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14/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6)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4) To Live As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마가복음 10:42-45
얼마 전에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가 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는가?”라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네로(54-68년), 도미티아누스(81-96년), 트라야누스(98-117년), 하드리아누스(117-138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3-211년), 막시미누스(235-238년), 데키우스(249-251년), 발레리아누스(253-260년), 이렇게 기독교는 로마에서 200년 넘게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는 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瞑想錄, Meditations)’을 남긴 황제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렇게 좋은 글을 쓴 지혜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잔인하게 크리스천들을 박해할 수 있을까요? 그는 크리스천들을 죽이고, 시체를 치우지 못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306-337년) 황제 때 와서 기독교를 공인(公認)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하게 된 것은 서기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379-395년) 황제 때입니다. 그의 이름에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저의 관심은 이렇게 200년이 넘게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어떻게 로마에서 인정을 받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연구가 있습니다. 로마의 다신론에 대한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자기 통치 기반으로 이용하려고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또 모진 박해 상황에서도 세력이 꺾이지 않았던 기독교에 대해 날로 세력이 쇠퇴해 가는 로마가 오히려 매력을 느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들 가운데 알란 클라이더(Alan Kreider, 1941-2017)라는 신학자의 주장이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로마가 기독교를 인정하게 된 배경에는 크리스천들의 사랑의 실천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그 당시 크리스천들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복음 전파가 행해지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호소력을 가지고 넓은 지역으로 전파된 것은 크리스천들의 삶의 모범과 사랑의 실천이 로마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이미 로마의 지배층 중에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로마 귀족들이 집에 하인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인 중에 크리스천들이 많았습니다. 귀족들은 크리스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파라볼라노이(παραβολάνοι)’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정신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로마서에 나오는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7-18, 21)” 이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사랑으로,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바로 ‘섬기기 위한 것(to serve others)’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자기 힘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높아지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높아지는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높아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정말 높아지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진정으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 ‘종’이라는 말은 ‘διάκονος(다이아코노스)’라는 말입니다. 영어로 ‘서번트(servant)’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첫째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δοῦλος(둘로스)’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어로 ‘슬레이브(slave)’라고 번역합니다. ‘서번트’ 보다는 ‘슬레이브’가 훨씬 더 의미가 강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모두 ‘종’으로 번역했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는 ‘다이아코노스’라는 말을 사용하셨고, 다른 하나는 ‘둘로스’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한동안 리더십에 대한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리더십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통적인 리더십 형태인데, 강력한 힘으로 조직을 끌고 가는 형태입니다. 둘째는, 민주적인 리더십입니다. 리더가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하지 않고, 조직원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조직원들의 의견들을 청취하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리더십 형태입니다. 셋째로, 앞의 두 가지 리더십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리더십이 있습니다. ‘섬기는 리더십(servant style leadership)’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리더십 형태입니다. 회사들이 뒤늦게 이런 리더십을 적용해 보려고 하지만 이게 잘 안 됩니다. 예수님에게서 리더십 형태만 배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알려면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의 리더십 형태만 배워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섬김의 삶은 필연적으로 자기 희생을 동반(同伴)합니다. 자기 희생이 없는 섬김에는 진정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책상에 앉아 머리 속으로 섬김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섬김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나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 놓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속물(代贖物)’이라는 말은 속죄를 받기 위해 대신 드리는 제물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랜섬(ransom)’이라고 합니다. ‘몸값’ 혹은 ‘보석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섬김에는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내놓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섬김과 겸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섬김이 있을 수 없고, 섬김이 없는 겸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자기의 권리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 목숨, 자기 생명이 소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내 생명에 대해서 누구도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놓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무도 나에게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No one can take my life from me. I sacrifice it voluntarily).” (요한복음 10:18) 내 스스로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으로써 겸손과 섬김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모두 닦아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13:12-17)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종들은 언제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주인이 볼 때만 열심히 일하는 척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게 주인을 섬기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 하듯이 열심히 일하십시오.” (골로새서 3:22-23)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옮겨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저는 그런 비판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에 대한 말씀을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실험실에서 이렇게 적용할 수 있다는 탁월한 예를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을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위선적으로 실천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이 볼 때만 하는 척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섬김의 삶은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요한복음 7:38 말씀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생수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섬김이 나를 통로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흘러 나가는 것이 우리의 겸손과 섬김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는 지금 이 질문을 여러분께 드리면서 이 질문에 응답하는 설교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Who am I)?”