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2021 | 교회의 모델 안디옥 교회

부활절이 지나고(15)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3:1-3

오늘은 이방인 지역에 최초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 이유는 누가 자신이 안디옥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지성인이었고, 역사 의식이 뛰어났던 누가는 안디옥 교회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생생하게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디옥(Antioch)’은 시리아(Syria)에 있는 안디옥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리아에 속해 있었지만, 현재는 터키 영토에 속해 있습니다. 안디옥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그 당시 주요 교통 수단이었던 배를 통한 이동(移動)이 용이했던 도시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안디옥은 당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세계의 3대 도시로 이름을 날렸다고 합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안디옥은 지정학적인 위치상 그리스(헬라) 문화와 동양의 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도시였다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온 많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때,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치밀하게 계획하신 일들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주 전에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를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outpost)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열왕기하 19:31, 이사야 9:7, 37:32)”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The zeal of the LORD Almighty will accomplish this(NIV)” 혹은 “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NL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면 그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하시는 일이라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교회를 ‘흩으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열심을 가지고 추진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열심이 성취되어 나가는 과정을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한번 돌아보세요. 예루살렘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각 사람이 필요에 따라 물건을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4:32, 34). 그들은 날마다 같이 모였습니다. 박해가 없던 때는 성전 뜰에 모였습니다(사도행전 2:36). 집집마다 서로 돌아가면서 식사를 하고, 주님의 성만찬을 나누기도 했습니다(사도행전 2:46). 그 공동체 안에 끈끈한 ‘연대감(solidarity)’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흩어진 주님의 제자들은 어디든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특이한 것은 안디옥에 있는 크리스천들이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바나바를 파견해서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고, 고향 다소에 은둔해 있는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년 동안 안디옥 교회의 신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킵니다. 그 때 이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붙은 이름이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다섯 명의 지도자를 세웠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외에 시므온(Simeon)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니게르(Nig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the black man(피부색이 검은 사람)’이라는 별명입니다. 이로 보아 시므온은 아프리카 사람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구레네(Cyrene) 출신 루기오(Lucius)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구레네가 지금의 리비아에 속한 도시인 것을 감안하면, 루기오도 아프리카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구레네에서 살다 온 유대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나엔(Mana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마나엔은 헤롯 안티파스(King Herod Antipas)와 어렸을 때 친구라고 합니다.

이 지도자들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일년 동안 집중적으로 양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연장자 순서로 세우거나 경험이 많은 순서 대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 중에서 세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양육으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서론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왜,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이렇게 안디옥 교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가 안디옥 교회를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대략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동서 문화가 교차되는 요충지에 있는 안디옥 교회를 이방인 선교의 본부((headquarter)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안디옥에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보스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문화적으로나 도시의 구성원에서나 보스턴과 안디옥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보스턴은 수많은 인종들이 함께 사는 다문화, 다인종 도시입니다. 보스턴처럼 각 나라의 문화를 존중해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도시가 흔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교회가 위치한 케임브리지는 다인종 도시의 모델과 같은 도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스턴은 하나님의 선교적인 마인드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최고의 도시입니다. 요즘에 와서 ‘다인종 교회(multi-ethnic church)’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세워진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는 이미 ‘다인종교회’였습니다. 저는 보스턴에서 목회하면서 한국교회라는 담(barriers)을 넘지 못했습니다. 제가 못 넘은 이 담을 이제 다음 세대인 여러분들이 뛰어 넘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다섯 명의 지도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운 것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들은 모두 이방인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추진하려고 하면 먼저 지도자들의 마음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다섯 명의 지도들 중에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사도행전 9:15에 이런 말씀이 있었잖아요? “사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선택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이제 바야흐로 이방인 선교를 위해 사울을 도구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열심)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는 것은 사도행전을 읽는 큰 재미입니다.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교회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이 분명한 교회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드리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 예배와 금식과 성령의 음성이 있습니다. 4절 말씀에는 금식이라는 말과 기도라는 말이 같이 나옵니다. 예배와 금식과 기도는 모두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예배는 신자들이 같은 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배가 매주 규칙적으로 열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이 예배를 소홀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이번 주에 예배를 못 드리면 다음 주에 드리면 되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또 금식(禁食, fasting)과 기도가 있습니다. 금식은 밥을 안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안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금식은 식사를 끊음으로써 더욱 영적으로 민감(敏感)해지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안디옥 교회가 예배에 집중하고 금식할 때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성령의 음성(a voice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하고, 성경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령의 음성’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도 성령의 음성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답답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모를 때,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성령의 음성’은 우리에게 희생(sacrifice)을 요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음성’ 혹은 ‘성령의 음성’은 반드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말은 나의 희생이 동반(同伴)되지 않는 어떤 음성을 들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음성을 들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넷째로, 그러면, 안디옥 교회가 들은 ‘성령의 음성’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여라.” (2절) 이 ‘성령의 음성’ 속에 희생이 들어 있습니까? “One day as these men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Dedicate Barnabas and Saul for the special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New Living Translation) “While they were worshiping the Lord and fasting, the Holy Spirit said, ‘Set apart for me Barnabas and Saul for the work to which I have called them.’” (NIV) ‘set apart’라는 말은 바나바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따로 세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더 이상 너희 교회에 머물게 하지 말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 내 놓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읽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를 향한 ‘성령의 음성’은 안디옥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이 들어오고, 안디옥 교회가 더욱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시킬 수 있도록 두 사람을 ‘set apart’하라는 것이 안디옥 교회가 들은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안디옥 교회에 다섯 명의 지도자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 지도자들 중에서 바나바와 사울은 가장 핵심적인 지도자였습니다. 만약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대번에 지도자들의 팀웍이 무너지고 지도력에 큰 공백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것을 알았지만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성령의 음성’은 반드시 우리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성령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위해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희생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뿐만 아니라 제자의 삶 자체가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합니다.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 생각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모델과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를 운영하고 계신 분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서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대로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outpost)가 되었습니다. 교회를 흩으셔서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를 통해 안디옥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7/25/2021 | 바나바와 사울

