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2017 |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 1

힘들고 어려울 때 In Times of Trouble

시편 46:1-11

오늘부터 세 번에 걸쳐 ‘나에게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특히보스턴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힘과 용기를 얻는 설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은 ‘고라 자손의 시 (A song of the descendants of Korah)’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라의 자손들이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열 두 지파가 있습니다. 그 중에 고라는 모세나 아론과 함께 레위 지파에 속해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 고라에게 불만이 생겼습니다. 광야는 그런 곳입니다. 광야 (wilderness)는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아 개간되지 않은 곳입니다. 기후는 건조하고 메말라 인간이 살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입니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살았습니다. 자연히 불평과 원망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만이 생길 때마다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지만 않았더라면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모두 당신들 때문에 이 고생을 한다”고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이 때 고라에게 나쁜 생각이 들어갔습니다. 아예 이 참에 지도자를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고라는 정식으로 모세와 아론에게 항의했습니다. “나도 똑 같은 레위 지파에 속해 있는데 왜 내가 당신들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까?” 이 이야기가 구약성경 민수기 (Numbers) 16장에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운 모세의 지도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고라를 심판하셨습니다. 멀쩡하던 땅이 갈라지면서 고라와 그에게 동조하던 사람들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250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 더 읽어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고라의 자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However, the sons of Korah did not die that day).” (민수기 26:11).” 하나님은 고라의 아들들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이 아들들이 그 때 살아 남아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비록 아버지 고라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았지만, 그의 아들들은 평생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을 찬양하는 사역자로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은 고라의 자손들이 쓴 찬양 시이고 노래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choir director:A song of the descendants of Korah, to be sung by soprano voices (성가대 지휘자에게: 이 노래는 고라의 자손들이 소프라노가 부르도록 작곡한 것이다)] 우리 성경에는 ‘알라못 (alamoth)’에 맞춰 부르라고 나와 있는데, ‘알라못’이라는 히브리어를 소프라노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힘이십니다. 어려울 때에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 (1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직역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우리의 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항상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분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하는 말씀이 아닌가요? 설교자인 제 자신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이곳에 이민자로 와서 살고 계시는 분들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하고, 보스턴에 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모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고달프다!” “삶이 힘들다!” “삶이 버겁다!” 우리 입에서 이런 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옵니다. 한국말을 잘 못하는 아이들도 “엄마, 인생이 힘들어!” 그런답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는지 모르지만, 맞는 말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in times of trouble’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힘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저는 새 학기를 맞이하여 보스턴에 온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생각으로 설교를 준비했 습니다. 제가 1983년 12월에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에 왔습니다. 도착한 곳은 뷰엔나 팍 (Buena Park)이라는 LA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에서 한 6개월 살았습니다. 미국에 처음 도착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곳이 미국이다!” 하는 꿈 같은 생각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제 아내는 RN 시험을 보기 위해서 공부했고, 저는 TOFLE 시험을 보기 위해서 공부했습니다. 누구에게 얻은 탁자를 마주 보고 앉아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클레아몬트 (Claremont)라는 곳으로 이사를 가서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부터 유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공휴일에는 여행도 가고, 라스베가스 (Las Vegas)에도 놀러 가고 할 때도 저는 공부만 했습니다. 틈틈이 학교에서 청소하는 일도 하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1시간씩 드라이브를 해서 교회에 갔습니다. 교회에서는 파트 타임으로 청년부를 맡아 섬겼습니다.

제법 Claremont 신학교에서 잘 적응을 하면서 지내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일년 반 만에 보스턴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Claremont에서 석사과정에서 공부한 학점들을 다 인정해 주고 박사과정으로 받아 준다는 보스턴 신학교의 편지를 받고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보스턴에 올 때 대륙횡단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광활하고 아름다운 미국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없이, 차를 달려서 보스턴으로 왔습니다. 지도를 봤더니, 보스턴에 거의 다 온 것 같았습니다. 90번 Mass Pike를 타고 보스턴으로 오다가 보면 오른 쪽에 맥도날드가 있습니다. 거기서 차를 주차하고 커피를 한 잔 사서 마셨습니다. 그냥은 보스턴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괜히 보스턴에 온 것이 아닐까?” “과연 이곳에서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에 저는 이렇게 보스턴 유학생활을 시작해서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유학생활은 꼭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40년의 광야생활과 같습니다. 이곳에 공부하러 온 신입생들은 아직 보스턴 생활이 익숙하지 않겠지만, 저는 여러분이 보스턴에 왔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보스턴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도시입니다. 보스턴에서 우리는 최고의 교수, 최고의 학자들을 만날 수 있고, 세계 각국에서 온 탁월한 학생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겸손을 배웁니다. 내가 누구인지,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겪었던 광야생활의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겸손을 배운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이들은 광야생활 속에서 배웠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도, 비지니스에 수완이 있는 사람도 광야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광야에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동안 이 광야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그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배가 고프고 먹을 것이 있어야 하는데, 텐트 밖에 나가보면 하얗게 만나 (manna)가 땅에 쌓여 있습니다. ‘manna’를 일반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the food miraculously supplied to the Israelites in the wilderness’라고 나와 있습니다. 맞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먹을 것이 공급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유학생활 중에 두 가지를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학문적인 성취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적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학문과 겸손, 이 두 가지만 갖추면, 여러분은 정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디모데후서 3:17)”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선한 일을 위해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한 생각에 머물러 있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문과 겸손, 이 둘을 모두 갖춰야 합니다. 학문만 갖춰서도 안 되고, 겸손만 갖춰서도 안 됩니다. 이 둘 모두를 갖춰야 이 시대를 위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광야생활에서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만납니다. 뱀과 전갈과 같은 해충에게 물리기도 하고, 전염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합니다.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유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만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비자 문제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공부하는 중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외로움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증을 겪기도 합니다. 방황도 합니다. 교수와 관계가 좋지 않아서 맘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연구하는 일이 전혀 진척이 없어서 절망하기도 합니다. 내가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한 것처럼 ‘in times of trouble (힘든 시간)’을 겪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답이 없습니다. 선배를 찾아 봐도, 누구를 찾아 봐도, 카운셀러를 만나 봐도 정답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Good News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 1-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So we will not fear when earthquakes come and the mountains crumble into the sea. Let the oceans roar and foam. Let the mountains tremble as the waters surge! Interlude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고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언제나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바다로 무너져 내려도 두렵지 않습니다. 바다가 으르렁거리고 거품을 뿜어도, 사나운 파도에 산이 두려워 떨어도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셀라)

