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0/8/2017 | 창립 39주년 기념주일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 A Church Entrusted With The Mystery Of The Gospel
에베소서 3:3-11
오늘 성경 말씀에 ‘비밀 (3, 5, 6절)’ ‘신비 (4절)’ ‘숨겨진 (9절)’ ‘지혜 (10절)’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바울이 이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무슨 의도가 있지 않을까요? 성서학자들은 에베소서가 기록된 것을 A.D. 62년경 로마에 수감되어 있을 때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영지주의 (Gnosti¬cism)’이 최고의 학문으로 각광을 받고 있던 때였습니다. ‘영지주의’는 ‘이분법 (Dualism)’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 철학사상입니다. ‘지혜 (wisdom)’를 찾고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밀스럽게 감추어져 있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오픈됩니다. ‘영지주의’를 ‘밀의종교 (mystery religion)’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쓰면서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비밀’ ‘신비’ ‘숨겨진’ ‘지혜’라는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 읽는 사람들은 에베소서가 ‘영지주의자’들이 남긴 문서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편지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이 비밀스런 진리를 아무도 깨달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통해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이 신비로운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5절) 오늘 말씀을 자세하게 읽어 보면 알게 되겠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숨겨졌던 하나님의 비밀스로운 진리가 드러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7절). 또, 자신은 그동안 숨겨져 왔던 진리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임무를 맡았다고 합니다 (9절). 그가 이렇게 기쁜 소식,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갖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알게된 ‘부요함 (richiness)’ 때문이라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ough I am the least deserving of all God's people, he graciously gave me the privilege of telling the Gentiles about the endless treasures available to them in Christ.” (8절) “나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 가장 자격이 없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로 나에게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을 수 있는 무한한 보물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명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웁니다. 하지만 무작정 아무 계획 없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도시에 교회를 세웁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끊임없는 소통을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전략적인 도시에 교회를 세웁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라는 도시에 갔을 때 유난히 박해가 많았습니다. 그 도시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중요한 도시인만큼 사탄에게도 그 도시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조용히 있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를 공격하거나 해치지 못할 것이다.” (사도행전 18:9-10) 바울은 여기서 신실한 동역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납니다. 둘이 직업기 같기 때문에 우연히 만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부부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례적으로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이나 머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 10-11절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목적은 (나에게 교회를 세우도록 하시는 목적은) 교회를 통해서 하늘의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태초부터 이루려고 계획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여기 ‘하늘의 천사들에게’라는 말은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라는 말이 정확한 해석입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보이지 않는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란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을 대적해서 세상을 통치하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게 하시는 목적은 이런 사탄의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나타났다는 것을 선포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God's purpose in all this was to use the church to display his wisdom in its rich variety to all the unseen rulers and authorities in the heavenly places.” (10절) (New Living Translation)
몇 년 전에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는 목적, 그리고 교회가 맡은 사명이 바로 이 말씀 속에 들어 있구나!” 에베소서 말씀을 읽다가 이 말씀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요점을 정리한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기관입니다. ‘교회’라는 말이 그리이스말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올해 ReNEW 주제가 ‘에클레시아’입니다. 부제를 ‘God’s Calling for This Generation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정했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기관’이라고 한 것은 맞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의 관점에서 보면 ‘에클레시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기기 위해서 불러낸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에클레시아’이고, 이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상을 통치하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들에게 하나님의 비밀, 그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세우신 계획입니다 (11절).
이 말씀 속에 교회의 존재 목적, 교회의 존재 이유, 그리고 교회의 사명, 교회에 대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로 창립 39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교회가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복음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구원의 복된 소식’ ‘구원의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시의 적절할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간혹 선한 사람을 위해 죽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을런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으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이렇게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될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로마서 5:6-10)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And since we have been made right in God's sight by the blood of Christ, he will certainly save us from God's condemnation. For since our friendship with God was restored by the death of his Son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we will certainly be saved through the life of his Son.” (8-10절, New Living Translation)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과 friendship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의 주도권 (initiative)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initiative를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에는 구원의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은 복음의 비밀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나요? 복음을 머리로만 이해하고, 가슴이 뒤따르지 않으면 ‘값싼 구원’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는데, 그 대가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는데, 이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것입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는 이미 70년 전에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고를 했습니다. “Cheap grace is the grace we bestow on ourselves. Cheap grace is the preaching of forgiveness without requiring repentance, baptism without church discipline, Communion without confession...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값싼 은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부여하는 은혜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와 세례와 교회 훈련이 없는 용서의 설교이고, 고백이 없는 성만찬입니다....... 값싼 은혜는 제자직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입니다.” 이미 70년 전에 본회퍼는 지금의 교회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만이 이 시대에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복음을 아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 때문에 삶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교회가 정말 그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많이 듭니다. 교회의 겉 모습은 나무랄 데가 없고 좋은데, 교인들의 생각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자들답게 여러분의 몸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So use your whole body as an instrument to do what is right for the glory of God).” (로마서 6:13)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 안에서 이런 믿음의 결단들이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Religious People (종교적인 사람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followers (제자들)’를 원하십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 (discipline)’ 해야 합니다.
