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6

요한복음 12:20-26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그리스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는 것입니다. 쉬운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for the Passover celebration’ (NLT) ‘to worship at the festival’ (NIV, ESV) 다른 번역성경에서도 ‘명절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온 그리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온 목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입니다. 순순한 그리스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Now there were certain Gentiles among them’ (Douay-Rheims Bible) ‘But there were also some of them from among the Gentiles who came up to worship at the feast’ (Aramaic Bible in Plain English) 이런 성경들은 아예 이 사람들이 ‘이방인 (gentiles)’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성경들은 ‘certain Greeks’라고 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리스 사람들 중에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은 다른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선교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이 그리스 사람들은 날마다 토론회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스토익 철학자들 (Stoic philosophers)도 있었고, 에피큐리언들 (Epicureans)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7:18). 스토익 철학은 B. C. 3세기에 제노 (Zeno)라는 사람이 세운 철학사상입니다. ‘금욕’을 중요한 덕목으로 보았습니다. 이 보다 조금 늦게 Epicurus라는 사람이 'Epicureanism'이라는 철학 사상을 주창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쾌락을 추구하는 사상입니다. 모두 그리스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소크라테스 (Socrates, B. C. 470-399)는 이들보다 약간 늦게 기원전 4세기에 활동했던 철학자입니다. 유명한 플라톤 (Plato, B. C. 428-348) 이 그의 제자입니다.

이런 문화와 철학적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예배 드리기 위해서 왔다는 것은 미스터리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그렇지 않고 순수한 그리스 사람들이라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왔을 리는 없고, 이 사람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새로운 사상에 목이 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나라에 지혜로운 랍비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겠지요? A. D. 1세기에도 그 나름대로의 지역과 지역 간에 소통의 시스템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랍비를 만나러 온 것입니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이니까 예루살렘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안드레가 이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4-25절)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Those who love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lose it. Those who care nothing for their life in this world will keep it for eternity.”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보면 새로울 것도 없고 매우 당연한 말씀입니다. 농부들이 밭에 씨앗을 뿌립니다. 그 뿌린 씨앗들이 땅에 떨어져 죽고 거기서 많은 씨앗들을 거두어 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뉴톤 (Isaac Newton, 1643-1727, 영국)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것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생각해 냈다고 합니다. 사과나무에 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했지 거기에 모든 질량을 가진 물체들 간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법칙 (Law of Universal Gravity)을 발견한 사람은 뉴톤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죽고,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많은 열매를 맺고, 이걸 보면서 이 속에 영원한 삶의 진리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원리는 실험을 해서 증명을 해야 합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도 개발이 되면 인간의 몸에 부작용은 없는지 실험을 해야 합니다. 많은 실험을 한 후에 부작용이 없다는 것이 증명이 되어야 백신을 사람의 몸에 주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무슨 ‘이버멕틴 (Ivermectin)’이라는 구충제 말이 많이 나오는 모양인데,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과학적인 법칙은 실험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지만, 인문학적인 진리는 체험을 통해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친히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역시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1-23). 바울이 말한 로마서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셨고,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29-30) “For God knew his people in advance, and he chose them to become like his Son,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 And having chosen them, he called them to come to him. And having called them, he gave them right standing with himself. And having given them right standing, he gave them his glory.”