이 시편 46편은 소프라노가 부르도록 작곡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디서 아름다운 소프라노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도와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 계속해서 이런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바다여, 화를 내라. 거품아, 일어나라. 파도여, 일어나라. 산이여, 흔들려라!” 잠시 노래 소리가 그치고 조용해집니다. 성경에는 ‘셀라 (Selah)’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잠시 ‘interlude’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pause’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날 어려움을 해결할 정답은 없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주는 Good News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 안에 계시면 그 성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5절)

와우!!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고, 하나님이 그 도시 안에 계시면 성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은 castle이라고 해도 좋고, city라고 해도 상관 없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하나님께서 그 도시에 계십니다. 그 도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은 그 도시를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성이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인생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인생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든든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마지막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I will be honored by every nation. I will be honored throughout the world (잠잠하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나는 모든 나라로부터 높임을 받을 것이다. 나는 온 세상으로부터 높임을 받을 것이다).” (10절) 여러분은 어떤 지 모르겠습니만, 제 눈에는 “Be still (잠잠하라)!”이란 말이 제일 크게 들어 옵니다. 불안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왕좌왕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말을 듣고, 저기서 저런 말을 듣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너의 피난처가 되고, 내가 너의 힘이 되어 주는데, 왜 불안해 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켜 주면 아무도 너를 무너뜨릴 수 없는데, 내가 새벽부터 너를 지켜 주면 아무도 너를 해칠 수 없는데, 왜 나를 바라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 안에 들어 오셔서 제 삶을 지켜 주십시오. 아무리 험한 파도가 일어나고,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흔들려도 제 삶이 흔들리지 않도록 지켜 주십시오.” 믿어지지 않지요? 어떻게 이 간단한 기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까?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믿어지지 않는 good news입니다. 성경은 이 ‘Good News’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을 믿으세요. 그리고 ‘복음’과 함께 보스턴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이른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보스턴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힘이 없을 때는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refuge)입니다.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였을 때는 하나님께로 피하십시오. 하나님께 지켜 달라고 하십시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면 사람들이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소나기를 피하는 것처럼, 여러분의 인생에 예상치 않았던 소나기가 내릴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피할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refuge’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지켜 줄 ‘fortress (산성)’입니다.

 


