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2021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시편 23편

오늘 읽은 시편 2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설교의 왕자(The Prince of Preachers)’라고 불리는 스펄젼(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이 시편을 ‘시편의 진주(the pearl of psalms)’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1986)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으로 시편 23편을 읽으라는 처방을 내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아주 드라마틱했습니다. 드라마틱했다는 말은 그의 삶에 그루브(groove)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려움 없이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맞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은 아무 일이 없는 편안한 삶이 아니라 드라마틱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가 그랬습니다. 다윗은 어렵고 힘들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가 쓴 시들은 우리가 가진 성경에 시편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 중에 다윗이 쓴 시편은 73편입니다. 그 시편들은 모두 다윗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하나님을 찾았던 시편들입니다. 

시편 23편도 그렇습니다. 워낙 목가적(牧歌的)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시편이기 때문에 다윗이 평안하게 지냈던 때에 이 시편을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시편 23편은 다윗의 생애 가운데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쓴 것입니다. 학자들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했을 때, 다윗은 차마 아들과 칼을 겨누고 싸울 수가 없어서 왕궁을 버리고 피난을 갔던 때가 있었는데, 시편 23편은 그 때 쓴 시편이라고 합니다. 도저히 그럴 것 같지 않지요? 하지만, 자세히 읽어 보면 시편 23편에 다윗의 처절하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이었던 상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시편 23편을 읽으면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 시편 23편의 내용을 한번 찬찬히 들여다볼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고백합니다. 목자를 ‘shepherd’라고 합니다. 양(sheep)을 herding하는 사람, 양을 지키고, 먹이고, 기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마치 목자가 양을 돌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씀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의 시제(時制, tense)에 주목하면서 여기에 사용된 시제가 미완료(未完了, imperfect) 시제라고 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어떤 동작이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시제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면 나는 계속해서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과거에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지금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고 감사한다’는 뜻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구절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욥기 1:21) 또 이런 말씀이 생각나지요?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배부를 때나, 배고플 때나,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빌립보서 4:12) 이들이 이렇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 비결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계획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은 하나님께서 뜻이 있기 때문에 주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얼마나 사랑이 많고, 얼마나 선하시고, 인자하신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my shepherd)’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환경에 있을 때도,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있을 때도, 변함없이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배려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그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하나님을 믿는 이상 나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과거에도 부족한 것이 없었지만, 지금도 부족한 것이 없고, 앞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위키 백과사전(WIKIEPRDIA)에 양의 성질(性質)에 대하여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화를 잘 안 내고 온화한 성질을 가진 사람을 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온순해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양을 온순한 동물이라고 생각지만 양은 매우 억세고 사나운 동물이다. 염소와 마찬가지로 고집이 세서 다른 동물에게 박치기를 하기도 하고 사람에게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기 때문에 양치기들도 애를 많이 먹는다.” 양은 성질도 좋지 않지만, 시력이 약해서 겨우 3m 정도 밖에 앞을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넘어져 몸이 뒤집어지면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 없어서 목자가 도와줘야 한다고 합니다. 지난 2월에 호주 멜버른 북부 랜스필드(Lancefield)에서 오랫동안 버려졌던 메리노(merino) 종(種) 양 한 마리가 구조되었는데요. 발견 당시 털의 무게가 무려 35kg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양에게 목자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목자 없이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도 양에 대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All of us, like sheep, have strayed away. We have left God’s paths to follow our own)” (이사야 53:6) 양에게 목자가 없으면 양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 엉뚱한 길로 갑니다. 목자를 잃은 양이 제멋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길(God’s path)’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들의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인생의 정도(正道)를 말합니다. 우리 자신들의 길이란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잘못된 길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정도를 떠난 우리에게 바른 길을 보여주고, 바른 길로 인도해 줄 목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은 “하나님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물가로 인도하신다(2절)”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신다(He renews my strength, 3절)”고 합니다. Amplified Bible에는 이 말씀이 “He refreshes and restores my soul (lif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실망하고 절망하여 주저 앉아 있을 때,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for his name’s sake)’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3절)”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하나님의 명예를 떨어뜨리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다윗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믿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보스턴 생활이 두려울까요? 낯선 새로운 환경이 두려울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이 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If God is for us, who can be against us)?” (로마서 8:31)

