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2019 | 부활절 넷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The Two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영어로 하면,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부활절은 이미 끝난 행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날 (that same day)’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그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은 매우 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엠마오’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13절).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명(地名)과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이 이야기의 사실성(事實性, historicity)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던 석양(夕陽, sunset)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들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일 유명한 그림은 로버트 췬트 (Robert Zünd, 1826-1909, 스위스)가 그린 ‘The Road to Emmaus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 해가 저물어 가는, 그 때의 상황을 잘 묘사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뭔가를 손짓을 해 가면서 말씀하시고, 두 사람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는 사방이 적막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Robert Zünd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rescue Israel).” (21절) 이 말에서 그 두 사람의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똑 같은 제자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We have left all we had to follow you).” (누가복음 18:28) “Behold, we have left our own [homes,] and followed You." Homes를 버렸다고 하면 집이나 재산도 포함되지만, 사랑하는 식구들도 포함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었고, 나중에 모든 것을 보상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가졌던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가는 그 때 제자들의 상실감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을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The disciples were grieving and weeping).” (마가복음 16:10)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 때,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다고 했습니다 (They stopped short, sadness written across their faces., 17절). 이 말 속에 두 사람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믿었던 것들이 틀어졌을 때,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영영 떠났을 때, 우리도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내 인생이 모두 끝난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월이 약이라고 합니다. 그냥 살다 보면 다 잊혀진다고 합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금방 죽을 것 같더니 시간이 좀 지나면 진정이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긴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이 찾아 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로 유명한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없어져도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큼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존 뉴톤 목사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의 말씀이 되고, 치유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상실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힌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신 것입니다. 비록 처음부터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 이 말씀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힘들어 할 때, 슬픔과 절망의 시간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 (effective) 할까요? 하고 말고요. 성경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Now these things happened as examples for us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6)

둘째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교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交際, fellowship)’라는 말은 주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아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것,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5-27절).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우리 마음에 불이 붙고,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은 우리의 눈이 새롭게 떠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믿고 있던 Old Paradigm이 무너지고 New Paradigm이 주어졌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바울은 이 경험을 ‘enlightenment (깨달음)’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I pray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 (나는 여러분의 마음이 눈이 밝아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이 이상한 말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구나!” “우리가 길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구나!”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삶이 없으면 끊임없이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교제의 삶이 있으면 그 의심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우리 믿음은 교제의 삶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견고해집니다.

셋째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personal encounter)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내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어떻게 내가 용서 받는 것이 됩니까? 오늘 여러분 중에도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가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열매가 있을 것 아닙니까? 바울은 23절에서 ‘those who belong to Christ (NIV, NLT)’ ‘those who are Christ's (NKJV)’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를 용서 받고,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세요. 슬픔과 절망으로 고향으로 내려 가던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에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아직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걷던 사람들이 동터 오는 새벽 길을 달려갑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상상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 (epistles)에 그의 뛰어난 신학적인 상상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2-5이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 (New Living Translation)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공식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절망할 때, 그 자리에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곧 주님께서 나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문제를 만나고 시련을 만날 때 절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 문제를 통해서 나를 단련 시키시는구나. 이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더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 시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이고, 크리스천의 삶의 공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저물어가는 석양 길을 걷지 않고 동터 오는 새벽길을 걷습니다.


5/5/2019 | 어버이 주일/졸업예배 메시지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Make Them Holy By Your Truth