부활절이 지나고(14)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9:26-31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사울(Saul)’이라는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나중에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3: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바울이라고도 부르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Saul, also known as Paul, was filled with the Holy Spirit)” 이 말씀부터 사울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쓰지 않고 바울이라는 이름을 씁니다. 유대인들의 이름에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은 ‘asked for(묻다)’ ‘questioned for’ ‘prayed for’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이라는 이름에는 ‘small(작은)’ ‘humble(겸손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실제로 회심 후에 바울은 자기 자신을 항상 겸손하게 낮췄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조산아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8-10) 이 말씀에서 ‘조산아(早産兒)’라는 말은 ‘제 때 나오지 않은 아이(one untimely born)’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자기 자신을 낮추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사울은 극적인 방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가 예수님이 살아있을 때 만났다는 어떤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사울이 동시대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의 말 대로 그는 같은 또래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갈라디아서 1:14). 그는 유대교 외에 다른 진리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울은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었고, 신앙적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많이 갖춘 사람이었습니다(빌립보서 3:4). 그는 부모를 잘 둔 덕분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2:28). 그리고, 그는 학문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사도행전 21:37). 그의 스승은 ‘가말리엘(Gamaliel)’이라는 유대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였습니다(사도행전 22:3).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울을 가르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소신이 있고, 진취적이고, 열린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유대 공의회가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심문할 때, 이 사람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실 수도 있다고 혼자 소신 발언을 했습니다. 저는 사울이 이런 스승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심 후에 사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빌립보서 3:7)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특권들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그의 성공을 보장해 주리라고 믿었던 것들을 ‘worthless rubbish(가치 없는 쓰레기)’로 여겼습니다. 모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일어난 변화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힘들어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번 사울을 보세요. 그가 버렸다고 말하는 로마의 시민권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모국어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그리스어나 로마말은 그가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 그의 목숨을 구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했던 학문적인 성취는 그가 쓴 편지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 같은 성경은 얼마나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전개됩니까? 그가 버렸다고 했던 것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들이었지만, 회심 후에는 이것들이 복음을 위해서 필요한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목적이 바뀌고, 우선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사울이 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이야기는 사도행전 9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시리아의 다메섹(Damascus)으로 가는 도중에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울은 회심하자마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밖에 나가서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은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피했습니다. 회심을 해서 마음에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하나님은 ‘요셉’이라는 사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요셉은 ‘바나바(Barnabas)’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사람입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에는 ‘위로의 아들(Son of Encouragement)’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이 꼭 이름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름의 뜻에서 그의 인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바나바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사도행전 11:24) 대부분의 성경들이 바나바를 가리켜 “Barnabas was a good man”이라고 했는데, GOD'S WORD® Translation에 보면 “Barnabas was a dependable man(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믿음이 좋다는 사람 중에 “He is a good man” 혹은 “He is a dependable man”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은 좋은데 평이 안 좋은 경우가 많고, 믿음은 좋은 것 같은데 어딘지 가까이하기에는 먼 사람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올바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착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 바나바를 사울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바나바는 신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에게 사울의 회심이 진실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사울의 회심을 믿지 않았을 때, 바나나가 사울의 회심을 보증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좋은 사람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고,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서 이런 바나바라는 사람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잘 배우고, 주변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면 언젠가는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날이 꼭 올 것입니다.