마지막으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4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est valley①,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 ①Or the dark valley of death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때도 하나님께서 나와 가까이 계셔서 나의 도움이 되어 주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독일 한 대학에 한 노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가 구사하는 언어가 10개가 넘는다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독일어, 영어, 불어는 물론이고, 스페인어에다 몇 개의 동양 언어까지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교수가 히브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 교수에게 어떻게 히브리어까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그 교수는 40년 전,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당시, 대학시절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 교수에게 기숙사 방을 같이 쓰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그 친구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사실은 그 친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유태인이었지만, 나치는 유태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서 수용소로 보내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하고 두 시간쯤 지나면 꼭 무슨 주문 같은 것을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친구가 히브리어로 외웠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치 음악같이 리듬을 타는 그 시가 무척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그 친구에게 물었더니 구약성경에 나오는 시편 23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 시편을 외우고 나면 기분이 좋아져서 공부가 더 잘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부터 그 교수도 친구에게 배워서 같이 그 시편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2년을 함께 보내는 동안 사이 좋은 두 친구는, 공부하다 지겨워질 때쯤 되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암송했습니다.

나치의 핍박이 점점 심해지자 그 친구는 학교를 그만두고 은신처에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서 지금 나치 비밀경찰들이 들이닥쳤다고, 자기는 가스실로 끌려가게 될 것 같다는 연락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수는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그 친구와 가족을 실은 나치의 트럭이 막 출발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는 출발하는 트럭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친구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트럭을 따라가는데, 고개를 내민 친구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친구의 얼굴은, 뜻밖에도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갑자기 소리 높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가는 친구는 미소를 지으면서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따라가던 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같이 그 시편을 외우면서 자전거 페달을 더 힘껏 밟았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친구를 태운 트럭은 점차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친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나치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끌어다가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그 교수도 결국 군대에 끌려갔다가 러시아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죽음의 대열에 낀 포로들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습니다. 그 교수의 머릿속에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가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음의 길을 웃으며 떠난 그 친구처럼, 나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자.” 끌려온 포로들이 하나 둘 총알에 쓰러지고, 드디어 교수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교수는 총을 겨눈 군인에게 마지막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연합군의 러시아 장교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도 같이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외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연합군 장교는, 유태인이었습니다. 장교는 그 사람을 풀어주라고 명령하면서 사형중지 서류에 사인을 했습니다. 놀라서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장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정말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의 말처럼 하나님의 나라에는 ‘ifs(만약에)’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자기 백성을 이렇게 지키신 것입니다.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양들에게 ‘풍성한 생명(an abundant life)’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요한복음 10:10). 돈을 받고 고용된(hired) 목자는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 않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덕분에 그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하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디 보스턴 생활을 통해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선한 목자’를 평생 여러분의 자산(資産, assets)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8/29/2021 |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Know That I Am God

시편 46편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보스턴에 새로 직장을 잡으셨거나 공부하러 온 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새로운 곳에 올 때는 항상 불안감과 기대감이 교차합니다. 보스턴에 새로 오신 분들 지금 많이 불안하시지요? 저도 1986년에 보스턴에 왔을 때 참 불안했습니다. “이곳에서 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나의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일까?” 또 “보스턴은 물가가 비싸다는데 생활비는 모자라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런 걱정도 있지만, 동시에 보스턴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생활과 학업에 대한 기대가 있을 줄 압니다. 

보스턴은 미국이 자랑하는 학문의 도시입니다. 수많은 대학들이 있어서 학교마다 학생들로 차고 넘치는,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보스턴은 참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어디를 가 봐도 보스턴처럼 고전적(古典的)인 것과 현대적(現代的)인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도시가 별로 없습니다. 아름다운 찰스강이 흘러 보스턴과 케임브리지의 경계를 이루고, 유명한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있고, 전통의 레드삭스 야구단과 셀틱스 농구단이 있고,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풋볼팀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저의 신학교 은사 한 분이 보스턴을 방문하셨습니다. 아름다운 찰스강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김 목사, 파리의 세느강이 아름답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찰스강과는 비교할 수가 없구만! 찰스강은 정말 아름다워!” 보스턴을 자랑하려면 이 외에도 끝이 없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네요. 바로 케임브리지한인교회입니다. 43년의 역사를 가진 케임브리지한인교회는 지금까지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했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예배와 아름다운 성가대, 그리고 청년부가 케임브리지한인교회의 자랑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은 시(詩)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에 곡조를 붙여 노래로 불렀습니다. 시편마다 어떻게 노래를 부르라는 지시어(指示語)가 있습니다. 시편 46편은 ‘A song to be sung by soprano voices①./①Hebrew according to alamoth’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소프라노 음성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상상을 해 보세요. 어디선가 아름다운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움 당할 때마다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니, 땅이 마구 뒤흔들린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산 저 산이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바다에 마구 폭풍이 몰아치고 미친 듯이 날뛴다 해도 그 물이 넘쳐 언덕들이 마구 요동한다 해도 우리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셀라)” (현대어 성경)

