눈물을 보며 꿈을 향해 도전하는 저들의 삶을 중보했습니다. 낯선땅에 와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들의 마음에 익숙한 것들로 부터의 단절, 고독, 외로움이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 안에서 외로움과 삶의 문제들까지도 하나님의 값진 선물로 이해할 수 있는 믿음의 깊이를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고 있는 두려움, 상처,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 상태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모두가 다른 환경과 처지에 살아가고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예배안에 있을 때에 우리가 품었던 마음의 온도가 동일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믿음을 끝까지 붙드는 이들을 통해 유지되고 존재합니다. 스가랴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기억하신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린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부흥을 허락하실까? 내게 다시 은혜를 베풀어 주실까?
여러분, 하나님은 반드시 너희에게 돌아오겠다 약속하셨고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인생의 농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이곳에 흩어 뿌리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품격이 다른것이지요. 우리가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한걸음도 나아갈수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면 마음 안에 늘 욕망이 꿈틀거립니다. 내 삶에 안전한 둥지를 마련하고 싶은 욕망, 나만을 위해 편하게 살고 싶은 안일함, 더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 어쩌면 우리는 세상의 욕망과 하나님의 꿈을 선택하는 그 사이에서 줄타기하듯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욕망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서 하나님의 위한 삶을 선택 보시기 바랍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 꿈을 보여주며 이 시간 우리에게도 무너진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대 하나님이 성전을 다시 세우라는 것은 여러분의 일상생활과 몸과 마음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주변에 보면 부유하지만 가난한 이들도 있고, 가난하지만 부유한 이들도 있습니다. 누구나 부유하기를 바라지만, 결핍의 마음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의 인생에는 불행이 시작됩니다. 결핍에 눈길을 주며 사느라 이미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은 특별한 날입니다. 욕망과 결핍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마음의 성전을 끊임없이 무너뜨려 갈 것입니다. 무너진 성벽 틈으로 끊임없는 유혹과 욕망은 채우고 채워도 마음의 공허함과 우울감만 계속 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꿈을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찮은 일을 통해 큰일을 행하시고 지극히 작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마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과 생각이 넘칠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용히 묵상해보십시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들을 보여 주시리라 믿습니다
빈센트 반고흐의 불꺼진 예배당 그림입니다. 그의 동료가 그에게 삶의 신조를 물었을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산다는 것. 곧 생명을 주고 새롭게 하고 회복하고 보존하는 것. 불꽃처럼 일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하게, 무언가에 도움이 되는 것. 예컨대 불을 피우거나, 아이에게 빵한 조각과 버터를 주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물 한 잔을 건네 주는 것이라네.” 합니다. 신앙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나의 욕심과 자아가 주님 앞에서도 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겠지요.
여러분 우리의 간절한 예배의 자리에서 아직도 흔들리는 나의 영적인 갈급함을 마주하고 계시다면 혹은 너무 많이 알고 들어서 영적인 배부름 때문에 주님을 보지 못한다면 이 시간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채워 달라고 결단하며 기도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주를 살아내야 할 우리의 삶의 일터와 현장에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경험되어지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우엔의 ‘꼭 필요한 것 한가지 기도의 삶’의 기도문을 함께 나눕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소원도 많고 욕심도 많고 기대도 많습니다.
이루어 질수 있는 것도 있지만 이루어 질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 모든 만족과 실망의 한복판에서 저는 주님을 소망합니다.
주님이 결코 저를 혼자 두지 않으실 것과 주님의 거룩한 약속을 이루실것을 저는 압니다.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 같을 때에도
실은 주님 뜻대로 풀리고 있음과 결국 주님 뜻이 제게 최선의 길임을 압니다.
오 주님 제 소망을 굳게 하소서.
특히 제 많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때 그리하소서.
주님의 이름이 사랑임을 결코 잊지 않게 하소서.
9/4/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2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We Are Not Alone
요한복음 16:28-33
여러분,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 1909-2002)이 쓴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1950)’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의 부제(subtitle)가 ‘A Study of the Changing American Character(변화하는 미국인의 성격에 대한 연구)’입니다. 리스먼은 이 책에서 미국인의 성격이 ‘전통지향형(tradition directed type)’에서 ‘내부지향형(inner directed type)’으로, 그리고 ‘외부지향형(other directed type)’으로 발전되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외부지향적 성격은 또래집단이나 친구집단의 영향에 따라 행동하는 성격입니다. 이런 성격이 형성되는데 매스 미디어가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면적인 고립감 때문에 힘들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말한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는 ‘외부지향형’ 성격 유형을 ‘고독한 군중’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가 이 책을 쓴 것이 1950년입니다. 그 때는 미국인의 성격이 ‘전통지향적’인 성격에서 ‘내부지향적’인 성격으로 옮겨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장차 미국인들의 성격이 ‘외부지향적’인 성격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한 것입니다.