라는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누구인가?”하는 질문에 대답이 어렵고, 대답을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대답을 찾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을 하면서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반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함으로써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1세기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실천으로 로마 제국을 정복했습니다. 정말 이 사실이 믿어집니까? 우리 앞에 시작되고 있는 새로운 시대는 ‘호모 데우스(Home Deus)’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인간을 신의 위치에 올려 놓는 교만한 시대입니다. 앞으로 AI가 어떤 식으로 우리 삶에 관계하고,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할지 생각하면 두렵기까지 합니다. AI가 악마적인 힘을 가지고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호모 데우스’의 시대를 파멸과 불행해서 구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겸손과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시대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그 결과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1세기의 크리스천들이 그렇게 살아서 로마제국을 정복했고, 그렇게 살아서 사랑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살면 이 시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 때는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쓴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 이 책을 가지고 새벽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Is it excessive to say that rivers will flow out of one individual believer? Do you look at yourself and say, ‘But I don’t see the rivers?’ Through the history of God’s work you will usually find that He has started with the obscure, the unknown, the ignored, but those who have been steadfastly true to Jesus Christ(한 개인으로부터 강물이 흘러나온다고 말하는 것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나에게는 강물이 보이지도 않아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언제나 무명의 사람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무시를 당하는 사람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계속 충실한 사람들을 통하여 그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너무 작아 보이는 일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2/7/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5)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3) To Live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마태복음 5:1-12
마태복음 5-7장의 말씀을 학자들은 ‘산상설교(山上說敎, The Sermon on the mountain)’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산을 생각하면 떠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산은 거의 모두 높은 언덕(hills) 정도입니다. 갈릴리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물의 근원지인 ‘헐몬산(Mount Hermon, 2,814m)’을 제외하고는 높은 산이 없습니다. 헐몬산에는 평소에도 눈이 쌓여 있어 스키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산상설교’를 하신 산으로 알려진 산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 산의 이름이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있는 ‘축복산(The Mount of Beatitudes)’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입니다. 갈릴리 호수 면보다 약 200m 정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팔복을 말씀하신 것으로 보이는 자리에 지금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가 있습니다.
당시에 랍비들은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가다가 뭔가 할 말이 있으면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랍비 앞에 둘러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시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유명한 여덟 가지 축복의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The Beatitudes’라고 합니다. 이 여덟 가지 축복을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무슨 축복이란 말인가?” 이렇게 반문할 수 있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은 크리스천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을 읽을 때 특히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축복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축복은 하나 하나가 모두 크리스천의 삶에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일곱 번째 축복이 특히 마음에 들어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9절)
우리는 평화에 대한 이 축복의 말씀을 읽으면서 성 프랜시스가 쓴 기도문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이 기도문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 프랜시스(St. Francis, 1181-1226, 이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것(To follow the teachings of our Lord Jesus Christ and to walk in his footsteps)’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평생 그 목적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이 때 프란시스의 삶을 인도해 준 말씀이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마태복음 10:9)”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평화의 기도문을 쓰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프란시스의 방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프란시스에게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습니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더니, 이 나병에 걸린 사람이 하는 말이 지금 자기가 너무 추우니 당신의 알몸으로 나를 녹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는 입었던 옷을 벗고 자기의 체온으로 그 나병에 걸린 사람의 몸을 녹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프란시스가 일어나보니, 그 사람은 온 데 간 데가 없었습니다. 그가 왔다 간 흔적조차 없었습니다. 프란시스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때 그가 올렸던 기도가 바로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where there is injury, let me bring pardon;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Where there is discord, let me bring harmony.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Where there is error, let me bring truth.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Where there is doubt, let me bring faith.