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8/14/2022 |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The Gospel is Jesus Christ
로마서 1:1-5
거룩한 주일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시는 교우분들을 이 시간 축복하고 싶습니다. 또한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 분들의 예배의 현장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룩해 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무너진 나의 마음이 회복되어지는 자리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귀한 은혜를 경험하시는 시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일어나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함으로 고백 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많은 이들이 로마서 복음을 통해 변화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로마서 복음을 통해서 삶의 근본을 바꾸었습니다.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150 A.D.- 215 A.D), 이그나티우스(Saint Ignatius of Antioch; 70 A.D – 107 A.D), 저스틴(Justin Martyr 100 A.D - 165 A.D), 폴리캅(Polycarp 69 A.D - 155 A.D) 등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입니다. 교회의 아버지이지요. 그들의 생애에 대한 자료들은 부족하지만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들이 로마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완전한 진리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임을 강조하며 기독교 역사속에서 순교자의 반열과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부들이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걸을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도 로마서의 복음을 사랑했습니다. 신학의 아버지 성 어거스틴(St. Augustinus, 354-430)은 로마서 13장 말씀을 통해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회심하였으며, 감리교 창설자인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 - 1791)는 1738년 런던의 어느 집회에서 로마서 서두를 읽고 설교하는 것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로마서는 성경 전체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새 언약(즉 복음)의 가장 완벽한 개요’ 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로마서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선배들의 생애에 영향을 미친 로마서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계시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 로마는 도적적으로 매우 부패했고 죄가 가득했지요. 옳고 그른 것이 혼돈되어 버렸고, 수없이 많은 부정이 횡행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로마에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십니다. 역사적 보면 이 하나님의 계획은 놀라운 섭리입니다. 당시 로마가 제국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복음이 온세계에 증거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현실의 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 나라의 순교자들이 죽어진 것 같지만 결국 로마제국은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말씀이 더욱 흥왕해 졌습니다.
오늘날도 거대한 세속의 물결이 기독교 복음을 위협합니다. 이 시대는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라 말합니다. 상대적 진리가 편만해진 시대이지요. 절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 진리로 삼는 것이 오늘날 시대 이념에 맞지 않고 옳지 않다고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절대’ 라는 말을 외치기 참 어려운 시대이지요. 우리 사회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누룩처럼 퍼진 자유주의 사상이 미국 땅에 이미 오랜 전부터 상륙했습니다. 신앙인들 조차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재들을 보는 눈을 잃어 버렸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을 망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출발점이 전적인 인간의 무능함에 있다는 생각들도 깨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더 복잡해 진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림을 찾아 보았는데, 첫번째 그림을 보십시요. 마치 저마다 옳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갖지 않습니까? 두번째 그림은 낭만주의 러시아 화가 카를 브룔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라는 그림입니다.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인데요. 저는 아마도 소모과 고모라의 멸망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은 그 성 안에 의인이 한사람도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 당시의 문화적, 사회적 기준으로 보면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오늘날도 성적인 가치관에 있어서 다수의 생각이 시대적 흐름이 되고 풍조가 되어지게 되면 진리를 말하기가 어려워 지는 것처럼 당시도 도덕적 타락이 편만해 져 있었을 테니 옳은 것이 그른 것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것도 옳다고 여겨지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상대적 진리입니다. 상대적 진리가 편만해지면 예수님의 진리도 인간의 이념 안에 갇혀 버리게 되지요. 이것이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 다양한 복음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번영신학으로 시작된 탐욕과 욕망의 복음, 수많은 이단 사상들이 전하는 거짓 복음, 상대적 진리의 이념으로 인간과 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이념적 복음, 진리에 이르는 길이 다양하다는 다원주의 복음 등 세속화 되어가는 물결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학을 무너뜨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대중적 복음일까요? 아니면 순수적 복음일까요? 예수님 주위에는 항상 수많은 군중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르심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은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 13 – 14) 좁은 길로 가는 이가 적은 이유는 분명 버려 할 것들이 많고, 낮은 자의 모습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합니까? 예수의 종이라 소개 합니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주인과 종의 관계가 있어서, 종들은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살았습니다. 당시 종들은 스스로 신분에서 벗어날 수도 없었습니다. 천한 노예의 신분이 세습이 되어지니 평생 살아가며 희망도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종이라 하면 이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부르심을 받은 사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따로 세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의 종을 붙드십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스스로 하나님의 종 된 나 바울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의 은혜와 복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와 복을 경험한 바울은 당시 주인이던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사랑하는 형제로 대해 주라고 편지합니다.(빌레몬서 1:16) 이것이 빌레몬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종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형제 된 관계가 되었으니 너의 종 오네시모를 기독교인으로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 종의 제도가 통용되던 사회였을 텐데 그 당시 바울은 주안에서 형제됨이 무엇인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어떻게 부르시는지? 복음으로 변화 된 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도 보이지 않는 계층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공평한 사회를 외치는 것도 현실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릅니다. 하나님 안에서 더 깊어질수록 낮은 자의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1-12) 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리 예수님을 마음으로 닮아가는 장소이지요. 예배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신격화 시키려는 내 마음을 지키겠다는 선언이며,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려는 내 마음의 깨뜨림입니다.
