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018 | 새해예배 설교 3

모든 일에 하나님 인정하기 Acknowledging God In All We Do

잠언 3:5-8

여러분, 잠언이 어떤 책인지 아시지요? 잠언(箴言)은 ‘바늘 잠’에 ‘말씀 언’으로 되어 있습니다. ‘箴’는 ‘대나무 죽’ 자가 위에 있고, ‘함’자가 밑에 있습니다. ‘대나무 죽’자가 위에 있으면 ‘대죽머리 부’라고 해서 ‘경고하다’, ‘경계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그 밑의 ‘함’자는 모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잠언(箴言)’은 ‘모든 사람에게 경고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proverbs’라고 복수형으로 쓰면 주로 성경의 ‘잠언’을 가리킵니다만, 단수형으로 ‘proverb’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속담’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잠언은 모두 31편까지 있는데요. 그 중의 많은 부분을 솔로몬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썼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이렇게 축복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 구했던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데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사도행전 13:22, 사무엘상 13:14)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었다.” (사도행전 13:36)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For David had done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and had obeyed the LORD's commands throughout his life, except in the affair concerning Uriah the Hittite).” (열왕기상 15:5)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잠언을 썼습니다. 그는 잠언을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읽는 사람들이) 지혜와 교훈을 얻게 하고, 슬기로운 가르침을 깨닫게 하고, 훈련과 지혜로운 생활을 얻게 하고, 의롭고, 올바르고, 정직한 삶을 살며,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사리 분별력을 주고, 젊은이에게는 체험적인 지식과 옳은 것을 깨닫는 능력을 주기 위함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듣고 학식을 더할 것이며, 지각 있는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잠언과 비유, 지혜자의 가르침, 그리고 오묘한 일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Their purpose is to teach people to live disciplined and successful lives, to help them do what is right, just, and fair. These proverbs will give insight to the simple, knowledge and discernment to the young. Let the wise listen to these proverbs and become even wiser. Let those with understanding receive guidance by exploring the meaning in these proverbs and parables, the words of the wise and their riddles).” (잠언 1:2-5)