요한복음 17:9, 14-19

오늘은 우리 교회의 전통대로 어버이 주일과 졸업예배를 같이 드리는 날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 졸업생들이 64명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생이 3명, 학사가 14명, 석사가 26명, 박사가 21명, 모두 64명이 졸업합니다. 졸업생 여러분들의 수고에 축하 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영광의 뒤에는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과 기도가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 영국)의 ‘오, 나의 어머니 (O Mother of Mine)’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내가 높은 산에 목이 매달린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올지를. 오 나의 어머니! 내가 깊은 바다에 빠진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눈물이 나에게 흘러올지를. 오 나의 어머니! 내 영혼과 몸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기도가 나를 구원할지를, 오 나의 어머니!” “If I were hanged on the highest hill, I know whose love would follow me still. If I were drowned in the deepest sea, I know whose tears would come down to me. If I were damned of body and soul, I know whose prayers would make me whole.”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과 기도 덕분입니다. 키플링은 그의 시에 “Dedication to The Light That Failed (꺼진 불에게 바치는 시)”라는 부제(副題)를 붙였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 아닙니까? 자신의 것을 모두 자식에게 내어 주고 자신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꺼진 불과 같은 존재 아닙니까? 키플링은 그런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한편의 시를 바쳐서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의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공부 잘 하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런 부모님의 소박한 소원을 한 차원 높여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의 사람들은 잘 되는 것을 ‘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나가 출세하여 이름을 떨친다는 뜻입니다. 유가의 경전인 효경(孝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전에 나오는 말들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입신양명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해마다 졸업 시즌이 되면 각 대학교에서는 사회 각계에서 성공한 유명한 사람들을 초대해서연사로 세웁니다. 이번 해에 어느 대학에서 누구를 초대하느냐 하는 화제인데, 특히 하바드 대학교에서 그 해에 누구를 초청하느냐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제가 알아 봤더니, 올해는 Angela Merkel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를 초대한다고 합니다. 아직 발표가 안 되었습니다만, 뭔가 졸업생들에게 평생 남을 연설을 하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2017년 졸업식에 Facebook CEO인 마크 저커버그 (Mark Zuckerberg)가 초대 되었습니다. 2016년에는 천재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가 초대되었습니다. 스필버그의 연설도 명 연설로 남아 있습니다. 2008년에는 ‘해리 포터 (Harry Potter)’를 쓴 조앤 로우링 (Joanne K. Rowling)이 초대 되었고, 2007년에는 Microsoft CEO인 빌 게이츠 (Bill Gates)가 초대되어 “여러분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세상을 바꾸라.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의무가 요구된다”는 연설을 했습니다. 저는 그 연설문을 읽으면서 빌게이츠는 항상 세계 최고의 갑부로 이름이 오르는데, 저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지금은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Apple의 CEO였던 스티브 잡스 (Steve Jobs)가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도 명 연설로 남아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그 때 졸업생들에게 “초심을 유지하면서 우직하게 나아가라 (Stay Hungry, Stay Foolish)”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의 담임 목사로서 졸업생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줄까 며칠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전체가 예수님의 기도이니까 오늘 우리 기준으로는 좀 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에 하셨습니다. 한 절 한 절에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나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오늘 졸업을 하는 졸업생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 (identity)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14절)

여러분에게는 크리스천,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성경이라는 삶의 스탠다드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과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들이 크리스천의 삶의 표준입니다.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가 같지 않습니다. 둘이 추구하는 가치가 같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부분에서 둘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릅니다. 크리스천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를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거나, 무시해 버린다면, 그것은 크리스천으로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번 포기하고 나서도 다음에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교회 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번 크리스천의 길을 포기한 사람들은 그 다음에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쉽게 포기합니다. 한번 포기한 사람이 두 번은 포기 못하겠습니까? 세 번은 포기 못하겠습니까?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성경이 제시하는 가치와 세상에 제시하는 가치가 다를 때,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갈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과정이 쉽지 않습니다. 힘이 듭니다.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Genuine Christian이 아닙니다. 진짜 크리스천들은 성경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어려움을 겪고, 때로는 손해를 보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 나가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누구도 그 길이 쉽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그 길로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 (the narrow gate)’이고, 그 길은 ‘험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3-14). “But the gateway to life is very narrow and the road is difficult, and only a few ever find it”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걸어야 하는 길은 험하고, 위험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도 많지 않아 때로는 외롭습니다. 하지만, 그 길은 ‘the gateway to life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 크리스천은 이 길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둘째로, 여러분은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 (good influence)’을 끼쳐야 합니다. 에머슨 (Walter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그렇게 말했잖아요?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단 한 사람이라도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았음으로 인해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적인 삶이다)!” 제가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17절, 공동번역) 여기서 ‘진리’라는 말은 로마서 12:2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이 기도를 쉬지 않고 하고 계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그리스도 예수는 다시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He 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d is also interceding for us).” (로마서 8:34)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용기를 잃어버렸을 때, 겁이 나고 두려울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지금 누구보다도 강력한 예수님의 기도를 받고 있다!”고 믿고 용기를 내십시오.

