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1/2018 | 사순절 14
또 한번의 기회 A Second Chance
요한복음 8:1-11
오늘 말씀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올리브산으로 가셨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1-2절) 예수님께서 전 날 성전 뜰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시비가 붙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예수님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태가 매우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긴장감 높아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밤에 올리브산에 올라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예수님 하나님과 기도를 통해 소통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반성해 보면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예수님은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언제 왔는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여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른 새벽에 예수님을 성전 뜰에서 기다리던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이 누군지 정확하게 정체를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다. “야, 이건 새로운 교훈이다. 전에 이렇게 말씀하신 분은 본 적이 없어! 이 분의 말씀의 권위가 어디서 온 것이지?” (마가복음 1:27, 누가복음 4:32) 예수님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People Need The Lord)’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찬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을 무웠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2,000전에도 그렇고,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공허함 (emptiness)’의 정체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입니다. 이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는 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갈급함을 느낄 것입니다. 2,000년 전에 그 이른 새벽에 성전 뜰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사람들 속에 있었던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먼저 가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실 때, 왁작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자들 간음 현장에서 붙잡아 끌고 왔습니다.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얻기 위해 이렇게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6절) 무슨 뜻입니까? 지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끌고 온 것은 오래 전부터 기획해 왔던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예수님을 trap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plot (음모)을 꾸며 온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음모에 보기 좋게 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 바닥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조급하게 계속 묻습니다. “아니, 선생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시겠냐고 묻지 않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기다립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7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떠나가고, 마지막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기세가 등등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손에 들었던 돌을 놓고 돌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 양심에 가책을 받은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받은 이유는 자기들도 이 여자와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종교적인 사람들 (the religious people)’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겉에서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이렇게 착하고, 선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지 않는 데서는 온갖 나쁜 일을 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제가 반복해서 잔소리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 됩니다.” “성경 읽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늬만 크리스천이지 자세해 보면 크리스천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예수님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첫째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에 대하여 정죄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예수님은 이 여자를 사랑으로 대하셨습니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The love Jesus demonstrated at the Cross is unconditional. True love reaches out to the unlovely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랑이다.”
둘째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 여자를 정죄하여 돌로 쳐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기회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1절) 자신을 정죄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에게도 예수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누가복음 19:9-10)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도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잘 믿고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잘못된 삶과 단절하고, 하나님의 ‘의의 도구 (instrument of righteousness) (로마서 6:13)’로 살아야 합니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또 한번의 기회’를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우리는 진실한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위하여 우리 생명을 내어 줌이 마땅합니다.” (요한일서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으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으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또 한번의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올바로 살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이미 이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기회가 헛되지 않도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도 주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2/28/2018 | 사순절 13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고린도후서 7:8-12
오늘 요절 말씀은 10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 (godly sorrow)’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의 슬픔 (worldly sorrow)’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슬픔입니다. 그런데, 이 슬픔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슬픔은 ‘세상의 슬픔’인데요. 무슨 슬픔일까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 슬픔, 억울한 일을 당한 슬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슬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슬픔, 이런 슬픔들이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영적인 죽음 (spiritual death)’을 가져 온다고 했으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사람을 회개하게 만들어서 좋은 결과를 가져 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오늘 읽은 한 토막만 떼서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왜 두 가지 종류의 슬픔을 말하고 있는지, 그 배경을 알아야 오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교회들은 거의 모두 바울이 세운 교회들입니다. 교회들마다 그 교들의 독특한 역사가 있고, 그들만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고린도는 바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선교 전략지역으로 여기고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도시들에 비하면 아무 예외적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그렇게 중요하게 본 이유는 환상 중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For I am with you, and no one will attack and harm you, for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사도행전 18:10)”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선교 방식에 있어서도 고린도 선교는 특별했습니다. 바울은 ‘tent-making mission (천막제조 선교)’이라는 독특한 선교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런 바울의 선교방식을 따르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즉 선교지에서 직업을 가지고 선교에 필요한 비용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선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여기서 평생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그들 부부는 나를 구하기 위하여 모든 위험을 감수한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정말 이들 부부에게 감사합니다).” (로마서 16:3)