리스먼의 이 책이 얼마나 유명한지, 뉴욕 타임즈에서 문학,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분야를 총망라해서 ‘죽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책 100권’을 선정했는데, 이 100권 중에 ‘고독한 군중’이 선정되었습니다. 정말 시대를 초월한 명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회퍼의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직의 대가, 1937), 또 몇 주 전에 소개한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 같은 책들은 시대를 앞서 발간된 명저들입니다. 리스먼의 책도 그렇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은 리스먼의 책이 나온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인들의 삶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보스턴에 새로운 학생들이 모여오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만은 못하지만, 보스턴 시내에 나가보면 거리에 새로운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모두들 꿈을 가지고 보스턴을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1986년에 캘리포니아 클레아몬트에서 석사를 마치고 보스턴 대학 박사과정에 들어왔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차를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대륙횡단을 해서 왔습니다. 오면서 그랜드 캐년도 구경하고, 나이아가라 폭포도 구경을 했지만, 보스턴 생활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 재미가 없었습니다. 95번에서 90번 매스 파이크를 타고 보스턴으로 들어오는데, 어찌나 마음이 불안했던지요. 보스턴에 거의 다와 갈 무렵에 맥도날드 휴게소에 들러 보스턴 쪽을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셨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저의 경우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보스턴 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보스턴에 공부하기 위해서 혼자 오는 학생들을 보면 한편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기도 합니다. 기숙사에 가도 반겨주는 가족이 없으니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그러다가 학교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몸이 아프거나 하면 얼마나 집 생각이 많이 나고, 부모님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혼자 지내는 보스턴 생활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이 외로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 눈에 띄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I am not alone)!”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 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곧 위험한 상황이 닥쳐오고 자기 제자들이 자기를 혼자 남겨 놓고 모두 떠날 것을 알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지만)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내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Because my Father is with me).” (32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다윗이 쓴 시편 23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쓸 때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었습니다. ‘나의 원수들(my enemies)’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는 적으로부터 둘러싸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주께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for you are with me)(시편 23:4)”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제 너희가 (나를) 믿느냐(Do you believe in Me, 31절)?”라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떠나고, 그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 그 때에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시는 분,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 상황을 견뎌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한복음 14:16), 그 약속이 대로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독특한 존재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과 나누는 ‘교제의 삶(the life of fellowship)’을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수님과 충분한 교제를 나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까요? ‘풍성한 열매(the abundant fruits)’를 맺습니다. 이 말은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충만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를 통하여 제자들이 그의 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되는 극한의 외로움과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의 교제의 삶을 통하여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리스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외부(타인) 지향적인 사람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는지, 또 그들 자신의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삶만큼이나 흥미롭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바닷물을 마심으로써 목마름을 해소하려는 것보다 더 심한 동료 집단 속에서의 고독을 해소하려고 애쓰지 않게 되고, 그들 자신의 감정이나 열망에 집중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If the other–directed people should discover how much needless work they do, discover that their own thoughts, and their own lives are quite as interesting as other people’s, that, indeed, they no more assuage their loneliness in a crowd of peers than one can assuage one’s thirst by drinking sea water, then we might expect them to become more attentive to their own feelings and aspirations).” 리스먼은 대중의 언어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면 ‘군중 속의 고독’을 극복할 수 있다고, 고독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은, 다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그리스어로 ‘κόσμος(kosmos)’입니다.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세상’도 ‘κόσμος’입니다. ‘κόσμος’라는 말은 ‘order(질서)’ ‘an orderly harmonious systematic universe’를 의미합니다. 우주나 자연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조화로운 질서’를 말합니다. 이 조화로운 세상에서 왜 우리는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질서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깨진 세상을 회복하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 21:4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더 이상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1980년 1월 22일 아침, 저는 제 아내와 함께 결혼 앨범을 꺼내 사진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제가 졸업한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으로 계시는 윤성범 학장님이 돌아가셨다는 전화였습니다. 제 결혼 주례를 서 주신 분이어서 방금 전에 결혼 사진을 보면서 그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게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한참 동안 멍하게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분의 장례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분의 제자이신 교수님 한 분이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린도전서 15:51-52, 55-58)