이 말씀에서 특히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있습니까? “젊은이에게는 체험적인 지식과 옳은 것을 깨닫는 능력을 주기 위함이다” 이 말씀이 특별한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나요? 잠언 하나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그렇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그러므로, 우리가 잘 되는 일은 성경을 부지런히 읽은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inspiration (영감)’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inspiration’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이 변화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했습니다. 평생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범사에,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에서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삶이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오늘 솔로몬이 쓴 잠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슬기를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말고, 여호와를 경외하고 악한 일은 피하여라.”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했을 때, ‘인정한다’는 말은 ‘acknowledge’라는 말을 씁니다. ‘recognize’라는 말을 쓴 성경도 몇 개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성경들은 ‘인정한다’는 말을 ‘acknowledge’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이 ‘acknowledge’라는 말은 앞의 ‘ac’이란 말과 뒤에 ‘knowledge’라는 말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knowledge’라는 말은 ‘know (알다)’라는 말과 관계되어서 ‘지식’이라는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나오는 ‘ac’이라는 말은 사전을 찾아 보았더니 ‘accord’라는 뜻이 있다고 하네요. ‘accord’라는 말은 ‘조화를 이룬다” “합의하다’ ‘동의하다’이런 뜻이 있지 않습니까? 조금 상상력을 동원해서 설명한다면 ‘acknowledge’라는 말은 내가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계시(啓示, revelation)되어 있는 책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는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오류(誤謬, error)를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 이런 말씀을 말씀 드렸습니다.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그들의 예배는 희극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만든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7: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29:13 말씀을 인용한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자기들도 그런 착각에 빠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면 자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니,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은 이루시며, 약속하신 것은 지키신다.”(민수기 23:19)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조화된 삶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NIV 성경에 이 말이 “Don’t be impressed with your own wisdo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모르는 것이 많고,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얼마나 실수투성이입니까? 바울이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Don't think you are better than you really are. Be honest in your evaluation of yourselves, measuring yourselves by the faith God has given us.” (로마서 12:3)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밖에 없다고요. 자신의 약한 점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이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닌 것을 압니다.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고, 늘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줄로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시편 118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표적인 시편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절) 이런 감사로 이 시편이 시작됩니다. 이 시편을 죽 읽어내려 가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편 118:8-9)”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하기까지 얼마나 사람에 대한 실망을 많이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기 ‘고관’이라는 사람은 ‘princes’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자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높은 신분과 권력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도 믿을 만한 사람들 아니라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오직 신뢰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이 시편 저자의 고백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할 때 하나님을 제일 먼저 두는 것입니다. "In everything you do put God first"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생각나고, 아내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누구가 되었든지 사람을 먼저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오늘 읽은 잠언 3:6 말씀을 “Listen for God's voice in everything you do"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귀를 기울여도, 그 사람이 기대했던 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고, 귀를 기울이는데, 정말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응답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영적으로 예민하게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divine intervention’이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에게 ‘divine intervention’을 보여 주십니다. 맞습니까? 모세가 호렙산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divine intervention’이었습니다. 모세도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어? 이상한데? 왜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나무가 타지는 않지?” 하면서 가던 길을 돌이켰습니다 (출애굽기 3:3). 이 때 모세는 그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WWJD'라고, "What would Jesus do?" 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1990년 대에 미국에서 ‘예수운동 (Jesus Movement)’가 일어났는데, 그 때 모토가 ‘WWJD’였습니다. 이 운동에 불을 지핀 것은 1896년에 Charles Sheldon이라는 미국의 목사님이 쓴 ‘In His Steps’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부제(副題, subtitle)가 "What Would Jesus Do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잘 결론이 나지 않지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질문해 보면 답이 쉽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 여러분도 한번 이 질문을 해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내 말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 하시도록 하고, 나는 그 인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구나 (마태복음 16:2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민수기 9:2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송구영신예배 때 나눴던 말씀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위에 구름을 머물러 있으면 자기들도 진을 치고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그들은 출발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 믿음생활은 앞서 가시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따라가는 순종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 말씀이 특히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을 받았던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권면했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믿음생활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신 발자국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보십시오. “He will clear the road for you to follow.” (CEV)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NIV) “He will guide you on the right paths.”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He will direct you and crown your efforts with success.” (Living Bible)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에게 ‘divine intervention’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연습을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을 연습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제일 먼저 의식하는 연습을 하고,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을 꾸준하게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때가 온다는 비전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다.” (이사야 11:9)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나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 찰 것이다.” (하박국 2:14)


1/14/2018 | 새해예배 설교 2

진실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라 Serve The Lord With A Sincere Heart

이사야 29:13-16

2018년 새해 들어서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1월을 ‘재뉴어리 (January)’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라틴어로 ‘문 door)’을 뜻하는 ‘야누아 (ianua)’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뉴어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문을 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 ‘재뉴어리’라는 말에 얽힌 이야기가 있는데요. 우리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야누스 (Janus)’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입니다. 한 얼굴은 앞을 바라보고 있고, 다른 얼굴은 뒤를 바라 보고 있습니다. 앞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은 새로운 ‘시작 (beginning)’을 의미하는 얼굴이라고 하고요. 다른 한 얼굴은 지나 온 시간들을 바라보는 얼굴이라고 합니다. 성경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1월 (January)에 얽힌 재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성경 요한계시록에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 문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 (요한계시록 3:7)”는 말씀이 있습니다. 2018년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심으로 닫을 사람이 없는 형통한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 새해 첫 주에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요한계시록 21:1-7)”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이사야 29:13-16 말씀을 본문을 가지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를 섬기라”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진실한 마음 (a sincere heart)’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를 드릴 때나, 찬송을 할 때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진실한 마음’과 반대되는 말은 ‘위선자’라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외식하는 자’ 라고 나와 있습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hypo¬crites’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stage actor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뜻입니다. 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각본에 나오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얼굴에서 ‘위선자’의 얼굴을 보신 예수님은 아주 혹독하게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한 장 전체가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의 문을 막는다. 너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마태복음 23:13) 바리새인들만 그런 것 아닙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진실하지 못해서, 우리 얼굴에 ‘위선자’의 얼굴이 보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의 문을 막고 있습니까?