어떻습니까? 노래 가사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지 않습니까? 이 시편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주기 위해서 쓴 시편입니다. 이 시편 말씀이 새학기를 맞아 보스턴에 오신 분들에게도 힘을 주고 위로를 주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오늘 시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이 시편을 쓴 사미스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계하시는 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며, 힘이십니다. 어려울 때 언제나 우리를 돕는 분이십니다(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1절) ‘피난처’는 급하고 위험할 때 뛰어가 피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갑자기 길을 가다가 폭우가 쏟아지고 번개가 치면 사람들은 급하게 어디론가 피할 장소를 찾습니다. 여러분들은 급할 때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가지고 계신가요? 이 시편을 쓴 사미스트는 하나님이 자기의 ‘refuge(피난처)’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언제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건강을 자신하던 사람도 언제 건강을 잃을지 모릅니다. 이런 연약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는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네델란드)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코리 여사’라고 부릅니다. 코리 여사는 네덜란드 할렘(Haarlem)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을 숨겨 주다가 독일군에게 체포되어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고난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그녀는 함께 갇힌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이렇게 수용소 생활을 하던 중에 코리 여사는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홀로코스트(Holocaust)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석방된 뒤에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고, 독일을 비롯한 전 세계를 다니면서 사랑과 용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평생 동안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았던 그녀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녀가 쓴 책 중에 ‘주는 나의 피난처(The Hiding Place, 1971)’라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가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The Hiding Place(1975)’ ‘Corrie Ten Boom: A Faith Undefeated(2013)’ ‘Torchlighters: The Corrie Ten Boom Story(2013)’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는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맞습니까? 코리 여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be afraid to trust an unknown future to a known God..... There are no ‘ifs’ in God’s Kingdom. His timing is perfect. His will is our hiding place. Lord Jesus keep me in Your will. Don't let me go mad by poking about outside of it(당신의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만약’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바로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뜻 안에서 나를 지켜 주십시오. 주님의 뜻 밖에서 헤맴으로 나를 힘들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이 우리의 확실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불확실합니다. 이 불확실한 우리의 미래를 확실한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만약’이라는 말이 없다고 하지요? 하나님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우리가 필요할 때에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어쩌다가 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목적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일들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편 46편의 사미스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려도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2-3절) 여러분,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흔들린다는 말은 우리의 존재(存在) 자체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면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5절)”라고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여기서 ‘city’는 도시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안에 계시는사람, 곧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코리 여사는 하나님의 뜻 안에 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It cannot be destroyed. God will protect it(그런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십니다)!” 그 분야의 권위자가 말하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듣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사미스트는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와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Come, see the glorious works of the LORD). 주께서 이 땅을 폐허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는 온 땅에서 전쟁을 그치시고 활을 꺾으시고 창을 부러뜨리시며 방패를 불로 사르십니다.” (8-9절) 전쟁은 양 국가가 서로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번 전쟁의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되면, 이긴 편이나 진 편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재산 피해를 내게 됩니다. 아무도 말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쟁의 광기로부터 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활을 꺾고, 창을 부러뜨리고, 방패를 불살라서 전쟁을 그치게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힘이 대단한 것 같이 보이지만, 팬데믹으로 온 세상이 일년 반이 넘도록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말씀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콧김으로 물이 쌓이고(By the blast of your nostrils the waters piled up), 파도는 언덕처럼 일어서며, 깊은 물은 바다 한가운데서 엉깁니다.” (출애굽기 15:8)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앞에 홍해바다(The Red Sea)가 가로막혀서 오도가도 못하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강한 바람이 불게 해서 바다 한 가운데 길을 만드셨거든요? 그 때 불어온 바람이 ‘the blast of God’s nostrils’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콧바람이 강하게 불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요.

