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2020 | In Times Of Trouble 26

주님, 저는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Lord, I Am Deeply Troubled

시편 116:1-14

오늘 설교 말씀은 제목부터 우리 눈길을 끌지요? “주님, 저는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억압을 받기도 하고, 무시를 받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인생은 끝이 났구나!” 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시편 116편을 쓴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자 혹은 사미스트라고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 116편을 쓴 사미스트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의 밧줄이 나를 옭아맸으며, 무덤의 고통이 나를 덮쳤습니다. 나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억눌려 있었습니다.” (3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eath wrapped its ropes around me; the terrors of the grave① overtook me. I saw only trouble and sorrow. /①Hebrew of Sheol “죽음의 밧줄이 나를 칭칭 감고 있었고, 무덤의 공포가 나를 엄습했습니다. 나는 완전히 고통과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주 시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사미스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Then I called on the name of the Lord. Please, Lord, save me!”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습니까? 한 밤 중에 괴한이 집에 침입했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일어나 급히 911에 전화를 거는 순간 괴한이 전화기를 확 나꿔챕니다. 전화기에서는 “여보세요,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call on’이라는 말이 ‘부르다’라는 뜻이 있지만 동시에 누구에게 ‘전화를 걸다’라는 뜻도 있잖아요? 이 사미스트는 다급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대부분의 시편들은 인간의 아픔과 절망을 주제로 씌어졌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귀족에게 고용되어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이라는 명화를 남겼습니다. 이 그림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 성당 (Santa Maria delle Grazie)’에 부속 수도원이 있는데, 이 수도원의 식당 입구에 그린 그림입니다. 다빈치는 작품 의뢰를 받아 그 그림을 벽에 그린 것입니다. 가로 9.1m, 세로 4.2m의 큰 그림입니다. 작곡자 헨델 역시 완전히 폐인이 되어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지내던 때에 ‘메시아’를 작곡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헨델은 다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만종(晩種, The Evening Prayer)’이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얼마나 경제적으로 힘든 생활을 했습니까? 밀레는 그 때 물감을 살 돈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가난과 역경이 명화를 만들었고, 인류가 길이 보존해야 할 유산(遺産)이 되었습니다. 시편116편도 사미스트가 처했던 고난과 역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전도서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전부 (the whole scope of life)를 알 수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전도서 3:11). 모두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시편 저자들이 만났던 고난과 역경들이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요? 아니요.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겪는 고난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창조의 힘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 함께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삶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28). 이런 말씀을 붙잡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사람들은 크리스천들 밖에 없습니다. 