겨울이어서 강당 안이 싸늘했습니다. 그 때 저는 강당에 울려 퍼지는 성경 말씀이 생생하게 귀에 들어오는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제 가슴에 들어와서 콕콕 박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죽음의 권세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조롱하고,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그 말씀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O death, where is your victory? O death, where is your sting?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But thank God! He gives us victory over sin and death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New Living Translation)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밖의 세상의 모든 문제들을 이기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죽음을 해결하신 분이 더 이상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그를 믿는 사람들도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긴다’는 말은 ‘victory’가 아니라 ‘overcome’입니다. ‘극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이 세상에서 너희가 많은 환난을 당할 것이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33절)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아무 문제가 없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문제들을 ‘극복하도록(to overcome)’ 도와주십니다. 로버트 로저스(Robert Rogers)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My faith didn't remove the pain, but it got me through the pain. Trusting God did not diminish the anguish, but it enabled me to endure and overcome it(나의 믿음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겪게 한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는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견디게 하고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보스턴에 꿈을 가지고 찾아오신 분들, 순탄하게 보스턴 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학교 교수님과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공부하는 과정을 따라가기가 힘에 버거울 수도 있고,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나 건강상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때로는 혼자 지내는 생활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내겠습니까?
다윗은 우리 모두가 모델로 삼을 만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문제가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다윗에게도 우리처럼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니, 그는 우리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 문제들을 해결했을까요? 그가 쓴 시편 16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않으리로다(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will not be shaken).” (8절) 여러분, 다윗이 항상 그의 앞에 모셨던 분! 다윗이 그가 내 오른쪽에 계신다고 했던 분, 그래서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고백했던 그분이 누구일까요?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의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8/28/2022 |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Jesus Is The Living Stones
베드로 전서 2:1-6
한주간도 잘 지내셨지요?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밤낮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성령 강림절기를 보내고 있는 케임브리지 교우들 삶에 성령의 바람이 감싸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9월이면 새학기도 시작되고 새로운 낯선 환경을 마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반복되는 일들 속에 무심히 9월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이처럼 같은 시간을 살아도 서로의 마음의 온도는 저마다 다릅니다. 우리는 마음의 온도차에 주목하며 실망하기도 하고 답답해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접속되는 순간 마음의 밭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누군가의 마음 밭은 싹을 내지도 못하는 땅이 드러나고, 혹은 싹은 내는데 곧 말라죽는 땅이 드러나고, 어느 정도 자라지만 곧 결실을 맺지 못하는 땅도 드러납니다. 케임브리지 교우들은 말씀에 반응하여 100배의 결실을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우리가 떠난 자리에 주님만이 드러날 수 있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현실속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주의 이름이 높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난 가운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우리는 죄가 가득한 연약한 존재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악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악한 감정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악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순수해 보여도 죄를 지닌 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0) 라고 하십니다. 본문에도 보면 죄를 먼저 열거 하는데 첫째는 악과 거짓이요, 둘째는 위선과 시기이며, 마지막으로는 험담을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2:1)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서 없애라고 하십니다. 외식과 시기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죄이며, 험담하는 말은 언행에 관련된 것으로 성경에서 가장 많이 경계하고 있는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입니다.
왜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기 전에 이러한 내적인 죄를 자각하라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어떤 불의도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악과 거짓을 버려야 합니다. ‘버려야 한다’를 원어 성경에 보면 ‘아포떼메노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1.‘관계를 끊다’ 2. ‘벗어 버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 위선과 시기, 험담하는 자리를 끊어내지 않으면 사랑의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보통 시기와 험담은 자신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증폭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게 되면 우리는 자기확신에 열광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벗어 버리다’ 입니다. 우리는 죄의 옷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옷은 단지 걸치고 있는 것일 뿐 몸의 일부는 아니지요. 악과 거짓, 위선과 시기, 험담하는 말은 옷일 뿐입니다. 이것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거룩이 없는 사랑은 죄로 인해 반드시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악과 거짓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조건도 없고 제한도 없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바울이 왜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하고 있지요. 우리는 순수한 사랑에 가까이 나아갈수록 마음이 거룩해지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시 죄의 옷은 자연스레 벗게 됩니다.