8/27/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2

순수한 믿음을 얻기 위하여 To Prove the Genuineness of Your Faith

베드로전서 1:6-12

지난 주부터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 설교부터 반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1세기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Diaspora Christians)’의 고난의 삶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우리가 느끼고 있는 고난의 삶이 오버랩 되면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1세기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 피난 가서 온갖 박해를 견디어 내야 했다면, 오늘 우리들은 또 다른 의미에서 크리스천의 삶에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Yes, and everyone who wants to live a godly life in Christ Jesus will suffer persecution).” (디모데후서 3:12) ‘persecution’이란 단어를 아무 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 잖아요? 자기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살다가 받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입니다. 1세기에 살았던 크리스천들도,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도 자기 믿음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평생 풀어야 할 숙제와 같은 것입니다. 고난을 떠나서는 크리스천의 삶을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주어지는 고난을 풀지 않으면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계획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고난을 주시는지 우리가 겪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에서 무려 400년 동안 포로가 되어 살다가 모세의 인도를 따라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집트에서의 생활이 아주 좋았습니다. ‘고센’이라는 비옥한 땅에서 양을 치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가 요셉의 때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으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모세 때에 이집트를 탈출하게 됩니다. 이것을 ‘출애굽 (Exodus)’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한 역사를 기록한 성경이 ‘출애굽기’입니다. 그 성경에 40년 간의 광야 생활의 애환이 모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발견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길을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에 불과했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구름기둥을 따라 갑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 불기둥을 따라 갑니다. 자기들이 길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결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가 보여 주는 가장 큰 교훈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일 중의 하나가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하는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한다고 배우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오늘 우리 예배에 김낙형 선교사님과 오정녀 선교사님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정녀 선교사님은 제가 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함께 성장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때 얼굴이 생각납니다. 예쁘장하고 해맑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그 교회를 따나 개척교회를 하게 되어 그 뒤 소식을 잘 몰랐다가 최근에 케냐에 선교사로 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그 청년 시절이 가졌던 자신의 꿈은 다 어디 가고 케냐에 선교사로 가 있다니요? 어제 저 하고 같이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잘랐습니다. 아마 미용사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손질을 전혀 안 한 머리니까요. 머리를 자르고, 기름을 바르고 하니까 예전 얼굴이 살아납니다. 그 남편도 김낙형 선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성악가였습니다. 저에게 본인의 CD 한 장을 주셨습니다. 찬양 CD였는데요. 아름답고 힘이 있는 테너 (tenor) 목소리시더라고요. 그 때 한 교회에서 같이 지휘자로 있던 오정녀 선교사를 만나서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갑상선에 이상이 생겨 목소리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아프리카 케냐에서 9년 째 음악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길을,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시는 따로 분이 있습니다.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결정은 여호와께서 하신다 (We may throw the dice①, but the Lord determines how they fall.” (잠언 16:33)/ ①Hebrew We may cast lots 주사위에 면이 여섯 개입니다. 주사위를 던지면 떼굴떼굴 굴러갑니다. 몇 번을 굴러가다가 언제, 어디서 설지, 또 굴러가다가 어디에 부딪쳐 방향이 바뀌면서 어떻게 뒤집힐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 결정을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 but the Lord determines how they fall.” 맞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동의하십니까?

출애굽기 14:1-3 말씀을 읽어 보세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뒤로 돌아서 비하히롯 앞에서 진을 치라고 말하여라. 그 곳은 믹돌과 홍해 사이이며, 바알스본 맞은편의 바닷가이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잃었다. 그들은 광야에 갇혔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Order the Israelites to turn back and camp by Pi-hahiroth between Migdol and the sea. Camp there along the shore, across from Baal-zephon).” 잘 가던 길을 ‘돌아서서 (turn back)’ 이스라엘 민족을 홍해 바다 앞으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왜 잘 가던 길을 바꿔서 앞이 가로 막힌 홍해 바다 앞에 진을 치게 했을까요? “너희들의 길을 결정하는 자가 나 여호와다! 너희 스스로 너희 길을 결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훈을 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중에 “아, 그렇구나!” 이렇게 깨닫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어쩌다가 집을 떠나, 엄마 아빠를 떠나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이게 모두 내가 원해서 된 일이었나? 아니야. 내 길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야!”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길을 인도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나에게 구름기둥을 보여 주시는지, 불기둥을 보여 주시는지 놓치지 않으려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야 같은 예언자는 ‘세미한 소리 (the sound of a gentle whisper)’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열왕기상 19:12)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눈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이 시험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수한지 알아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순수한 믿음은 금보다도 훨씬 귀합니다. 금은 불에 의해 단련되기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닳아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순수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6-7)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어디를 가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동족(同族)인 유대인들로부터 이단(異端)으로 취급되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을 ‘나사렛 이단 (the Nazarene sect)’이라고 부르면서 핍박했습니다 (사도행전 24:5). 설상가상으로 이제는 로마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놓여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베드로가 쓰고 있는 편지를 보십시오. “눈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겠지만.....” 무슨 말입니까? 지금의 이 어려움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이 어려움이 기쁨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험들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강하고 순순하지 알아 보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se trials will show that your faith is genuine.”