셋째로,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는 다른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고 싶은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결과 아닌가요?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복음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은,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그것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내릴 것입니다 (Yet preaching the Good News is not something I can boast about. I am compelled by God to do it. How terrible for me if I didn't preach the Good News).” (고린도전서 9:16) 구약 예레미야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9) ‘his word burns in my heart like a fire (하나님의 말씀은 내 마음 속에서 불처럼 타오릅니다)’ 예레미야의 마음 속에 타고 있었던 그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다. 복음의 비밀을 맡은 교회는 이렇게 복음의 열정으로 불타는 사람들로 채워져야 합니다.
오늘 주보 겉면에 있는 그림을 보십시오. C.S. Lewis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There are only two kinds of people in the world. Those who bend their knee to God and say to Him, ‘Your will be done;’ or those who refuse to bend their knee to God and God says to them, ‘Your will be done.’”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하나님께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너희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이 세상에는 자기가 전자라고 착각하는 크리스천으로 꽉 차 있습니다. 비록 전자라고 할지라도 후자에 대한 책임이 없다면, 그 사람이 요나 같은 사람 아닙니까? 요나가 누구인가요? 하나님께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 아닌가요?
우리교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기초를 쌓는 일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교회의 규모가, 사이즈가 얼마나 커지느냐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일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를 크리스천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세상에 복음의 비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모두 같은 자리에서 그 말씀을 읽었습니다. C.S. 루이스의 말을 조금 패러디 (parody) 해서 이렇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중에 오직 두 종류의 사람들만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는, 오늘 말씀을 듣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사람으로 살겠다고 결단하는 사람들과, 또 하나는, 오늘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따라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나요? 그리고, 우리 교회에 대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10/1/2017 | 세계 성만찬주일 설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Do This in Remembrance of Me.
마가복음 10:42-45
오늘은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성만찬을 나누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이 성만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3.1절이나, 광복절 등 해마다 기념일을 지키듯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만찬 예식을 자주 행하여 나를 기억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의 성만찬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마시는 잔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는 것 (to share in the blood of Christ)’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 (to participate in the blood of Christ)’이라고 해석했고, 우리가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빵을 떼서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우리는 한 운명의 공동체라고 해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예전에 중국에 단기 선교 가서 성만찬을 나누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미리 그곳에 있는 조선족 전도사님과 연락이 되어 세례식을 하고 성만찬 예식을 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10명 정도가 세례를 받았고, 우리대원들까지 30명 정도가 성만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외부 사람이 들어가서 세례를 주거나 성만찬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약간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먼저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이고,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포도주와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받아 들고 훌짝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포도주와 빵을 받아들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자리가 울음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만찬 예식을 진행하던 저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진행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품에 안아주면서 “주님, 이 사람들이 이제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는데, 그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성만찬을 나눌 때 그런 감격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우리의 선조들에게 성만찬 예식은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목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에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천주교를 말합니다. 이론적인 학문보다 실용적인 학문을 고대했던 이벽, 정약전, 권철신, 정약용 등이 적극적으로 서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이승훈이라는 사람을 중국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그 때가 1784년이었습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부터 은밀하게 신자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신자들이 가장 갈망했던 것이 세례 받고 성만찬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신자들은 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세례를 받고, 성만찬을 받았습니다. 한 밤 중에, 어디서 신자들이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들은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조선인처럼 변장을 하고 신자들에게 가서 세례를 주고, 성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만찬의 핵심은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remember (기억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내 몸 속에 흐르게 하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으로 먹음으로써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예식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맺어진 ‘새로운 계약 (the New Covenant)’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누가 저에게 질문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누가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주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께 와서 저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높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인자도 (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왔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말씀 속에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本能)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지만 섬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 놓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쉬지 않았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누가복음 7:44-46)
이 말씀에 나오는 시몬은 베드로가 아니라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이 말씀 속에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내게 입맞추지 않았다’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다’ 이런 표현들은 우리의 문화적인 관습에서는 매우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의 관습에 의하면 이런 행위는 종이 주인울 섬기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섬김의 삶을 선언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누가복음 22:27) 저에겐 “But not here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이 말씀이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에서는 앉아서 먹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서서 서브하는 사람이 낮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서 계시는 이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된 이 자리에서는 먹는 사람이 결코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 서브하는 사람이 결코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이 뒤집혀 새로운 가치관이 탄생합니다.
