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4/2/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2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
요한복음 10:19-42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사건 (기적)은 오랫동안 유대 사회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가짜 뉴스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도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말도 유대 지도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마태복음 12:24).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돼. 귀신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21절)?” 하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물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우리를 애태우게 할 작정입니까?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터놓고 그렇다고 말해 주십시오.” (24절)
예수님은 이 질문에 “내가 전에도 여러 번 말했는데, 너희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고, 나도 내 양을 안다. 내 양은 나를 따른다.” (27절)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The proof is the work I do in my Father's name)”는 말씀입니다. 그 뒤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나를 믿지 마라. 하지만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37-38절) “Don't believe me unless I carry out my Father's work. But if I do his work, believe in the evidence of the miraculous works I have done, even if you don't believe me. Then you will know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이 말씀의 의미를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든 정직하게, 성실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잖아요?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고요.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요한이 세례에 관해 설교한 이후,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 땅에 걸쳐 발생한 큰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셨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목격한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10:37-39)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설교 속에 나오는 말씀이어서 이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더 큰 감동을 줍니다. 베드로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셨습니다. 섬기는 사역이지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치료 사역이지요? 이 치료 사역의 의미가 큽니다. 지금 미국에 뒤늦게 코로나바이러스가 퍼져서 전문가들의 말이 10만, 20만명이 죽는다고 하잖아요? 큰 소리 치던 트럼프 대통령이 맥이 빠졌습니다. 며칠 전까지도 이번 부활절에는 사태가 해결된다고 큰 소리 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병고치는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은 그 때 사람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문제들을 예수님께서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에는 이런 예수님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을 부으신 분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말씀 사역이지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니까 제자의 눈에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한번 적용을 해 보세요.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하고 싶은 일들, 그 일들이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합니다. 저는 분명히 믿기를 이 간단한 생각이 여러분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일들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과 관계되어야 하고, 여러분이 받은 은사 (gifts)와 관계 되어야 합니다. 그 때 여러분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 연변 용정에 가면 명동촌에 명동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김약연 목사님 (1868-1942)입니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릴만큼 훌륭한 분입니다. 당시에 크고 굵직한 모든 애국 운동에 김약연 목사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 교회 옆에 시인 윤동주 (1917-1945)와 문익환 목사님 (1918-1994)의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둘 모두 명동교회를 다니면서 김약연 목사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습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신조는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유언은 그 사람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잖아요? 유언 속에 그 사람의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은 내가 이렇게 살아왔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나의 유언과 같다고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진실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니, 웬만큼 진실하게 산 사람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북간도의 십자가’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왔습니다. 유튜브에서도 웬만큼 이 다큐멘터리의 스토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큐에 김약연 목사님과 윤동주, 문익환 목사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떻게 그 시절 북간도에서 그렇게 훌륭한 민족의 지도자들이 쏟아져 나왔느냐 하는 것이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더욱 더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삶으로) 표현하는 일을 훈련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믿음생활의 문제는 뭘 잘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그 사람들과 오늘 우리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훨씬 더 성경 지식이 많을걸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들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생활을 지식으로 배우지 않고 행동으로 배웠습니다. 그들은 아는 것보다 행동이 앞섰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렇게 산다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지식은 많은데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해 보셨습니까? 초대 교회 사람들은 행동으로 믿음생활을 배웠지만, 그들의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쉽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저는 터키 성지순례를 하면서 ‘카타콤 (catacomb)’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무엇이 이들의 믿음을 이렇게 견고하게 만들었을까 하고요.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7: 24-27 말씀이었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쳤을 때, 그 집은 쉽게 무너졌는데, 그 무너진 정도가 심하였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견고한 믿음생활의 비결은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기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믿음생활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고, 쉽게 흔들리고, 견고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데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나를 증명한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때에는 나를 믿지 마라. 하지만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한다면, 나는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믿어라.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0:25, 37-38)
4/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1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0:1-18
어저께 ‘apologist’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Samuel Greeleaf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사람이 한 말 중에 꼭 보여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못한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 그가 한 말을 보실까요? “A person who rejects Christ may choose to say that I do not accept it, he may not choose to say there is not enough evidence (어떤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으로 들어갈까요? 오늘 말씀도 긴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내 양 (my own sheep, 14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고 우리는 그 목자를 따르는 양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선한 목자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의 생각 속에 다윗이 쓴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이 들어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있을 법한 생각 아닙니까?