다시 오늘 시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자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사미스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 (God is our refuge)’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위급한 상황 속에서 보통 사람들 입에서는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입에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도대체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었길래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불렀을까요?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올바른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는 순진한 자들을 보호하시며 내가 큰 위험에 빠졌을 때,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How kind the Lord is! How good he is! So merciful, this God of ours! The Lord protects those of childlike faith; I was facing death, and he saved me).” (5-6절)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납니다. 전교인이 야외예배를 갔는데,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비가 올 것 같기도 하고요.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해서 쉘터 (shelter)를 예약하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이미 예약을 하는 바람에 예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때도 야외예배 장소가 ‘합킨톤 팍 (Hopkinton Park)’이었는데, 우리가 늘 모이는 곳이 아니라 사방이 막혀 있는 아늑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pavilion 형태의 shelter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미국 교회가 그 shelter를 예약을 했는지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비가 막 쏟아집니다. 우리 교인들은 비를 피해야 하는데 갈 곳이 없으니까 shelter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shelter는 이미 미국교회 교인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그 shelter가 두 교회 교인들이 비를 피해 점심을 먹기에는 비좁았습니다. 게다가 우리 교회는 예약도 하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 교회 교인들이 우리를 위해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점심을 다 먹었다고 하면서 자리를 양보하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How kind the Lord is! How good he is”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쉘터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급하고 위태할 때 그리로 달려가면 언제나 문을 열어 주시고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하여 사미스트는 “우리 주님은 얼마나 친절하고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은 친절하고, 선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compassion’을 가진 분, 순진한 사람들을 보호하시고,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순진한 사람들’이란 말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the simple’ ‘the simplehearted’ ‘the helpless (힘 없는 사람들)’ ‘the ordinary people (보통 사람들)’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those of childlike faith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을 때 항상 자기를 도와주셨던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다시 그로하여금 위태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크고 작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그 경험들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을 찾게 하고 있습니까? 한번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갔었는데, 그 집에 키가 큰 낯선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 저 아이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아이입니다” 하면서 지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제가 “그런데, 집사님, 저 아들을 교회에서 못 본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예, 지금은 교회 안 갑니다” 이 말을 듣고 제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셨던 경험을 가진 사람 중에도 지금은 믿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생활에서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 경험이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발전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축복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굳게 믿고 말했습니다. ‘나는 큰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또 나는 실망 가운데서 여호와께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10-11절) “I believed in you, so I said, ‘I am deeply troubled, Lord.’ In my anxiety I cried out to you, ‘These people are all liars!’” 이 말씀은 아주 독특합니다. 아마 성경 어디에서도 이런 말씀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이 사미스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시편 말씀에 “내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좀 달라요. “‘주님, 저는 지금 큰 고통 중에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제가 이렇게 부르짖을 때는 ‘I believed in you, so I said (내가 주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내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고통 중에 있지만, 이번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을 믿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뒤에 “이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장이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지요? 자기 주변에 좋은 말을 해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이 사람들의 말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중에도 (in my anxiety)’ 이 사미스트는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찬양 가사가 생각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도다/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오직 주만이 나의을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시편 62편 다윗이 쓴 시편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 찬양 좋아하고 많이들 불렀는데요. 부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He alone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where I will not be shaken (하나님만이 그 안에서 내가 흔들리지 않을 나의 바위, 나의 구원, 나의 산성입니다).” 

윌리엄 커싱 (William Orcutt Cushing, 1823-1902, 미국)이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설교를 잘해서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대가 나빠지게 되고, 급기야 목소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가 앓고 있던 병은 ‘creeping paralysis’라는 병이었는데, 이 병은 목소리를 잃게 되는 병이었습니다. 설교자에게 성대는 생명과 같기 때문에, 그 목사님은 목회를 그만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이 목사님은 눈물과 절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찬양 시로 쓰게 됩니다. 그 찬송이 바로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입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밤 깊고 비바람 몰아쳐도/아버지께서 날 지켜 주시니/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주 날개 밑 평안하다/그 사랑 끊을 자 뉘뇨/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영원히 거기서 살리” 비록 이 목사님의 목소리는 다시 소생되지 않았지만, 그는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마음에 치유를 받았고, 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찬양 시에 Ira D. Sankey (1840-1908, 미국)라는 유명한 작곡자가 곡을 붙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찬송가가 되었습니다. 커싱 목사님은 평생 300개의 찬양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많이 부르는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545장)’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564장)’ 이런 찬송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마지막으로 사미스트가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는 내 영혼을 죽음에서 구해 내셨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셨으며, 나의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8절)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큰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9/27/2020 | In Times Of Trouble 25

모든 것을 주께 맡기라 Commit Everything You Do To The LORD

시편 37:3-7

지난 주일 설교에서 시편 119편이 길이와, 구성과 형식에 있어서 아주 독특한 시편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학적인 맥락에서 읽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자음이 모두 22개인데, 시편 119편은 8절씩 모두 22개의 연 (stanza)으로 되어 있고, 각 연의 8절이 모두 같은 히브리어 자음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시편 37편도 그렇습니다. 각 절이 두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은데, 그 문장이 히브리어 자음 순서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3-7절 말씀은 히브리서 두 번째 자음 베트과 세 번째 자음 기멜, 그리고 네 번째 자음 달렛으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그 저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시편 속에 저자의 삶과, 믿음과 그가 경험했던 수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시편 37편의 저자를 다윗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어떤 이야기가 이 시편 속에 들어 있을까요? 다윗이 자기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편 속에 그의 주변에 있었던 악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악한 사람들이 성공해서 큰소리 치고 떵떵거리며 잘 살지만,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마음 상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못된 짓만 일삼는 것들이 잘산다고 걱정하지 말아라. 저 나쁜 짓 하는 것들이 하는 일마다 잘된다고 부러워하지 말아라.” (1-2절) 또 이런 말도 합니다. “나도 한 때 청년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나이 많은 원로가 되었다네. 나는 지금껏 살면서 의인이 버림받는 것이나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네 (Once I was young, and now I am old. Yet I have never seen the godly abandoned or their children begging for bread).” (25절)