‘trials’라는 말은 법적인 용어입니다. 우리 말로 ‘공판’이라는 것입니다. 공판은 이 사람이 죄가 있나 없나 알아 보는 과정입니다. 확정 판결을 하기 전에 증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서 조사하는 과정입니다. 또, ‘trials’라는 말은 ‘시련’ ‘어려움’ ‘고난’ ‘핍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자기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겪고 있는 이 일들을 ‘trials’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판결을 받기 위해 법정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베드로를 통하여 오늘 우리들의 삶 속에 주어지는 많은 문제들, 시험, 시련, 고난을 어떤 시각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 일들은 결국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를 밝혀 줄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It is being tested as fire tests and purifies gold (불이 금을 테스트하고 깨끗하게 정제(精製)하는 것처럼 지금 우리의 믿음이 테스트를 받고 있습니다).” (7절) 같은 뜻으로 잠언 17: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한다. 하지만,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신다 (Fire tests the purity of silver and gold, but the Lord tests the heart).”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연단 하실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하실까?” 하나님은 우리가 ‘정금(pure gold)’ 같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마음에 불순물이 있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욥 (Job)이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욥은 자기가 받는 고난 속에 자기를 깨끗하게 purify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중에 ‘번제 (burnt offering)’라는 것이 있습니다.  번제를 드리는 법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레위기에 잘 나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번제로 쓸 제물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습니다. 이것은 자신과 제물을 동일시하면서 자의 허물과 죄가 이 제물에게 모두 전가(轉嫁, transplanted)된 것을 의미하는 의식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를 드리는 본인이 직접 제물을 죽여 피를 받아 제사장에게 줍니다. 제사장은 그 피를 번제단 사방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제사 드리는 사람이 동물의 다리를 자르고 깨끗하게 씻어서 제사장에게 줍니다.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서 번제 제단에 올려 놓고 완전히 불태웠습니다. 제사장은 제물이 완전히 불에 탈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제물이 불타는 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제물이 완전히 타서 재가 되면 비로소 번제가 끝이 납니다. 이 모든 과정들 (의식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 번제를 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불순물이 불에 타서 깨끗하게 purify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Your faith is far more precious than mere gold. Because when your faith remains strong through many trials, it will bring you much praise and glory and honor on the day when Jesus Christ is revealed to the whole world (여러분의 믿음은 금보다 더 귀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겪고 있는 이 시험들 속에서 여러분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크리스천들이 당하는 시험 (trial)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시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밝혀 주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진실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증명된 믿음은 우리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가져 올 것입니다. 똑 같은 말씀이 로마서 5:3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심 되는 단어들을 뽑아 보십시오. 환난 (trials), 인내 (endurance), 연단 된 인품 (strength of character), 소망 (hope)입니다. 이 네 단어들이 크리스천의 삶의 전 과정을 보여 줍니다. 환난은 우리에게 인내와 연단 된 인품과 소망으로 이어지는 크리스천의 삶의 시작입니다. 환난이 없이는 인내가 없고, 인내가 없이는 연단 된 인품이 없고, 연단 된 인품이 없이는 소망이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과정은 환난, trials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지금 당장에는 눈앞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하여 힘들겠지만, 기뻐하라고 합니다 (6절). 크리스천의 삶에 시험 (trials)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배운 사람들에게는 시험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 믿음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내가 너희를 단련시켰으나, 은을 정련하듯 하지 않고 너희를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단련시켰다.” 이사야 48:1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이 시험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고난의 용광로 속에 넣고 단련시키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시험을 통하여 나의 믿음이 과연 진실한지 테스트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나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비록 여기가 시험을 받는 자리라고 할지라도,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8/20/2017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소망 A Living Hope in Christ

베드로전서 1:1-5

오늘부터 베드로전서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두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앞에 쓴 편지를 ‘베드로전서’, 나중에 쓴 편지를 ‘베드로후서’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먼 데 사는 사람과 의사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심부름을 시켜서 말을 전달하는 방법이 있었고, 직접 가서 그 사람을 만나 말하는 방법이 있었고, 편지를 써서 전달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27권 중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요한복음 외에 나머지는 누구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누가복음도 ‘데오빌로 각하 (most excellent Theophilus)’에게 써서 증정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사도행전 역시 누가복음에 이어 ‘데오빌로 각하’에게 두 번째로 증정한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교회들에게, 혹은 개인에게 쓴 편지입니다.

예전에는 ‘파피루스 (papyrus)’나 ‘양피지 (parchment)’라고 해서 양의 가죽 뒷면에 잉크로 썼습니다. 베드로전서는 비교적 짧은 편지여서 그리 부피가 많이 나가지 않았을 지 모르지만, 구약성경 두루마리는 엄청난 양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을 시켜 전달하는 것입니다. 긴거리를 가야 하기 때문에 강인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동역자 중에 ‘두기고 (Tychicus)’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바울은 ‘두기고’를 시켜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디모데전서 역시 두기고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전달한 것을 보입니다 (에베소서 6:21, 골로새서 4:7, 디모데후서 4:12). 바울은 ‘두기고’를 가리켜 “He is a beloved brother and faithful helper who serves with me in the Lord's work (그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요, 나와 함께 주님을 섬기는 동역자입니다).” (골로새서 4:7)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역시 누군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베드로의 동역자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 전달한 편지입니다. 그 때는 여러 통의 편지를 복사할 수 없어서 한 통만 보내고 서로 돌려 보도록 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 때를 대충 A.D. 62-64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때는 ‘네로 (Nero)’가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입니다. 그는 A.D. 37-68년까지 황제로 재임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한 사람으로 악명(惡名)이 높은 사람입니다. A.D. 64년에 로마에 대 화재가 발생합니다. 그는 이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지워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미 그 이전에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된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서 지금의 터어키 지방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또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이 지역이 일찍이 크리스천들이 피난 가 살던 지역입니다. 본도 (the provinces of Pontus), 갈라디아 (Galatia), 갑바도기아 (Cappadocia), 아시아 (Asia), 비두니아 (Bithynia )입니다. 이 지역 역시 로마의 지배 밑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박해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디아스포라 (diaspora)’라고 합니다. 뒤에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붙여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더 정확하겠지요?