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where there is despair, let me bring hope;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where there is darkness, let me bring light;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where there is sadness, let me bring joy.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Lord, grant that I may seek rather to comfort than to be comforted;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to understand, than to be understood;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to love than to be loved.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and it is in dying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성 프란시스는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인데, 그 때 벌써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이면, 우리나라 역사로 치면 어느 때쯤일까요? 대략 몽골이 우리나라를 침입했을 때쯤 됩니다. 그 때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보려고 했던 때입니다. 동방의 한 나라가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지구의 한편에서는 프란시스라는 수도사가 하나님께 평화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를 단순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처럼 살아보려고 했던 수도사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프란시스 수도회(Franciscans)를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알아보았더니.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PP. III, 1160-1216)가 프란시스를 인정했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시스의 알현을 받은 교황은 프란시스가 제출한 수도회의 회칙과 생활 양식을 읽어보고는 좋긴 하지만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면서 인준을 유보(留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황은 이내 생각을 바꿨습니다. 프란시스가 그 당시 권력 지향적이고 부유해진 교회를 쇄신할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교황은 프란시스의 수도회가 앞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그 규모가 더 커지고 발전하기를 바란다는 축복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만일 프란시스가 교황의 인정을 받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프란시스는 이단으로 몰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둘째로, 특이한 것은 프란시스가 이집트의 다미에타(Damietta)로 가서, 알카밀(al-Kamel)이라는 술탄(Sultan)을 만났습니다. 그때는 그곳이 사라센 제국의 영토였습니다. 그 때가 1219년, 프란시스의 나이 38살 때였습니다. 그 때 십자군과 사라센 군대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4주 동안 휴전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 프란시스가 그의 동료 수사 한 사람을 데리고 사라센 진영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두 사람은 곧 사라센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술탄 앞으로 끌려가서 며칠 동안 그의 막사에서 지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프란시스와 술탄과의 만남은 당시 십자군의 기록에 나온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만 술탄은 프란시스를 시종일관 친절하게 대접하였고,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고 십자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프란시스는 평화에 대해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실천하기 위한 행동의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곧 ‘평화의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날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자손도 아니며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았던 여러분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평안을 누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마치 둘 사이에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심으로써 그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 놓던 율법을 없애심으로, 이 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새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이 둘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찾아오셔서, 평화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에베소서 2:12-17) 마음에 들어오는 두 개의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을 벽을 허물고 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16절, 15절)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평화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17절)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평화가 없는 곳에, 다툼과 반목과 미움과 싸움이 있는 곳에,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오는 새 시대에 우리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새 시대 속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이 해야 할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저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을 고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소금과 빛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오는 시대를 위해서 우리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하는 결정들이 다음 시대를 결정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미래를 내다보는 책임 있는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舊) 시대가 퇴진(退陣)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대립과 갈등이 있겠습니까? 지금 평상시 같으면 생각하지도 못할 단기적인 조치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실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끝이 나도 지금의 조치들을 계속 가져가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전제주의적 감시냐? 아니면 시민 자율권이냐?”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어느 한 편을 결정해야 합니다. 과학의 발달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시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한 나라들이 있습니다. 중국, 이스라엘, 북한 같은 나라들입니다. 그러나, 한국, 대만, 싱가폴 등은 광범위한 검사와 정보 공유, 그리고 국가와 시민들 사이의 신뢰와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서 코로나바이러스에 대처한 대표적인 나라들입니다. “국수주의적인 고립이냐? 아니면 국제적인 연대냐?” “독재적 리더십이냐? 아니면 민주적 리더십이냐?” 이런 중요한 문제들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메시지를 세상을 향해 던져야 하겠습니까?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각자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평화를 창조하는, ‘Peace Makers’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은 국론 분열이 매우 심각합니다. 촛불 세력과 태극기 부대, 두 세력이 존재합니다. 국제적으로는 한국의 ‘K방역’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정부가 방역에 실패했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 국민의 절반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국론 분열의 현실에 대하여 아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두 입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마저 양 진영으로 갈라진 것이 아닌가 우려가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크리스천들이 나서서 국론을 하나로 만드는 화해와 평화의 창조자들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교회들이 근거 없는 가짜 뉴스에 휘둘리고 있습니다.