성서 신학자들은 바로 이 25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시편 37편은 다윗의 생애 중에 어느 특정한 사건을 배경으로 했다기보다 다윗이 나이 많은 노인이 되어서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고 좌절하는 청년들에게 충고를 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도 청년들이 주장하는 것이 ‘공정’과 ‘정의’입니다. 자기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잘 둔 사람들은 척척 취직이 됩니다. 누구나 다 가야하는 군대로 부모를 잘 둔 사람은 면제되거나 쉽게 군대 생활을 합니다. 누구는 어렵게 대학을 갔는데, 부모를 잘 둔 사람들은 쉽게 스펙을 쌓고 좋은 대학에 들어갑니다. 충분히 청년들이 분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년들의 이런 분노의 심리를 정치인들이 교묘하게 이용해서 큰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아마 다윗 시대에도 이런 ‘불공정’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돈 벌고, 쉽게 성공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에서 다윗은 젊은 청년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네가 사회의 ‘불공정’ 문제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나 같으면 오히려 주님의 ‘공정하심’을 믿고, 성실하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겠다.”  정말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인데, 정작 이 말씀을 들어야 할 청년들은 교회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윗이 쓴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가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세 가지 메시지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다윗은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합니다 (3절).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Take delight in the Lord” 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번역된 성경도 있습니다. “Make God the utmost delight and pleasure of your life, and he will provide for you what you desire the most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삼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가장 바라는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The Passion Translation) 

저는 지난 몇 번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기뻐해야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사람과 가까워지고 싶으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내가 이 사람을 가까이해야 하는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는지 판단이 섭니다. 그 다음으로, 이 사람과 어떻게 하든지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같이 만나서 커피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하나님은 누구인지 기본적인 내용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보세요. “Before daybreak the next morning, Jesus got up and went out to an isolated place to pray (다음날,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아침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35)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또 하나, 우리는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디모데후서 3:16) ESV (English Standard Version) 성경은 이 말씀을 “All Scripture is breathed out by God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 쉬신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의 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성경의 말씀들이 새롭게 전과는 달리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금방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으니까, 그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선하고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아니까, 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니까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Even though you do not believe me, you should at least believe my deeds).” (요한복음 10:38, Good News Translation) 저도 주님의 심정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저를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를 싫어하고 미워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은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하지 못하면 우리 믿음생활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나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계속 교회에 나오고 믿음생활 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 사람에게 ‘your heart's desires (마음의 소원) (4절)’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Desire에는 good desire가 있고, evil desire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good desire (좋은 소원)’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좋은 소원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우리 FKCC 교우들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소원들’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청년들 중에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소원’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합니다 (5절). 이 말씀을 다양한 번역 성경에서 찾아보았습니다. “Commit everything you do to the Lord, and he will help you.” (NLT) “Commit your way to the LORD, And He shall bring it to pass (여러분의 길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가 그것을 통과시켜 주실 것입니다).” (NKJV) “Commit your future to the LORD! And he will act on your behalf (여러분의 미래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대신해서 일하실 것입니다).” (New English Translation)