많은 화가들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그림은 Warner Sallman (1892-1968, 미국)이 그린 ‘The Good Shepherd (선한 목자)’입니다. 그 그림 한번 보실까요? 오늘 읽은 말씀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 목자다” 이 말씀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그림입니다. Warner Sallman이 그린 또 하나의 명작이 있는데, 그 그림 제목이 ‘The Head of Christ’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The Head of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이마)’인 것이 참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이마가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Sallman이 그린 예수님의 이마를 한번 보십시오. 빛이 나면서 강인한 인상을 주지 않습니까? 전체적으로는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이지만, 강인한 의지를 가진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이 그림에 우리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다시 Sallman이 그린 ‘선한 목자’ 그림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 (누가복음 15:4-6) ’가 생각이 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뒤로 잔잔한 강이 흐르고 있고, 양들 앞에는 풀밭이 있습니다. 양들의 표정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만족한 표정들입니다. 양 가운데 서 계시는 예수님 역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양과 목자이신 예수님의 관계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가관인 것은 많은 목사들이 자기들을 목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교회를 맡고 있는 목사에게 ‘pastor’라는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런데, 이 ‘pastor’라는 말이 ‘a person who leads to pasture (초장으로 인도하는 사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pastor’는 목장에서 ‘양을 치는 사람 (shepherd)’을 말합니다. 목사들의 모임에 가 보면 회장이라는 사람이 나가서 “여러분, 각자의 목장에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하고 인사를 합니다. 또 대표 기도하는 사람은 그런 기도를 합니다. 정말 가관입니다. 제가 여러 번 목사들 앞에서 설교할 기회 있을 때마다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무슨 목자냐? 당신들이 양들을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지금의 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시대의 목사들은 목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 역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양들 중에 하나이다” 이렇게 열변을 여러 번 토했지만 소용 없습니다. 여전히 자기들이 목자인 줄 압니다. 그런 생각들이 몸에 뱄습니다. 목사들은 지금보다 한 없이 더 낮아지고 겸손해 져야 합니다. 목사가 무슨 특권일 줄 아는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프랜시스 교황이 신부들 (목사들)에게 이렇게 말해서 그 말이 화제가 되었었잖아요? “여러분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여전히 교황도 목사와 양을 구별하고 있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목사들이 양 무리 속으로 들어가야 한 것은 퍽 인상적입니다. 목사가 무슨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말을 빌린다면, 목사는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고린도전서 3:22-23).