생명의 탄생은 참 신비롭습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과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충만은 컵에 물이 채워지듯이 일시적으로 채우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의 성품과 인격,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게 될때에 생명의 말씀이 우리의 전인격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충만함은 일시적인 감정의 확신이 아니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일입니다.(벧전 2:2) 갓난아이에게는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 어미의 사랑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최고의 양식인 영적 예배는 필수적이어야 합니다. 영적예배를 통해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며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이 일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해집니다. 바울은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두렵고 떨림을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다 알 수는 없지만 교만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그리스도만이 가장 공평하시고, 가장 위대하시며, 모든 것에 으뜸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작은 그릇에, 자기애로 가득한 옹졸한 그릇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벧전 2:3)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은 이전에 알지 못하던 것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분의 성품으로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거듭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말하는 것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들은 그분의 성품과 행동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게 되고 주안에서 형제를 대하는 작은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AD 30년 경에 육신으로는 단 한번 활동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기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분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그분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예수께서 하신 일을 지속하고 계시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 있게됩니다. 그러니 거룩함은 외적인 분리됨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 내면의 변화, 마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식당에 가보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친절한 직원을 만나면 우리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피곤에 찌들고 일의 불평이 있는 직원은 당연히 불친절 할 수 밖에 없지요. 우리는 어떠한 얼굴과 모습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을 생각할 때에 죄로 물든 마음에 일평생 수만가지의 감사가 솟아 오르고, 세상의 근심과 복잡한 현실속에 있는 우리에게 성령께서는 하늘의 기쁨을 마음에 퍼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 가득 지속적으로 채워지도록 나의 손과 발이 나의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대하듯 형제를 사랑 하십시요.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사로 거룩한 제사장으로 세상속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 하시 않으시고 너희는 소금이라 빛이라 하셨습니다. 이미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돌을 버렸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머릿돌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귀한 존재로 그분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로 오십시오. (벧전 2:4)
길가에 버려진 돌들은 참 투박하고 평범합니다. 그러나 수석가들은 돌에 담겨진 자연을 본다고 합니다. 돌 속에 담긴 자연의 생명을 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산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원 역사의 반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아무리 투박한 돌이라 해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게 되면 그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면 보잘 것 없는 인생이 존귀한 인생이 되어지고, 욕망을 따라 살던 옷을 벗어 버리게 되니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욕심과 이기심으로 형을 속이고 나서 불안과 두려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기나긴 나그네 길에 오릅니다. 도망치듯 빠져나온 고향집을 뒤로 하고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 286마일의 머나먼 여정길에 오르게 되지요. 얼마간을 걸어서 칠흑 같은 밤이 되었을 때 한 장소에 도착합니다. 이때 야곱은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하지만 그곳은 야곱의 일생에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였습니다. 아무도 반겨주는 이가 없고 노숙을 하며 인간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바로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베고 자던 투박한 돌 베개에 하늘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훗날 기둥으로 세운 그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되었습니다. 바로 벧엘이라는 장소입니다.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세계 최대의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제1호 보물은 그리스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는 “로제타 스톤”이라는 돌이라고 합니다. 로제타 스톤에는 세 종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 문자는 인류의 숙제인 고대 이집트 문자를 풀게 해 주었답니다. 그래서 세상에 가장 값진 보물이 되었습니다. 1799년 나폴레옹 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처음 발견하였을때는 누구도 그 돌이 큰 보물인 줄 몰랐다가 새겨진 문자에 의해서 값비싼 보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돌 같이 단단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은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게 되면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아도 그것은 구원을 이뤄가는 삶이 아닙니다. 굳은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와 험담하고 싶은 마음을 제거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존중하는 마음을 갖어 보십시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지요. 그래서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의 권위가 그분에게만 있으니, 우리는 포도나무요, 사랑이신 주께 붙어 있을때,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을 지닌 산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잘 보살피라고 권면하지 않습니까? (행 20장 17절) 교회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부족해 지면 영적 빈혈이 생기고 본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당신의 집이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세상에 증언 되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먼저 그 길을 걸어 가셨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에 있지요. ‘결국엔 하나님의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생각을 이야기하지만 결국엔 우리는 모두 외로운 존재이며, 근원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에 목말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즉 사랑과 사람이 삶의 본질임을 말해줍니다. 주님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생의 중심에 사랑이 중요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 안에는 참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져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퍼 주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말씀이 되어 마음에 새겨지니 새 생명이 잉태되고, 새로운 삶으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 말고 다른 기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삶의 반석이 되지 않으면, 모든 삶은 결국 허물어집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와 명예를 얻을지라도 인생의 마지막은 허망함입니다. 예수님이 앞 서 가신 길을 알지 못하니 스스로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베드로도 처음에는 그 길을 알지도 못했고 걷지도 못했습니다. 