언젠가 사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For Christ's love compels me., 고린도후서 5:14)”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빚을 진 사울은 예루살렘을 돌아다니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과 마찬가지로 그의 설교를 듣고 분노한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사울을 그의 고향 다소(Tarsus)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은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당장에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향에 숨어 지내야 합니까? 그의 마음 속에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이 불타고 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은둔 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다시 바나바로 하여금 다소에 있는 사울을 불러내게 하십니다. 바나바는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사울을 데리고 시리아의 ‘안디옥(Antioch)’으로 갔습니다(사도행전 11:25) 사울의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하나님은 바나바를 보내서 사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때로 우리의 앞길이 절망적이고 막막한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바나바’를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잠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We can make our own plans, but the Lord gives the right answer).” (잠언 16:1)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길을 어떻게 인도하시는 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인생의 위기 때마다 바나바를 보내셨다는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바나바는 그 때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에 박해를 피해 피난 온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그들은 유대인들을 찾아 다니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정체 불명의 크리스천들이 안디옥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구브로(Cyprus)와 구레네(Cyrene) 출신 사람들이라는 것 밖에는 더 이상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안디옥 교회로 보내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이야기가 우리의 구원과 직접 관련된 일인 것을 알게 되면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납니다. 맞습니까? 만일 그 때 바나바가 조사원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 때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회 문을 닫았더라면, 오늘 우리의 구원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한 사람, 바나바의 눈에 비친 안디옥 교회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사도행전 11:23). 바나바는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동역자를 찾았습니다. 그 때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고향 다소에 내려가 있는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함께 교회를 1년 간 섬겼습니다. 그 1년이라는 기간이 중요한 이유는 이 때 ‘크리스천(Christians)’이라는 말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1:26에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 신자들이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크리스천들이다!” 하고 이름을 붙여준 것입니다.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때 안디옥 교회 신자들은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실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략(The Divine Conspiracy)’이라는 책을 쓴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희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주께서 명하신 바를 실천하는 길을 열어 줄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윌라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은 올바른 크리스천으로서 살게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또 누가 한 말인지 한번 맞춰 보십시오. “Jesus, a man who was completely innocent, offered himself as a sacrifice for the good of others, including his enemies, and became the ransom of the world. It was a perfect act(예수님은 완전히 결백한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심지어 원수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위한 대속물이 되었다. 그것은 완전한 행위였다.” 마하드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 인도)의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찬양했던 간디가 크리스천들에 대하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나는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당신들이 믿는 그리스도와 너무 다르다).”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일마다 사도행전 말씀을 듣고 계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지금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이 부끄러운 세상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달라스 윌라드의 말처럼 성경을 펴서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롭게 읽고 배우고, 그 말씀을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 됩니다. 그 길 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7/18/2021 |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다