‘진실한 마음’은 꾸밈이 없는 정직한 마음입니다. ‘sincere’라는 말이 ‘씬체루스 (sincerus)’라는 라틴어에서 왔다고 합니다. 또 ‘씬체루스’라는 말은 ‘씨네 (sine, without)’라는 말과 ‘체라이 (cerae, wax)’라는 말이 합해지면서 생겼다고 합니다. ‘양초 없이 (without wax)’라는 뜻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조각과 건축 자재로 대리석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대리석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어서 흠이 없는 대리석은 아주 고가로 팔렸습니다. 장사들은 약간의 흠이 있는 대리석에 양초를 먹여서 흠집을 메꾸어 고가의 대리석으로 팔았다고 합니다. 대리석 장사들 중에는 “우리 집에서 파는 대리석은 양초를 먹이지 않습니다”라고 선전하는 장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부터 ‘진실한 (sincer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 중에 위선자를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 중에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다 좋아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인격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숨기는 사람,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 우리가 하나님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8)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나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은 아닙니다. 먼저 죄를 깨끗하게 씻고, 정결한 마음을 품고 나오라고 합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정결한 마음 (purified heart)’이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입니다. 다른 데 모두 뺏기고 조금 남은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 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까이 해 주십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기원전 700년경 남왕국 유다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오늘 읽은 말씀 1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백성이 그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경배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해 오던 대로 형식적으로 하는 것일 뿐이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이 말씀이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se people say they are mine. They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And their worship of me is nothing but man-made rules learned by rote①. / ①Greek version reads Their worship is a farce, /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Compare Mark 7.7 직역해 보면, “이 사람들은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입으로는 나를 존경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들이 나를 예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Their worship is a farce (그들의 예배는 우스꽝스러운 희극이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적어도 새해 들어서 믿음생활을 잘 해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주님 (the Lord)’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주님’이라는 말이 바로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라고, 나는 예수님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존경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위에서 야고보서 4:8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씻고, 정결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가까이 해 주신다는 말씀을 읽었지 않습니까? ‘정결한 마음’이란 신부의 마음입니다. 신부가 온전하게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 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지금 너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요. 성경에는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nd all your mind (마태복음 22:37)” 이렇게 나와 있거든요.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 6:5에도 나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꼭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지 저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요? 성경은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이라고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이사야가 살던 시대에 유대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지자 이사야의 마음이 다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다가 망해가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보면서도 똑 같은 전철을 밟고 있는 동족들을 보는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예전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하는 바리새인들을 바라 보는 예수님의 심정도 똑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가 너희와 같은 위선자들에 대하여 쓴 것이 옳구나.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키는구나.” (마가복음 7:6-8)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을 보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이사야 말씀에 좀 이상한 말씀이 나옵니다. “보아라, 내가 놀랍고 신기한 일로 이 백성을 다시 놀라게 하겠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지혜를 잃고 똑똑한 사람들은 총명함을 잃을 것이다.” (1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ecause of this, I will once again astound these hypocrites with amazing wonders. The wisdom of the wise will pass away, and the intelligence of the intelligent will disappear.” 직역하면, “내가 다시 한번 이 위선자들을 놀라운 일로 놀라게 하겠다. 지혜자의 지혜가 사라지고, 지성인을 자처하던 사람들의 지성이 사라질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once again’이라는 말로 보아서 과거에도 여러 번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똑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학자들에게서 지성 (intelligence)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divine intervention’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깨닫고, 미련한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릴까요? 이미 마음을 세상 것들에게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 속에는 이미 세상적인 가치관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생활은 일종의 교양이 되고 만 사람들이, 주변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서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올까요? 그런 일들이 주변에서 벌어진다고 해서,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 올까요? 한번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킬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기 전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가끔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냥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을 갖도록 해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시면 간단하게 해결될 일을 가지고, 왜 우리 때문에 그렇게 마음 아파하실까?”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어제 토요일 아침에 요한계시록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믿음을 가진 라오디게아 교회 (the church in Laodicea)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그렇습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면서, 안에서 문을 열기를 기다릴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그냥 문 열고 들어가면 안 됩니까?