궁금합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 지 궁금합니다. 특이한 것은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다고 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깊은 인상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지금까지 공부하고 들었던 모든 사상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체계입니다. 스토이시즘 (Stoicism)은 Zeno가 만든 사상이고, 에피큐리언니즘 (Epicureanism)은 Epicurus가 만든 사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근본적으로 출처 (origin)가 다릅니다. “이것은 처음 듣는 말씀이로다!” 하면서 지금까지 그들이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다시 한번 이렇게 확인해 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비유적으로 말하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있는 밀알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 아닙니까? 어저께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There is only one thing worth being concerned about. Mary has discovered it,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누가복음 10:42) 제가 보여드린 그림 밑에 나온 말씀 기억하고 계시나요? “My Alabaster Jar..... It’s Mine for Breaking.”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평생 붙들고 사는 사람은 죽지 않는 밀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중한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가 있는 사람은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입니다. 거기서 많은 밀알을 추수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우리는 마음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 것? 영원히 한 알의 밀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기꺼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될 것인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자기의 옥합 평생 내 것이라고 붙들고 살 것인가? 아니면 깨뜨리기 위해 옥합을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결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릅니다. “뭘 그냥 성경을 읽으면 되지. 그렇게까지 결단을 할 필요가 있을까?” 예. 제가 말씀을 드리지요. 그런 사람은 지금까지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기 때문에 삶이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를 섬기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서 높이실 것이다 (Anyone who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follow me, because my servants must be where I am. And the Father will honor anyone who serves me).” (26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을 ‘따른다 (follow)’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삶의 ‘example (모범)’을 삼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민할 것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땅에 떨어져 죽는 삶을 선택하면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로마서 8:34)’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4/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5

그녀를 가만 내버려 두어라

요한복음 12:1-11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말씀을 전체 문맥 상황 속에서 읽고 해석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말씀만 따로 떼서 읽는 것입니다. 뭐 이렇게 읽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 말씀을 전혀 잘못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들이 대개 이런 식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말씀만 가져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매님, 여기 이런 말씀이 있지요?” 하고 말씀을 딱 읽어 주면 대부분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단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전체 문맥에서 읽고 내용을 파악하면 그럴 위험성은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의 경우가 딱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경에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가복음 버전 (누가복음 10장)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마르다는 일을 하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옆에 앉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르다는 예수님 일행을 접대하는 일을 했고, 마리아는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렸습니다. 목사님들 중에도 봉사하고 일하는 것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더 귀하다고 해석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잘못하면 노동과 봉사를 경시하는 과오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지금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분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없습니까? 열심히 예수님 일행을 접대한다고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는 마르다는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 것이네요? 모두 말씀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도 문제 아닌가요? 하나님의 일에는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제가 들을 말입니다만, 수도사들은 일을 기도라고 생각한다고 하네요. 강원도 태백산에 있는 예수원에 가면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는 것이 노동이다.” 이런 글귀가 예배당 양 옆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말씀을 해석할 때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하면서 누가 더 잘했다, 잘못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오늘 말씀은 전체적인 문맥과 상황에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예수님을 접대하기 위한 마르다의 행동이 예수님께 좀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1983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에 왔습니다. 사모님도 같이요. 그 때는 지금처럼 비행 시간이 짧지 않았습니다. 직항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개는 어디를 경유해서 미국으로 갔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저는 무슨 비행기를 탔는지 지금 기억이 없습니다. 미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일본을 경유했습니다. 한국인 승무원이 없었던 것을 보면 미국 비행기였던 것 같습니다. 전 그 때만해도 비행기 여행을 해 본 경험이 정말 없었습니다. 신혼여행 때 제주도에 갔다 온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조금 가져 갔는데, 그 돈을 작은 가방에 넣었습니다. 누가 훔쳐갈까봐 잠도 자지 않았고, 화장실로 안 갔던 것 같습니다. 매우 긴장했습니다. 일본 공항에서 4-5시간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미국 비행기를 타고 LA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 잠도 안 자고요. 화장실도 한번 안 가고요. 무릎 위에 가방을 꼭 붙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계속하겠어요. 공항에 내려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계획이 없었습니다. 기생충에서 송강호가 그러잖아요?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거든. 계획은 세워봤자 틀어지기만 해.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고. 무슨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지.” 정말 이 대사처럼 저희는 공항에 도착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획이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 때 가서 어떻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에 처음 오는 데다 계획마저 없으니 스트레스는 많이 받았겠지요. 더 많이 피곤하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공항에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연착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미국에 오도록 주선해 주신 분인데요. 캘리포니아 한국 간호사협회 회장 직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나와 있다가 우리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 부부는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그분 차를 타고 가서 그분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이 좋더라고요. 저희 두 사람을 위해서 이 분이 터키를 구워 놓았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웠으니까 터키를 구워 놓은 모양입니다. 노릇노릇하게 구워 진 것이 맛이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한 점 딱 먹었는데, 입에 안 받는 것입니다. 너무 피곤했고 긴장이 풀렸는지 딱 한 점 먹었는데, 더 이상은 못 먹겠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분도 잘못한 것이 있습니다. 피곤한 사람들이 입 맛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 분도 생각을 못한 것입니다. 또 하나 이 분이 잘못한 것은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터키를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생각 못한 것입니다. 이 분의 정성은 고마웠지만, 입에서 안 받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제가 잘못했습니다. 만든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맛있게 잘 먹었어야 했습니다. 이제 제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 말씀을 전체 문맥과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의 집에 도착한 것은 유월절 엿새 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누가복음 19:28)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0:32-34) 32절만 영어 성경으로 한번 읽어 볼까요? “They were now on the way up to Jerusalem, and Jesus was walking ahead of them.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awe, and the people following behind were overwhelmed with fear. Taking the twelve disciples aside, Jesus once more began to describe everything that was about to happen to him.” 이 말씀이 베다니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분위기였습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문맥과 상황은 1절에 있는 “유월절 육 일 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고 있는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celebration began, Jesus arrived in Bethany, the home of Lazarus--the man he had raised from the dead)” 이 말씀입니다. ‘유월절 육일 전에’ 이 말씀을 이해해야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이 육일 남았을 때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여기 베다니에 오시면서도 제자들보다 앞서 걸으셨고, 예수님의 얼굴은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에게 말을 걸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서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원래 음식을 좋아합니다. 잘 먹어요. 그런데, 그 때는 너무 긴장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고, 또 음식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터키였고요. 그래서 못 먹었습니다. 안 먹혀요. 예수님은 그 때 어땠을까요? 그 때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 만들어서 예수님을 대접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동생 마리아는요. 누가복음 버전 (누가복음 10:38-42)에는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가만이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매우 비싼 나드 향유 약 300그램을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였다고 했습니다.