한주간도 세상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다가 주님의 날 예배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합니다. 믿음 앞에 온전히 바로 섰다고 생각했지만 작은 문제 앞에서도 무너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성숙함으로 기도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자들을 외면하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회복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자기 포장과 자기과시의 가면을 쓰고 살며, 신비와 거룩함이 가려진 우리의 모습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깨달은 한 사람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사도행전 8장 보면 에티오피아의 모든 국고를 맡고 있는 여왕의 내시가 예루살렘을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는데 복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큰소리로 읽어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오늘날이야 성경이 저렴하고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고 하지만 당시는 큰 파피루스나 양피지 재질에 기록된 성경이기에 값비싼 것이었지요. 왕실의 재무부 장관 정도의 직책이니까, 오늘날로 보면 몇 천만원 가치의 주석 성경을 구매해서 읽고 또 읽고 있지만 깨달음이 없고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돈으로 깨닫거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나타나 ‘너는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하십니다.’ 이 거리는 대략 44마일 정도의 거리인데, 빌립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길에서 에티오피아 내시와 만남을 갖게 됩니다. 시간과 방향이 완벽한 타이밍이었기에 이 둘은 만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는 자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에는 오차가 없는 것이지요.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은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놓치면 마음이 불안한 것처럼 평안함으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붙드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현장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완전한 진리이신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에티오피아 내시가 복음을 깨닫고 길을 가다가 세례를 받게 되지요. 그리고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게 됩니다. 에티오피아 내시는 아마도 자신의 나라로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겠습니까?
행 8:29-31 _29 성령이 빌립에게 “저 마차로 가까이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30 빌립이 달려가서 그 사람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지금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31 그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제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빌립에게 마차에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부탁했습니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 구절로부터 시작해서 그 사람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쉬운성경)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복음에 대한 진리로 꽉 차 있기에, 온세상을 압도하는 진리는 역사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흘러갑니다. 순종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작은 순종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시는 분입니다. 루터에게 순종은 수도원을 떠나 종교개혁의 깃발을 드는 것이었고, 헨리 나우웬에게 순종은 하버드 대학 교수의 자리를 떠나서 토론토 장애인 공동체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나니 이전에 가던 길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자신이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었습니다.