한자에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라고 말이 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는 뜻입니다. 현실이 암울할수록 교회와 크리스천들의 선한 영향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데, 이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 여론 조사에서는 조사에 참가한 76%의 사람들이 더 이상 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800년 전에 살았던 성 프란시스는 나를 주님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해 달라고, ‘미움’과 ‘다툼’과 ‘분열’과 ‘의심’과 ‘절망’과 ‘어둠’이 있는 곳에 평화를 창조하는 도구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창조하는 도구’로 살기를 원했던 진정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1/31/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2) To Live As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마태복음 5:13-16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계속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만큼 지금 우리는 엄청난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대로 지금은 밤이 깊고 ‘새 시대’의 새벽이 동터오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때입니다(로마서 13:12). 바울은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 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로마서 13:14).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세상을 ‘새 시대’라고 보았습니다. 이 ‘새 시대’를 살아야 할 사람들은 ‘새 시대’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빛의 갑옷을 입는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잘못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마치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 입듯이, ‘새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어둠의 생활을 청산하고 빛으로 걸어 나오는 삶이고, 질서 없고 문란했던 생활을 청산하고 단정하고 규모 있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요구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5장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이 제자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소금과 빛을 일종의 ‘수사적(修辭的)인 표현(a figure of speech)’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금과 빛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상징성을 제자들의 삶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알려진 대로 예수님은 언어의 천재라고 할 만큼 뛰어난 수사법을 구사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비유(比喩, parables)’는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장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 1921-2011, 영국)라는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should not ask ‘What is wrong with the world?’ for that diagnosis has already given. Rather we should ask, ‘What has happened to salt and light(우리는 이미 진단이 내려진 ‘이 세상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신 우리는 ‘소금과 빛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하고 물어야 합니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한 번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유체이탈식(幽體離脫式) 화법을 사용해서, 나는 쏙 빼놓고 세상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분석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 들어가 세상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은 그것이 아니잖습니까? 세상에 대한 분석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진단이 이미 내려진 마당에, 더 이상 세상에 대해서 분석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석해야 할 것은 왜 크리스천들이,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하는지, 도대체 크리스천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분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도대체 크리스천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소금으로서, 빛으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일까요? 이 엄청난 질문에 대한 답을 한 두마디로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를 반성해 보면 그 이유를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이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파악하는 노력과 반성이 부족했습니다. 많은 경우에 교회를 나가는 크리스천들은 자기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문제가 된 교회와 선교 단체들을 보십시오.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할 때 그 중심에 신천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중국에서 감염균을 가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방역에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방역 시스템을 무너뜨린 중심에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에 대한 경고가 내려진 상태에서도 광화문 광장에 수십만이 모여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집회를 법원에서 허가를 내준 것입니다. 많은 감염자가 나오고 방역 당국의 지시를 거부했던 사랑제일교회는 교회가 폐쇄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BTJ’라는 선교 센터가 당국의 권고를 무시하고 몰래 대규모 모임을 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1,000명이 모여 1박 2일동안 선교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도시락도 나누어 먹고요. 하지만 여기서 감염자가 무더기로 나와 방역 시스템을 무너뜨리더니, 또 다시 ‘TCS 국제학교’ ‘IEM 국제학교’ 등에서 무더기로 감염자들이 나왔습니다. 모두 개신교 선교 단체들이 운영하는 비인가 학교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선교 훈련을 받았다고 하잖아요? 왜 이런 시국에 선교 훈련을 받습니까?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훈련을 받은 것 입니다. 이 사람들이 하는 주장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종교적인 도그마(religious dogma)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 자신들이 죄인들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소금과 빛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행위로 말미암아 감염자들이 속출하는데도 행선지를 감추고, 전화를 받지 않고, 방역 당국과 연락을 끊고, 방역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정부가 교회를 핍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들의 그런 행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교회에 대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기독교 단체들이 사과 성명을 냈습니다. “이웃 생명의 안전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신앙 양태만 고집하는 교회를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제자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 섬처럼 떠도는 교회는 선교적 존재 가치를 상실한 교회로 더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다.” 과연 기독교 단체들이 낸 사과 성명서 하나로 일부 잘못된 교회들의 행동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이 도표를 한번 보십시오. 