여러분, 이 말씀이 믿어집니까? 어떤 사람은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이렇게 반문하겠습니다. “당신은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의 길을 온전하게 하나님께 맡긴 적이 있습니까?” 맡긴 적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길을 하나님께 맡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commit’라는 말은 무엇을 믿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commit’라는 말 대신 ‘entrust’라는 말을 쓸 수도 있는데, 이 말도 믿고 맡긴다는 뜻입니다. 한 번도 자기 인생을 하나님께 믿고 맡겨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말씀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의 눈 (human point of view)’으로 보면 이 말씀은 말이 안 됩니다. 성경은 ‘human point of view’로 기록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 (God’s point of view)’ 혹은 ‘믿음의 눈 (the eyes of faith)’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셋째로,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e still in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wait patiently for him to act (주님 앞에서 잠잠히 주님이 일하시기를 참고 기다리라).” (7절)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나의 길을 온전히 맡기고, 이제는 조용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Wait patiently for him to act”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는 시편 37편을 읽으면서 “성도의 인내가 여기에 있다 (Here is the perseverance of the saints) I요한계시록 14:12)!”고 말했다고 합니다. ‘perseverance’라는 말은 단순히 ‘patient’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서도 결코 원래의 뜻을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을 말합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을 보셨습니까? 이 책 원래 제목은 ‘Don't Eat the Marshmallow- Yet! The Secret to Sweet Success in Work and Life’라는 긴 제목입니다. 우리 말로는 ‘마시멜로 이야기’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은 성공한 대기업의 사장 조나단이 그의 운전 기사 찰리에게 성공의 법칙을 알려주고 찰리는 그 내용을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4살 때 조나단은 스탠포드 대학 석사과정에 있던 아버지의 마시멜로 실험에 참가합니다. 아버지는 실험에 참가한 네 살배기 아이들에게 달콤한 마시멜로를 하나씩 나누어주면서 15분 간 마시멜로 과자를 먹지 않고 참으면, 상으로 한 개를 더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결과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 중 3분의 1은 15분을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었고, 3분의 2는 끝까지 기다렸다가 하나씩을 더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사실은 그로부터 14년 후에 당시 마시멜로의 유혹을 참아낸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아는 정신력과 함께 사회성이 뛰어난 청소년들로 성장해 있었고, 참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어버린 아이들은 쉽게 짜증을 내고, 사소한 일에도 곧잘 싸움에 말려드는 등 성공한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마시멜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3-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인내는 강인한 인품을 만들어낸다).” 또 Good News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Endurance brings God's approval (인내는 하나님의 승인을 받게한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삶이 지루하고, 짜증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인내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품으로 연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모두 맡기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리십시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9/20/2020 | In Times Of Trouble 24

고난 받는 것이 나에게는 유익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시편 119:65-72