이상이 바울의 고린도 선교를 대충 요약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내용 면에 있어서 고린도 선교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8-9 상반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로 인하여 내가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 편지로 인해 잠깐이나마 마음 아파했다는 것을 알고는 나 자신도 후회를 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지난 번에 쓴 편지’라니요? 그것이 무슨 편지일까요? 어떤 사람은 이 편지가 고린도전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보낸 또 하나의 편지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편지를 ‘눈물의 편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존재하지 않는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것입니다. A. D. 56년 경에 디도를 통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한 실랄한 책망과 충고,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디도를 통해 그 편지를 보내 놓고 매우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내가 너희 강하게 편지를 쓰지 않았나?” “혹시라도 이 편지가 문제가 되어서 오히려 교회 문제가 더 어렵게 되지 않을까?”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내 편지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염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편지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을 돌아 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졌던 슬픔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
오늘 우리에게는 잘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 그냥 덮어 주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 용서가 어떤 용서인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 눈 감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덮어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드러내셨습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그 죄를 자기의 아들에게 전가 (imputation) 시켰겠습니까?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잖아요?
교회 안에서 어떤 문제를 꺼내는 것은, 그 공동체 속한 모두에게 큰 아픔을 줍니다. 모두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꺼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문제가 더 심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초기 단계에서 빨리 수술을 했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을, 수술할 시기를 놓쳐버려서 생명을 잃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힘든 치료 과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술을 해야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7:10에 쓰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kind of sorrow God wants us to experience leads us away from sin and results in salvation. There’s no regret for that kind of sorrow. But worldly sorrow, which lacks repentance, results in spiritual death.”
우리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어제 한국 뉴스를 봤더니 또 한 사람이 자신이 연극인이라고 하면서 실명으로 TV 인터뷰에 나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실명으로 나를 밝히지 않으면 상대방이 그런 일 없었다고 부인하기 때문에 여자인 제가 실명으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의 문제를 자꾸 말할 것 없습니다. 문제는 나의 문제를 그냥 덮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 드러내서 회개해야 할 문제인데, 그냥 덮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위선자 (hypo¬crites)’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하면, 평생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덮지 말고 입을 열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사순절이 그런 기간입니다.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한번도 자신에 대하여 진진한 반성이 없었지 않습니까? 한번도 입을 열어 진지하게 회개의 기도를 드려 본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11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슬픔이 얼마나 여러분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더 이상 어깨를 움츠리지 않고 진지해졌을 뿐만 아니라 성의를 갖게 되었으며, 내가 지적한 죄를 짓지 않으려고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 원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나의 도움을 바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서 죄지은 사람을 처벌했을 뿐 아니라 그 일을 해결하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현대어성경)
2/27/2018 | 사순절 12
죄를 용서 받는 회개 A Call To REpentance
누가복음 24:44-4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모세의 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에 관해 쓰여진 모든 것들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44절) 여기 ‘모세의 법’ ‘예언서’ ‘시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신약성경에 없었으니까, ‘모세의 법’ ‘예언서’ ‘시편’ 이라고 하면 성경 전체를 말합니다. ‘모세의 법’은 흔히 오경이라고 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렇게 5권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삼 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회개가 전파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애와 예수님의 고난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 이후에 있을 일들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이 일들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are witnesses of all these things). 내가 미리 이렇게 말했는데, 이 말대로 되는지 되지 않는지 지켜 보고 과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는 것을 보거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요절은 46-47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을 말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까?
성경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죄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경험에서 보더라도 우리는 크고 작은 많은 잘못을 저지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지금 한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Me Too’ 운동을 보십시오. 법복을 입은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생각도 못할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예술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인들도 똑 같은 일들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과거에 행한 일들이 그동안 숨겨져 있다가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23). 정말 문자 그대로 죽을 죄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어금니 아빠’라는 흉악범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미국 체조팀의 팀 닥터로 있는 래리 나사르 (Larry Nassar, 54세)라는 사람이 수십년 간 156명의 선수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것이 드러나서. 판사는 이 사람에게 175년 형을 선고했습니다. 판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감옥 밖으로 걸어서 나갈 수 없습니다!” 저도 뉴스에게 그 장면을 봤는데, 섬칫 하더라고요.