위의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바닥에 비싼 향유가 든 옥합 (a alabaster jar)이 깨져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 그림 밑에 이런 글이 씌여 있습니다. “My Alabaster Jar..... It’s Mine for the Breaking.....” “내 옥합인데..... 깨뜨리기 위한 나의 옥합입니다” 이런 글이 씌여 있습니다. 뭔가 이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드는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옥합들이 있습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옥합을 평생 깨지 않고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이것을 언젠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옥하바은 무엇을 위해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for keeping or for breaking?’ 한번 생각해 보시지요. 전 여러분이 언젠가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 깨뜨리기 위해서 옥합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마리아의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이 향유를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지 않은가? 이것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값비싼 것인데 말이야.” 하지만, 마태복음 버전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성경에 보면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다 마리아를 비난했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6:8). 자, 그러면 여러분이 잘 아는 누가복음 버전과 요한복음 버전을 다시 한번 비교해 보시지요. 누가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 가만히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저녁 준비로 바빴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는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 드렸고, 마르다는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행동은 두 버전이 똑 같고요. 마리아의 행동은 향유를 붓는 것으로, 또 가만히 예수님 옆에 앉아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르다와는 다른 행동 양식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보세요. 마르다와 마리아, 지금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정말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마르다가 준비하고 있던 식사입니까? 아니면 마리아의 행동에 더 예수님께 위로가 되었을까요? 아마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예수님께서 별로 식사에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에게 터키를 구워 주신 분같이요. 그분은 최선을 다해서 터키를 구워 저를 잘 대접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상황이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에게 큰 실례를 한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버전에서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고요 (누가복음 10:42). 오늘 읽은 요한복음 버전에서는 마리아는 나의 장례를 위하여 향유를 준비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행동을 성경에서는 ‘분별력’이라고 합니다.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영어로, ‘understanding’이라고 할 수 있고요. 좀더 전문적인 말로는 ‘discernment,’ 혹은 ‘insight’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이겠느냐? 주인이 그 종에게 다른 종들을 맡기면, 제 때에 양식을 나누어 줄 일꾼이 누구겠느냐?” (누가복음 12:4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faithful, sensible servant is one to whom the master can give the responsibility of managing his other household servants and feeding them.”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sensibilities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4/5/2020 | 종려주일 메시지