사미스트는 “와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십시오(8절)”라고 했습니다. 자기에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여줄 것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도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습니까? 구약 잠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성을 정복하는 자보다 낫다(Better a patient man than a warrior, a man who controls his temper than one who takes a city).” (잠언 16:32, NIV) 내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다스리고, 나를 자제(自制, control)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성을 빼앗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잘 압니다. 그렇게 의심이 많고, 그렇게 고집이 센 우리를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들이 살아 있는 증인(證人)들입니다.

셋째로, 사미스트는 위기의 순간에 모든 인간적인 시도를 중지하고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합니다. “조용히 하여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나는 모든 나라들 위에 높임을 받을 것이며, 온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이다(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I will be honored by every nation. I will be honored throughout the world).” (10절) 코리 텐 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How foolish of me to have called for human help when You are here(하나님께서 여기 나와 함께 계신 것을 모르고 사람의 도움을 구한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요).” 어렵고 힘들 때 동분서주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조용히 시선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서 그 뜻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코리 텐 붐 여사의 말처럼 그것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삼지 않았던 사람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보십시오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많은 재산을 믿고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면서 점점 힘을 키워 간 사람을 보십시오!” (시편 52:7) 자기 힘을 믿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의 말씀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精進)하고,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그 일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빠지지 말고 나오십시오. 성경을 배울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함께 성장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입니다. 우리 다 같이 5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8/22/2021 |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부활절이 지나고(18) After Jesus’ Resurrection

로마서 15:14-19

사도 바울이 남긴 선교 업적(業績)은 정말 엄청납니다. 이 놀라운 업적은 그의 옆에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업적을 자랑하거나 업적을 부풀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동역자들과 함께 끝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실 하려고 했습니다. 

본문 19절에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의 사역은 한마디로 ‘From Jerusalem to Illyricum(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한번 그가 말하는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보실까요? 직선 거리로 약 1,000마일(1,600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로마까지는 1,400 마일 정도 되고요. 요즘같이 교통 수단이 발달한 때에는 이 거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배를 타고, 걸어서 가려고 하면 엄두가 나지 않는 거리입니다. 그리고 도로가 잘 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겪었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선교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과 강도들로부터 오는 위험, 내 동족들에게서 받는 위험, 이방인들에게서 받는 위험, 도시에서 당하는 위험, 황량한 광야에서 당하는 위험, 바다의 위험, 또한 거짓 신자들로부터 오는 위험을 겪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6-27)

“바울은 어떻게 이런 엄청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하는 질문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foundational question)’ 질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너 자신을 알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합니다. 잘못된 판단과, 잘못된 선택, 그리고, 실수들이 생겨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이 모두 내가 누구인지 나 자신을 모르는 데서 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I am a special messenger from Christ Jesus to you Gentiles).” (16절) 우리는 단순히 “Who am I?”이렇게 묻지 말고 “Who am I in Christ Jesus?”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히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하고 질문해 보세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많은 문제들이 이 질문 앞에서 풀려지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별것 아닙니다. 이 질문에 충실한 삶을 살면 거기에서 진정한 삶의 만족과 행복이 주어집니다.

둘째로, 바울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8)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영국) 목사님이 쓴 역작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The Incomparable Christ, 2001)’라는 책 제목이 생각납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분이 없었고, 그보다 더 깊은 영향력을 가졌던 분이 없으셨다. 그와 필적할 만한 상대는 영원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았기에 “내가 바라고 또 바라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배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0)”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소중하게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러분에게 뭔가 정말 소중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소중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지 않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선교사들이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에 대한 열정입니까? 전도에 대한 사명감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for his name’s sake)’입니다.” 

저는 바울의 마음 속에도 ‘그의 이름을 위하여’ 이 마음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그리스인이든지 미개인이든지 지식인이든지 문맹인이든지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14-15) 이 말씀이 그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 아닙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the name above all other names)’이 되게 하셨습니다(빌립보서 2:9). 바울이 빌립교 교회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그의 인생 전부를 바쳤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름이 나의 인생 전부를 바쳐도 아깝지 않는 이름인가요?