우리도 불완전한 세상이라는 도성과 천국의 도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죄와 시험을 이기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복음에 대한 눈이 떠져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마음은 외적으로, 내적으로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가지요. 하나님의 존재를 닮은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에서 오염된 물을 마시는 것을 그치고 복음을 받아 들이게 될 때에 비로소 새로운 여정으로 들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칭의’는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순간,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인생의 주인이 달리지는 변화의 사건입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은 이것을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 말합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교우 여러분, 복음을 만난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참 평화가 있습니다. 분열과 분쟁이 그치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공동체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 교우들 한사람 한사람이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의 ‘복’은 히브리어로 ‘아쉬레’인데 이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 인해 이미 복된 존재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소유로 인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계십니까? 사람은 자기가 인식한 것이 삶의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심 받은 사도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선택 받아 세워진 자로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종의 삶에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고난이 와도 흔들림 가운데에 종의 손을 잡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새로운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일을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푯대를 향해, 부르심의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이 한 사람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미국 부흥운동의 중심역할을 했던 믿음의 거장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Jonathan Edwards 1703~1758) 그는 성령 체험이후 미국 교회의 회심의 불을 붙인 청교도 목사입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회의를 품다가 확신을 갖게 된 말씀이 있는데, 바로 디모데 전서 1장 17절입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 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 무궁토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확신을 품은 에드워즈는 스물 살 때 “나는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갖게 된 사람의 겸손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굉장히 위험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평탄할 길을 걷고 있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춰야 합니다. 하지만 순탄치 않는 길을 걷는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우리는 갈급함에 허덕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의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는 것이지요.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미지근해진 마음 가운데, 믿음으로 시작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7/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10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If You Believe, You Will See God’s Glory
요한복음 11:33-43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시원한 환경 속에서 예배를 드리면 좋은데, 지난 주에 에어컨 작동 안 하는 것이 있어서 고쳤습니다. 오늘은 본당이 비교적 시원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오늘은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 열 번째 시간으로 ‘믿음’에 대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의 설교를 통해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많이 들어서 잘 아는 말 같은데, 무엇을 믿는 것인지, 믿음의 대상은 누구인지, 믿음의 결과는 무엇인지, 믿음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 나오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히브리서 11:6 말씀인데요.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이 말씀 속에 믿음에 대하여 꼭 알아야 할 것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우리의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할 수 있으면,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제가 믿습니다! 제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마가복음 9:22-24) 이 아버지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악한 영이 들어가서 시도 때도 없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는 “저러다가 내 아들이 물 속에 빠지고 불 속에 넘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한 나머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Anything is possible if a person believes).” 여기서 ‘믿는 사람’이란 무엇을 믿는 사람을 말할까요? 한번 답을 찾아보세요. ①자기 아들의 병이 나을 줄로 믿는 사람 ②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다. ③이 아버지에게 아들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이 부족한 것을 지적한 말이다. ④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을 말한다.
언젠가 제가 ‘believe in’이라는 말의 의미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영어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I believe in God”이라고 하거든요? Merriam-Webster 사전에 보면 ‘believe in’에 세가지 의미가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1) To have faith or confidence in the existence of God (하나님이 계시다고 확신하는 것) (2) To have trust in the goodness or value of God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는 것) (3) To have trust in the ability of God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것)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1:6에 나오는 말씀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미국 화폐에 “In God we trust”라고 작은 글씨로 씌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24)”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재물’이라는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μαμμωνας (맘모나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맘몬’입니다. 영어는 ‘mammon(매먼)’이고요. 예수님은 이 ‘맘모나스’를 의인화시켜서(to personalize) 돈이 사람을 지배하면 그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을 세운 믿음의 선조들은 돈에 경고문을 써넣은 것입니다. 돈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요.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돈에 그런 경고문을 써넣은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둘째로, 히브리서 11:6 말씀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진실하게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자기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서부터 하나님께서 해 오신 약속입니다. 보세요.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And you will seek Me and find Me, when you search for Me with all your heart).” (예레미야 29:13)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But from there you will seek the LORD your God, and you will find [Him] if you search for Him with all your heart and all your soul).” (신명기 4:29) 두 말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속한 모든 교우들이, 그리고 특별히 청년들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일에 온 마음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youthful lusts)’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디모데후서 2:22). 여러분, 다윗이 쓴 시편 말씀을 한번 들어 보세요.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Blessed are the people whose God is the LORD).” (시편 144:15)