초대교회 목사 중 한 사람인 이자익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살다가, 전북 김제시의 부자였던 조덕삼을 만나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갑니다. 조덕삼은 자신의 집에서 머슴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는 이자익의 성실함을 눈여겨 봤습니다. 이러다가 이 마을에 최의덕 (Lewis Boyd Tate) 선교사 오게 되어, 두 사람은 1905년 10월 11일 함께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은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 날한 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 창립 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1907년, 두 사람은 함께 교회의 집사로 임명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당연히 조덕삼이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습니다. 이자익이 조덕삼을 이기고 장로로 추천된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이 때, 조덕삼은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집사는 저보다 신앙이 더 깊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조덕삼 집사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여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에도 조덕삼 집사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이자익 장로의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지내고,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집사의 관계로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머슴인 이자익이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담임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자익이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학비를 내 준 사람이 조덕삼 장로였다고 합니다. 이들의 삶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유는 이들의 삶이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긴다는 것은, 이론(理論)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이었습니다. 섬김의 삶은 자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 (ransom)’로 내주심으로서 증명되었습니다. 말로만 섬김의 삶을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ransom’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우리의 몸값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和睦)한 (reconciled)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reconcile’이란 말은 ‘re (again)’ + ‘conciliate (make friend)’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ransom’으로 지불하신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이해서 섬기는 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John D. Godsey 라는 사람이 본회퍼의 신학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In Bonhoeffer’s theology, there is an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Jesus Christ and the church. In his letters from prison Bonhoeffer spoke of Jesus as “the man for others.” And in parallel fashion he wrote that the church is truly the church only when it exists for others. Just as Jesus lived his life completely for others (even unto death on the cross), so the church is to serve God by serving the world of need.” “본 회퍼의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본 회퍼는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본회퍼는 교회는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다른 사람을 섬기셨던 것처럼, 교회도 세상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교회마다 멋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바빴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목사님들은 선진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의 큰 교회들, 예를 들면 Rick Warren 목사의 Saddleback Community Church나 Bill Hybels 목사의 Willow Creek Church를 앞다투어 방문하고 그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들을 벤치마킹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지금에 와서 모두 부질 없는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두 사람의 신학자가 같은 시기에 예언자적인 글을 써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요한네스 호켄다이크 (J. C. Hoekendijk, 1912-1975)라는 네델란드의 선교 신학자가 ‘The Church Inside Out (영문판 1966, 한글판 1975)’이라는 책을 냈고, 한스 큉 (Hans Küng, 1928- )이라는 카톨릭 신학자는 일년 뒤인 1967년에 ‘The Church’라는 책을 냈지만, 아무도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두 신학자는 모두 교회가 이대로 가면 미래가 없다고 전망했습니다. 교회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교회의 구조 (structure)를 섬기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이제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누구 다른 사람 말할 것 없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어느 훌륭한 목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큰 교회에게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공부를 합니까? 학위 받고 좋은 직장에 가서 남보다 더 많은 샐러리를 받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공부합니까? 바로 그런 생각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내려 놓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예배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포도주 잔을 들면서 예수님의 피가 나의 핏줄에 흐르게 하고, 빵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삶이 나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내가 깨어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교회의 생명은 살아나고, 세상은 다시 교회에게 소망을 둘 것입니다. 오직 이 한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9/24/2017 |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4
그러면, 너는 성공할 것이다. Then You Will be Successful.