그리스도를 따르자 Follow Jesus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18-25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오늘 ‘종려주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까지도 하나님께서 통제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먼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고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분별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담임 목사로서 교우 여러분들께 감사 드리는 것은 온라인 예배에 열심히들 참여하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더욱 감사한 것은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우들이 헌금생활을 잘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교회가 어려울 때 교인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성실하게 잘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종려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入城)하실 때 연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꺾어 들고 흔들면서 “호산나 (Hosanna)!”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영어로 ‘종려주일’을 ‘Palm Sunday’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손바닥을 ‘palm’이라고 합니다. 제가 사진을 찾아 봤더니 어떤 ‘종려나무’ 가지는 꼭 사람의 손바닥처럼 생긴 것도 있더라고요. 지금 보여드리는 사진은 ‘Date Palm Tree’라고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때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다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 것은 맞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퍼져 있던 때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고, 크게 무리를 지어 그 곳으로 왔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그들이 나사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9-11) “예수님께서 나사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7-18)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귀는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입니다. 이런 법이 있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As Jesus and the disciples ap-proached Jerusalem, they came to the town of Bethphage on the Mount of Olives. Jesus sent two of them on ahead. ‘Go into the village over there, you will see a donkey tied there, with its colt beside it. Untie them and bring them to me. If anyone asks what you are doing, just say, `The Lord needs them,’ and he will immediately let you take them.’ The two disci-ples did as Jesus commanded. They brought the donkey and the colt to him and threw their garments over the colt, and he sat on it.” (마태복음 21:1-3, 6-7) 예수님께서 새끼와 어미가 있는데, 새끼를 타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예언서에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탔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라고 나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언서의 말씀을 이루려고 (to fulfill the prophecy)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다.” (요한복음 21:4-5) 요한이 말한 그 예언서의 말씀이란 스가랴 9:9에 나오는 말씀을 말합니다. 그날 예수님은 반드시 나귀 새끼를 타셔야만 했네요. 그래야 예언서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자기의 생명을 건지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건질 것이다.” (누가복음 9:23-24) 예수님은 몸소 이 말씀을 실천하셨습니다. 공생애 (the public life)를 시작해서 마지막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을 통과하실 때까지 예수님은 선명한 ‘고난의 발자취 (Jesus’ footsteps of suffering)’를 남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님의 남기신 그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서 살자고 했습니다. 과연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이 말씀을 각자의 삶에 적용하고 자신의 삶을 해석하는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남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들 (household servants)에게 한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시리아로, 소아시아로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Dias-pora Christians)’입니다. 이 사람들은 낯선 외국 땅에서 생존을 위해 어떤 험한 일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부자집에 ‘household servants’로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운이 좋아 좋은 주인을 만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인들은 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남긴 고난의 발자국을 따라 사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혹은 직장 상사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에 고발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그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외국인들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에 고발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어느날 고국의 교회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베드로가 쓴 편지입니다. 그 편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을 존경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십시오. 선하고 친절한 주인에게만 아니라 악하고 나쁜 주인에게도 복종하십시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하게 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없이 참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18-19절) 답답하지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고요.