제가 클레아몬트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신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한 과목을 들었는데, 그 과목이 목회학에 해당하는 과목이었습니다. 거기서 한 책을 소개 받았는데, 리차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라는, 영국의 청교도 목사님이 쓴 ‘The Reformed Pastor’라는 책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구구절절이 목사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를 깨우쳐 주는 책이었습니다. 정말 양들을 위해서 깨어 있고, 돌보고, 자신을 모두 희생해야 하는 사람이 목사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하고, 자기 신앙의 성장을 위해서 애써야 하는지, 목사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목사라면 목자라는 타이틀을 가질 자격이 있겠다고요.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10-11절) 양들의 생명을 훔치고, 죽이고, 빼앗고, 파괴하는 사람은 목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버젓이 목자의 자리에 앉아 있고, 그 보다 더 한 명칭을 자기에게 갖다 붙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처럼 목자가 아니라 삯꾼입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돈이 탐나서 일하는 사람이지 목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참 목자의 삶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쳤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렇게 안 읽어서 그렇지 한번 보세요.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뭡니까? 가슴이 섬칫하지 않습니까? 정말 양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이 남긴 유서와 같은 말씀을 지금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도 목자를 안다고 했습니다 (14절).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알고 양들은 음성을 안다고 했습니다 (3-4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완전히 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안다 (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목자는 양들을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의 전부를, 양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아는 것입니다. 양들의 필요가 무엇이지 알고, 또 때를 따라 양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완전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목자라는 것입니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가는 것은 이런 목자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분을 따라가면 나의 생명이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풀을 뜯을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저 분의 보호 아래서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 분의 인도 아래서 나의 생명이 더 풍성해 질 것이다.” 목자에 대한 이런 신뢰가 없으면 어떻게 목자를 따라 가겠습니까? “하지만 양들은 낯선 사람을 절대로 따라가지 않는다 (5, 8절)”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또 자기를 ‘문 (the gate)’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9절)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출입 (出入)’이라고 합니다. ‘출입’은 우리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집을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 쉬고 잠을 잡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오고 나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문’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들어오고 나가면서 ‘문’이신 예수님을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정상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참 적절하게 자기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표현하셨습니다. 시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7-8)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 사방을 찾던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발견한다는 시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그분은 죄가 없으시며, 거짓을 말한 적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을 살피시는 목자와 보호자의 품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21-25)
마지막 절 25절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the Guardian of your souls.”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모두 양 같이 방황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목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들이 방황하는 이유는 목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참 목자가 되시고, 영혼의 가디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가디언’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가디언’는 부모를 대신해서 그 아이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가디언’은 부모를 대신하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책임 있게 관리하고 돌보시는 ‘가디언’과 같은 분이라고 합니다. Guardian이라고 할 때 ‘G’자로 대문자로 썼지요?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이분을 신뢰하고, 이분을 믿고, 이분을 따라가는 이상 우리의 삶은 안전합니다. 그리고 만족한 삶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목자로 삼고, 여러분의 영혼의 ‘가디언’으로 삼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에서 양이 할 수 있는 것은 목자를 신뢰하고 믿는 것입니다. 목자가 해야 하는 것은 양을 돌보고,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양들의 생명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이 아침에, 여러분의 인생을 ‘선한 목자 (The Good Shepherd)’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가디언 (The Guardian of our souls)’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맡기는 결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이 됩니다.
3/3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0
THE FIRST APOLOGIST
요한복음 9:18-41
오늘 말씀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된 사건의 여파(餘波)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3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의 불행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이 이 문제가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제들, 고난, 절망, 이런 것들이 아무 뜻 없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면, 그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잘 봐야 합니다.
제가 길고 복잡한 문제를 몇 가지 이슈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이 사건은 유대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실 성경을 읽어보면 이 사건 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라는 사람은 죽은 지 4일이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이 사건이 유대 사회에 주었을 충격은 이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인파가 모여 손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수많은 인파들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요? 이 성경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대제사장들은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였습니다.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예수님께 가서 그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유월절을 지키러 온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0-13, 17-18) 사실은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 내신 이야기가 성경에 또 한번 나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데요.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에 가셨을 때 이미 죽어서 관 속에 들어 있는 한 청년을 살려 내신 말씀입니다. 이 청년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아들이 죽자 모든 희망이 끊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 아들을 살려내서 어머니에게 돌려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11-15).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이 사건은 그렇게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오늘날에도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사람에 대한 사건은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습니다. 지금 같으면 ‘실검 순위 1위’로 떠 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맞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하고 비슷하기는 한데 그 사람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요한복음 9:8-9). 그도 그럴 것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앞을 못보고 길거리에 앉아 구걸을 하던 사람이 두 눈을 뜨고 있으니, 쉽게 믿어지겠습니까?