워너 샐먼 (Warner Sallman, 1892-1968) 이 그린 ‘Christ At Heart’s Door (마음의 문 밖에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그림을 아시나요? (화면을 보십시오) 이 그림은 워너 샐먼이 요한계시록 3:20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서 그린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영국의 홀만 훈트 (Holman Hunt, 1827-1910)가 그린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 (Christ The Light Of The World)’에 영향을 받아서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좋아합니다. 예술가들의 영감이 얼마나 놀라운지......이 그림을 잘 보면 문에 손잡이 (knob)가 없습니다. 그래서 밖에서는 열고 들어갈 수가 없고, 안에 문을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억지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토기장이와 진흙 (the potter and the clay)’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우리는 진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만들어진 물건이 자기를 만든 토기장이를 향해 ‘그가 나를 만들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16절) 이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만드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가장 행복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하지 않도록 저와 여러분을 만드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때 분명히 ‘divine intervention’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지혜로운 사람은 빨리 깨닫습니다.

새해에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러분이 형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앞에 하나님께서 열어 주시는 문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열어 주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열어 주십니까? 간절히 원하면 열어 주십니까? 교회 열심히 빠지지 않고 출석 잘 하면 열어 주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지금이라도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귀를 열어 주셔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 가운데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마음 전부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1/7/2018 | 새해예배 설교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God Who Makes Everything New

요한계시록 21:1-7

오늘은 2018년 새해 첫 주일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우리 예배당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알았습니다. 적당한 예배 장소를 구하지 못했는데, 마침 전명수 장로님 댁에서 예배 장소를 내 주셔서 이렇게 새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예배는 인터넷 방송으로 중계 되기 때문에, 집에서 이 방송을 보면서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새해 첫 주 예배를 예배당에 가득찬 성도들과,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 연주, 그리고, 성가대와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함께 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이런 것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지내왔던 우리 마음에, 감사의 마음을 회복 시켜 주시려고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22장까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21장이니까 요한계시록 끝부분입니다. 악한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복되고, ‘새하늘과 새땅’이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았다는 사도 요한이 기록한 말씀으로 오늘 말씀이 시작됩니다.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요한은 이 ‘새하늘과 새땅’이 전에 있던 하늘과 땅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늘과 땅입니다. 그래서 ‘새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부터 내려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바다는 용이 살던 곳입니다. 용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용이 살던 바다가 없어졌다고 하니까요. ‘새하늘과 새땅’은 하나님의 통치을 반대하던 세력들이 정복되고.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하게 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 (5절)”고 하신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ok, I am making everything new! Write this down, for what I tell you is trustworthy and true.”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겠다고 한 이 말은 틀림없는 나의 진실한 말이니까 이 말을 받아 적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새해 들어서 새롭게 되고자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새롭게 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는지, 우리는 그 방법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새해 ‘resolution’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 말로 하면 ‘결심’이라고 할까요? “What is your resulution for the New Year?” 하고 물으면 새해를 어떻게 살 것인지 마음에 결심한 것이 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새해 ‘resolution’을 세운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결심이 얼마나 약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결심해도 그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말이 그래서 나왔잖아요? 마음은 먹었는데 3일 밖에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어에도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하네요. “I throw in the towel too soon.” 혹은  “I stick to nothing.” 이런 표현도 있다고 하네요.