제 facebook에 2017년 Cal Maritime State University Academy 졸업식에서 Rick Rigsby라는 사람이 연설한 동영상을 올려 놓았습니다. 그 연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면서 자기의 아버지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을 중퇴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가장 지혜로운 분이라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예쁘고 현명한 여자였지만,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인생이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했을 때라고 합니다. 그 때 그의 아버지가 해 준 세 마디 말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면서 연설을 마칩니다. 그 아버지의 말은 “You keep standing (계속 서 있어라)!”이었습니다. “절대로 주저앉지 마라!”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마라!”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You keep standing!” 이 아버지의 말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저도 같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가 나가야 할 세상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You keep standing!” 여러분은 서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가치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서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희망이 있습니다. 

2016년에 하바드 졸업식장 연사로 왔던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역시 그의 천재성이 연설문 전반에서 돋보이는 명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이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이 되려면 한가지 더, 물리칠 악당이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모두 행운아들입니다. 이 세상은 여러분이 물리쳐야 할 괴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매우 유머러스 하면서도 그 속에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지 않습니까?

Erwin Lutzer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ose who have failed miserably are often the first to see God’s formula for success (처참하게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종종 하나님의 성공에 대한 공식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자기가 만든 성공의 formula를 가지고는 실패 했잖아요? 이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이렇게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공의 formula에 눈을 돌립니다.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formula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formula는 처음부터 낮은 자리를 찾아 가는 것입니다. 물이 낮은 곳을 찾아 그곳에 머물듯이, 하나님의 성공의 formula를 따르는 사람은 처음부터 낮은 곳에서 섬길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계속해서 이곳에 있을 것입니다. 힘들과 외로울 때 이곳을 생각하고 힘을 내십시오.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 함께 찬양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꿈과 비전을 나누었던 이 교회를 생각하십시오. 우리 교회는 항상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여러분의 편에 서 있을 것입니다. 