이런 것은 극단적인 예들이지만, 오늘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3:9). 잘못을 저지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그 죄를 다 치르지 않고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모든 민족에게 전파하라고 합니다. 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파해야 합니까? 이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 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길을 전파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열린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의 회개를 전파해야 합니다.
지금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목격한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나의 증인들인 너희가 세상에 나가서 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 받는 회개를 전파하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의 특징은 쉽고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쉬운 복음을 어렵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편지에 나오는 말씀만 해도 예수님의 말씀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참 아이로닉한 일입니다. 로마서 말씀 같은 것은 얼마나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까? 설교자들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성경 말씀보다 목사들의 설교가 훨씬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좋게 말해서 ‘지적인 설교 (intellectual sermon)’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말이 좋은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설교를 왜 ‘지적인 설교’라고 칭찬합니까? 또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설교를 지적인 설교라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보세요.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용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12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들,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죄를 용서 받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데, 꼭 죄를 회개해야 합니까? 예, 꼭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문 (door)’입니다. 우리는 ‘회개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순서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회개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다. 깜짝 놀란 요한은 이렇게 “제가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어찌 주님께서 저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셨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자.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 (It should be done, for we must carry out all that God requires①." So John agreed to baptize him. / ①Or for we must fulfill all righteousness.” (마태복음 3:15)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보내서 먼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하셨습니다. 요한의 사역이 끝나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회개는 복음을 듣고 믿음의 길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요한은 그 문을 여는 사역을 감당했고, 예수님은 그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교회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이름 으로’ 죄를 용서 받은 회개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로들 여러분의 ‘Personal Savior’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 전에 여러분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은 나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 사방이 고요한 시간에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여러분은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까? 여러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나에게 용서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죄사함의 은혜는 오직 예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시겠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하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교회생활 했던 햇수가 여러분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여러분의 ‘Personal Savior’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 나는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나의 죄를 회개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 들입니다. 아멘.”
2/26/2018 | 사순절 11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 The Supreme Moment in History
골로새서 2:11-15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Look! The Lamb of God who takes away the sin of the world)!” (요한복음 1:29, 36)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쉽게 이해합니다. 명절 때마다 어린 양을 준비해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것이 그들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물로 드릴 양을 고를 때 깨끗하고 순결하고 아무 흠이 없는 어린 양을 골랐습니다. 그 어린 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 자신들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The Lamb of God’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take away (없애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신 ‘어린 양’이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시는 분들은 금방 떠오르는 말씀이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14에 나오는 ‘여호와이레 (Yahweh-Yireh)’라는 말이지요? ‘여호와이레’란 말의 뜻은 “The Lord will provide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을 위해서 이삭 대신 하나님께 드릴 어린 양을 준비하신 하나님은,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제물로 쓸 어린 양을 준비하셨는데, 그 제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실 때, 이 때야 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역사는 ‘그 순간 (the moment)’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의 (God’s righteousness)’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가 우리를 지배했던 역사가 끝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과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라는 장매물이 제거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건의 의미를 로마서 6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 (as instruments of evil)’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as instruments of righteousness)’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1-13)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의미를 ‘new circumcision (새로운 할례)’란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new circumcision’에 반대되는 말은 ‘old circumcision (옛날의 할례)’입니다. ‘옛날의 할례’는 유대인들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다!” 이런 표시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런 식으로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던 ‘old circumcision’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you came to Christ, you were "circumcised," but not by a physical procedure. Christ performed a spiritual circumcision- the cutting away of your sinful nature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할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몸의 한 부분을 잘라내는 식의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잘라내시는 영적인 할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씀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다 보니까 이런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14-15절 말씀을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림으로써 하나님께 빚을 진 기록 (증서)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기록 (증서) 속에 우리가 율법을 어기고 따르지 않은 죄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기록 (중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못박아 깨끗이 없애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주권과 능력을 꺾으시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심으로, 십자가를 통한 승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You were dead because of your sins and because your sinful nature was not yet cut away. Then God made you alive with Christ, for he forgave all our sins. He canceled the record of the charges against us and took it away by nailing it to the cross. In this way, he disarmed the spiritual rulers and authorities. He shamed them publicly by his victory over them on the cross.”