부활절이 지나고(13)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8:1-4

성령 강림 후 이 땅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기고,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은 일은 예루살렘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습니다. 누가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사도행전 9:31) 교회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성령의 위로하심이 있었고, 누구나 성령께서 이 공동체 안에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갈릴리와 사마리아에도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평안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평안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폭풍전야(暴風前夜)’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청난 폭풍이 불기 전 날 밤이라는 뜻입니다. 그 전날 밤까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엄청난 폭풍이 불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폭풍전야’를 영어로 ‘the calm before the storm’이라고 한다고 하네요. 아주 적절한 말인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 날에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A great wave of persecution began that day, sweeping over the church in Jerusalem)(1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날’이란 스데반(Stephen)이 돌에 맞아 죽은 날을 말합니다. 유대인들, 특히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호시탐탐 교회를 박해할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교회를 박해할 명분(名分)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의 무모함을 탓해야 할까요? 스데반은 자기가 맡은 구제 사역이나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밖에 나가서 설교를 하다가 화를 자초하게 되었을까요? 한 사람의 무모함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신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들 외에는 모두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고 했습니다. 겨우 만들어진 신앙공공체가 이렇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Saul)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Saul was one of the witnesses, and he agreed completely with the killing of Stephen). 사울은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유대교 지도자들과 똑 같은 시각(視角)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보기에 스데반은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울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요. 사울은 그 때 그가 교회를 박해했던 일들을 두고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간증합니다. “한때는 저 역시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반대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고 확신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예루살렘에서 했던 일이 그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했습니다.” (사도행전 26:9-10)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의 인생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사울은 교회를 박해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 대하여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사도행전 9:15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이방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삶에 대해서도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실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오. 나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다시 순교자 스데반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요? 얼핏 보기에는 스데반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설교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박해의 명분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스데반의 설교가 아니었더라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또 다른 박해의 명분을 찾았을 것입니다. 어차피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께서 교회를 운영하고 계시다면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평안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교회를 흩으려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회가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며 한데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흩을 수 있는 방법이 박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교회를 파괴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유대교 지도자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흩으신 것입니다.

몇 주 전에 ‘합킨톤 공원’에서 야외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제가 설교 본문 말씀이 시편 95편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여호와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위대한 왕이십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도 그분의 것이며, 가장 높은 산들도 그분의 것입니다. 바다도 그분의 것입니다. 이는 주가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손으로 마른 땅도 지으셨습니다. 다 와서 엎드려 주를 경배합시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3-6절)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바다도 하나님이 지으셨고, 마른 땅도 하나님께서 지으셨구나!” ‘마른 땅’은 ‘dry land’를 말합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황무지(the wastelands)’라고 나와 있습니다. 떨기나무(bush) 같은 것만 겨우 살 수 있는 황폐한 땅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마른 땅’을 만드셨을까요? ‘마른 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쓸 데 없이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눈에 쓸 데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들어보셨지요? “내가 빛을 만들고 어둠을 창조하였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이사야 45:7).” 빛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어둠이 있어야 합니까? 평화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재앙이 있어야 합니까? 좋은 일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왜 절망이 있어야 하고 불행이 있어야 합니까? 그런 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application과 implication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을 읽고 application(적용)을 잘 해야 하지만, implication을 잘 찾아야 합니다. 그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와 원리를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함축적인 의미(implication)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삶 속에 관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무의미한 일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힘든 일이 있습니까? 절망적인 일이 있습니까?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교회가 받은 박해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는 당시에는 아무도 그것을 몰랐습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나중에는 안디옥(Antioch in Syria)을 비롯한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했습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은 교회를 흩어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땅끝까지 나가 복음의 증인들로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의 연대감(solidarity)이 강했기 때문에 박해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신자들을 흩어지게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크리스천들을 찾아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충실했지만, 그가 했던 일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 신자들 사이에서 사울이라는 이름은 악명(惡名)이 높았습니다. 다메섹(Damascus)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Ananias)라는 주님의 제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9:13) 워낙 신자들 사이에 사울의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나중에 사울이 회심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자들은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9:21). 

여러분, 이런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다는 성경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사울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입니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습니다(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ward me did not prove vain).” (고린도전서 15:9-10)