4/28/2019 | 부활절 두 번째 주일

“제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I Have Seen The Lord

요한복음 20:11-18

제가 대학교 시절에 윌리엄 버클리 (William Barclay, 1907-1978)라는 영국 목사님의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 분은 목사이면서 학자이고, 영향력 있는 방송인이기도 합니다. 이분이 방송에 나가서 신약성경 이야기를 오랫동안 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하도 인기가 좋아서 그 때 강연했던 것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 유명한 ‘버클리 주석 (William Barcaly’s Daily Study Bible)’입니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은 책입니다. 이 분은 그 외에도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기억에 남는 책은 ‘The Mind of Jesus (예수님의 생각)’과 ‘The Mind of St. Paul (사도 바울의 생각)’이라는 책입니다. 해박한 지식으로 아주 잘 쓴 책입니다. 이분은 청각이 좋지 않아 나이가 들어서는 거의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집 앞을 지나다니는 마을 사람들은 매일 저녁 늦게까지 그의 서재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치는 타이프 소리를 멀리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버클리 목사님이 ‘The Mind of Jesus’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경우를 대체로 7개의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이고, 둘째로, 슬퍼하며 회개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경우, 셋째로, 예수님이 죽은 후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경우, 넷째로, 절망과 공포에 싸인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경우, 다섯째로,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경우, 여섯째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신 경우, 마지막으로,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경우이다.” 상당히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말씀입니다. 버클리 목사님이 분류한 첫 번째 카테고리에 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은 ‘막달라에 살고 있는 마리아 (Mary Magdalene)’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마리아라는 이름은 아주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이름도 마리아인데. 다른 마리아와 구별하기 위하여 ‘동정녀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동정녀라는 말은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결혼은 했지만 서로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은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동정녀 마리아 (virgin Mary)’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은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나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who was conceived by the Holy Spirit, born of the Virgin Mary)’라는 말이 나옵니다.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리아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에는 그녀의 과거의 삶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후에 예수님께서 여러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악한 영과 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신하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여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누가복음 8:1-3)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후원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녀에 대해서는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esus took his twelve disciples with him, along with some women who had been cured of evil spirits and diseases. Among them were Mary Magdalene, from whom he had cast out seven demons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는데, 악한 영과 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 명의 여자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인데, 예수님께서 쫓아내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런 말씀이 마가복음 16:9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일 주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일곱 귀신을 내쫓아 주신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그냥 읽고 지나갈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제자들이 아니고, 베드로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마가가 기록한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전에 일곱 귀신이 들렸던 적이 있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우리 눈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모두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를 보셨습니까? 작년에 나온 영화인데요. 제가 보기엔 괜찮게 만든 영화인데,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 남자들 밖에 없는 제자 그룹에 합류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통해서 메시아 왕국이 세워질 것을 기대합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을 제일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넌 나의 증인이야 (Mary, you are my witness)!”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결국 제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 못박혀 죽습니다. 충격과 절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한 곳에 숨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영화 장면은 성경 말씀하고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슬픔에 잠긴 마리아를 찾아 와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왜 여기서 이렇게 울고 있느냐?” 하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동산 관리인일 줄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무덤 앞에서 슬픔에 지쳐 잠이 들었던 마리아가 동이 터오는 새벽에 일어나 무덤 앞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께 다가 간 것을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무슨 말씀을 주고 받았는지 영화에는 그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을 찾아 갑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면서 지금까지 무덤을 지켰느냐고 마리아를 맞아 줍니다.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마지막까지요. 그런데 해가 뜰 무렵에 그분을 봤습니다. 그분이 거기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건 네가 꿈을 꾼 거야!” 하면서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꿈이 아니라 그분은 거기 게셨어요!” 하면서 주님이 부활하신 것이 틀림 없다고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그 때 베드로가 기분이 상했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말 대로 그분이 부활했는지 몰라.) 하지만 그분이 우리보다 널 먼저 선택했다고 우리에게 말하려고 온 것은.....그분이 너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셨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마리아, 넌 우리를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어.” 마리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너희들이 내 말을 듣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어! 너희가 나를 있는 그대로 봐 주기를 기도할 뿐이야! 난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제자들과 헤어집니다. 이것이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윌리엄 버클리 목사님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마리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 감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 이후의 삶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이번 사순절 마가복음 강해설교 하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Once you have seen what God can do for you, it’s time to see what He can do through you (한번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발견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지를 봐야 한다).”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바디매오에게서 이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의 삶에서도 이것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의 사랑을 오해합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에게 새 삶을 주신 예수님을 떠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에게 이 사랑이 있었기에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을 때도 끝까지 예수님의 무덤을 지켰습니다. 