여호수아 1:5-9
여러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 입어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한 회 연장해서 네 번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이 설교가 예배를 드리는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설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를 데려 가신 것입니다. 이유가 될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 광야 (the wilderness of Zin)에서 가데스 (Kadesh)라는 곳에 캠프를 치고 있었습니다. 광야니까 당장에 급한 것이 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목이 마르다고, 가축들이 물이 없어 다 죽겠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모세에게 와서 불평했습니다. 이러다간 우리 모두 다 죽는다고, 무슨 대책이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 앞에서 서서 저 바위에 대고 말하여라. 그러면 저 바위에서 물이 나올 것이다.” (민수기 20:8)
인간의 문제는 복잡하고, 어렵고, 심각한데,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쉽고 간단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런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문제의 해답 (answers)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할 때는 믿고 구해야 합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If you need wisdom, ask our generous God, and he will give it to you. He will not rebuke you for asking. But when you ask him, be sure that your faith is in God alone).” (야고보서 1:5-6) 누가 그랬습니다. 사방이 다 막혀 있어도 위가 열려있다고요. 위가 열려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은 여전히 열려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스왈드 체임버스 (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의 ‘My Utmost for His Highest)’ 이 책을 좋아합니다. 체임버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When we are afaid, the least we can do is pray to God.” 아무리 두렵고, 떨리고, 절망적이어도 최소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채널은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기도의 채널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문제는 이 채널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소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난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까 궁금합니다. 분명히 모세는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저 바위에게 명령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물이 터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했습니다.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도 실컷 마시고, 가축들도 실컷 마셨습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사람들 앞에서 신경질적으로 지팡이를 두번 내려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Because you did not trust me enough to demonstrate my holiness to the people of Israel, you will not lead them into the land I am giving them (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의 거룩함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그들에게 줄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민수기 20:12)
모세에게는 정말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너는 이 일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도 분명히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 모세가 그만한 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도 안 돼!” 이 설교를 하는 저도 이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떤 때 하나님은 한없이 참으시고, 한없이 너그러우신데, 이런 때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시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세가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인 모세가 이해했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는데, 제 삼자인 우리가 흥분할 이유가 없습니다.이 일 이후에 모든 상황이 신속하게 진행됩니다. 모세는 그의 조수 (assistant)였던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넘겨 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히 사라집니다.
여호수아는 누구입니까? 모세와 여호수아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모세는 큰 산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무로 말하면 거목(巨木)입니다. 큰 나무와 같은 존재입니다. 모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는 매우 겸손했습니다. 모세는 땅 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Now Moses was very humble - more humble than any other person on earth).” (민수기 12:2) “하나님은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대면하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one speaks to a friend.” (출애굽기 33:11) “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그 뒤로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There has never been another prophet in Israel like Moses, whom the LORD knew face to face).” (신명기 34:10)
이런 모세와 신출내기 여호수아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모세의 조수로 일했다고 하지만, 어떤 일을 했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 참여했습니다. 그 때 갈렙은 유다지파의 대표로 가나안 땅 정탐에 참여합니다. 가나안 정탐 결과를 보고할 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땅이니까 우리가 능히 정복할 수 있는 땅이라는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만으로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할 것이며,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너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결코 너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여호수아 1:5-6) 모세와 소통하시던 하나님은 이제 여호수아와 이렇게 소통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함께 한다’는 말은 ‘be with you’ ‘동행한다’는 뜻입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버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고,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추면서 광란의 파티를 벌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죽었습니다. 지금 멕시코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130명이 죽었느니, 140명이 죽었느니 하면서 야단들인데, 3,000명이 죽었습니다. 엄청난 재앙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섭고 두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절망적인 일인지 알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합니다. 모세의 기도의 결과로 다시 하나님께서 “내가 친히 너와 함께 가겠다. 네가 안심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출애굽기 33:14)”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중보기도란 이런 것입니다. 한 민족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중보기도입니다.