왼쪽 파란 원에는 ‘소금’이라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오른쪽 갈색으로 칠한 원에는 ‘빛’이라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두 원이 겹쳐지는 곳에 “이와 같이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16절)”는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서 소금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선한 삶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Salt and light speak of the influence Christians can exercise for good in society(소금과 빛은 크리스천이 사회에서 선한 활동을 해야 한다는 영향력을 말합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일은 우리의 의도와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만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의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시면서 제자들을 소금에 비유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마가복음 9:50 말씀을 한번 보세요.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서로가 소금을 지니고 화목하게 지내라.”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for seasoning. But if it loses its flavor, how do you make it salty again? You must have the qualities of salt among yourselves and live in peace with each other(소금은 맛을 내는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어떻게 그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너희들은 서로 소금의 질을 유지하고 서로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또 다른 번역성경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and useful; but if salt has lost its saltiness (purpose), how will you make it salty? Have salt within yourselves continually, and be at peace with one another(소금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소금이 그의 짠맛, 목적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계속해서 소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 (Amplified Bible)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소금의 질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이라도 소금의 질을 유지하지 않으면 제자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소금에 대한 구약성경의 배경을 알아보는 것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배경을 구약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8:19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예물로 드리는 것을 나 여호와가 너와 네 아들들과 딸들에게 주리니, 그것은 영원히 너희의 몫이다. 이것은 너와 네 자손을 위해 여호와 앞에서 대대로 지켜야 할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It is a covenant of salt forever before the LORD with you).”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는 것은 소금이 변질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변하지 않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 하신 약속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는 세상 속에서 나의 제자로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나에 대한 충성심(allegiance)을 계속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들의 정체성이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소금을 제자직과 연결시켜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만일 그 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다시 짠맛을 내겠느냐?” (누가복음 13:34-35)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것은 곧 소금으로서 맛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도표 왼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Covenant obedience to the whole law as Jesus preached it(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체 율법에 대한 언약적인 순종)’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약적인 순종. 이것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실패하고,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패한 것은 내가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체성에 대한 생각과 반성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도 ‘BTJ’라는 선교 단체를 통해 선교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어둠 속에서는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둠에 대한 영적인 의미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빛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좀 전에 보았던 도표 오른쪽 원에 ‘The personal character of the beatitudes shaped in the light of the cross(십자가의 빛에서 형성된 축복에 대한 개인적인 성격)’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이 말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축복된 삶을 크리스천 각자 각자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세상에 동화(同化)되어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말았는데 이에 대한 반성 없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매달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해 온 선교사역을 보면 모두 그렇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일부 성과를 거둔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맛을 잃은 소금은 밖에 버려지게 되고, 사람들이 밟고 다닌다(13절)고 하셨는데, 지금의 상황이 꼭 그렇습니다.
문제는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시대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명사적 대전환을 가져오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큰 교회, 많은 교인수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선교를 하고 있는지, 교회의 예산이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한 시대가 아닙니다. 교회들이 정말 정신을 차려서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양육해야 하고,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성급하게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썩지 않도록, 타락하지 않도록, 부패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소금으로서 맛을 내는 사람이 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크리스천이 어두운 세상을 밝혀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을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는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세상에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올바로 보여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대답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We are not called to shine our own light, we are called to reflect His(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빛을 비추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반사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다).”