마지막으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흩어진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But the believers who were scattered preached the Good News about Jesus wherever they went).” 교회는 언제까지 평안을 누리면서 함께 공동체의 삶을 누리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이 공동체를 흩어지게 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The Gathered and Scattered Church(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호켄다이크(Johannes Christiaan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이라는 그의 책에서 처음 쓴 말입니다. 이 책의 제목을 직역하면 ‘뒤집어지는 교회’입니다. 이 책이 1966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교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책이 1979년에 우리나라에 ‘흩어지는 교회’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호켄다이크가 이 책을 출판된 지 13년이 지난 후에 출판된 것입니다. 호켄다이크는 이 책에서 기존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뒤집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gathered church(모이는 교회)’에 있지 않고 ‘scattered church (흩어지는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교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연대감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말씀을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사도적인 교회(the apostolic church)’ 다시 말하면 ‘흩어지는 교회’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Ite, missa est(이테, 미사 에스트).” 카톨릭 교회에서 미사를 마친 후에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하는 말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Go, you have been dismissed”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미사가 끝났다는 말이 아니라 “Go, it is the sending [dismissal]!”이라는 뜻입니다. 미사는 끝이 났지만, 이제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내보낸다는 말입니다. 사제가 이렇게 말하면 신자들은 “Deo gratias (Thanks be to God)!”라고 화답합니다. 나를 복음의 증인으로 보내주심을 감사드린다는 뜻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은 박해를 통해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너무 드라마틱합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서도 똑 같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는 ‘모이는 교회’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이는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는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리는 이유는 흩어져 복음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입니다.

 


7/11/2021 | 사역의 우선순위를 정하다

부활절이 지나고(12)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6:1-7

옛 말에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이롭거나 친근한쪽으로 마음이 쏠리기 쉽다는 뜻입니다, 또 비슷한 말로 “가재는 게 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한 편이 되어 서로 사정을 봐 준다는 뜻입니다. 영어에는 ‘favorit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편애(偏愛)라는 말인데요. 어느 특정한 사람만을 치우치게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신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구제 사역(긍휼사역)을 하는 중에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차별한 것입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인데, 이 사람들은 몇 달 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순례를 왔다가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제 때에 공급이 되는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제 때 공급이 안 되고 소홀하게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교회를 운영하시고, 신자들이 물건을 함께 사용할 정도로 네 것 내 것이 없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여러분, 우리가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했다고 해도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우리의 본성(nature)이 단번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완전히 변화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과 시행착오가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성화의 과정(the process of sanctific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일컫는 것입니다.

카톨릭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총은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ce does not destroy nature, but perfects it).” 그가 쓴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 ‘인간’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3부로 되어 있습니다. 아퀴나스는 3부 ‘예수 그리스도’를 다 마치지 못하고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제자가 3부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아주 타락하지 않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총(은혜)이 인간의 본성을 온전하게 만들어간다고 보았습니다. 신앙공동체 안에 많은 신자들이 모였지만, 그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그들도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차별을 받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폴린 필립스(Pauline Phillips, 1918-2013)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비가일 밴 뷰렌(Abigail Van Buren)이라는 펜 네임으로 잘 알려진 분인데요.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church is a hospital for sinners, not a museum for saints(교회는 성자들을 위한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병원입니다).” 박물관에 가 보면 진열장 안에 오래 된 진귀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나 이런 사람이예요” 하면서 자기를 과시하지만 진열장에 들어 있는 오래된 물건들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성자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모인 병원과 같은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으나, 환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마태복음 9:12) 예수님은 자신을 의사에 비유하셨습니다. 의사이신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말씀이 교회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문제가 없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편애와 차별의 문제가 생겼을 때,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열 두 사도들이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라는 말은 사도들 외에 일반 교인들을 말합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받은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2-4절)