세상의 어떤 약속보다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보다 더 안심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 계시는 어른들 중에 노후 보장이 잘 되어 아무 걱정이 없으신 분 계십니까? 그 보장이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만큼 더 좋지는 않습니다. 여기 청년들 중에 교수님의 인정을 받고 있는 사람들 있나요? 교수님이 인정해 주시면 얼마나 신납니까? 하지만 교수님의 인정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보다 위대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 (John Wesley, 1703-1791, 영국)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혹시 요한 웨슬리에 대해 알고 있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청년 시절 옥스포드 대학에 다닐 때 ‘홀리 클럽 (Holy Club)’을 만들어서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매일 기도와 성경읽기에 빠졌던 사람입니다. 오죽하면 그를 ‘성경 벌레 (Bible moths)’라는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성경 벌레’라는 말은 좀 벌레가 천을 갉아 먹고 살듯이, 성경 벌레는 성경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그가 죽을 때 그의 임종을 지켜 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가슴이 뛰는 말씀 아닙니까? 나의 삶을 정리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이 말보다 더 감동적인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세가 죽고 나서 갑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그 땅의 원주민들과 전쟁을 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라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앙의 거인 밑에서 40년 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이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는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사람입니다. “내가 과연 모세처럼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불안해 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도 함께 하겠다, 너를 떠나지 않고, 너를 버리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아무 조건 없이 이런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 종 모세가 너에게 준 모든 가르침을 빠짐없이 지키도록 하여라. 네가 그 가르침대로 행하며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대로 지키면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다. 언제나 율법책에 씌어 있는 것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소리 내어 읽어라. 그리하여 거기에 씌어 있는 모든 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여라.” (7-8절) 무슨 말씀입니까? 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지키라는 말씀 아닙니까? 그러면, 네가 하는 일 다 잘 되도록 해 주겠다는 말씀 아닙니까? 다시, 말씀을 읽어 내려 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명령한 것을 기억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가는 곳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9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잘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할 것며,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의 삶의 성공과 실패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내 삶의 성공과 실패가 내 능력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은 한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실천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도와 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들이 다 잘 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Then, you will be successful in everything you do” 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해 주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깁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그대로 지킵니다. 그래서 성공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테스트합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도 나의 말을 그대로 지키는지 테스트합니다. 여리고와의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은 뜬금 없이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남자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라니요? 여호수아는 자기의 지혜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합니다. 견고하여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여리고성이 무너집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수아가 능력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전략이 뛰어나서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고, 그 말씀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가 가는 곳마다 함께 하셨습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여러분, 화면을 보면서 이 말씀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afraid and do not panic before them. For the Lord your God will personally go ahead of you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당황하지 마라. 너의 주 하나님께서 너보다 앞서 갈 것이다).” (신명기 31:6) ‘personally’라는 말은 나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불안이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지, 여러분이 무슨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실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어떤 불안도, 걱정도 쉽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9/17/2017 |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3
나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잠언 3:3-7
오늘은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리즈 설교 세 번째 마지막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이 설교가 예배를 드리는 모두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설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잠언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잠언을 쓴 사람이 유대나라의 유명한 왕 솔로몬이 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대 역사에 전무후무한 왕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지혜가 많은 왕이었습니다. 얼마나 지혜가 뛰어났으면 스바 (Sheba)의 여왕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가 과연 소문대로 지혜가 많은지 시험해 보려고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 왔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솔로몬은 이 세상의 어떤 누구보다도 재산이 많았으며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솔로몬을 보고 싶어했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듣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10:1-25). 솔로몬은 평생 잠언 3,000개와 1,005개의 노래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돌담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과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4:32-33).
그 밖에도 솔로몬은 국방을 튼튼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최신 무기인 전차 (chariots)를 이집트에서 수입했다고 합니다. 전차 1,400대와 전차 군단 12,000명을 예루살렘에 두었고, 전차를 끌 말은 이집트와 길리기아 (Cilicia)에서 수입했다고 합니다 (열왕기상 10:28).
이런 솔로몬이었지만, 그는 그의 힘이 강해지자 점점 교만해졌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지면서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외국 여자들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열왕기상 11:1-6). 나라 일은 돌보지 않았고, 무리한 건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말년의 삶을 회상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남긴 책이 ‘전도서 (Ecclesiastes)’입니다.