참 사랑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돌이 되시는 예수를 체험하고 만나고 나서는 고난 속에서도 낮아지신 길, 섬기신 길, 자기 희생의 길로 나가셔서 하늘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주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 되시오니, 지도에 없는 길을 걷는다 해도 주께서 걸으신 발자욱만 보고 따라가다 보면 주의 은총이 우리를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벧전 2:6)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는 불안정한 로마시대에 고난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반석이 되시며 산돌이 되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있는 사람들, 선한 목자가 내 이름을 알고 계신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하나님과 관계속에서 포도나무에 끝까지 붙어 있는 가지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결국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고는 교회 공동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보이는 교회를 남기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건물을 더 중요시 하는 어리석음을 보였기에 예수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세울 것이라 하시고, 당신의 몸이 성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주님은 목마른 자들의 생수가 되어 주시고, 낮은 곳 모퉁이에 세워진 사방을 연결하는 머릿돌이 되십니다.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산돌들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로 함께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은 개인적인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은 회중들 속에서 부르신 사명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아는 태도로 공동체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길이 닦여지고 많은 이들의 살아나면 좋겠습니다. 소금은 맛을 잃어 버리면 한낱 모래알에 불과해 길가에 버려 집니다. 내 손에 쥔 말씀의 등이 빛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장애물에 걸려 넘어집니다. 빛이 드러날때에 마음의 불편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것입니다. 세상의 성공과 욕망은 모래 위에 성과 같아서 결국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사람의 감정은 어디로 불지 모르는 바람과 같습니다. 무엇을 기초로 하여 인생의 돌을 쌓아 올리시겠습니까? 산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기본과 기초로 삼고,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를 함께 지어져 갈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이들에게, 애썼다고, 고맙다고 토닥여 주며 격려해 주십시요. 그리고 스스로 격려하시고 서로를 격려해 주십시요. 나의 말투, 작은 습관, 행동과 눈빛, 태도 아주 작은것까지도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하여 주시는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선한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이 확신을 붙들고 나아가려합니다. 이 여정속에 함께 하는 여러분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걷는 길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에 기쁨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21/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1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16, 19
한자 사자성어에 ‘신신당부(申申當付)’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듭하여 간곡히 당부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에 ‘entreat’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를 영어로 ‘Deuteronomy’라고 합니다. ‘deutero-‘라는 말은 ‘두 번째(second)’라는 뜻입니다. ‘-nomy’라는 말은 ‘법(law)’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고 그들의 자녀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출애굽 2세대들에게 그들의 부모들에게 했던 출애굽기와 민수기 말씀을 다시 한번 가르친 것이 ‘신명기’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명기’를 한자로 쓸 때 ‘申命記’라고 쓰거든요? ‘申’자는 ‘신신당부’할 때의 ‘신’자와 같습니다.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제발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가나안 땅의 풍요로운 삶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꼭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한 책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All authority has been given to me in Heaven and in the earth; in the manner in which my Father has sent me, I am sending you(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마태복음 28:18,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말씀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all authority(모든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출애굽 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의 농경문화의 풍요로움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아무리 ‘신신당부’해도 부모님의 당부를 깜빡 잊어버리고 지키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말을 꼭 지켜 달라고 ‘신신당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권위를 가지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우리는 ‘The Great Commission(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우리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어떤 상황에 있든지, 반드시 수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의미를 잘 알았기에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디모데후서 4:2) 이 말씀을 Amplified Bible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Preach the word [as an official messenger]; be ready when the time is right and even when it is not [keep your sense of urgency, whether the opportunity seems favorable or unfavorable, whether convenient or inconvenient, whether welcome or unwelcome] 말씀을 전하기에 좋은 때든지 아니든지, 항상 말씀을 전해야 하는 긴급함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우리에 좋게 돌아갈 때가 있고, 좋지 않게 돌아갈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상황이 있고 불편한 상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환영받을 때가 있고 환영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핑계대지 말고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전파의 긴급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년에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히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상명령’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내가 감옥에 있으나,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있고, 나를 돕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전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전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기뻐하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14-15, 18)
여러분,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라는 탐 크루즈(Tom Cruise)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를 보셨지요? 지금 6편까지 나왔고요. 8편까지 이미 예고가 된 영화입니다. 1편은 1996년 5월에 상영되었습니다. 탐 크루즈가 CIA 본부에 들어가서 컴퓨터를 해킹해서 동유럽에서 활동하는 첩보원들(NOC)의 명단을 빼낸다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이단 헌트(Ethan Hunt)는 이 명단을 가지고 무기 밀매상 맥스(Max)와 연계되어 있는 CIA 내의 내부 첩자 코드명 ‘욥’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주인공 이단은 그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CIA 비밀 정보를 다루는 방으로 침투해 들어갑니다. CIA에 들어가서 정보를 빼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Mission impossible(불가능한 임무)’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이단 헌트는 이 불가능한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1편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몇 개 보여 드리겠습니다.