오늘 본문 말씀은 시편 119:65-72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은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시편입니다. 우선 길이가 무척 깁니다. 무려 176절까지 있습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저자는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실은 그가 ‘율법 (law)’이라는 말을 각각 다른 말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율례 (statutes)’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말씀 (word)’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법령 (decree)’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명령 (commands)’이라고 말하고, 어떤 때는 ‘계명 (commandments)’이라고 말하고, 그 외에도 ‘증거 (statutes)’ ‘규례 (regulations)’ ‘교훈 (teachings)’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편 119편은 형식적인 면에서 볼 때 아주 독특합니다. 히브리어의 자음 (consonants)은 모두 22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자음 하나마다 8절씩 22개 연 (stanza)으로 시편을 구성했습니다. 그리고 각 ‘연’의 8절은 모두 같은 자음으로 시작하도록 이 시편을 구성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편 119편은 아주 독특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히브리어 9번째 자음 ‘ט(테트)’로 시작되는 ‘연’입니다. 그러니까 8절 말씀이 모두 ‘테트’로 시작합니다. 저자는 여기서 고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고난’이라는 말은 주로 ‘suffering’이라고 번역할 때가 많지만, 이와 비슷한 말로 ‘affliction (고통)’ ‘troubles (근심)’ ‘difficulties (어려움)’ ‘hardship (힘든 일)’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주의 종에게 선을 베풀어 주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에 따라 선을 베풀어 주소서 (You have done many good things for me, Lord, just as you promised) (65절)”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You have dealt well with Your servant, O LORD, according to Your word (당신의 종을 당신의 말씀에 따라 잘 대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또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은 이 말씀을 “LORD, You have treated Your servant well, just as You promised”라고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에는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은 저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말씀하신 대로 저를 선하게 잘 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65절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과 신뢰가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니까,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시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1983년에 아내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 때 조금이라고 돈을 절약하려고 일본을 거쳐서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일본 공항에서 악 5-6시간을 대기하다가 다시 비행기를 탔습니다. 정말 마음이 불안하고 막막했습니다.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누구 하나 공항에 마중 나올 사람도 없는데, 공항에 내리면 어디로 갈 것인가?” 비행기 안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가 저는 창세기 12:1-4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그렇지? 아브람도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고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땅으로 갔지?” 하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저는 염려를 많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저의 길을 선하게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여러분 앞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저의 이런 경험이 저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고난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받았던 고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습니다만, 69-70절 말씀을 보면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말로 나를 더럽혔어도, 나는 마음을 다해 주의 교훈들을 지킵니다. 그들의 마음은 차디차고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주의 법을 기뻐합니다.” 그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만하고’ ‘마음이 차디차고 아무 느낌이 없는 사람들 (their hearts are dull and stupid)’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더럽혔다’고 하는데, 이 말은 ‘짓뭉갰다 (smear)’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를 아무 짓뭉개서 내 인생을 망쳐 놓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이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내 인생을 이렇게 망쳐 놓았지만, 나는 마음을 다해 주의 교훈들을 지키고, 나는 주의 법을 기뻐합니다.” 놀랍게도 자기의 원수들에 대한 원한과 복수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그 말씀을 지키면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말씀을 공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말씀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or we also have had the gospel preached to us, just as they did; but the message they heard was of no value to them, because those who heard did not combine it with faith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복음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들은 말씀은 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2, NIV) 말씀을 듣고 배웠으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 119편 본문 말씀에서 이런 교훈을 받습니다. 

이 시편 저자에게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67절, 71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고난 받기 전에는 내가 잘못된 길로 갔으나, 이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67절).....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는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법령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0절).” 67절 말씀과 71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면 이런 말씀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 인생을 잘못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으면서 주의 말씀을 읽게 되고, 주의 뜻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바른 길을 찾았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고난 받은 것이 오히려 좋았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참고 견디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고난이 오히려 좋았다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저는 이 시편 저자의 말을 묵상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편 저자의 말 대로 한다면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는 좋았습니다. 이 상황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뜻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있습니까? 다들 답답해하고 어서 이 상황이 끝나서 6개월 전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세상은 코로나바이러스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 1976- 이스라엘) 같은 학자는 지금이야말로 과거에 못다한 개혁을 완수할 때라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준 유익이 참 많습니다. 첫째로, 이 전염병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지식과 과학의 힘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들은 백신 개발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도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의 피해를 제일 많이 본 나라들은 아이러닉 하게도 발달된 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입니다. 상대적으로 피해를 적게 본 나라들은 저들보다 의료 시스템이 뒤떨어진 아시아 국가들입니다. 이들은 열악한 의료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국민들과 소통하고 국민들의 협력을 얻음으로써 코로나 사태를 잘 통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서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우선이라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높은 가치로 내세우는 나라들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논리를 주장하면서 검사를 받거나 마스크를 착용을 강요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국가들은 대부분 공동체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양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검사를 받고 마스크를 착용했습니다. 불편하지만 불평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셋째로, 교회에 대한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코로나 이전에도 이런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교회 현장 예배가 온라인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 모이는 대신 집에서, 여럿이 아니라 혼자서, 혹은 몇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처럼 한 장소에 모여 큰 교회를 자랑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그 대신 가정이 교회가 되고, 개인의 영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본질(本質)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하게 되고, 이제는 개인 개인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넷째로,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건강해야 다른 사람도 건강합니다. 내가 감염이 되면 내 주변 사람들도 감염이 됩니다. 우리에게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고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동식물을 남획하는 것은 곧 사람들에게 재앙으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에게 기생하는 바이러스가 중간 숙주 ‘천산갑’을 통하여 인간의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몸에 좋다고, 건강에 좋다고, 야생동물들을 마구 남획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앰허스트 (Amhurst)에 있는 한 목사님이 동영상을 보내왔습니다. 요즘엔 동네에 곰들이 많이 돌아다닌다고 하면서 집 뜰에까지 들어온 곰을 찍어 보냈습니다. 그리고 전에 안 보이던 이름 모를 새들도 많이 보인다고 또 동영상을 찍어 보냈습니다. 인간의 활동이 줄어 드니까 공기도 맑아지고, 자연도 회복되고 있습니다. 