이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온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 (God's chosen people, 1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절에는 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신앙의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숨어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그들이 받고 있는 박해 속에 하나님께서 이 박해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박해를 받고 있는 그 사람들을 안심 시키기 위해서 하는 값싼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이 몇 개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은, “별 일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이게 별 일 아니라고?)” “진정해! (너 같으면 진정 하겠니?)”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한 잔 마시고 다 잊어버려! (잊어 버리라고? 너 같으면 이 일을 잊을 수 있겠니?)” 이런 말들은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런 식의 위로의 말을 그의 편지에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고난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요? 예레미야 29:11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future and a hope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을 나는 알고 있다. 그 계획들은 재앙이 아니라 너희들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좋은 것이다).” 같은 뜻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함께 일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로마서 8:28)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나쁜 일을 계획하실 수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의 자녀들의 삶에 고난이 있고 박해가 있을지라도 결국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 오도록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his children”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로마서 말씀에는 이보다 더한 말씀도 있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Since he did not spare even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 won't he also give us everything else)?” (로마서 8:32)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우십니까?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오래 전부터 선택하십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른 것과 구별된다’는 뜻이 잖아요?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거룩한 백성’의 삶에 대해서 네 가지를 말하고 있잖아요?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둘째는, 그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셋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고 (2절), 3절에 하나 더 있습니다. ‘산 소망 (a living hope)’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그런 목적으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 사람을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우시고, 그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셨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이 자기 자녀들과 자손들을 가르쳐 여호와의 길을 잘 따르게 하기 위해 그를 선택했다 (I have chosen him so that he will direct his sons and their families to keep the way of the LORD by doing what is right and just).” (창세기 18:19) 세상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그의 자녀들을 보면서 “아하,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구나.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사는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위해서 좋은 계획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똑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 밑에서 불안하고, 초조하고, 하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내일을 알 수 없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편지를 써서 돌려가면서 읽게 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은 지하 ‘카타콤 (catacomb)’에 숨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언제 로마 군인들이 이들이 숨어 있는 ‘카타콤’을 기습할 지 알 수 없어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크리스천의 삶을 계속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크리스천의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지금 이런 고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삶 속에 나를 부르시고,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고난도 이겨 나갈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 글 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 생명’을주심으로써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산 소망’은 ‘a living hope’ 입니다. 이 말과 반대되는 말은 ‘죽은 소망’, ‘헛된 소망’입니다. 아무 근거 없는 소망입니다. 그렇게 소망했다가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소망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소망은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살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라고 했습니다. ‘firstfruits’은 맨 처음에 열리는 열매인데, 예수님을 말합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그 다음에 계속해서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그 열매들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 23).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지 조심해서 읽어 보십시오. “We have a priceless inheritance - an inheritance that is kept in heaven for you, pure and undefiled, beyond the reach of change and decay.” (4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priceless inheritance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유산)’라고 합니다. 백 만 불, 천 만 불, 이런 것들은 값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약속하신 것들은 값을 붙일 수가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priceless inheritance (값이 없는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누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패하거나 썩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머리 속에 침침한 지하 동굴에서 베드로가 보낸 이 편지를 어떤 사람이 읽고, 모두들 숨을 죽이고 이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장면을 연상해 보십시오. 이 편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베드로가 보낸 편지입니다. 제가 ‘갑바도기아’에 있는 ‘카타콤’을 가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지하동굴이 있을 수 있는지 경이롭게 느껴졌습니다. 사진에서 본 것처럼 꽤 넓은 광장도 있습니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베드로가 직접 이곳을 방문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그냥 편지만 보낸 것이 아니라, 직접 박해 받는 크리스천들을 방문하고 위로를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었는지, 돌기둥이나 벽들이 손때가 묻고 달아져서 반들반들합니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 때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믿음생활을 했습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서 주님을 믿었습니다.

다시 베드로의 편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침침한 불 빛 속에서 베드로가 보낸 편지를 읽는 소리가 동굴에 퍼집니다. 사람들은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여 듣고 있습니다. “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고향을 떠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1절) 여기 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납니다. 또 어느 구절에서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통해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그분께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기를 원하십니다.” (2절) 그리고 어느 구절에서는 그들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집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 주려고 준비해 두신 복을 소망합니다. 이 복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으며, 결코 썩거나, 그 아름다움이 변하지 않습니다.” (3-4절)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교양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종교 (religion)’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신자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헤어지는 종교적인 의식(儀式, rite)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냥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 환란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핍박이 있고, 박해가 있습니다. 1세기의 크리스천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이 환란을 참고 견디며 마침내 이겨냈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생활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생활 속에 환란이 있나요? 참고 견디십시오. 여러분을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여러분의 삶에 대한 좋은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때를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희망의 이유가 되시고, 근거가 되셨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8/13/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7

"가라, 온 세상으로! “Go Into All The World!”