1/24/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3)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1) To Live As Influential People For Good
로마서 12:1-2
여러분, 이런 노래 가사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강산에라는 가수가 부른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의 가사입니다.
연어는 신기하게도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산란하기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를 ‘회귀본능(回歸本能)’이라고 합니다. 연어를 양식장에서 양식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연어는 다른 물고기들과는 달리 평소에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물 위를 뛰어오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저 연어가 저렇게 물 위를 뛰어오르는지 알아봤더니 연어의 몸에 ‘sea lice(바다 이)’가 기생하고 있는데, 이게 연어를 고통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바다 이’를 몸에서 떼어내려고 물 위를 뛰어오른답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아니, 그 말도 일리는 있지만, 연어가 저렇게 평소에도 물 위를 뛰어오르는 연습을 하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면서 폭포를 거슬러올라갈 수 있을 만큼 꼬리의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어는 강에서 태어나 약 6개월 정도를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그 때 고향의 물맛과 냄새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산란기가 되어 고향을 찾아올 때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물맛과 냄새의 기억을 되살려 돌아온다고 합니다. 물론 다른 학설도 있습니다. 지구의 미세한 자기장(磁氣場)을 감지하여 되돌아온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이 학설은 연어의 몸 속에 자기를 띤 물질이 발견되기 때문에 나온 학설이라고 합니다. 연어들이 이동한 경로 주변의 자기장의 세기가 연어들이 태어난 강의 자기장 세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연어들이 고향의 자기장 세기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이와 유사한 곳을 찾아 거슬러 간다는 것입니다.
암컷 연어는 산란 시기인 9-11월이 되면 더 이상 먹이를 먹지 않고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여정(旅程)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가는 도중에 온갖 장애물들을 만나게 되고, 때로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면서 온갖 위험을 만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고향의 강물로 돌아온 연어들은 오느라고 너무 힘들어서 살도 빠지고, 몸에는 상처투성이가 된다고 합니다. 한번 이 사진을 보시지요. 이런 위험을 뚫고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강으로 돌아온 암컷 연어는 알을 낳고, 수컷 연어는 수정을 합니다. 이렇게 산란을 마치면 연어는 일생을 마치고 죽는다고 합니다.
연어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2절)’라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흐름’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도 트래픽 ‘흐름’이 있습니다. 이 ‘흐름’을 따라 운전을 해야 안전합니다. 세상도 ‘흐름’을 따라 살면 안전합니다. 영어로 ‘flow’ ‘stream’ ‘current’라는 단어들이 모두 강물의 ‘흐름’과 관계된 단어들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customs(풍습)’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유행(fashion)’이라는 말입니다. 그 때 그 때마다 유행의 트렌드가 있습니다. 이 트렌드를 따라하면 안전합니다.