다섯째로,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세계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정보를 독점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만 선별적으로 흘리는 리더십, 고집 불통의 리더십은 큰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반면에, 투명하고, 민주적이고, 대중과 소통하는 리더십, 그리고 전문가들의 말을 존중하는 리더십이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다섯 가지 정도 코로나바이러스가 가져온 유익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가만히 이것들을 생각해 보면, 지금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원래 창조의 모습대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worm’s-eye view’로 보면 답답하고 짜증나고, 우울하기만 한데, ‘bird’s-eye view’로 보면 세상은 좋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8년이나 포로로 잡혀 있다가 극적으로 생환(生還)할 수 있었던 제임스 스톡데일 (James Bond Stockdale, 1923-2005, 미국 해군) 대령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8년이라는 시간을 견딜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중에 곧 풀려날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겨내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부활절까지는 석방되겠지!” 이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기약 없이 길어지는 바람에 상심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무사히 생환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기약 없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버텨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풀려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극적인 현실을 눈감고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톡데일 대령의 경험담은 ‘스톡데일의 역설 (The Stockdale Paradox)’이라는 말로 심리학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현실이 힘들수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근거 없는 무조건적인 긍정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 해가 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긍정(肯定. positive)’이라는 말은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FKCC 교우 여러분, 지금 이 시간이 많이 어렵고 힘들지요?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칼 메닝거 (Karl Menninger, 1893-1990, 미국)라는 정신분석학자는 “Attitudes are more important than facts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창의적으로 이겨 나가도록 하십시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인간의 시간을 중지시키고 하나님의 시간을 가져왔습니다. 


9/13/2020 | In Times Of Trouble 23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Now Is The Time To Find The Lord

이사야 55:6-11

오늘 읽은 이사야 55장은 ‘제 2이사야’ 끝에 속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희망과 위로와 치유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더욱 이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6절에 나오는 “너희는 찾을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여호와를 불러라” 이 말씀에 주목할 것입니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인 것은 맞지만,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는 먼저 너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悔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개’를 ‘후회’나 ‘뉘우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회개의 과정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회개하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7-38) 유대 명절인 오순절 날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23, 36)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생겼습니다.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이런 현상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결국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만들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교회의 미래가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잘 정리를 했습니다. “Repentance means ‘change of mind.’ Yet the full meaning is somewhat more. In the New Testament, the word metanoia is often translated as ‘repentance’. But this kind of repentance is not about regret or guilt or shame; it implies making a decision to turn around, to face a new direc-tion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메타노이아’는 ‘회개’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이 말은 단순히 ‘후회’ ‘죄의식’ ‘수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뜻은 ‘돌아서기로’ ‘새로운 방향을 향하도록’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회개’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Let the wicked change their ways and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Let them turn to the Lord that he may have mercy on them. Yes, turn to our God.” (7절) 이 말씀에 ‘change their ways’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turn to the Lord’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이 말들이 정확하게 회개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회개’의 과정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아마도 교인이 되는 과정을 쉽게 만들어서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적인 야망과 경쟁심이 크게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적인 야망, 그리고 경쟁심, 이런 것들이 교회를 파괴하는 죄악들입니다. 아니, 지금도 이런 야망을 가진 교회들이 있더라고요.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모인다”고요.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고요. 지금은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이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닙니다.