억울한 일을 당하기로 말하면 예수님 같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당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습니까? 성경은 일제히 예수님에게 아무 죄가 없다고 증언합니다 (히브리서 4:15). 이 편지를 쓴 베드로 자신이 그런 말을 했네요.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2: 18-19)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22-23절)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그는 우리의 모범이 되신 분이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21절)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좀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면 항상 예수님의 방법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우리 방법은 틀렸고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 19’ 때문에 뜻하지 않게 한국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 중국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이 되었고, 우리나라로 옮겨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한국은 국경을 봉쇄하지 않은 방법을 선택해서 경제적인 손실을 최소화 한다는 선택을 했습니다. 방역을 강화하고, 빠른 시간 내에 검사를 받고 결과를 알 수 있는 테스트 키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쉽게 검사를 받도록 ‘Drive-Through Screening’ 방법도 고안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검사를 받도록 했더니, 감염자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은 그런 식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국경을 봉쇄하고, 검사를 많이 하지 않고, 감염자 수가 적은 것처럼 속였습니다. 한국이 선택한 방법에 대하여 많은 비난이 있었지만, 지금은 각국이 한국이 선택한 방법이 옳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방법은 부당한 방법에 맞서 싸우는 고발과 싸움과 투쟁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어디서 읽을 수 있습니까? 예. 바울이 쓴 로마서 12:17-21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Never pay back evil with more evil. Do things in such a way that everyone can see you are honorable. Do all that you can to live in peace with everyone. Never take revenge. Leave that to the righteous anger of God. Don't let evil conquer you, but conquer evil by doing good.” 베드로와 바울은 초대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이 두 사람이 똑 같이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우리를 대신해서 받은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받지 않아도 될 고난을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저는 이것 역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받는다고 하는 말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매우 낯선 말입니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되도록 관계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끝이 나면 인간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번 설교에서도 그 점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미래학자들이 이미 이 점에 주목하고 있더라고요.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라는 이스라엘의 역사학자는 벌써 이 점에 주목하고 ‘The World After Coronavirus (코로나 이후의 세계)’라는 책을 내 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사피엔스 (Sapiens)’ ‘호모 데우스 (Homo Deus)’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21 Lessons For The 21th Century)’ 같은 베스트 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하라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우려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우리의 삶은 더욱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이 코로나바이러스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개인주의적으로 바뀌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이런 방식을 선택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된다면,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가 떠안는다든지, 다른 사람과 고통을 분담한다든지 하는 성경의 메시지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일찍이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로마서 12:2)”고 경고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탁월한 식견을 가진 미래학자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제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성경의 가치가 옳다는 것을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시대 정신에 굴복하지 않고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모범은 시대가 어떻게 바뀌든지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4/4/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4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요한복음 11:28-44

오늘 말씀은 어제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는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 그 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요. 이 사람들을 이 집 식구들을 위로하려고 온 마을 사람들입니다. 나사로의 dead body는 이미 굴 (무덤) 속에 있었습니다. 좀 어수선한 분위기가 읽혀 집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집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을 밖에서 먼저 마르다를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또 마리아를 불러냅니다.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오지 않으시고, 그 때까지 줄곧 마르다를 만났던 곳에 계셨습니다.” (30절)

예수님의 전갈을 받고 마리아가 ‘황급히 (hastily)’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마리아가 너무 슬퍼서 무덤에 가서 울려고 나가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로가 확실하게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뒤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39절) 예수님께서 그 집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많이 아파서 거의 죽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로,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을 듣고 황급하게 나간 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 지 보여 줍니다. 오빠가 죽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마리아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저의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2절)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도 예수님에게 똑 같은 말을 했었습니다. 오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예수님께 전했는데, 무슨 일인지 이렇게 늦게 오신 예수님께 대한 원망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마음이 원망의 마음보다 더 컸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영원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Love never gives up, never loses faith, is always hopeful, and endures through every circumstance.” (고린도전서 13:7, NLT)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ve is always supportive, loyal, hopeful, and trusting.”