‘잠언 (Proverbs)’ 솔로몬의 지혜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이 중에는 일반적인 삶의 지혜을 모아 놓은 잠언도 있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신앙의 잠언을 모아 놓은 것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 3장은,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 한다는 지혜를 모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의 생애 중기에 잠언을 썼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젊은 시절의 타락과 유혹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솔로몬의 생애 말기에 남긴 것들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먼저 인생을 받드는 두 개의 기둥, 성실과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너는 성실과 사랑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판에 잘 새겨라.” (3절) ‘목에 건다’는 말은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영어 표현으로 하면 ‘as a reminder’입니다. 자기 목에 늘 걸고 다니니까 잊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손목에 맨다’는 말도 있고, ‘머리에 붙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신명기 6:8). 또 ‘마음판에 새긴다 (Write them deep within your heart)’는 말이 나옵니다. 돌판에 글씨를 새기듯이, 마음판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내 마음판에 새겨 놓으면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판에 새겨 놓고 늘 이 말씀을 생각하라 혹은 묵상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실과 사랑, 이 두가지를 목에 항상 걸고 다니고, 이 두 가지를 마음판에 새기라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Never let loyalty and kindness leave you!”라고 나와 있습니다. ‘loyalty’와 ‘kindness’를 절대로 떠나지 말라는 말이지요? ‘loyalty’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충성’이라고 번역하잖아요? ‘충성’은 한번 정한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든지 나쁘든지, 유리하든지, 불리하든지, 한번 정한 것에 끝까지 commitment하는 것입니다. 쉬운 성경에는 이 말씀이 ‘성실(誠實)’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한번 말한 것을 번복하지 않고, 말한 것을 그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성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인자 (mercy)’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New Living Trnaslation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kindness’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kindness’라는 번역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lovingkindness’라는 합성어를 만들어 번역하기도 합니다.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담긴 친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성경은 ‘loyalty’와 ‘kindness’, 이 두가지를 목에 매고 다니면서 마음판에 새기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누가복음 2:52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어렸을 때 이런 모습으로 성장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를 통하여 ‘loyalty’와 ‘kindness’에 대한 교육을 받고 성장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의 인생, 우리의 삶이 아름답고 풍성하게 되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loyalty’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동시에, 사람에 대한 ‘loyalty’를 지키는 것도 이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태도를 바꾸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 일에 ‘commitment’합니다. 꾸준합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직장에서도, 비지네스 현장에서도, 학교에서도, 누구나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나라에서도 이런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없어서 난리입니다.
‘kindness’ 혹은 ‘lovingkindness’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considerate (사려깊다)’라는 말이 ‘lovingkindness’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입니다. 언젠가 룻기를 읽으면서 보아스라는 사람에게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친적이었었는데,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결혼을 하지요? 보아스 같은 사람이 ‘lovingkindness’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보아스와 나오미가 같이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사실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른 새벽에 사람들의 눈에 띄면 구설수에 오르게 되니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가난한 룻의 형편을 잘 아는 보아스는 룻에게 겉옷을 벗어 펴라고 하면서 곡식을 담아 줍니다. 집에 가서 이 곡식으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드리라는 배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장면이 감동적입니다.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Boaz said to her, ‘Bring your cloak and spread it out.’ He measured six scoops of barley into the cloak and placed it on her back. Then she returned to the town.” (룻기 3:15, NLT) NASV에는 “and he laid [it] on her”라고 했습니다. 룻이 주섬주섬 보따리를 들고 나간 것이 아니라, 보아스가 룻의 등에 곡식을 담은 짐을 지워준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보아스, 이 사람 정말 멋있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을 이렇게 배려할 줄 아는 ‘lovingkindness’를 가진 사람을 누가 원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사람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도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과 칭찬을 받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다음으로, 솔로몬은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라 (5절)”라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네 온 마음으로, 전심으로 신뢰하라고 합니다. ‘온 마음으로 (wholeheartedly)’ 혹은 ‘전심(全心)으로’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세계에 흩어진 선교 기관 가운데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 (Wycliffe Bible Translators)’라는 기관이 있습니다. 기 기관에 소속된 선교사들은 투철한 신앙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미나 아프리카나 작은 부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가서,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 문자를 가지고 성경을 번역합니다. 한 사람이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죽으면 누군가가 뒤를 이어 다시 그 곳에 들어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가서 사도행전을 번역합니다.
이 선교회의 선교사 한 분이 남미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이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의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성경 번역을 하다가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몰라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신신당부를 하면서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차례 그렇게 말하고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네 마음을 나누지 마라!” 이 말을 들은 선교사는 “그래, 순종을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구나” 하면서 무릎을 쳤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선교사는 순종은 마음을 나누지 않고 네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번역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자기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5절).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6절).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Seek his will in all you do”라고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Living Bible에는 이 말씀이 “In everything you do, put God first”라고 나와 있습니다. 네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하나님을 제일 첫 번째에 두라는 것입니다. “With every step you take, think about what he wants (ERV)”라고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네가 가는 길을 평평한 길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가 가는 길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면,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저는 지금 어디서 좋은 말씀을 듣고 와서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는 것입니다.