약 20년 전에 유건호하는 청년부 학생이 있었습니다. MIT에서 박사 과정에 있던 학생이었는데요. 나름 성경공부의 배경이 탄탄한 학생이었습니다. 한번은 청년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이 유건호하는 학생이 지금 읽은 골로새서 2:14-15 말씀을 자기가 배운대로, 자기가 이해한대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제가 이 말씀을 그 청년에게 배웠습니다. 그 학생이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때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여러분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 되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죄라는 장애물 (barrier)이 없어지고, 이제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intimate fellowship)’를 나눌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로 내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내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랬더하면,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겠습니까?
2/25/2018 | 사순절 새벽기도 3
주님께 귀한 것 드려 Offer A Precious Gift to The Lord
로마서 11:15-18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넌 크리스천의 삶과 뭔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할까요? 성경에 보면 우리 크리스천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부르셨고 (데살로니카전서 4:7),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2)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레위기 19:2, 베드로전서 1:1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로마서 12:2)”라고 말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가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까? 그렇게 살아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다른 무엇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그렇게 해야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살아야 우리는 넌 크리스천들과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위한 두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됩니다.” (디모데전서 4:5)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저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삶이 거룩해 집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Sovereign Lord has given me his words of wisdom, so that I know how to comfort the weary. Morning by morning he wakens me and opens my understanding to his will.”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주께서 나에게 지친 사람들을 어떻게 위로할지 지혜의 말씀을 주셨다. 주께서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고 나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개역성경에는 ‘understanding’이 ‘명철(明哲)’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총명하고 사리에 밝다는 뜻입니다.
조금 신학적인 말씀이 되겠습니다만, 성서 학자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바빌로니아 포로시대라고 합니다. 그 때 포로로 잡혀 간 유다 백성들이 가장 절망했던 것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혀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느꼈을 절망을 우리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절망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일에 ‘이사야’라는 사람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서 학자들은 그 때 하나님께서 사용한 사람은 이사야가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제 2 이사야’ 혹은 ‘제 3 이사야’라는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사야는 기원전 약 600년경에 살았던 예언자였거든요. 유대 민족이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 것은 이사야가 죽은 지 약 100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아침마다 말씀의 지혜를 주셨고, 그는 절망에 빠진 자기 백성들을 찾아가서 위로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아침마다 (morning by morning)’라는 말씀입니다. 아침 혹은 새벽은 조용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에 좋고, 하나님과 소통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지헤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사물을 잘 이해할 수 있는 ‘understanding’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딱 필요한 것들이 바로 ‘wisdom (knowledge) and understanding’ 이 두가지 아닙니까?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으니까, 때와 장소가 기도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보면 기도 역시 사방이 고요한 새벽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새벽에 하나님 말씀 듣고, 새벽에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기 때문에 새벽 시간을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마가복음에 1장에 나옵니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35절)
시편 저자들 (psalmists)이 일제히 ‘아침’ 혹은 ‘새벽’을 주목하는 이유는 아침이 말씀을 묵상하는 데 좋고, 하나님과 기도하기에 좋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말씀을 보세요. “여호와여 오직 주께 기도 드립니다. 아침에 드리는 나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시는 줄 압니다.” (시편 88:13) 아침에 나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말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소통이 효과적으로 잘 된다는 뜻입니다. “아침마다 주의 변함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평생토록 기뻐하며 즐겁게 노래하겠습니다 (Satisfy us each morning with your unfailing love, so we may sing for joy to the end of our lives).” (시편 90:14) 무슨 말씀인가요? 아침 시간이야 말로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 (unfailing love)’을 느끼고, 경험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30: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진노는 잠깐이요, 그분의 은총은 영원합니다. 밤새 울었더라도 아침이면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 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in the morning.” 감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 외에 어디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밤새 울고, 잠을 못 잤습니다. 