이런 믿음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예루살렘 가까운 곳에 ‘베다니’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 대해서는 특별한 소개의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주었던 사람이라는 바로 마리아였다고 합니다. 마르다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던 예수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 대접을 했습니다(누가복음 10:38-42). 그리고, 나사로에 대해서는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Lord’s dear friend, 요한복음 11:3)’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로가 매우 위독하다는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만사를 제쳐 두고 베다니로 달려가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5-6)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을 보면 그 때 제자들도 왜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는지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이나 지난 후에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베다니에 가 보니 나사로는 이미 죽은 지 나흘이 된 때였습니다. 오빠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슬픔에 싸여 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격한 감정이 들어 몹시 마음 아파하셨고(요한복음 11:33)”,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Jesus wept)(요한복음 11:35)”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to the point of anger at the sorrow caused by death] and was troubled(그는 [죽음으로 인한 슬픔에 대해 분노할 만큼] 심령이 깊이 감동되어 근심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수님께서 왜 슬퍼하셨고, 왜 분노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슬퍼하셨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 중에서 가장 큰 연약함은 죽음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인용합니다. 인용할 때는 꼭 그 사람이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 년도를 찾아서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몇 주 전에 소개했던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같은 천재 화가는 1853에 나서 1890년 죽었습니다. 37살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렸던 기간은 10년에 불과합니다. 참 아깝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연약함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면서 슬퍼하신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의 무지(無知)를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요한복음 11:25)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살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말씀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요한복음 11:40)
마르다는 예수님이 언젠가 말씀해 주신 이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퀴즈를 해 볼까요? 예수님께서 “If you believe(네가 믿으면)”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믿으라는 말인가요? ①하나님의 영광을 볼 줄로 믿으라는 말이다. ②무엇을 믿으라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③하나님의 영광을 불신하지 말라는 말이다. ④ “나를 믿으면(if you believe in me)”이라는 말이다. 이 중 몇 번이 정답인가요?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id I not say to you that if you believe [in Me], you will see the glory of God [the expression of His excellence]?” ‘glory of God’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탁월하심에 대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탁월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시는 최선의 것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성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Faith is to believe what you do not see; The reward of this faith is to see what you believe(믿음은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주어지는 보상은 당신이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해 주신 일 중에 가장 탁월하신 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But to all who did receive him,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요한복음 1:12, English Standard Version)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신 것입니다. ‘right’라는 말 대신 ‘privilege(특권)’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일이 얼마나 놀랍고 흥분된 일이길래 요한은 이런 ‘특권’이라는 단어까지 사용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의 상속자들(co-heirs with Christ)’이 된 것입니다.” (로마서 8:17) 예수님을 믿기 전 ‘죄인’이었던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상속자’로 신분이 격상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즘에 ‘최애(最愛, bias)’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최애 영화’ ‘최애 책’ ‘최애 노래’ ‘최애 음식’ ‘최애 친구’라는 말을 씁니다. 요한복음 11:40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여러분의 ‘최애 말씀’으로 한번 삼아 보시겠습니까? 생각했던 대로 일이 잘 안될 때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힘을 내시시기 바랍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도 금방 베다니로 달려가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수님의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음을 믿게 하기 위하여(so that they will believe you sent me)” (요한복음 11:42) 그래서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씀을 증명하시려고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도 우리가 완전히 절망하도록, 우리가 죽기를 기다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절망은 그냥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7/31/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9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 Make A Good Influence On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요즘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7절).” 그리고 이 말씀 앞에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예전에 최일도 목사님이 리뉴에 강사로 오셔서 이런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최 목사님이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하용조 목사님이 자꾸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거슬려서 손을 들고 “목사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천 잡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님의 지적 때문인지 잡지 이름이 1999년 4월 호부터 ‘소금과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 ‘빛과 소금’이든지 ‘소금과 빛’이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Travis Sco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 인사이트를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과 트렌드를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2:2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더 이상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하여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들을 보십시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처에 많은 위험들이 있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뛰어오르는데, 곰들이 입을 벌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어들이 자기들이 태어난 강 상류로 가서 알을 낳는 것은 타고난 본능(本能, instinct)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평균 1,000마일(1600km)을 여행한다. 온갖 상처를 입으며 강물을 역류해 올라가는 고난을 감수한다. 연어는 알을 낳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알을 낳으면 그 생을 마감한다.” 연어의 이런 본능이 마치 이 시대의 사상과 유행을 본받지 않고 거슬러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크리스천들의 운명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교제(fellowship)’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혼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같이 드리는 예배가 필요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 옆에 앉은 형제와 자매와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의 필요성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연대의식(連帶意識, solidarity)’을 갖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교회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크리스천으로 가져야 할 바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2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좋은 습관도 나쁘게 됩니다.” 두 말씀 모두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세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대해서도 똑 같이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에 ‘~에 속한’이라는 뜻이 있지만 이 경우는 ‘~에 속한’이라는 뜻보다는 ‘specific identity within a category’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하고 있을 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유지할 때 맛을 낼 수도 있고, 썩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 소금의 ‘짠 맛’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소금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땀을 많이 흘리면 우리 몸이 짠 음료수나 짠 음식을 원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 산양들이 왜 이렇게 위험한 절벽에 붙어 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바위에 붙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먹기 위해서 이 산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이 소금의 정체성이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Danie & Jessi 두 사람이 공동으로 “How to Be a Christian Influencer(크리스천으로 영향력을 갖는 비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선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먼저 “건전한 신학을 가져야 한다(Make sure you have good theology)”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건전하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good theology)’은 마치 인정받는 회사에서 나온 제품과 같습니다. 