마가복음 16:10에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 소식을 가지고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갔을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울음은 어쩌면 마리아의 울음과 의미가 다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의 울음은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진 데서 온 슬픔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삼 년이나 예수님을 따랐는데,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울음은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제 사랑하는 예수님과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고 헤어져야 한다는 데서 오는 울음이 아니었을까요? 버클리는 사람이 너무 슬퍼하다 보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볼 것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이 예수님의 무덤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마리아의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울고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마리아에게 다시 이번에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릅니다. “마리아야!” 예수님께서 그 때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신 그 목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인자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이었을 것입니다. Heinrich Hofmann (1824-1911)이 그린 ‘The Rich Young Ruler’라는 그림을 보신 적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눈빛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이 압권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던 그 음성은 세상의 그 음성보다 다 따뜻한 음성이 아니었을까요? 동시에 그 음성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그녀를 불렀던 목소리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금방 몸을 돌려 ‘랍오니 (Rabboni)’ 하고 예수님을 알아 보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마리아를 만나 주신 것은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도 마리아가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 못마땅해 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제자들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난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I will not stay and be silent)!”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내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면 우리가 뭐가 되냐?” “마리아, 넌 우리 남자들을 나약한 존재로 만들었어!” 이런 비난이 있더라도 나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젠 우리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에는 처음부터 이기주의는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복음은 선포하는 것이었고, 복음은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시대에 와서 복음은 이기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은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이기적인 성향이 개인주의를 만나면서 날개를 달았습니다. 그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강요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믿는 것이 음악회에 원하면 가고 원하지 않으면 안 가는 것과 같습니까?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이런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안 믿는 것은 구원을 받고 안 받고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말해야 합니다. “난 절대로 침묵하지 않을 거야 (I will not stay and be silent)!” 


4/21/2019 | 부활주일 메시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요한복음 11:25-27, 40-44

주님이 부활하신 새벽입니다. 2,000년 전, 첫 번 부활절은 ‘very early on Sunday morning, just at sunrise (마가복음 16:2)’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it was still dark (20:1)’라고 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이른 시간이었던 같습니다. 그날 새벽에 여자 몇 명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여자들 손에는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릴 ‘향료 (burial spices)’가 들려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가면서 무덤 입구를 막은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줄까 하고 걱정하면서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은 옆으로 굴려져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어찌 된 일인가 하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한 젊은 사람이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순간 여자들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고 있지요?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가 예수님을 모셨던 곳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먼저 갈릴리로 가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마가복음 16:2-7)

여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마가복음과 조금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자들은 급히 제자들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지만, 여자들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런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여자들의 말은 제자들에게 넌센스같이 들려서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혹시 제가 이런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사이몬 그린리프 (Simon Greenleaf, 1783-1853)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바드 법대를 세운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증거의 법칙에 대한 논문 (A Treatise on the Law of Evidence)’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진 책이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의 재판제도는 아직도 그린리프가 구성한 증거의 법칙에 의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린리프 교수가 하바드 재직 중에 강의를 하다가 예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무신론자 (atheist)였으니까 당연히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던 학생들 중에 세 명이 “교수님이 만든 ‘증거의 규칙’을 예수의 부활에 적용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그러면 자기가 세운 증거의 규칙을 가지고 부활에 대한 증거를 조사해 보겠다고 학생들과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그의 이론을 따라서 증거를 조사하면 쉽게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는 예수가 실제로 무덤에서 살아 나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됩니다. 가장 당혹스러운 것은, 예수가 죽은 후에 벌어진 극적인 변화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과 행동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어떻게 한 두 명도 아니고, 모든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증거의 규칙’을 적용해서 예수의 부활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반대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사의 결과를 가지고 ‘전도자들의 증언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The Gospels Examined by the Rules of Evidence)’을 출판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는지, 그가 수집한 증거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자신이 수집한 증거를 부정할 수 없어 결국 크리스천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편견을 갖지 않고, 법정에서 하는 것처럼 정직하게 증거를 검토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사람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경로가 다양합니다. 여러분 중 혹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데 그린리프 교수 이야기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한번 맞춰 보십시오. ‘The Wrong Tomb Theory’ ‘The Hallucination Theory’ ‘The Swoon Theory’ ‘The Drugged-Body Theory’ ‘The Stolen Body Theory’ ‘The Missing Body Theory’ ‘The Spiritual Resurrection Theory’ ‘The Twin Theory’ ‘The Soldier Fell Asleep Theory’ 이 모든 이론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부활을 반대하기 위해 만든 이론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을 가지고도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제자들의 삶의 변화입니다. 앞에서 말한 그린리프 교수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중에서도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이 전과 전혀 다른 삶으로 변화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로마의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예수를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순교한 수많은 사람들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몇 년 전에 이 지역의 목사님들이 수련회를 하면서 함께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영화 제목이 ‘Risen (부활)’이었습니다. 2016년에 나온 영화인데, 아주 잘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목사님들이 모두 박수를 쳤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클라비우스 (Clavius)라는 로마의 호민관 (tribune)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집행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예루살렘에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문이 납니다. 이 호민관은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훔쳐 간 것이 틀림 없다고 단정하고, 제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 급습합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줍니다. 이 호민관은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그럴 리가 없다고 자기 눈을 의심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홀연히 사라집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릴리로 갑니다. 이 호민관 역시 자기 눈으로 본 엄청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제자들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동행합니다. 그런 그를 제자들은 경계하지 않고, 먹을 것을 나누어 줍니다. 갈릴리로 가던 중에 호민관의 배신을 눈치채고 뒤 쫓아 온 자신의 부하에게 “저 사람들의 손에 세상의 운명이 달려 있다네”라고 말하면서 제자들을 해치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합니다.