지난 주에 ‘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한국교회에 드리는 호소문 (성명서)을 발표했습니다. 청년들은 “우리는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다. 이대로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으며 사그라질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전광훈과 극우 기독교 세력을 만들어낸 묵은 땅을 갈아엎고, 개 교회 중심주의, 중년·남성·목사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보다보다 못한 청년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길을 닦고 그가 닦아 놓은 길로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잘 준비된 마음의 밭에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3:15).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과거의 잘못된 삶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결단 없이 믿음생활을 시작한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교회는 나오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결과로 나왔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크리스천들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지금과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Seek the Lord while you can find him. Call on him now while he is near (하나님을 찾을만한 때애 그에게 찾으라. 하나님께서 너희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6절)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기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계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역사적인 맥락’에 따라 읽어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 중입니다. 대규모 건설사업에 동원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피곤하고 내일을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John Flavel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요. 어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그를 부르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그를 만나러 나오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사미스트’였습니다. 성경에 다윗이 쓴 시편이 무려 63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가 겪었던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그를 위대한 ‘사미스트’로 만들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만약 다윗의 생애 속에 고난이 없었고 편안한 삶이 계속되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연히 재미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음악가 베토벤의 생애를 소재로 해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아 해외로까지 수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악성(樂聖)’이라고 불릴만큼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린 것은 1796년 유럽 순회 공연을 다닐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자마자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는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음악가에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베토벤은 신경이 예민해졌고,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유서를 씁니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 때였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알려진 이 유서는, 베토벤이 자기 동생들에게 쓴 편지인데, 당시 그가 겪었던 좌절과 공포가 고스란히 이 유서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자살을 실행에 옮기 못하게 되었고, 유서는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시련과 싸우며 음악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교향곡 3번 ‘영웅 (1803)’. 교향곡 5번 ‘운명 (1807-1808)’, 교향곡 9번 ‘합창 (1822-1824)’ 등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모두 유서 작성 후에 작곡한 곡들입니다.

뮤지컬 ‘루드윅 (Ludwig)’은 베토벤이 유서를 작성한 날, 그 무엇이 그를 다시 삶의 길로 이끌었는지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 날 밤, 마리라는 여자가 한 소년을 데리고 그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발터인데, 그녀의 스승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리는 베토벤에게 이 아이를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된 발터는 영국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자신가 발터의 보호자가 될 테니, 제발 이 아이가 빈에 남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법원에서는 발터가 베토벤의 제자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베토벤은 사연은 딱하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제자를 받아 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마리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마리의 등장으로 인해 베토벤은 자실 시도에 실패하게 되지만 자신이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베토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기면서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니까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살을 생각하고 유서까지 쓴 사람이 생각을 바꾸잖아요? 그리고 자기의 불행을 이겨내잖아요? 불행을 딛고 불후의 명곡을 쏟아내잖아요? 베토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불행을 딛고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여러분, 지금 화면에서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어떻게 해서라고 소리를 듣고 싶은 안타까움에서 그가 사용했던 보청기(補聽器)들입니다. 처음에 왼쪽 귀에서 시작된 난청 증상이 오른쪽 귀에도 생겼고, 48세 때에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도 여러분이 경험하는 ‘extremity (극단적인 절망)’가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 여러분의 삶과 단절(斷絶)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여러분의 삶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지금까지 향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향 (a new direction of life)’으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상황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계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기회가 되고 선물이 될 것입니다. 

 


9/6/2020 | In Times Of Trouble 22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I Am Your God