저는 신학서적이나 신앙 서적을 살 때 제일 먼저 이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 출판사를 봅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그럴듯해 보여도 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와, 이런 좋은 글이 있다니!” 하면서 저자가 누구인지 봤는데 누군지 이름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을 봤더니 굉장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가는 교회를 봤더니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일명 몰몬교)’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이단 종교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의 글을 설교 시간에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믿음이 건전한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희생(sacrifice) 정신’입니다. ‘희생’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ransom)’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내 준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고린도전서 6:20, 7:23) 이 은혜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갖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희생’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희생’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Kenneth Blanchard라는 사람의 말인데요. “The key to successful leadership today is influ-ence. not authority(오늘날 성공적인 리더십을 위한 핵심 단어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다).” 참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한순간에 ‘권위주의’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어디에서도 ‘권위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권위주의 리더십’ 대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말합니다. 구성원들을 내 몸같이 돌보고,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선한 행동(good deeds)’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전통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베드로후서 1:9, 현대어 성경) ‘근시(近視, shortsighted)’는 가까운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베드로는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선한 행동’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메시야’ ‘천지창조’ 같은 작품들을 ‘걸작품(masterpiece)’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건전한 신학과 희생, 그리고 선한 행동, 이런 것들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교회를 지을 때 예수님 말씀 대로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지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면 온 동네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1965년부터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44년 간 하바드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세속화되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논의한 책입니다. 그가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그 책에서 다루었던 교권 세습 문제, 성장제일주의, 교회의 대형화 경쟁 등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Harvey Cox는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익명성(anonymity)’을 들었습니다. Harvey Cox 말이 맞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군중 속에, 대중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큰 대형 교회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산 위의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익명성’이라는 시대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7/24/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8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If You Can’t Understand This Parable
마가복음 4:1-9
예수님의 비유에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가 매우 짧습니다. ‘탕자의 비유’같은 것은 비교적 길지만, 대부분의 비유들은 길이가 매우 짧습니다. 둘째로, 대부분의 비유가 “천국은 마치......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is like)”는 말로 시작합니다. 셋째로,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는 생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비유에는 울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유들이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나라구나!” 하고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클레멘트(Clement, 150-215, 그리스), 오리겐(Origen, 185-253, 이집트),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allegorical) 해석을 했던 전통이 있습니다. 최근에 비유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은 비유의 본래 뜻을 해치기 때문에 삼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비유풀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단 ‘신천지(新天地)’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린 것을 알면 적극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서 ‘비유풀이’를 가르칩니다. 이 ‘비유풀이’가 바로 예수님의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자기들 유리한대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The Parable of The Sower)’입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 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선택한 이유는 이 비유가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는 입문(入門)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비유를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If you can't understand the meaning of this parable, how will you understand all the other parables)?” (마가복음 4:13) 이 비유를 잘 듣고 잘 깨달으면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빈센트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린 ‘The Sower(씨뿌리는 사람)’라는 그림입니다. 고흐는 같은 이름으로 30개 이상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Sunflowers, 1889)’ 그림이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이라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고흐가 왜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을 그렸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흐는 한 때 목사가 되려는 생각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할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고흐는 전도사 시절에 탄광촌을 찾아가서 가난하고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그의 열정과는 달리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허락했는데, 신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지는 바람에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워낙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떨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한 이후부터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흐가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린 것은 1888년이라고 하는데요. 그 때 고흐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갱의 말에 의하면,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상상력(imagination)을 사용해서 그렸습니다. 그리고 감정과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흐만의 독특한 색깔을 사용했습니다. 하늘을 녹황색으로, 들판을 자주색으로, 태양을 밝은 노란 색으로 그려서 마치 ‘씨 뿌리는 사람’ 뒤에서 빛나는 후광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씨 뿌리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이도록 처리했습니다. 고흐는 생명의 씨앗을 밭에 뿌리고 거두는 농부의 삶을 거룩한 성직(聖職)으로 본 것입니다. 화가로서 고흐는 밀레(1814-187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요.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역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한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데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흙이 없는 돌짝 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가시 덤불 속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날아와서 금방 먹어버렸고, 흙이 얕은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은 겨우 싹이 났지만 흙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었습니다. 가시 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 때문에 자라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9절)” 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 끝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 보라. 이 이야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하였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주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11-12절, 이사야 6:9-10에서 인용함)
이 말씀은 성경 말씀 중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도록 해 주는 사람들은 ‘열 두 제자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the twelve disciples and the others, 11, 12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게 하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outsiders, 11절)’입니다.