드디어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 밤 중에 호민관과 예수님 사이에 짧은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호민관은 며칠 사이에 자신에게 생긴 궁금한 것들을 예수님께 묻습니다. “제가 최근 며칠 사이에 목격한 일들은 이제껏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일들입니다.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영원한 삶에 대해서, 평안에 대해서, 또 죽음이 없는 세상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수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날이 밝아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죽음의 권세를 이긴, 산 자와 죽은 자의 주인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집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제 이 호민관도 자기의 길을 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호민관이 혼자 주막에서 차를 한 잔 마십니다. 그리고, 찻 값으로 호민관 반지를 빼서 ‘탁’하고 책상에 내 놓습니다. 호민관의 반지를 본 주인이 깜짝 놀라면서 “호민관님, 정말 이걸 다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호민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믿어. 이젠 어제와 같은 삶을 살 수 없지!” 이렇게 말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 장면에서 소름이 돋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말씀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이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도들의 변화된 삶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했고, 사람들은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도 똑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말을 듣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기 전에 먼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잘 살고 계십니까? 제가 묻는 것은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서 잘 살고 계시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크리스천의 삶에 특별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고린도후서 5: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For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 속에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크리스천들이 이 방식대로 살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데 믿음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성경은 이렇게 나와 있는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본받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정 반대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부터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는데, 누가 우리 말을 듣겠습니까? 교회가 세속화되어서 교회나 세상이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누가 교회에 나오며, 누가 교회가 하는 말을 듣겠습니까?

오빠가 죽었다고 슬퍼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0절) 불행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무조건 될 줄로 믿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였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 (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 (이사야 45:7) 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나사로가 왜 죽었습니까? 나사로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빨리 베다니로 가셨더라면 나사로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부러 시간 끌다가 나사로가 죽은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 (요한복음 11:25-26) 예수님은 이 말씀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발견한 가치들을 내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말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I AM’이신 분, ‘스스로 계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오늘 우리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데서 오는 문제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않으니까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니까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나 세상이나 비슷해서 구별이 안 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믿음을 받치고 있는 기초 (foundation)입니다. 그런데, 이 기초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믿음으로 살지 않고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사람이 부활을 믿겠습니까? 이 기초가 무너지니까 믿음도, 선교도, 설교도,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도 모두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부터, 오늘 이 새벽에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는 우리부터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4/20/2019 | 사순절 새벽기도 40

빈 무덤 이야기

마가복음 15:42-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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