마가복음 16:15-20

오늘 “가라, 온 세상으로!” 마가복음 강해설교 67회를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시작했던 것이 2015년 5월 4일 주일이었습니다. 2년 3개월만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마가복음 강해설교를 통해서 제 자신이 받은 은혜가 참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설교 준비를 하면서 복음서 중에 가장 처음에 기록된, 가장 오리지널 형태의 복음서를 읽고 설교한다는 설렘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이 설렘을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누가복음 7: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종의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과 교훈을 지혜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이 참되냐 그릇되냐,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사람들이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의 마가복음 강해설교가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달했느냐, 또 얼마나 좋은 설교였느냐 하는 것은, 그 설교를 들은 여러분의 삶이 얼마나 변화 되느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의 명령을 하시는 것을 끝이 납니다. 요한복음 역시 20:21-23에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물론 그 뒤에 21장에 있지만, 신학자들은 21장을 요한복음의 ‘appendix’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 전파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命令, commandment)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잘 따르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을 듣지 않거나 무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온 세상으로 들어가 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 이렇게 명령 하시는 데, 이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에밀 부루너 (Emil Brunner, 1889-1966, 스위스)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입학한 것이 1971년이니까 부루너가 사망한 지 5년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신학공부를 했습니다. 그 외에도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 루돌프 불트만 (Rudolf Bultmann, 1884-1976, 독일),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 독일), 등의 신학도 공부를 했습니다. 이들보다 좀 뒤에 나온 라인홀드 니버 (Reinhold Niebuhr, 1892-1971, 미국), 그 동생 리차드 니버 (Richard Niebuhr, 1894-1962),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등의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신학적인 사조(思潮)에서 보면 모두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입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 신학입니다.

에밀 부루너의 신학은 학문적이라기 보다 실천적인 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그의 신학을 선교신학이라고 불러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에 충실할 때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해 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교회가 복음 전파의 사명에 무관심하거나 게으르다면 그 교회는 존재의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불이 탐으로써 존재하는 것처럼, 교회는 선교를 함으로써 존재한다 (The church exists by mission as a fire exists by burning).”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에 특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보스턴 다운타운에 가면 구세군 본부가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마침 그 때 구세군 교회에 한국 목사님이 와 계셨기 때문에 만나 볼 일이 있어서 그 교회에 갔었습니다. 목사님을 기다리면서 홀에 앉아 있다가 벽에 이런 성경 말씀이 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Mark 16:15) 우리 말 성경에서 읽던 것 하고는 달리 이 말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 왔습니다. 참 표현이 독특하다 싶어서 집에 와서 찾아 봤더니 마가복음 16:15을 New International Version으로 적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주의해서 보았던 것은 ‘into’라는 접속사였습니다. 사전을 찾아 봤더니 3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1. To the inside of (~ 속으로) 2. to a point of contact with (~과 접촉점으로) 3. be intensely involved in (~과 긴밀하게 관계하다) 그러면, 뒤에 ‘world’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 ‘세상과 긴밀하게 관계하라’ ‘세상과 접촉점을 만들어라’ 이런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세상에 빛을 밝혀 주는 의미로, 또 세상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선교학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접촉점 (a point of contact)’의 역할을 해서 세상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살아야 할 무대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갈 만한 힘과 용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사도행전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결코 지루한 성경이 아닙니다. 읽을 때마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영감(靈感)을 주는 말씀입니다. 처음에 이 땅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생겼을 때, 그들은 사회적으로 존경 받거나, 인정받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소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명분을 앞세워서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유대사회의 지도자들이 이 사람들을 잡아 다가 심문을 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너희가 무슨 능력으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By what power, or in whose name, have you done this)?” (사도행전 4:7) 유대 지도자들이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 말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 사람들이 모두 무식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4장에 생생하게 나와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담대하게 자기들의 믿음을 말할 수 있는가 (They were ordinary men with no special training in the Scriptures. How could they say so boldly their belief)?” (사도행전 4:13)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는 그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부르시고, 이들에게 귀신을 이기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병을 치료하라고 이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가복음 9:1-2)”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냥 내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능력 (power)’과 ‘권위 (authority)’을 주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수님은 자기의 ‘능력’과 ‘권위’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위임하신 (commission)’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 (명령)하실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의 능력과 권위를 부여해 주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식입니다. 다시 사도행전의 말씀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초대교회의 크리스천들은 모두 평범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유대 지도자들이 놀랄 정도로 담대하게 자신들의 믿음을 전파했던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과 ‘권위’였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대에도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일꾼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 일꾼이 차고 넘치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부족하다고요.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새학기를 앞두고 우리교회도 많은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팀장들이 필요하고, 이 팀들을 섬길 간사가 필요합니다. 청년부의 규모가 커져서 팀을 5-6팀 늘려야 할 형편입니다. 그만큼 일꾼이 더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실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면 하나님의 일이나 세상 일이 다른 점이 어디 있겠습니까? 확실합니다. 주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능력’과 ‘권위’를 주셔서 섬기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17-18절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따라올 것이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배우지 않은 새로운 말을 하고,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를 받지 않을 것이며,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나을 것이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누구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 믿는 사람은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if they drink anything poisonous) 아무 해가 없을까? 정말 환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까?”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려고 접근하는 사람은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강한 사람이라도 몸에 치명상을 줄 수 있는 ‘독 (poison)’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래서 주석가들 (commentators)은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현장에서 주님은 어떤 위험한 환경에서도 그의 제자들을 지켜 주신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타고 가던 배가 난파되어 사람들은 널판지나 부서진 배 조각을 붙잡고 가까스로 몰타섬 (the island of Malta)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때 비가 오고 기온이 뚝 떨어져 매우 추웠습니다. 다행히 섬 사람들이 친절하게 맞아 주고 춥지 않도록 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바울이 장작을 가져다 불 속에 넣었는데, 장작 속에 숨어 있던 독사가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섬 사람들은 바울이 그 자리에서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렇지 않게 그 뱀을 불 속에 던졌습니다. 바울은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선교 현장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고 합니다.