이사야 41:8-13

혹시 여러분, 이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고든 피 (Gordon D. Fee)와 더글라스 스튜어트 (Douglas Stuart)가 쓴 책인데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How To Read The Bible For All Its Worth”입니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손실하지 않고 성경을 온전히 읽는 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고든 피는 캐나다에 있는 리전트 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도 교수로 있었습니다. 더글라스 스튜어트는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습니다. 이 책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먼저 저자가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읽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맥에는 두 가지 문맥이 있는데, 하나는 문학적인 문맥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문맥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느 한 구절만 읽어서는 안 되고 앞뒤 문장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문학적인 문맥을 따져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문맥에 따라 읽어야 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이 성경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이 성경을 누가 기록했는지, 그 때 당시의 사회는 어떤 사회였고,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살펴서 읽어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41장 본문 말씀은 역사적인 맥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서를 이사야 한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별로 없습니다. 보통은 이사야서를 1-39장, 40-55장, 56-66장, 이렇게 3등분합니다. 1-39장은 ‘제 1 이사야’라고 합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40-55장은 ‘제 2 이사야’라고 하는데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구원의 대한 소망의 말씀들이 들어 있습니다. 56-66장은 ‘제 3 이사야’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공평하고 정의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라는 꿈과 비전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 2이사야’에 속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생활 중에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1절). 하나님께서 지금 포로생활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불행을 해석하는 방법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욥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이런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 9:3)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너희가 이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에서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조국을 잃고 이렇게 타국에 와서 떠돌고 있다고 해서 너희에 대한 나의 관심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같은 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The Age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1963년에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가 1977년에 쓴 책의 제목인데,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삶도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하니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고, 불안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 아닙니까? 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이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말들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말들인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크리스천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Omnipotent God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Omniscient God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렵고 힘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9절)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邊方)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강대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작은 나라입니다. 국제 질서가 바뀌는 대로 이집트의 영향권에 있다가, 앗시리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바빌로니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신약시대에는 로마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약소 국가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사람을 부르시고 선택하신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언자들을 선택하신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말씀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동역자로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데마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긴 사람이고,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가 중간에 믿음의 길에서 돌아선 사람입니다. 성경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카로 갔다 (디모데후서 4:10)”고 했습니다. 아니, 유다나 데마를 선택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요한복음 15:16)”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근시안적으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bird’s-eye view’로 봐야 합니다. 우리 말로 ‘조감도(鳥瞰圖)’라고 합니다. ‘aerial view’라고도 하고 ‘helicopter view’라고도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관점 (view)을 ‘worm’s-eye view’라고 합니다. ‘벌레의 눈의 관점’이라는 뜻입니다. 벌레는 땅에 기어 다니기 때문에 ‘벌레의 눈’으로 보면 전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bird’s-eye view’로 전체를 봐야 보일 때가 많습니다. ‘bird’s-eye view’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전체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개역성경)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doesn't take back the gifts he has given or disown the people he has chosen.” 또 GOD'S WORD Translation에는 “God never changes his mind when he gives gifts or when he calls someon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시편 46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1-3, 5절)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뛰놀고, 산이 요동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묘사하는 수사법 (figure of speech)입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시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겁을 내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10절)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난 사람들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괜찮아, 잘 될거야.” “걱정하지 마.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다들 그래.” “힘들지? 얼마나 힘들겠어.” “툴툴 털고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말이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붙들어 줄께.” “내가 함께 있어 줄께.” “내가 도와줄께.”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말들이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Don’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Don’t be discourag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 (10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용기를 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너를 붙들어 주겠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11절 말씀과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와 다투는 사람들, 너에게 대적하는 사람들, 너와 싸우는 사람들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큰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십니다 (With God nothing is impossible).” (창세기 18:14, 마태복음 19:26, 마가복음 9:23, 누가복음 1:37)

‘바라바 (Barabbas)’라는 1962년에 나온 옛날 영화를 보았습니다. 바라바는 예수님 대신 목숨을 구한 흉악한 강도입니다. 앤소니 퀸 (Anthony Quinn)이 바라바 역으로 나옵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 대신 살아난 바라바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도질을 하다가 붙잡힌 바라바는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다는 시실리 섬의 유황 광산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바라바는 거기서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유황 광산에서 만난 사하크 (Sahak)라는 사람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검투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하크라는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검투사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주변이 있으시지요. 마치 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법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하크가 담담하게 자기의 믿음을 말하는 이 장면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항상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사도행전 17:24-28)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을 못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오른 손으로 너를 붙잡고 있다 (I am your God. Don’t be afraid, I am with you. I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붙들고 계시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우리를 그분의 ‘victorious right hand’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