철통 같은 보안시설이 되어 있는 CIA 본부에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불가능한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러다가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지상명령’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권세’를 가지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지상명령’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보 하나를 빼내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겠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Go and make disciples of all the nations①/①Or all peoples (마태복음 28:19)”고 명령하셨습니다. ‘모든 민족’이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πάντα τα ἔθνη’라고 되어 있습니다. ‘ἔθνη’라는 말은 영어의 ‘ethnicity’입니다. ‘ethnic group’이라고 하면 같은 문화와 언어, 역사, 종교를 공유하는 그룹을 말합니다. 2022년 현재 세계에는 193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 안에 수천개의 ‘ethnic group’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을 나의 제자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서 이 사람들은 나의 제자로 만들라고,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의 기독교 선교 단체들이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수행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은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17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미국 장로교 선교사)나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 1858-1902, 미국 감리교 선교사) 같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덕분에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 노방 전도를 하고,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후반에 ‘하나님의 선교(The Mission of God)’라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라틴어로 ‘미시오 데이(Missio Dei)’라고 합니다.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낼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나오면서부터 선교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우리를 내보내시는 모든 삶의 현장이 선교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이렇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하면서부터 ‘섬김(service)’이라는 개념이 선교의 핵심 개념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선교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김을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신 것처럼, 선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섬김’의 삶을 통하여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는 마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너희는 세상으로 들어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마가복음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대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Go into all the world)”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10여년 전에 이 말씀을 보스턴 다운 타운에 있는 구세군 본부에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보스턴에 한국 구세군 사관이 한 분 발령을 받아서 오셨습니다. 그 분을 만나야 할 일이 있어서 1층 로비에서 그분을 기다리면서 여기 저기를 둘러보다가 한 쪽 벽에 영어로 쓰여 있는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하면 주로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데, 마가복음으로 읽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대한 말씀은 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go into’라는 말이 마음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안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간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단순히 들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학교 강의실이 될 수도 있고, 그곳이 일터가 될 수도 있고, 손님을 맞이하고, 손님과 인사하고 대화하는 비즈니스 현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 그 자리가 가족이 함께 식사하고, 서로 대화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자리가 친구들과 함께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떠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지상명령’ 속에 나오는 “Go into all the world(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세상 속으로 들어갈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는 목적을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크리스천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선한 영향력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Work willingly at whatever you do, as though you were working for the Lord rather than for people).” (골로새서 3:23) 얼핏 보면 이 말씀이 소극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씀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최근 들어 크리스천의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누가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참 시대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우리 시대에 가장 적절한 선교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영향력’이라는 말을 직접 쓰시지는 않았지만, 이미 제자들의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4, 16)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씀 아닙니까?
2,000년 전에, 지금의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에서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기들끼리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신자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1세기에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pestilent fellows (사도행전 24:5, KJV)’라고 욕을 먹었습니다. 전도자들을 무서운 전염병인 ‘페스트를 퍼뜨리는 놈들’이라고 욕을 한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교회의 담임 목사인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가 쓴 ‘Becoming a Contagious Christian(1996, Mark Mittelberg와 공저)’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1세기의 전도자들은 ‘Contagious Christians’였습니다. 이들과 접촉하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감염되듯이 모두 복음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 1세기의 전도자들은 그들 스스로를 가리켜 ‘예수님의 향기(the aroma of Christ, 고린도후서 2:15)’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Travis Scott의 말이 생각납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닮으려고 함으로써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자기 정체성(identity)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침투해 들어가서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섬김의 삶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서 사람들을 전염시키는 ‘Contagious Christian’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크리스천다운(Christian-like)’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에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