우리가 새로워지기를 원하지만, 마음 먹은대로, 결심한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있습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세요. 디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랍비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의회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최고로 존경 받는 사람으로 이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밤중에 찾아 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니고데모는 자기가 가지고 온 문제가 무엇이라고 예수님께 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의 문제가 무엇이라는 것을 단번에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복음 3: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에 나옵니다. “Unless you are born again①, you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 / ①Or born from above 성경은 새로워진다는 말을 ‘거듭난다’ 혹은 ‘born again’한다라는 말과 같은 말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born again’이라는 말은 ‘born from above’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다고 각주 (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것은 우리의 결심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워지기 위해서 이런 저런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대로 되지 않아 포기하고 맙니다.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으로’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5:17-18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이 말씀 속에 사람이 새로워지기 위해 알아야 할 세 가지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은 믿는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둘째로, 성경이 말하는 새로워지는 삶이란 예전의 삶이 새로운 삶으로 완전히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철이 들어 말이나 행동이 전보다 조금 좋아지는 것을 새로워진다고 하지 않습니다. “The old life is gone and a new life has begun”입니다. 예전의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전의 삶과 새로운 삶 사이에 단절이 생긴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새로워지는 문제는 우리의 힘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가 새로워지기 위해서 알고 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신다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Look, I am making everything new! (5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는지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비겁하고 믿지 않는 자, 악을 행하는 자, 살인하고 음란한 자, 마술을 행하고 우상 숭배하는 자, 거짓말하는 자들에게는 유황이 타는 불못이 예비되어 있을 것이다.” (8절) 라고 했습니다. 런 사람들은 ‘새하늘과 새땅’의 백성들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워진 사람들만이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면, 낡은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될 수 있다.” (마태복음 9:17) 예수님께서 “낡은 가죽 부대는 터져서 새 포도주가 담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여기서 말씀하신 ‘낡은 가죽 부대 (old wineskins)’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율법주의자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의 (self-righteousness)’에 빠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의 것을 고집하면서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 부대’로 만드시는 일을 끊임없이 하십니다. ‘새 부대’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야말로 ‘새 부대’가 되지 않고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혹은 15년 안에 이 시대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도 지금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확신은 지금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들을 행하고 계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성전이 제 구실을 못했을 때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서 파괴해 버리신 하나님께서 다시 그 일을 하지 않으신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의 솔로몬의 성전도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침략해서 파괴하지 않았나요? 그 때도 성전이 제 구실을 못했습니다. 그 때가 기원전 586년이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었을 유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유대인들은 요즘 말로 하면 ‘멘붕’에 빠졌습니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누가복음 12:5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계획하시고 진행하고 계시는지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까?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새 부대 (new wineskins)’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획하시는 일들을 놓치는 일이 없이, 모두 담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 말씀에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I will be their God, and they will be my children)”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가장 정상적일 때, 가장 완전했을 때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비정상적일 때도 있나요? 며칠 전에 새벽 기도에서 히브리서 11장 말씀을 읽었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16절)” “That is why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NLT)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땅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고 자신들을 나그네라고 생각하면서 천국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implication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이 그런 것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새롭게 하는 일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3-4절) ‘새하늘과 새땅’에서 있는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 잘 안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말씀과 정반대의 현상들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이고, 이 일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교회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보스턴)의 말이 생각납니다. “What is succes?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th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자주 많이 웃고, 지성적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 대해 애정을 갖고, 비평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거짓된 친구들로부터의 배신을 참고, 아름다움의 가치를 알고,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아이를 건강하게 기르거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거나 사회조건을 개선하여어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남기고, 내가 세상에 살았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숨을 편하게 쉴 수 있었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삶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일도 바로 이런 일이 아닐까요? 무슨 큰 일을 해서 ‘새하늘과 새땅’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작은 일을 통해서도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의 눈을 닦아주는 일, 다른 사람의 슬픔과 아픔을 위로하는 일, 이런 일들도 충분히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2018년 새해가 아무 계획 없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그렇게 말하잖아요? “잠에서 깨어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The hour has come for you to wake up from your slumber because our salvation is nearer now than when we first believed).” (로마서 13:11)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이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담임목사로서 새해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부르시고, 우리교회를 부르실지 기대가 됩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기쁨으로 응답하고 참여하는 여러분과 또 우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2/31/2017 | 송년주일예배 설교

내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 God Knows Me By Name.