그런데,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을 보면,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지 말고 시대를 거슬러 살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연어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강을 찾아 거슬러올라가듯이, 크리스천의 삶은 때로는 시대를 거슬러올라가는 용기 있는 삶이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시대의 흐름이 항상 하나님께 원하시는 방향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이후의 시대에,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입니다. ‘호모 데우스(Homo Deus)’가 된 인간이 잘못하면 ‘악마적인 힘’을 가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미 전문가들은 수많은 문제들이 나올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실직(失職)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떤 전문가는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없어질 직업도 있겠지만 새로 생기는 직업도 있을 테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하는데요. 과연 걱정할 필요가 없을까요? 그리고, AI가 생활 속에 깊이 들어오게 되면 필연적으로 인간관계가 파괴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을 상대라는 대신 AI를 상대하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올 비인간화(非人間化) 문제와 윤리적인 문제들이 심각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누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가는 문은 넓고 그 길이 쉬워, 많은 사람들이 그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문은 작고 그 길이 매우 좁아, 그 곳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태복음 7:13-14)”고 말씀하셨을 때, 많은 사람이 다니는 넓고 쉬운 길이 무슨 길이겠습니까? 시대의 흐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말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좁은 길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생각 없이 살지 말고, 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 아닙니까? 시대가 흘러가는 대로 살지 말고 시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그 시대를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라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신학대학를 졸업하고, 앞으로의 생각도 정리할 겸 강원도 황지에 있는 예수원에 들어가서 20일 정도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낮에는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같이 모여 중보기도를 하고, 남는 시간에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때 제가 공동번역 성경을 들고 들어갔었거든요? 그 때 읽었던 성경 말씀 중에 예레미야 15:19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고 낙심해 있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면 나는 너를 나의 대변자로 세우겠다. 백성이 너에게 돌아와야지 네가 백성에게 돌아가서는 안 된다(If you return to me, I will restore you so you can continue to serve me. If you speak good words rather than worthless ones, you will be my spokesman. You must influence them; do not let them influence you!).” 저는 그 때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개역성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말씀의 명료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서 앞으로 목회자로 살아갈 저의 삶에 대한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 책임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사는 크리스천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올라가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돌아오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주어집니다.
이런 시대적인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오늘 읽은 로마서 본문 말씀이 영감(靈感)을 줍니다. 이것이 시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성경에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요.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서 당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키시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때문입니다.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과 같은 창조입니다. 시편 51편에 있는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Create in me a pure heart, O God, and renew a steadfast spirit within me.”(NIV) 이 말씀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말씀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대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듯이 내 안에 깨끗하고 순순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시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아무리 새롭게 되려고 해도 새로워질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고백을 한 시편 아닙니까?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꼭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까?” 바울은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2절) 구약 예레미야에 있는 말씀입니다. “만물보다 악하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아무도 그 속을 알 수가 없다(The human heart is the most deceitful of all things, and desperately wicked. Who really knows how bad it is?).”(예레미야 17:9) 네 속에 있는 네 마음은 다른 무엇들보다 더 썩었다는 것 아닙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옛 사람(the old sinful nature)’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22-24)”고 나와 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옛 사람’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온전히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새 사람’이 되는 일에 전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신기한 것은 성경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인간의 선함을 믿을 수가 없기 됩니다. 인간의 선함 속에는 항상 악한 모습들이 감춰 있고, 이기적인 모습들이 숨겨 있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해야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질 수 있습니다.
끝으로, 바울은 ‘영적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새 사람’이 사는 방식이 곧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영적인 예배’는 ‘새 사람’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동물을 잡아 피를 하나님께 바치거나, 동물을 불에 태워 그 연기를 하나님께 바치는 종교적인 행위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자가 자기의 진심을 드리지 않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offer) 예배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살아 있는 거룩한 제물(a living and holy sacrifice)’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이 모습 이대로 저를 받아주십시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지금 있는 모습 그래도 우리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가 아니라 변화된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변화된 우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어서 흠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여져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긴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로마서 15:16-17) NLT 성경에 이 말씀이 “I bring you the Good News so that I might present you as an acceptable offering to God, made holy by the Holy Spirit”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 그렇다면 ‘새 사람’이 되는 일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우리 속에는 이미 하나님을 생각하는 DNA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하나님은 모든 것이 그의 시간에 아름다워지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영원을 심어 놓았습니다).”(전도서 3:11) ‘영원을 심어 놓았다(has planted or has set eternity)’는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마치 연어가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강의 물맛과 냄새를 기억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오듯이,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새 사람’이 되면 우리는 잊어버렸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고, 변화를 받아 ‘새 사람’이 되어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 때로는 세상을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 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예배자’입니다. 특히 팬데믹 이후를 살아갈 크리스천은 ‘영적 예배자’로 살아야 합니다. 매일의 삶이 곧 예배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영적인 예배의 장소입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많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1/17/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새로운 사람으로 To Live As A New Person