마리아의 뒤를 따라 온 마을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도 격한 감정이 들면서 몹시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When Jesus saw her weeping and saw the other people wailing with her, a deep anger welled up within him①, and he was deeply troubled. /①Or he was angry in his spirit 다른 번역 성경들을 보면 “His heart was touched, and he was deeply moved (Good News Translation)” 이렇게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7:16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온 도시가 우상들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대단히 화가 났습니다 (He was deeply troubled by all the idols he saw everywhere in the city).”

그 때 예수님이 화가 났다는 표현도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지금 자기 오빠가 죽었다고 마리아는 슬피 울고 있고, 마을 사람들은 마리아를 위로하고 슬픔을 같이 나누는 마음에서 슬피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슬픔, 여러분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아시지요? 저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전 혼자 많이 울었습니다. 이것이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들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화가 나신 것입니다. 왜? “부활이요, 생명인 내가 그들 앞에 있는데, 왜 나를 믿지 않고 이 사람들은 슬피 우는가?” 이것이 예수님께서 화가 나신 이유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화가 난 이유도 그렇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왜 자기들이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모여서 철학적인 토론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들에게 빠져 있는가?”

끝내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눈물은 인간의 연약함을 동정하는, 같이 느끼는, ‘compassion’ ‘sympathy’에서 오는 눈물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몹시 아픈 마음으로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 무덤은 입구를 커다란 돌로 막아 놓은 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주님, 이젠 아무 소용 없어요. 너무 늦었어요.) 이 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생각을 읽으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Didn't I tell you that you would see God's glory if you believe)?” (40절)

여러분, 우리 믿음생활이 이 말씀처럼 중요한 말씀이 있을까요?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거기서는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So he did only a few miracles there because of their unbelief).” (마태복음 13:58)

또 하나 더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히브리서 11:6) 그 어느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 가지를 믿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일에 관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관계하신다는 것입니다. “God is in control!” 이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의 자녀로 삼으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분인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상을 받는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스스로 있으시는 분, ‘I AM’이십니다. 그분이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 Everyone who lives in me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ever die”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정확하게 말하려면 “I AM is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2,0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유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절망 속에서, 우리의 모든 계획이 무산되는 절망 속에서, 나의 삶의 계획들이 모두 무너지는 절망 속에서도, 이 말씀은 유효합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도 유효합니다. 평생 이 말씀을 붙들고 사십시오. 어떤 환경에서도 이 말씀을 믿고 받아 들이십시오. 믿으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동일하신 우리 주님의 약속입니다.


4/3/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3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1:1-27

오늘 말씀은 ‘베다니 (Bethany)’라는 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난 표적 (sign)입니다. 예수님은 이 표적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부활이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조금 못되는 곳에 있는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그 오빠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좋아했다는 표현이 좋을까요? 그리고, 예수님도 이 세 사람을 아꼈고, 그 집을 편안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자주 이 집을 들렀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는 매일 이 집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고난주간에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가 저주 받는 사건도 이 때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1:18). 마침 저만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뭐 좀 열매가 있으려나 하고 가 봤더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집에 예수님을 접대하기를 좋아하는 마르다라는 언니가 있는데, 왜 이른 아침에 예수님 아침 식사를 대접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생각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는 생각이고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날 아침에 예수님은 배가 고프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찾으시다가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셔야 했고, 열매가 없자 그 무화과나무를 반드시 저주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예배의 기능을 상실한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사건이었거든요. 성경을 이런 관점에서 읽으면 참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날 아침 베다니에 있는 그 집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지 못할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예수님은 빈 속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은요. 베다니의 그 집에 우환이 생긴 것입니다. 나사로가 몹시 아픈 것입니다. 생명이 위독할 정도로요. 성경에는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리아의 언니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라는 마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씻어 주었던 바로 그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든 것입니다.” (1-3절) 마리아와 마르다는 급히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몹시 위독합니다.” (3절) 예수님께서 평소에 그렇게 사랑하는 집 사람들이니까 열일 제쳐 놓고 베다니로 가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좀 달랐습니다. “이 병은 죽게 될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얻을 것이다.” (4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이지요? 나면서부터 앞으로 보지 못했던 사람, 그 사람의 불행이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 누구의 죄도 아니다. 이 사람에게서 일어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요한은 다시 한번 이렇게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오빠 나사로를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지금 계신 곳에서 이틀을 더 지내셨습니다.” (5-6절) 요한이 보기에도 그 때 예수님의 그런 행동은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틀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땅으로 가자! 우리 친구 나사로가 깊이 잠들었으니, 그를 깨우러 가야겠다 (1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 나사로가 잠들었다면 곧 낫게 되겠네요” 하면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다시 그 때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은 것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사로가 정말로 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14절)