시편 147:1-7

오늘은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2017년을 시작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세월이 살같이 흘러갑니다. 한자에도 광음여류(光陰如流), 세월유수(歲月流水), 광음여전(光陰如箭)이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모두 세월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또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3절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망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Time is now fleeting, the moments are passing from you and from me).” 또 성경 시편 90편에 보면 “우리의 인생이 날아가듯 빨리 지나갑니다 (시편 90:10)”라는 말씀이 나오고, 신약 에베소서에는 “세월을 아끼라 (5:16)”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올 한 해를 어떻게 사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올 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을 겪으면서 맘 고생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올해는 많은 사람들이 직장 문제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원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한국으로 나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 facebook에 올려 놓았습니다만, ‘미국에서 한국인이 사는 법’이라는 동영상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유학생들이 미국에서 직장을 얻지 못하고 ‘OPT (Optional Practical Training)’ 기간이 끝나 하는 수 없이 한국으로 귀국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영상입니다. 그리고, 제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올해 사랑하는 어머니를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리스천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크리스천들도 힘든 일을 겪게 되면 믿음이 약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까지 의심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다고 해서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편 147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는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시편 147편은 누가 쓴 것인지 저자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시편도 다윗이 쓴 시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이 150편 중에 73편이나 되니까 그럴만도 합니다. 하지만, 성서신학자들은 시편 147편은 다윗의 시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147편은 무명의 저자가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시편 147편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시편은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찬양하십시오 우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요. 그분께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요.” (1절)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에서 찬양이 중요한 이유는, 찬양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recognize)’ 것이기 때문입니다. ‘praise’라는 말 자체가 찬양의 대상에게 존경과 인정을 표현하는 것 아닙니까? 욥기를 읽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은, 그가 고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재산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도, 자식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죽는 참사를 겪으면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대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의 내 삶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세요? “누구든지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나도 귀하게 여기겠다. 그러나 나를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은 나도 그들을 깔보아 수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두겠다. 이는 내가 온 세계의 주인이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하는 말이니 그대로 될 것이다 (I will honor those who honor me, and I will despise those who think lightly of me).” (사무엘상 2:30, 현대어 성경) 하나님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너 (honor)’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너’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씀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시 제사장이었던 엘리 (Eli)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 때 제사장 엘리는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웠다고 했습니다. 매우 상징적인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엘리와 하나님 사이의 소통이 이미 단절된 상태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 때 엘리의 입에서 찬양이 끊어진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보다 자식들에 대한 정이 더 앞서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 시간 송년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올 한 해,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힘든 시간을 보냈든지 상관 없이,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아너 (honor)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인정해 주시고, 높여 주십니다.