여러분, 사도들의 말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교회의 정체성(identity)과 관계된 말씀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교회의 정체성이라고 할 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마가복음 11: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 이사야 56:7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을 둘러보셨을 때, 성전 안에서 비둘기를 팔고, 소와 양을 팔고, 외국 돈을 환전(換錢)해 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 모습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장사꾼들처럼 보였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그곳을 ‘도둑들의 소굴’ 같다고 하셨겠습니까? 기도는 현실의 삶에서 염려와 근심을 가진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들을 이기는(over¬come) 것입니다. 성전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어떻습니까?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병자와 앓는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4:23)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즉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 가르치는 사역, 그리고 치유하는 사역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정체성을 상실한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00년 전에 사도들이 교회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차별을 받았다고 했는데, 사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차별을 받은 것입니다. “The Greek-speaking believers complained about the Hebrew-speaking believers, saying that their widows were being discriminated against in the daily distribution of food.” (New Living Translation)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discrimination(차별)’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이 기도 사역과 말씀 사역이 중요하다고 선언한 것은 음식을 배급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application’이라는 말이 있고 ‘implic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application’은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한다는 뜻이고, ‘implication’이라는 말은 그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폭 넓게 해석해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지금 초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폭 넓게 해석해 보면, 말씀 사역과 봉사 사역(긍휼사역)이 충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사역이 중요하냐 봉사 사역이 중요하냐 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교인들의 수가 많이 늘었습니다. 일할 사람들이 부족하다 보니까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차별받는 일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했을까요? 교인들의 수가 늘고 일할 사람들이 부족하면 사도들도 그 일에 매달려서 차별받는 사람들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만일 그 때 사도들까지 모두 음식 배급하는 일에 매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교회는 기도 사역과 말씀 사역을 소홀하게 하게 되고, 교회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면 일반 자선단체와 구별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 둘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일반 자선 단체와 다릅니다. 자선 단체는 선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Do you have the gift of speaking? Then speak as though God himself were speaking through you. Do you have the gift of helping others? Do it with all the strength and energy that God supplies. Then everything you do will bring glory to God through Jesus Christ (말씀을 전하는 은사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말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돕는 은사를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1)

교회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받은 사람(men who are well respected and ar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3절)’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men who are full of faith and the Holy Spirit, 5절)’ 일곱 사람을 선정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시 한번 교회의 긍휼사역이 어떤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사람을 선정하는 기준이 특별합니다. 일반 자선 단체에서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뽑았습니다. 크리스천의 봉사는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정된 일곱 사람들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인으로 개종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 모두 믿음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church gave them this responsibility and the apostles could spend their time in prayer and teaching the word(교회는 이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맡겼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3-4절) 이 얼마나 지혜로운 결정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생긴 ‘차별’ 문제도 해결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도 지혜롭게 해결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그 떼 선정된 일곱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 한 사람, ‘스데반(Stephen)’이라는 사람이 눈에 띕니다. ‘스데반’은 교회 역사 상 최초로 순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해서 교회에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스데반’은 음식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일을 위해서 선정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스데반’은 밖에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다가 순교까지 하게 되었을까요? 사도행전 7장 전체가 ‘스데반’이 그 때 했던 설교입니다. 그는 거침없이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이 메시아를 죽였다고 유대인들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화가 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왜 그랬을까요? 

저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실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평신도와 사도들의 사역의 경계가 상당히 유동적(flexible)이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사도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일곱 사람 중 하나인 ‘빌립’도 그랬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설교는 사도들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닙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목사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일들이 목사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새 시대의 교회에는 맞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평신도들의 역량(力量)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습니다. 평신도들이 좀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는다면 교회를 위한 엄청난 자산이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4/2021 |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활절이 지나고(11)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3:1-10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각자 필요한대로 가져다 썼습니다. 아무도 부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공동체 안에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사도행전 2:43). 여기서 두려운 마음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갈릴리에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공동체마다 평안하였고, 그 안에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갔습니다(9:31).

그런 중에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를 합니다. 사도들은 새로운 공동체에 속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기도 시간이 되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는 그날 기도 시간이 되어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일은 매일 일상처럼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사용하는 문은 ‘미문(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문’ 앞에 늘 한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나이가 40세가량 되었고(사도행전 (4:22), 부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집에서 쫓겨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지체 부자유자가 태어나는 것을 집안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 이런 사람이 태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날마다 제 시간에 이 사람을 성전 문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3: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they ap-proached the Temple, a man lame from birth was being carried in. Each day he was put beside the Temple gate, so he could beg from the people going into the Temple.” 여러분, 이 말씀에서 이 사람의 비인간적인 불행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마치 물건을 운반해서 그 자리에 놓아두듯이, 사람들은 이 사람을 성전 문 앞에 갔다 놓았습니다. 해가 저물면 또 어디론가 이 사람을 데려다 놓았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앉아서 구걸을 했기 때문에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그 때 두 사도는 이 사람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은 주목(注目)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ter and John looked at him intently.” ‘intently’라는 말에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in a firmly or steadfastly fixed or directed way, as with the eyes, ears, or mind(눈이나 귀, 마음을 대상에게 확고하게 고정해서)’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in a fully engaged or determined way that shows strength of purpose(강한 목적을 가지고 대상에게 완전히 결정적인 방법으로 관계해서)’라는 뜻입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날은 두 사도가 이 사람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아, 이 사람, 날마나 여기 앉아서 구걸하는, 걷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로구나!” 그날 두 사도가 이 사람을 바라보았던 시선(視線)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셨던 바로 그 시선이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because He knew all people) 자기 자신을 그 사람들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고 계셨기 때문에(for he knew what was in man), 사람에 대해서 어느 누구의 증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2:24-25)