주님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전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접촉점을 만들고, 복음을 전파합니다.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은 변함이 없지만, 복음을 전파하는 형식과 방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말로 전파하는 복음보다 우리의 행동으로, 우리의 삶으로 보여 주는 복음 전파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조선족들이 사는 곳에 ‘명동(明東)’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 명동교회가 있고, 교회 바로 옆에 시인 윤동주 생가와 문익환 목사님의 생가가 있습니다. 이 둘이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습니다. 명동교회를 다녔고요. 그런데, 그 때 명동교회의 목사님이 김약연 (金躍淵, 1868-1942) 목사님이었는데, 이 분이 ‘간도 대통령’으로 불릴 만큼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자연히 윤동주와 문익환 목사님은 김약연 목사님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은 처음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나중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되신 분입니다. 이 분은 돌아가시면서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라는 유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만큼 이 목사님은 삶이 곧 그의 유언일만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셨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은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우리가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지켜 보고 실망했습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진실한 행동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행동을 보고 너희가 하는 말을 믿고, 너희가 전하는 복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교회가 큰 도전을 받고 있고, 크리스천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이 큰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어디 가서 떳떳하게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하면, 하나님은 이 시대에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성경에도 보세요. 시대가 편안할 때보다는 시대가 어려울 때 예언자들이 나와서 시대가 나가야 할 길을 제시했습니다. 시대가 편안할 때보다는 어려울 때 하나님은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우리가 지금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려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니라,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있는 자리에서 진실하게, 정직하게 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을 진실하게 행동으로 나타내십시오. 그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8/6/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6

"그건 넌센스야!" “It Sounds Like Nonsense!”

마가복음 16:9-14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나타나셨다는 말씀과,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이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다른 두 제자의 말을 듣고도 열 한 명의 예수님읜 제자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은 열 한 제자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우리교회라면 이 정도 말씀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겠다는 믿음이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화면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오늘 본문 말씀이 나갔습니다. 9절 첫 머리에 [Longer Ending of Mark]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물론 번역 성경에 따라서는 이런 말씀을 표기(表記)하지 않은 성경도 있습니다.

하지만 NASB은 9절부터 20절 끝절까지 [  ]로 묶어 놓았습니다. NET, NIV, ASB, AMP, CEB,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Phillips (J.B. Phillips New Testament), MSG (The Message) 등 많은 번역 성경들이 이 사실을 표기했습니다. Phillips에는 9-20절 말씀에 ‘An Ancient Appendix (오래된 후기)’라는 말을 붙여 놓았고, NIV 성경에는 [The earliest manuscripts and some other ancient witnesses do not have verses 9–20 (가장 오래된 사본과 다른 고대 증언에는 9-20 말씀이 없다).]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우리 말 성경을 보면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 성경에 이 말씀을 다른 설명 없이 괄호로 묶어 놓았습니다.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서 중에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학자들 간에 큰 이견(異見)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오래된 마가복음서에 오늘 읽은 9-20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없으면 마가복음은 16:8,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것은 무서움과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뭔가 복음서의 끝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9-20절 말씀은 (NLT 성경에 [Longer Ending of Mark]이라고 나오는 부분) 마가복음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후에 첨가했다는 말이 됩니다. 당연히 성경 학자들에게 이것이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학설들이 나오고 주장들이 나왔습니다만,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절대적인 학설이나 주장은 없습니다.

제가 지난 번 설교에서 우리는 부활의 역사성을 강하게 주장했던 마가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부활 신앙이 중요한 만큼 이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부활의 역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역사성’이 검증(檢證)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활신앙’은 아무 근거 없는 주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는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 목격했던 여자들의 충격과 무서움, 그리고 공포, 그리고 당황스러움을 그의 복음서에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마가가 그 뒤에 아무 기록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요나서도 끝이 좀 이상한 것 아세요?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나무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옳으냐?’ 요나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고 싶도록 화가 납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넌) 네가 심지도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으며, 밤새 나타났다가 이튿날 죽고 만 그 나무를 그렇게 아끼는데, 하물며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도 넘게 살고 있으며,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저 큰 성 니느웨를 내가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서는 이렇게 어정쩡하게 끝이 납니다. 그 뒤에 더 이상 아무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나오지 않아도 요나서를 읽고 나면 뭔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이것을 문학적인 수사법에서는 ‘open endings’이라고 합니다. ‘open endings’과 반대되는 수사법은 ‘closed endings’입니다. 더 이상 아무 여운을 남기지 않고 모두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가가 그의 복음서를 여자들이 느꼈던 충격과 공포와 당황스러움으로 끝을 낸 데에는, 그의 복음서를 ‘open ending’으로 끝내고 싶었던 마가의 의도(意圖)가 들어있지 않았을까요? 마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closed ending’으로 그들의 복음서를 완성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부활이 믿어 지십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믿어 지십니까? 지금 새벽기도에서 누가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 주간에 누가복음 7장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인 (Nain) 이라는 마을에서 죽은 사람이 실려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 과부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머니를 불쌍하게 보시고, 그 죽은 사람의 관에 손을 대시면서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정말 죽었던 그 청년이 살아나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아들을 어머니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아십니까?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위대한 예언자가 우리 가운데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아 주셨다!’” (누가복음 7:16)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이 말씀을 읽으니까 정말 그 때 광경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Great fear swept the crowd, and they praised God, saying, ‘A mighty prophet has risen among us,’ and ‘God has visited his people today (큰 두려움이 군중들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큰 선지자가 나왔다. 하나님께서 오늘 그의 백성들을 찾아 오셨다.’)’”