둘째로,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목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쉽게 절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크십니다. 그분의 분별력은 끝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ow great is our Lord! His power is absolute! His understanding is beyond comprehension!”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beyond our comprehension (우리의 이해 밖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우리의 좁은 생각 속에 가둬 놓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worm’s-eye view’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bird’s-eye view’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당장에 눈 앞에 있는 것만 보지만, 하나님은 전체적으로 그의 자녀들의 삶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당장에는 내가 보는 것이 맞는 것 같지만, 큰 그림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관점이 맞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어떻게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을까?” 하고 깜짝 놀라는 말씀들을 발견합니다. 신명기 8:4-5 말씀을 보십시오.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여러분의 발도 부르트지 않았소. 부모가 자기 자녀를 단련시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여호와께서도 여러분을 단련시켜 가르쳐 주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시오.” 광야생활 40년을 ‘worm’s-eye view’를 가지고 봐 보세요.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불평과 원망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하지만, 그 때 당장에는 문제투성이였던 것 같은데, 하나님의 ‘bird’s-eye view’로 보니까 전혀 해석이 달라집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공급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정말로 광야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을까요? 정말로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신발은 닳아 없어지고, 옷은 해어지고, 고생이 이만저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 광야생활을 돌아 보니까 모두가 축복이었고, 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광야생활의 경험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했던 고생은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배고픔과 목마름은 아무 이유 없이 겪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돈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을 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영어 번역 성경에 보면 5절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ll never comprehend what he knows and does (우리는 그가 알고 계시는 것과 그가 행하시는 일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33-34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은 참으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했던 말씀과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가 참으로 깊다고 하면서 ‘unfathomable’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깊이 (바닥)을 잴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아주 귀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귀했으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내주셨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서 볼 때 아주 ‘유니크 (unique)’한 사람들입니다. 나와 똑 같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니크한 삶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분은 별들의 수효를 결정하시며, 별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주셨습니다 (He counts the stars and calls them all by name).” (4절) 도대체 하늘의 별이 몇 개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많은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시고, 그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그것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이름을 부르신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도 선한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양들이 많든 적든 선한 목자는 자기가 돌보는 양들을 압니다. 단순히 얼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알고 이름을 부릅니다. 또 이와 같은 뜻으로 이사야 49:16에는 “나는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 네 무너진 성벽들이 항상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너는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언제나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구나!”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을 리가 없겠지만, 우리의 이름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 놓았다고 (engraved)’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이름이 지워질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삶에 힘든 일이 있고, 고난이 있다고 해서 쉽게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비록 잠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수는 있지만, 금방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때는 ‘worm’s-eye view’로 여러분의 삶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bird’s-eye view’로 여러분의 삶을 해석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전과 전혀 다른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3절 말씀에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신다”라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heals the brokenhearted and bandages their wounds.”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올 한 해 동안에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인간관계에서, 부모와 자식 간에,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마음이 상할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성경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제사는 깨어진 마음입니다. 오 하나님, 상처난 가슴과 죄를 뉘우쳐 주님께 고백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경멸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깨지고 상처 받은 심령들을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편 51편을 쓴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broken spirit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자의 심정으로까 승화 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예배자들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사적(修辭的)인 표현이 아니라, 다윗의 경험 속에서 나온 진실한 고백입니다. “내 죄를 주께 고백하고, 내 잘못을 여호와께 말씀 드렸더니, 주님은 내 죄와 내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시편 32:5)

‘상한 심령’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worm’s-eye view’를 가지고 보면 내 마음이 깨지고 아플 때, 세상이 원망스럽고, 삶의 의욕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bird’s-eye view’를 가지고 보면, ‘아, 내 마음이 깨지고 아팠을 때, 하나님은 그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도록 나를 부르셨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일찍 깨닫고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치유 (healing)’를 받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지 간에 첫째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 계획하신 일들은 우리의 머리로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만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위대한 계획을 세우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쉽게 절망하고, 쉽게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때때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도록 ‘borken spirit’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깨지고 상한 마음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147편을 통하여 송년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을 회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 중에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하면서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직도 여러분 중에 ‘worm’s-eye view’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가지고 계시는 선하신 계획과 목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비록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한마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생각하지도 않은 것들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64:4, 고린도전서 2:9) 우리가 가진 ‘worm’s-eye view’를 버리고, 하나님의 ‘bird’s-eye view’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올 한 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2018년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12/31/2017 | 송구영신예배 설교

어떤 때는 나가고, 어떤 때는 머물고 Sometimes We Will Move On And Sometimes We Will Stay.