성령은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두 사도가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 사람을 바라보았을 때, 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이 사람의 과거와 현재의 불행한 삶을 한 눈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이 사람의 불행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떳떳하게 한 가족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이 사람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미문’ 앞에서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찾아왔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For the Son of Man came to seek and save those who are lost).” (누가복음 19:9-1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여리고(Jericho)에 살고 있던 삭개오라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목자들이 양을 키울 때 낮에는 풀을 찾아다니면서 풀을 먹이고, 저녁에는 양의 우리(fold)에 양들을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양의 수를 셉니다. 이 때 수가 모자라면 그 모자라는 양을 ‘잃어버린 양(the lost sheep)’이라고 합니다. 이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값을 물어내야 했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양’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길을 헤매고 있는지, 아니면 사나운 짐승에게 잡아 먹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이라는 말은 하나님을 떠난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입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이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람,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 이런 사람이 ‘잃어버린 사람(the lost man)’입니다.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던 사람, 이 사람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영국)은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한 그는, 붙잡혀 노예선에서 15개월 동안 비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사다가 파는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 독일)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책을 읽고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학으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라는 찬송시를 써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나는 한 때 길을 잃고 방황했지만, 이제는 구원받았네. 나는 한 때 눈이 멀었었지만, 이제는 볼 수 있네).” 이 가사에서 뉴턴은 그가 한 때 목자를 잃어버린 양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사도는 이 사람에게 “우리를 보시오(Look at us)!”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뭔가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두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4-6절)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와!”하는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어 두 사도를 에워쌌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꼭 붙들고는 놓아주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 베드로와 요한을 보러 ‘솔로몬 행각’이라 부르는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진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Peter saw his opportunity and addressed the crowd).” (사도행전 3:11)

이 모든 일은 성령께서 주도하고 계셨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이 불행한 사람이 걷게 된 일은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증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by faith in the name of Jesus)’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 네델란드)이 쓴 ‘예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1989)’라는 책이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책(Reflections on Christian Leadership)입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잠깐 책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이 책에서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하여 세 가지 리더십을 말하면서 크리스천 리더들이 현실적이고, 유능하고, 멋있고, 능력있는 리더가 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합니다. 나우웬은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은 첫째로 기도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나우웬은 현실 지향적인 목사들의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목사들은 목회 현장에서 당장에 필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능한 목사가 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영혼을 섬기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들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힘과 권위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돌봄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리더는 예수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그분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고,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생명을 찾고 또 풍성히 찾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따르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들이 다른 사람을 인도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자신도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람이 걸을 수 있지? 말도 안 돼!” 이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고 그 대신 “오늘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지?” 하고 물어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이 사람이 걷게 된 것은 그동안 소외되었던 삶에서부터 공동체 안의 삶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람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제일 먼저 들어갔던 곳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성전이었습니다(8절).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이제 이 사람이 하나님 백성들과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온전하게 회복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 사람을 회복시켰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것이 헨리 나우웬이 말하는 영혼을 돌보는 리더십입니다. 초대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놀라움 자체였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두려워했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퍼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들이 큰 표적을 행한 것을 알고 있소.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소. 하지만 이 일이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예수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경고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래서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불러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다시 공의회 안으로 불러들여서 매질을 한 후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고 놓아주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사도행전 4:16-18, 5:40-41)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회복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헨리 나우웬이 말한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이 하나의 해답을 주지 않을까요? 우리는 기도하는 리더십, 영혼을 섬기는 리더십,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리더십을 이해하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력감에 빠진 청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는 과거의 현실적이고 유능하고 힘 있는 리더십이 아니라, 헨리 나우웬이 말한 ‘21세기 크리스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이 리더십이 있어야 사람들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