셋째로, 우리는 바울이 자기 사명을 위해 어떤 헌신을 했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내게 맡기신 것을 세상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I am not ashamed of it)”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it’는 복음을 전하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로마서 1:16에도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전도자로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얼마나 잘 사는 사람들이 많고, 또 행복하게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 볼 때, 부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전도자들에게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의 삶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 말씀 속에 ‘주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what I have entrusted to him or what I have committed to Him)’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주님이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준다(guard)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The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연은 어떤 일이 어려움이 있어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세기에 서커스 공연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처음으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서커스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변수가 많겠습니까? 녹화를 했다가 내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대 뒤에서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배우에게 갑자기 돌발적인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동물들에게도 문제가 생길 수 있고, 소품을 챙기는 데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상황이 어찌 되었든 막이 열리면 서커스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바울은 주님이 내게 맡기신 그 일은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데 고난이 따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클리프 선교사들은 선교지에 들어가서 그 부족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문자가 없는 부족들에게는 문자를 만들어 주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해야 합니다. 한 선교사가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그 일이 중단됩니다. 그러면, 다음 선교사가 그 일을 맡아 계속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부족의 문자로 성경 번역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중단되지 않고 계속됩니다.

넷째로,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동역자들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큰 감동이 밀려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디모데는 마치 아들과 아버지처럼, 나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 (빌립보서 2:22)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 대하여 “He has helped me”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고 “He has served with me”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해서 수고할 때 디모데도 나와 함께 수고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이렇게 빌립보서를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인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믿는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들과 지도자들과 집사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빌립보서 1:1) 나도 디모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와 디모데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동일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이것이 동역자를 대하는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에게는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동역자들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예루살렘서 일루리곤까지(From Jerusalem to Illyricum)’ 그 광활한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겠습니까? 디도(Titus)라는 바울의 동역자가 있습니다. 디도는 그리스 사람인데,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제자가 되었고,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디도는 바울에게 ‘친아들’과 같은 사람이었고(디도서 1:4), 동료(fellow worker, 고린도후서 8:23)였습니다. 디도는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도는 주로 바울의 편지를 교회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나중에 바울은 그를 크레타(Crete) 섬의 감독으로 임명했습니다. 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서로 만난 후, 이 부부는 평생 신실한 바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부에 대하여 “이 두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 교회가 그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로마서 16:4)”라고 인정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끝으로, 바울이 전도자로 섬긴 기간은 서기 47년에서 57년까지 약 10여년 간입니다.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한 때 교회를 박해했다는 트라우마가 있었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트라우마가 그를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바울의 과거였지만, 여기에도 주님의 계획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바울이 끝까지 자기 사명에 충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다른 전도자들과 경쟁하는 조급한 마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반짝하고 일꾼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겸손했고, 다른 전도자들과 경쟁심을 버렸기에 10여년 동안 롱런(long-run) 할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Apollos)라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전도자와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나 아볼로나 여러분을 믿도록 하고,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게 하신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3:5-6) “나는 다른 사람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집을 세우지 않으려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지역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로마서 15: 20) 이런 마음과 태도가 바울이 끝까지 자기 사명을 다 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하여 최후의 고백을 합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내 삶을 바쳤고, 이제는 이 땅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6-8)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그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그 시대의 엘리트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의 이름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뛰는 일을 선택하라!” 참 멋진 말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었고, 자신이 인생을 다 바쳐도 후회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 바울을 생각하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져 보세요.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분인가?” “나는 지금 가슴이 뛰는 일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나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 있기를 바랍니다. 


8/15/2021 | 아테네 설교

부활절이 지나고(17)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7:22-28

오늘 말씀은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중에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제2차 선교여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다소, 더베, 루스드라를 거쳐 비시디아 안디옥, 드로아를 거쳐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 아테네, 고린도, 에베소,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때가 대략 서기 50년 경으로 생각됩니다. 제2차 선교여행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최초로 유럽에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행전을 읽을 때마다 한 사람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지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주께서 내게 맡기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 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사도행전 20:24)

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대하여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이 로마서 1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I have a great sense of obligation to people in both the civilized world and the rest of the world①, to the educated and uneducated alike(나는 문명 세계의 사람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큰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 ①Greek to Greeks and barbarians 그는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로마에까지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금방 모든 일이 잘 해결되면 로마교회의 파송을 받아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로마서 15:24, 28). 