민수기 9:15-23

오늘 추위에도 불구하고 송구영신 예배에 나오신 교우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매년 이 맘 때가 되면 뭔가 마음이 착잡해 지는 것 같습니다. 착잡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 해가 저물어 간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더 큰 이유는 한 해를 최선을 다해 살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나는 최선을 다해서 믿음생활 했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우리 중에 누구도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생활도 좀 더 잘 해야 했습니다. 성경도 좀 더 성실하게 읽어야 했습니다. 교회 봉사도 더 잘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좀 더 사랑하고, 좀 더 용서하고, 좀 더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성실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우리를 착잡하게 합니다.

오늘 읽은 민수기 9:15-23 이 말씀은 좀 특별한 말씀입니다.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었습니다. 성막은 이동식 조립식 성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광야에서 이동할 때는 신속하게 해체해서 가지고 가고, 어디 머물 때는 신속하게 조립을 해서 성막을 세웠습니다. 성막 가장 안쪽에 법궤를 두었습니다.

성막을 세우던 날, 구름이 장막을 덮었습니다. 밤이 되면 그 구름은 불기둥처럼 보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걷혀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곳에 진을 쳤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도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구름이 며칠 동안만 머물기도 했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틀을 머물기도 하고,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일 년을 머물기도 했습니다. 구름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성막 위에 머물던 구름이 걷히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떠났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길을 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0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들을 모두 열거하면서 “이런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처럼 악한 일을 즐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0:6)”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본보기’라는 말은 영어 성경에 ‘examples’이란 말로 나옵니다. 개역 성경은 이 말을 ‘거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본보기’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민수기 9:15-23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하나의 ‘example’ ‘본보기’ ‘거울’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습니다.” (20절)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다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23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metimes the cloud would stay over the Tabernacle for only a few days, so the people would stay for only a few days, as the LORD commanded. Then at the LORD's command they would break camp and move on.”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길을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머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 상상해 보십시오. 며칠 동안 행군을 했기 때문에 발들이 부르트고, 아이들이 칭얼댑니다. 좀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도 안 되어서 구름이 걷혔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행군을 해야 했습니다. 또 반대의 경우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는 오랫동안 머물기는 여건이 좋지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름이 계속 성막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길을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가 없습니다. 아니, 그 여건이 좋지 않은 곳에서 성막 위의 구름이 1년을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아요?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이 말씀을 적용해 봤습니다. 일반적으로 적용을 ‘application’이라고 합니다만, ‘implication’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implication’이란 말은 ‘imply’의 명사형입니다. 우리 말로 ‘암시하다’ 또는 ‘함축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금방 행군을 하고 진을 친지가 얼마 안 되는데, 성막 위의 구름이 걷혀서 금방 다시 행군을 해야 할 때에도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꼭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문제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이 2018년 한 해를 시작해야 하는 우리에게 좋은 ‘example’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새해에는 더욱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늘 내 생각을 앞세워 결정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2018년 새해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생각할 것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복음 16:23) 이 말씀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보다 앞서가지 말고, 예수님의 생각보다 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로 가서 예수님이 걸어가진 발자국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보다 앞서 행동했고, 예수님의 말씀보다 내 생각을 앞세웠습니다. 기도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일을 저지르고 일이 잘 안 되면 그 때 기도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그러지 말자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시지 안으면 인내를 가지고 계속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성경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을 먼저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화면을 보면서 오늘 주신 말씀을 소리내어 읽어 보겠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걷혀 올라가면, 이스라엘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다가 구름이 멈추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곳에 진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다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도 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도 여호와의 명령대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며칠 동안만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막 위의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만 머물기도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구름이 걷히면,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구름이 걷히면,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성막 위의 구름은 이틀을 머물기도 하고,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일 년을 머물기도 했습니다. 구름이 머물러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걷히면, 백성도 길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진을 쳤다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했습니다.” (민수기 9:17-23, 쉬운성경)

이 말씀이 2018년을 위한 우리들의 ‘example’입니다. 우리들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들의 ‘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가정과, 계획하는 모든 일들 속에, 그리고 우리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