문제는 과연 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날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서 예수님은 호수에 배를 띄우고 배에 앉아서 해변에 앉은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셨을까요?
예수님께서 ‘outsiders(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outsiders’가 누구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마가복음 3:22에 있는 말씀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ho had arrived from Jerusalem)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 예수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님은 이 때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에 들렸다는 이 소문에 얼마나 강력했든지 예수님의 가족들 조차도 예수님이 정신이 나갔다고 믿을 정도였습니다. 지도자들은 여론에 민감하고, 사람들의 인기에 민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갈릴리 지방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비가 되어 못쓰는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헤롯 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3:2, 5, 6)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시기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소문을 낸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파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항상 이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사람들은 그 때도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좋은 일도 나쁜 일이라고 보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일도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어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보고했습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증거를 수집할 목적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outsiders’입니다. ‘deliberately(일부러,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씨앗은 좋은 땅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도, 돌짝 밭에도, 가시덤불에도 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 밭의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집니다. 당장에 우리가 기대한 대로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마음 밭들이 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마음 밭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outsiders’가 아니라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거기서 싹이 나고 뿌리가 나서 열매를 거두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나 아볼로나 주님께서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I planted the seed in your hearts, and Apollos watered it, but it was God who made it grow. It's not important who does the planting, or who does the watering. What's important is that God makes the seed grow.” (고린도전서 3:5-7) 자신의 사명을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으로 인식한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거두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생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땅에 대한 비유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땅에 뿌리는 ‘The Sower(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중단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에게 의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고흐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성직(聖職)’입니다.
이 대화를 한번 들어 보세요.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 1883-1921): “마마, 우리 미국은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황후: “우리나라도 그렇게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릴리어스 호튼: “마마, 그러 하오나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황후: “그런 나라가 있다면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모두 가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와 그녀의 주치의로 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이 1894년 크리스마스 때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호튼은 당시 왕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장이들과 함께 한 15년)’이란 책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이 책은 2008년에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황후는 매우 총명해서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비록 복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의학, 과학, 수학, 철학, 신학 등 서구의 발달된 문명에 대하여 매우 호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자객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이 남습니다.
7/17/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7
그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His Words!
누가복음 15:25-32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모두 몇 개나 될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40개 정도됩니다. ‘비유’가 무엇인지, ‘비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a short story that teaches a moral or spiritual lesson, especially one of those told by Jesus as recorded in the Bible(윤리적인 혹은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짧은 이야기로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비유라고 한다).” (Oxford Learner's Dictionaries)
‘비유’는 그리스어로 ‘παραβολή(파라볼레, parabolē)’라고 합니다. ‘para-’라는 말은 ‘옆에, 나란히(alongside)’라는 뜻이고요. ‘bolē’라는 말은 ‘던지다(to throw, to cast)’라는 뜻이거든요? 두 말을 합치면 “옆에 나란히 놓다” “비교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려운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나란히 놓고 그 영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통찰(insight)이 있습니다. 생활 주변에서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자들이 부엌에 두고 빵을 구울 때 쓰는 누룩(yeast)이 있습니다. 누룩을 넣으면 밀가루가 부풀어 오릅니다. 예수님은 이 누룩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는 것이 꼭 이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누룩처럼 작은 우리의 헌신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작은 일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 네델란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학자로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은 예일 신학교의 종신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하바드 신학교의 초빙을 받아 실천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The L'Arche Daybreak Community)’에 채플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공동체에서 지체 부자유자들을 섬기면서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책으로 초기에 나온 책이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1989)’라는 책입니다. 가장 나중에 나온 책 중의 하나가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992)’이라는 책입니다.