부활은 결코 우리가 쉽게 믿을 수 있는 사실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부활은 우리의 경험과 이성(理性)과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아테네 (Athens)에 갔습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그 때가 대략 1세기 중반, 서기 60-70년 경이었을 것입니다. 90-100년 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벌써 그곳에 ‘아레오바고 (Areopagus)’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The Most Learned Society of Philosophers in the city (최고의 철학자들의 모임)’입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Socrates, 469-399 B.C.)와 그의 제자 플라톤 (Plato, 428-348 B.C.)이 활약했던 곳입니다. 그야말로 철학의 도시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난 사람들은 ‘에피큐리언 (Epicurean)’ ‘스토익 철학자들 (Stoic philosophers)’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테네의 철학을 이끌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설교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도행전 17:32에 이렇게 나와 있었습니다.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 내용에 관해 나중에 더 듣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When they heard Paul speak about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some laughed in contempt, but others said, ‘We want to hear more about this later’).”

오늘 읽은 말씀에도 보십시오.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알렸습니다. 그 시간에도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고 하는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는 넌센스 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열 한 제자들은 계속해서 들려 오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이 두 제자는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7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는 가까운 마을입니다. 이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두 제자는 가던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가서 열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하지만, 열 한 제자들은 여전히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목격하면서도 열 한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자기의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성경을 가르쳐 주시면서 자신의 부활을 증명하셨습니다. 마가는 이런 이야기들을 모두 생략하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의 믿음이 적음과 마음이 굳어 있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He rebuked them for their stubborn unbelief because they refused to believe those who had seen him after he had been raised from the dead, 마가복음 16:14)”라고 기록했습니다.

‘stubborn (고집)’ ‘unbelief (불신앙)’ ‘refused (거절하다)’이런 단어들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고집을 부렸을까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를 믿기를 거절했을까요? 제자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보기에도 부활은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험과 이성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하물며, 철학의 도시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의 최고의 지성인들이 부활에 대한 바울의 말을 쉽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조금 더 말씀을 깊이 들어가 볼까요? 부활을 왜 믿기가 어려운지 알기 위해서요.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윗 같은 사람도 죽을 때를 알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야 할 길로 간다.” (열왕기상 2:2) 사도 바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하여 죽음은 죄의 삯 (wages)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6:23). 인간의 죽음은 그가 지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정말 엉망으로 사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죄 받을 거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저 사람 벌 받아도 싸지!” 그렇게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과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6:23 말씀을 계속 읽어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fre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죄의 삯 (대가)는 죽음이지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인간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누구나 다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걸어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을 통해서(through Christ Jesus our Lord)’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to believe Jesus Christ)’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the free gift of God’라고 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선물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좀 곰곰이 생각을 해 보세요.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선물은 상대방이 값없이 주는 호의 (favor)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은 선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인간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절대로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들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이 죽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태어났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자기 하고 싶은 것 하고, 즐기고 싶은 것 즐기고, 보고 싶은 것 있으면 보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이 다른 동물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말씀 속에 인간의 생명은 다른 동물의 생명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라는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이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는 운명적인 공식을 깨뜨리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인물들도 많이 있었고, 위대한 발명도 있었고, 위대한 사상가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른 아무 것 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활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을 조롱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뉴스를 처음으로 들었던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도 그렇게 말하는 여자들을 허튼 소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하지만 그 말이 그들에게는 넌센스 같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4:11) ‘넌센스’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이나 사건을 말하는 것이잖아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closed ending’으로 마무리를 하지 않고, ‘open ending’으로 끝냈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던 여자들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당황스러움으로 끝을 냈습니다. 마가복음을 다 읽고,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을 읽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그의 복음서의 끝이 마무리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고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말씀을 덧붙이고, 예수님께서 온 세상으로 제자들을 내 보내시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마무리를 잘 지어 놓았습니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역사성에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습니다. 이제 ‘open ending’으로 끝난 마가복음을 마무리할 책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스토리로 마가복음을 끝맺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 위에 어떻게 여러분의 부활신앙을 이어 나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