하지만 (but)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 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칙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새벽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새 날과 함께 기쁨을 주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새벽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새벽에 주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은 새벽에 주시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벽의 유익 (profits)을 거절하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에게 주시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길어집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녁 늦게 오랫동안 하는 일보다 이른 아침에 잠깐 하는 일이 더 성과가 좋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아침이 저녁보다 집중력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아침 (새벽)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으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는 시간으로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제 경우를 말한다면, 새벽 기도 시간은 저에게 말씀을 깨우치는 시간입니다. 다른 아무 것에도 방해 받지 않고, 궁금한 말씀들, 난해한 말씀들을 묵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제가 새벽 기도 시간을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깨달은 하나님의 은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한 동안 ‘아침형 인간 (morning person)’이니, ‘저녁형 인간 (evening person)’ 이니 하는 말들이 유행했습니다. ‘아침형 인간’이 되면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Google에 들어가서 ‘아침 형 인간’, 혹은 ‘새벽 형 인간’을 찾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론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와 있고요. 또 어떻게 하면 새벽 형 인간으로 내 삶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는지 수많은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아무리 밤이 즐거워도 아침과 맞바꾸지 말라.” “저녁에 할 일과 아침에 할 일이 다르다.” “수면시간은 오후 11시부터 오전 5시까지를 원칙으로 하라.” “현실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선제 공격은 아침에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아침의 1시간은 낮의 3시간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도 아침 형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런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1:15-18 말씀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새벽기도의 유익함을 말하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생각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인가?” 이 신학적인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땅 속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 나무에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습니다. 바울은 뿌리는 아브라함, 야곱, 이삭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생각했고, 그 나무의 가지는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가고 그 자리에 이방인들이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들이 뿌리로부터 수액(樹液, sap)을 받아 생명을 유지한다는 ‘접붙임의 원리 (The Principle of grafting)’에 주목했습니다. 바울이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처음 떼 내어 드린 반죽의 일부분이 거룩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하고,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가지도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로마서 11:16),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뿌리로부터 수액을 공급 받기 때문이다.”
여러분,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시나요? 어떤 사람이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얼마를 떼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반죽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조상들이 거룩하니까 그 조상들에게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들도 거룩한 사람들로 변화된다는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삶의 곳곳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새벽 시간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이 첫 시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면 나머지 시간이 모두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눈 떠서 다른 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자신의 삶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 드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 됩니다. 첫 시간, 첫 수확, 첫 아들, 이렇게 ‘첫’자가 들어간 것은 모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처음 난 것은 ‘firstfruits (첫 열매)’라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루의 ‘첫 시간’이 언제 입니까? 잠에서 일어난 새벽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을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시려고, 이 시간에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unfailing love’를 경험하게 하시려고, 그의 자녀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려고 ‘하나님의 시간’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이 시간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귀한 때는 언제입니까? 저는 그 때가 ‘청년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청년의 때’는 여러분의 ‘라이프 스팬 (life span)’에서 가장 귀한 가운데 토막입니다. 이 귀한 때를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반죽을 만들어서 제일 먼저 한 부분을 떼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죽 전체가 거룩한 반죽이 되는 것처럼,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사람의 전체 삶이 다 거룩한 삶으로 변화 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솔로몬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한 말입니다. 솔로몬이 왜 ‘청년의 때’를 강조해서 말했을까요? 이 귀한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면 이 사람 인생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 되기 때문에 ‘청년의 때’를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리십시오. 시간도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해서 주님께 드리고, 여러분의 삶에서도 가장 귀한 ‘청년의 때’를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삶 전체가 거룩한 것으로 변화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