고린도후서 5: 14-20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쪽에서부터 구름이 이는 것을 볼 때, 비가 곧 오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너희가 남풍이 부는 것을 보고 날이 덥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누가복음 12:54-56에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왜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본래 ‘위선자’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대에 올라간 연극 배우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대로 연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날씨를 분별하는 것처럼 너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을 텐데, 마치 시대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는 위기(危機)의 시대였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괜찮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조국이 멸망하는,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여 있는 때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를 몸으로 느끼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왜 날씨는 잘 분별하면서 위기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는 보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이 시대를 올바로 분별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누구인지 올바로 파악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AI와 테크놀로지가 발달해도 그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AI와 테크놀로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AI와 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이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하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발 하라리 같은 무신론자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변화의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코로나 이후의 시대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교회들이 구습(舊習)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새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시대를 책임질 수 없는 낙오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창조’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왜 여기서 ‘새로운 사람’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살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나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그 시대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엄청난 계획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제 역사는 예수님 이전의 역사와 예수님 이후의 역사로 구분될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중대한 질문 앞에서 바울은 ‘새로운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우리는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이후의 시대는 문명사적(文明史的)인 전환(轉換)을 가져오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이 변화의 시대를 잘 이해한 사람은 이 시대를 책임 있게,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청년들은 시대를 진단하는 전문가들의 책들을 사서 읽고, 그들이 분석하는 말들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2,000년 전에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inspiration)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말씀과 다른 이유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세상은 바뀌어도 하나님(예수님)은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올 미래에도 똑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세상에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훈련을 꾸준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의 순서와 관계없이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관점(point of view)을 가진 사람입니다(16절).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사물을 보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거기에 대처해 왔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관점을 버리고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점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하면 새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paradigm shift(패러다임 전환)’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틀(a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마태복음 9:17)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를 새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엄청난 변화와 팽창력을 가진 시대를 마주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낡은 주머니에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새 주머니에 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인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변화의 시대를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시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전문가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대를 방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새로운 사람’은 이전의 것들을 완전히 버리는 사람입니다(17절).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알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새로운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이전의 것들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 사람입니다. ‘A new person is in him the old life has gone and a new life has begun(새로운 사람은 그의 안에서 예전의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asy-to-Read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hen anyone is in Christ, it is a whole new world. The old things are gone; suddenly, everything is new(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갑자기 이전의 것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아주 멋진 번역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새로워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얼마 안 가서 우리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예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옛날 중국 은(殷)나라의 탕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수 대야에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고 새겨 놓고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탕 임금은 그렇게 해서 30년 재위 기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만, 그렇게 해서 정말 얼마나 인간이 새로워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목욕을 하고 세수를 하면 몸은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몸이 깨끗해지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거든요.
성경은 새로워지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다(17절)”고 합니다. 우리 속에는 새롭게 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힘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가 진실을 말한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are born again①, you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①Or born from above).” (요한복음 3:3)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born again’이라는 말에 ‘born from above’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새로워지는 일에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believe in Jesus)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belong to Jesus)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under the reign of Jesus)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실천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안전한지, 얼마나 만족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본회퍼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를 따르라는 말은 부름을 받았으니 지금까지의 삶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낡은 것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에서 떠나 불안정한 생활로(사실은 절대적으로 안정된 삶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전망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생활(실제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사실은 유일하게 예측이 가능한) 생활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성경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 본회퍼의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살아봐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영어 표현에 ‘take a risk’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지요? 믿음생활은 위험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람’은 삶의 메시지가 있는 사람입니다(18-20절).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된 사람에게 ‘wonderful message’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오라(Come back to God)(20절)”는 화목의 메시지입니다. ‘화목(和睦))’이라는 말은 ‘reconciliation’이란 말입니다. ‘conciliation’이라는 말에 이미 ‘화목’이라는 뜻이거든요? 앞에 ‘re-‘가 붙으면 ‘다시 화목하라(to make friendly again)’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원래 관계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새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사명(使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