우리 생각이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지 몰라도 그 대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제가 1983년에 미국에 이민자의 신분으로 들어와서 지금까지 지내오는 동안 제가 가지고 있었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한동안 많이 절망했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께서 이런 생각을 주셨습니다. “너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대신 나의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이 한마디 말씀으로 저의 마음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를 방문한 것은 서기 50년경이었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카, 베뢰아를 거쳐 오면서 같이 동행하던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남겨 두고 혼자 아테네에 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는 동안 아테네 시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테네의 역사는 3,000년이 넘을 정도로 오래 된 철학자들의 고향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Socrates, 469-399BC), 페리클레스(Pericles, 495-429BC), 소포클레스(Sophokles, 497-406BC) 등 쟁쟁한 위인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가 아테네에 있고, 그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가 세운 ‘리케이온(Lykeion)’도 아테네에 있습니다. 일종의 체육관이자 학교였고, 공공 모임 장소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아테네의 중심에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언덕이 있는데, 그 중앙에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파르테논(Parthenon, BC 432년에 완공)’ 신전이 서 있습니다. 

아테네 시내를 돌아본 바울은 수많은 신상(神像)들을 보면서 마음에 분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사적인 도시의 시민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안타까운 생각때문에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감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이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진리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날마다 토론을 벌이면서 진리의 하나님을 찾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상 밑에 새겨 있는 신상들의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상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To An Unknown God, ΑΓΝΩΣΤΩ ΘΕΩ)’라고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테네 시민들은 수많은 신들을 섬기면서도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이런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물을 바친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을 찾아가서 유대인들과 그리스인 신자들(the God-fearing Greeks)과 매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 토론에서 바울은 “왜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까?”라고 문제를 제기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은 에피큐리안 철학자들과 스토익 철학자들(Epicurean and Stoic philosophers)과도 토론을 벌였습니다. 누가는 그 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한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사도행전 17:18). 에피큐리안들이나 스토익 철학자들 모두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에피큐리안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했고, 스토익 철학자들은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 것이 행복인데, 그러기 위해서 지혜와 용기와 절제와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진정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오는 것이라고 그들과 토론을 벌인 것입니다.

토론에서 절대로 밀리지 않는 바울을 보면서 에피큐리안들과 스토익 철학자들은 바울을 가리켜 “What's this babbler trying to say with these strange ideas he's picked up(18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이 말쟁이(수다쟁이)가 말도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와서 지껄여 대는 거야?” 이런 말이 되겠네요.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그들에게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18절) 이 사람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the Areopagus)’ 광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바울의 주장은 ‘무척 낯설고 새로운 것(some startling and strange things)’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명한 바울의 ‘아테네 설교’가 시작됩니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면서 자기가 할 이야기는 아테네 시민들과 ‘연관성(relevancy)’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니 여러분들은 매우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시내를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신상을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23절) 이 말에 아테네 시민들은 상당히 호감을 가지고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대방과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라면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가 마음을 열도록 접근하신 방법은 “나에게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가 시작되어 마침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있다는 말씀으로 연결됩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그런 물이 있다면 저에게 주십시오(요한복음 4:15)”라고 오히려 예수님에게 요청합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가까워진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침, 그들의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함께 묵으면서 그들과 같이 일했습니다. 천막 만드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3) 그들은 직업이 같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직업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이 서로 열렸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손으로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제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설교를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레오바고’ 광장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는 아테나 여신을 섬기는 웅장하고 화려한 파르테논 신전이 서 있습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신을 섬기는 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 신전 앞에서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의 한 유대인이 감히 신전과 아테나 여신을 향해서 도발(挑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터키에 성지 순례를 갔을 때, 미국에서 간 몇 사람들과 한국에서 온 분들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한 야외 극장을 보았습니다. 약 1/3 정도는 파괴된 상태로 있었지만, 상당한 규모의 극장이었습니다. 어떻게 설계를 했는지 음향이 마치 마이크를 댄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곳에서 에베소 시민들이 “에베소의 여신 아데미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28)!” 하고 외쳤을 때 그 소리가 얼마나 컸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속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이 극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이 찬양을 불렀습니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고 여전히 타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찬양을 시작할 때는 저의 목소리도 떨리고 저의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괜찮아져서 끝까지 찬양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셋째로, 바울은 하나님은 누구나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27절). 우리의 삶 속에 어느 것 하나 하나님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BC 6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에피메니데스(Epimenides)의 시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28절) 아테네 시민 여러분의 삶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바울은 BC 3세기에 살았던 그리스 시인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28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많은 신상들처럼, 하나님은 손으로 만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 이런 인문학적인 소양을 쌓았을까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할 때 배웠을까요? 아니면 고향 다소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 이런 소양을 길렀을까요? 언제가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의 인문학적인 소양이 복음을 전파하는데 크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성경만 알면 돼!" 하면서 그 밖의 것들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특별히 지금 우리시대에는 인문학적인 소양이 더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문학, 미술, 음악, 철학, 그 밖의 소양들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지금 그런 소양들을 길러 놓으면 언젠가는 그것들이 복음을 전하고 설명하는데 요긴하게 쓰일 때가 반드시 옵니다.