불행한 것은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그런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것입니다. 과거에는 경제적으로 힘든 집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별로 들을 수 없습니다. 지금 시대가 그렇게 변했습니다. 지금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앞서 나가 있는 사람들이 있고, 뒤져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간격이 좁혀지지 않습니다. 한동안 한국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이기 때문에 바뀌지 않는다고요. 젊은 청년들의 입에서 이런 말들이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우리의 삶을 더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한 삶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을 보여 주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이 성경을 읽고 자신의 삶을 바꾸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 속에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신뢰하되 형식적으로, 대충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with all your heart (네 마음을 다 해서)’ ‘전심으로’ ‘온 마음으로’ ‘마음을 나누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느 곳에서나, 어느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그렇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보 겉면에 있는 그림을 한번 봐 주십시오. 거기 이사야 40:31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잠언에는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은 삶이 형통하게 된다고 했는데, 조금 다른 버전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새 힘을 얻는다는 말이나 삶이 형통하게 된다는 말이나 그 의미는 같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는 사람의 삶이 형통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보스턴에 새로운 꿈을 안고 찾아 온 신입생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어 공부하고 싶지 않으세요? 이 새 힘을 얻는 사람은 피곤하여 지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어찌 신입생들뿐이겠습니까? 늘 힘들고 지쳐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인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이 필요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십시오.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맨 먼저 두십시오 (In everything you do, put God first). 그런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습니다.
9/10/2017 |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2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The Lord Is My Strength.
시편 28:6-9
오늘은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두 번째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보스턴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설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28편은 ‘다윗이 가장 어려웠을 때 드린 기도’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우리에게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 우리는 이것을 ‘세계관 (worldview)’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틀 (frame)’을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그밖에 ‘인생관’이라는 것도 있고, ‘가치관’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들은 그 사람의 ‘세계관’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이 그의 고난의 문제를 다루는데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삶에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더라도 고난을 피해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요셉은 어떻습니까? 요셉은 누구보다도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열 한 형제가 있었는데, 요셉은 막내였습니다. 다른 형들이 나가서 일을 할 때, 일도하지 않고 요셉은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의 품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요셉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닥칠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욥이라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밖에 외출할 때는 나이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욥에게 인사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 아침에 아들들이 모두 죽고, 그 많던 재산이 다 날라가고, 몸에는 악성 피부병이 생기고, 아내는 욥을 저주하면서 떠나갔습니다.
오늘 시편을 쓴 다윗도 그렇습니다. 다윗은 갑자기 유명해진 내쇼널 히로우였습니다. 우연히 아버지심부름으로 형들이 나간 전쟁터에 갔다가 골리앗을 이긴 바람에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사울 왕은 다윗을 경계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사울이 왜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는지 다윗은 이유도 모른 채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이리 저리, 이산에서 저 산으로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이때가 다윗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들 때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어느 새 노래로 변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편은 단순히 시가 아니라 노래입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시편 46편도 ‘알라뭇’에 맞춰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알라못’이라는 말이 소프라노 목소리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고난 중에 부르는 찬송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성경의 인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지요. 그는 빌립보에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선교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내륙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번번히 무산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꿈에서 보여 주시는 환상을 본 것 아닙니까? 그 꿈 속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 이리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달라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이 마케도니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선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이 되다가 무슨 일 하나가 빌미가 되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한 밤 중에 사방은 조용합니다. 그는 그 때 자리에서 일어나 찬송을 부릅니다. 죄수들이 잠에서 깨어나 그의 찬송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도행전 16장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고난 중에 있을 때 기도할 수 있고, 찬송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 아닙니까? 다시,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과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음으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대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대로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다는 것이 ‘크리스천 세계관 (Christian worldview)’이요, 인생관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적은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선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The thief's purpose is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 요한복음 10:1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믿는 사람들이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디즈니 무비 중에 ‘Joseph King of Dream’이라는 애니메이션 무비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요셉의 일생을 다룬 영화입니다. 이 영화 중에 요셉이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 제목이 ‘You Know Better Than I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아시니까요)’입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요셉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 일 없이 아버지 집에서 잘 살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곤두박질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우물 속에 집어 넣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집트로 팔려 갑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서 주인의 눈에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 그는 다시 나온다는 기약이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런 요셉이 자기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 요셉이 찬송을 부릅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요셉의 삶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충분이 이 노래 가사에 동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You know better than I, You know the way (주님은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주님은 길을 아십니다). I'd let go need to know why for You know better than I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내려 놓겠습니다. 주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니까요). I'll take all the answers You'll supply (저에게 주시는 모든 주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You know better than I (주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니까요).”