아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매우 혼란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뭐지?” “내가 너희를 위해서 거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 기쁘다. 이것은 너희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제 나사로에게 가자.” (15절) 아마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혼란해 하면서 나사로의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일부러 이틀이나 시간을 끌었고, 결국 그런 사이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뭔가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인류가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과제입니다. 의술이 발달함에 따라 과거에는 불치의 병으로 알았던 병들이 속속 치유되고 있습니다만, 죽음의 문제는 인류가 손을 대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도 백신만 개발이 되면, 우리가 플루가 유행할 때 백신을 맞으면 크게 감염을 염려하지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지금처럼 불안에 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금방 나올 것 같던 백신이 1년도 넘게 걸려야 맞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잘못된 백신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과거에 고칠 수 없었던 질병들을 많이 고칠 수 있게 되어 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줄어들고, 인간의 수명은 길어졌습니다. 이젠 특별한 고질병만 없으면 80세, 90세가 되도록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80세, 90세가 되면서 노인 인구가 많아졌습니다. 노인들에게 찾아 오는 ‘치매’가 찾아와 가정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치매가 국가가 관리해야 하는 문제로 부상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질병을 퇴치해서 인간의 수명은 길어졌지만, 여전히 죽음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뭔가 하시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 나머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도 많지 않습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369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가사가 생각납니다.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 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후렴)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될 줄을 모를까.” 오늘 성경 말씀은 이 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도 해결하시는 분이시다. 왜 너희의 죄의 짐을, 걱정과 근심을, 너희의 괴로움을 너희의 낙심을 주께 맡기지 않느냐?”

뒤늦게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그 집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무덤에 있었고, 죽은 지 4일이나 되었습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 오빠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사 일이나 되어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21-22, 39절) 마르다의 말은 그냥 예수님께 대한 예의 바른 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설령 죽는다 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 누가 되었든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25-26절)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Anyon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after dying. Everyone who lives in me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ever die. Do you believe this.” 이 말씀 속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계획하신 것이 무엇인지 모두 드러납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선언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을 도구로 이용하신 것입니다. 어저께, 그저께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선언을 하기 위해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한 남자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의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니요?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없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고요.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하심으로 이 말씀이 맞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立證)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미스터리한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anyone who believes in me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 나온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요한복음 3:16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이 말씀에도 ‘everyone who believes in Him’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똑 같이,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인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나와 똑 같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엄청난 말씀이 나의 삶과 관계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교회에게 적용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번 보실까요?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해 온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해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께서 먼저요,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3) 마지막 23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ut there is an order to this resurrection: Christ was raised as the first of the harvest; then all who belong to Christ will be raised when he comes back.” (NLT)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순서대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이지 아시지요? 우리가 정말 부활을 믿는다면 말씀입니다. 이 말은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부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부활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믿고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지금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바뀌어야 맞습니다. 사람들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이 뒤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 때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구가 평평한 것이 아니라 둥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고, 이 지식이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부활이 있다는 메시지가 성경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2020년 4월 3일 사순절 새벽기도에서 이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물론 전에도 이런 말을 들었지만 진지하게 듣지 않았거든요? 이 날 새벽에 우리는 처음으로 이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이 메시지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아야 맞습니다. 이것은 ‘지동설’이나 ‘지구가 둥글다’는 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소식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소식을 듣고도 마치 부활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