넷째로, 바울은 아테네 시민들에게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서나 온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30절) 아테네 시민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신들이 세계에서 최고의 시민들이라는 지적인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아테네 시민들에게 바울은 과거 하나님을 몰라 우상을 섬겼던 삶을 회개하라고,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키라고 촉구합니다.

다섯째로, 지금까지 아테네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정하신 한 사람을 시켜 온 세상을 의롭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이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31절)”라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이 ‘심판의 주님’이시라는 증거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을 때,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테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변해 바울을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부활하셨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고린도전서 1:23) 여기서 이방인이란 주로 그리스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철학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nonsense’였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당신 말을 다시 들어보겠다고 하면서 ‘아레오바고’를 떠났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 나오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은 ‘nonsense’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는 인본주의적인 종교가 되고 맙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를 믿고 받아들일 때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가 됩니다. 부활의 메시지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은 냉소적으로 변했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Dionysius)와 다마리(Damaris), 그리고, 몇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날 크리스천이 된 것입니다. 아테네 시내에 다마리스의 이름을 딴 "Odos Damareos" 거리가 있다고 합니다. 다마리스는 평생 자선사업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박해시대에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방교회에서는 그녀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좋겠지만, 어떤 때는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귀한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그런 경우입니다.


8/8/2021 | 예루살렘 회의

부활절이 지나고(16) After Jesus’ Resurrection

사도행전 15:1-6

오늘 설교의 소제목은 ‘예루살렘 회의’입니다. 예루살렘에 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중요한 문제를 논의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모두 참석했고, 바울과 바나바가 참석했고요. 문제를 제기한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이 회의를 ‘예루살렘 공의회(The Council of Jerusalem)’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데, 교회 역사가들은 서기 325년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니케아(Nicaea)’에서 열린 회의를 ‘제1차 니케아 공의회(The First Council of Nicaea)’라고 합니다. ‘니케아’는 지금 터키에 있는 ‘이즈니크(Iznik)’입니다.