1983년, 프랑스를 여행하던 나우웬은 ‘라르쉬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8, 네덜란드)의 그림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맙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원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그림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책이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인물은 중앙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고령의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넓은 어깨와 가슴을 가졌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깨에 두른 빨강 망또는 아버지의 고귀한 신분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에 초점이 없어 보입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의 눈이 눈물로 짓물러 거의 시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우웬은 아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두 손이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그려진 것을 주목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고운 반면에 아버지의 왼손은 투박하고 굵직한 힘줄이 보입니다. 마치 힘센 아버지의 손과 아들을 사랑과 용서로 감싸는 어머니의 손이 모두 보입니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아버지 품에 무릎을 꿇고 안겨 있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들의 머리는 짧게 깎은 것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는 태아(fetus)를 연상케 합니다.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평안한 모습을 렘브란트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prodigal living)’을 하다가 가진 돈을 모두 날렸습니다. 이 아들의 남루한 모습이 그의 방탕했던 생활의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신발 한 짝은 벗겨져 맨발이었고, 다른 신발 한 짝도 뒤꿈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했다.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 말해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로 여기십시오.’ 그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누가복음 15:17-20)
아버지에게 받아온 돈이 아직 남아 있었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고 먹을 것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A Long Way Off(아득히 먼 길, 2014)’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 제목에 이런 부제를 붙였습니다. ‘The Modern Day Story of The Prodigal Son(현대판 탕자의 이야기)’이라고요. 그리고, 포스터에 이런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We all know one, have been one, or are waiting for one to come home (우리 모두는 그 한 사람을 알고 있거나, 그 한 사람이었거나, 그 한 사람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조심해서 읽어보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작은 아들에게 돈이 떨어지자 때마침 그곳에 큰 흉년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맞을 때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눈으로 지금 작은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작은 아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7절) 아버지 집을 나간 그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탁월한 신학자이고 철학자입니다. 인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 철학을 주창하신 분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1976), 카뮈(Albert Camus, 1913-1960) 등이 모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신학의 기초를 세운 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1843)’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 1843)’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 1849)’ 등이 유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most common form of despair is not being who you are(가장 흔한 절망의 형태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이 작은 아들을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가 절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작은 아들이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한 그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무엇이 작은 아들로 하여금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도약하게 했을까요?
아버지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의 뒷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른쪽 허리춤에 단도(a short sword)를 차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왜 이 작은 아들은 단도를 차고 있을까요? 객지를 나돌다 보면 위험한 순간들이 많으니까 호신용으로 차고 있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탕자의 귀향’에서 이 단도는 작은 아들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탁월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작은 아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칼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존심이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19, 21절) 역설적으로, 이 말은 나를 아들로 받아 달라는 간청으로 들립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줍니다.
마지막으로 봐야 할 사람은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두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의 치켜 올라간 눈썹에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질투와 분노, 상실감이 느껴집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9-30절)
큰 아들의 말에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어긴 일이 없이 말 잘 듣는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자기에게 해 준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도 짜증이 났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그토록 감격스럽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처사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는 집을 나간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정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살면서도 그는 종처럼,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에 대반전(大反轉)이 일어납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31절)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었고, 한 번도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큰 아들과 같이 종의 마음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many elder sons and elder daughters who are lost while still at home(집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고 있는 수많은 큰 아들들과 큰 딸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를 모르고 불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짜증을 냅니다. 스스로가 아들이 아니라 종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제3의 인물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 사이에 있는 모자를 쓴 사람인데,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무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기가 그 상황 속에 들어가 객관적으로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렘브란트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린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위로와 평안을 맛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헨리 나우웬이 한 말을 소개함으로써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But what makes us human is not our mind but our heart, not our ability to think but our ability to love(하지만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큰 아들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탕자를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아버지들이 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