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서, 다윗이 어떤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또 그는 그 어렵고 힘든 때에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알아 보려고 합니다. 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여호와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내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이 말씀보다 더 좋은 번역은 이 말씀을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울의 추격을 피해서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불안과 공포 속에 떨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서였을까요?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For he has heard my cry for mercy.” ‘cry’라는 말은 ‘울다’ ‘부르짖다’ ‘간절히 바라다’ ‘애원하다’ 이런 뜻이 잖아요? 얼마나 간절하면 울음이 나오고, 얼마나 간절하면 부르짖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기 전에는 그것을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간절하게 울며, 부르짖습니까?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이 울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아도 다른 옵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울며, 부르짖지 않습니다.
제가 1984년에 클레아몬트 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서른 두살이었습니다. 그 때 와서 공부를 하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을 마치고 다시 미국에서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정말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영어가 안 돼 가지고 힘들었던 얘기는 말로 다 못합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점수는 잘 받았습니다. 교수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신학교 강의가 주로 세미나 식으로 진행이 되고 그룹 토의 형식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더 어려웠습니다. 금요일이 되면 한 주간 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 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근처의 산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산이라야 그렇게 높지 않는 산입니다. 어두컴컴해지면 몇 사람의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갑니다. 그 산에 작은 폭포가 있었습니다. 폭포 소리 때문에 여기 저기 흩어져서 기도하면 저 사람이 무슨 기도를 하는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어떤 때는 차를 타고 가면서 차 안에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보면 어느 새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신학교 생활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울며 기도하는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지금 제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지금 제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 제 마음 속에 있는 두려움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도와 주십시오. 하나님 밖에는 제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그의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그 다음 7절 말씀을 보실까요?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방패이십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나를 도와 주십니다. 내 마음이 기뻐 찬양하며 주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 읽어도 잘 이해가 됩니다만,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The LORD is my strength and shield. I trust him with all my heart. He helps me, and my heart is filled with joy. I burst out in songs of thanksgiving.”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구절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I trust him with all my heart”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 옵니다. “내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의지합니다.” “제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신뢰합니다.” “제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믿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정말 마음을 다해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신뢰한 적이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믿음생활을 수 십년을 하면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 1:11-12에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선택받았고, 또 사도와 교사의 직무를 맡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내게 맡기신 것을 세상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But I am not ashamed of it, for I know the one in whom I trust.”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for he knows the one in whom he trusts’입니다.
문제는 내가 믿는 그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 내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 알면 됩니다. 그 속에 내가 찾는 모든 해답 (answers)이 들어 있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발견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믿는 그분을 온 마음으로 신뢰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 만난 하나님은 힘이요, 방패였습니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내가 힘이 없고 낙심되어 주저 앉아 있을 때에도, 내가 절망하고 좌절했을 때에도, 나를 다시 일으켜 주신 분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나의 방패 (shield)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방패는 나를 보호해 주는 장비입니다.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릅니다. 어디서 총알이 날아 올지 모릅니다. 이런 위태한 곳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방패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입니다.
이제 제 설교를 마치면서, 한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실패는 반드시 나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패뿐만 아니라 위기와 고난과 절망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어려울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시는 그의 노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속에 있는 시편들은 거의 모두 다윗이 쓴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쓴 시편들은 즐겁고 기쁜 때에 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어렵고 힘든 일을 겪으면서 쓴 것들입니다. 그는 이렇게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만약 다윗에게 고난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시를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세계관을 가지고, 크리스천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그리고, 그 눈으로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해석해 보면, 그 어떤 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고난, 실패, 절망, 외로움,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 50: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형님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일어나는 악한 일들을 하나님의 때에 선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크리스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청년들이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이런 세계관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훈련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셉이 그랬던 것처럼,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사도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축복의 기회로 만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답답하고, 어렵고 힘들 때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