여러분, ‘니케아 공의회’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이 공의회를 주최한 사람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274-337) 황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제국의 종교가 된 기독교 안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통치자의 입장에서 이를 하나로 통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다룬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the divine nature)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 the human nature)에는 문제가 없으나 아리우스(Arius, 256-336)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아리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출신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우스는 키가 크고 군살이 없는 몸매에, 준수한 용모와 공손한 말투를 썼고, 여자들은 그의 정중한 예의와 금욕적인 외모에 감동했고, 남자들은 그의 지적 탁월함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안디옥에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늘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으며,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원래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가 아니며, 하나님이 만든 하나의 창조물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피조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써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냥 말씀과 지혜 자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에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는 말씀이 아버지를 정확하고 완벽하게 알지도 못하며, 그를 제대로 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우스의 이런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면서 폭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하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정통신앙을 변호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역시 서기 300년경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로부터 크리스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고, 철학과 신학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청년시절에 종종 광야로 나가 수도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말씀과 엄격한 규율과 삶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타나시우스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논리가 치밀했거나, 그의 스타일이 우아했거나, 정치적 술수에 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신념과 신앙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철저한 신앙생활, 사람들 속에 뿌리박은 신념, 그의 강력한 의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원칙 등이 아타나시우스를 누구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서기 325년에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 모두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습니다. 대부분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에서 온 감독들이었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에서는 6명만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회의 장소인 니케아까지 가는 길이 멀고, 또 그리스어를 잘 몰라 참석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18명 중에 알렉산더 감독을 비롯해서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감독들이 약 2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감독들도 이와 비슷하게 약 28명 정도였고, 나머지 감독들은 대부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양측이 잘 타협하겠지!” 하면서 중도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 때 아타나시우스는 알렉산더 감독의 보좌관 자격으로 공의회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아리우스는 장로였기 때문에 공의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달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동조했던 감독들이 차츰 아타나시우스의 입장에 가담하게 되어 투표에 붙인 결과 2명의 감독을 제외한 316명의 감독들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쪽에 투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감독들은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를 발표합니다. 이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ings visible and invisible. And in one Lord Jesus Christ, the only Son of God, begotten from the Father before all ages, God from God, Light from Light, true God from true God, begotten, not made; of the same essence as the Father. Through him all things were made(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태어난, 신 중의 신이며 빛 중의 빛이고, 참 신 중의 참 신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출생되었으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니케아 공의회의 진행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그 회의를 인도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를 보면서 “만약 그 회의에 언변이 뛰어났던 아리우스가 참석했더라면 회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그 회의에서 아리우스가 자기 주장을 조리 있게 설명해서 감독들을 설득했더라면, 회의 결과가 뒤집혔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지금과 다른 신앙을 고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서기 1세기의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회의에 대한 말씀입니다. 저는 이 회의를 생각하면서 ‘니케아 공의회’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예루살렘 회의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이 회의의 안건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야 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안디옥 교회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 몇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안디옥 교회 소식이 전해졌지만, 바리새파 출신이었던 이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들의 그런 행동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으로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신자들의 눈에는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못마땅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식사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그들의 옷차림과 말투도 못마땅했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고, 저런 사람들을 어떻게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런 사람들에게는 먼저 율법 교육부터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문의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요.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 가면서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야기를 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모든 형제들이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했습니다(3절).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누가는 필요한 것 같지 않은 이런 이야기를 기록했을까요? 누가가 이런 이야기를 기록한 이유는 지금 안디옥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방인 선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베니게와 사마리아에 살고 있는 신자들(크리스천들)이 바울과 바나바의 이야기를 듣고 크게 기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해외에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의 ‘열린 마음(open mind)’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국을 떠나 이곳 보스턴에 와서 사시는 여러분들, 그리고 유학생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은 열린 마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이 열린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조국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서 크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이 말씀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참석할 예루살렘 회의에 대한 전망(展望)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 회의에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희망적인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바울과 바나바는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의 환영을 받았습니다(4절). 이 말씀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문을 열고 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 회의가 열렸습니다. 먼저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고했습니다. 두 사람의 보고가 끝나자 바리새파 출신 신자들은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토론(a long discussion)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교회를 세우겠다(마태복음 16:18)”라고 약속한 사람 아닙니까? 베드로의 존재감과 무게는 사도들 중 단연 최고였습니다. 여러분,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로 모두 피난을 갔는데, 왜 예루살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 교회에 대표적인 지도자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이고,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은 제자 요한입니다. 갈라디아서 2:9에 보면 ‘James, Peter, and John, who were known as pillars of the church(교회의 기둥으로 알려진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영향력 때문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쉽사리 예루살렘 교회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 중에 베드로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어 야고보가 베드로의 말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발언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와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신다(9절).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우리 사도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베드로는 교회에 들어온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신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모두 질 수 없었던 짐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10절) 베드로의 말을 듣고 그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잠잠해졌습니다(12절). 더 이상 어떤 반론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석을 깐다’ 혹은 ‘복선을 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 일들을 대비해서 미리 조금씩 힌트를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복선을 까는 데 천재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선교에 처음부터 마음이 열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몇 차례에 걸쳐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경험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경험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포석을 깔아 두신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보자기 환상(a vision of a large sheet)’과 이어지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Cornelius, a Roman centurion)의 집을 방문했던 일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내가 왜 이방 사람의 집을 방문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를 안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34) 이 모든 일들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깔아 놓으신 정교한 포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