둘째로, 유대 지도자들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이 사람의 사건을 자세하게 조사했습니다. 조사한 이유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면밀하게 조사해서 사건의 진상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큰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사건이 진실이 아니라, 잘못 알려진 사건임을 입증해서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이 집중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본인을 두 차례나 심문했고, 그 부모까지 찾아가서 이 사람이 당신 아들이 맞는지 확인할 정도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 남자에게 묻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당신의 눈을 뜨게 하였다고 주장하는데,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의 부모에게 사람들을 보내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 맞습니까?” “그 아이가 우리 아들 맞습니다.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애가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그 아이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는지, 우리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는 자기 문제에 대해서는 자기가 대답을 할 만큼 나이도 먹었으니,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 보십시오.” (요한복음 9:23)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쫓아 내기로 이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22)
여러분, 이 말씀에서 그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적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인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회당에서 쫓아낸다고 했는데, 이것을 영어 단어로 ‘excommunication’이라고 합니다. 동사는 ‘excommunicate’입니다. 위의 말씀을 이렇게 잘 번역했습니다. “His parents said these things because they feared the Jews, for the Jews had already agreed that if anyone confessed him [to be the] Christ, he should be excommunicated from the synagogue.” (Darby Bible Translation) 한국 말로 번역한다면 ‘파문(破門)’입니다. 그 뜻은 ‘the ecclesiastical sentence by which a person is excommunicated’입니다. 유대사회 같은 종교사회에서는 회당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같은 것입니다.
셋째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이 사람 간의 대화를 한번 들어 보시지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오.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것을 알고 있소.”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 가지는 전에 제가 앞을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본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9:24-25) “흠, 그래? 그 예수라는 사람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시 말해 보시오.” “내가 이미 여러 번 말했는데, 무엇을 다시 듣고 싶으십니까? 혹시 당신들도 그분의 제자가 되려고 하십니까?” “당신은 그의 제자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들이오. 우리는 모세는 잘 알지만, 예수라는 사람에 대하여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조차 모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나의 눈을 고쳐 주었는데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다니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앞 못 보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말에 화가 난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놈이 감히 우리를 가르치려 해?’ 하면서 그 사람을 쫓아 내 버렸습니다.” (요한복음 9:25-34)
여러분, 이 사람이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이 사람은 온갖 위험과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자기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의 불행을 통하여 이런 식으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최초의 ‘apologist’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나사로 같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감만으로도 훌륭한 ‘apologist’로 살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사람은 적극적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해 준 예수님을 변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람보다 뒤의 사람인데,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apologist’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큼 장시간에, 열정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호한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대표적인 ‘apologist’는 제가 지난 해 부활절 예배에서 소개했던 Simon Greenleaf (1783-1853)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바드 법대를 창설한 사람입니다. ‘전도자의 증언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1846)’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의 전공은 법정에서 어떤 증거가 실효성 있는지에 대한 연구입니다. 이 사람은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아무 증거 없는 사건이라는 결론을 얻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사복음서에서 부활의 증거를 수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가 얻은 결론은 “부활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사건이 분명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스스로 얻은 결론을 부인할 수 없어서 자신이 크리스천이 되었고, 유력한 apologist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최고의 ‘apologist’는 C. S. Lewis (1898-1963)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Screwtape Letters, 1942)’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1950-1956)’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1952)’ 같은 수많은 기독교를 옹호하는 책들을 썼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는 그가 쓴 최대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신학적인 입장이나 전통의 차이점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시각에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런 요소들을 배제한, 순수한 기독교란 어떤 것인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번역이 잘된 번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불행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의 불행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런 경우 이 사람의 불행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불행을 통해서 이 사람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절망과 불행이 있습니까? 문제는 나의 불행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행히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사람을 결국 회당에서 쫓아냈습니다 (34절). 다시 이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그는 회당에서 쫓겨나는 불이익을 받았지만, 이제 이 사람은 이런 일을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는 사람이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를 만나러 오신 것은 감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겁니다. “너는 인자를 믿느냐?” “선생님, 인자가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너는 이미 그분을 보았다. 지금 너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주님, 제가 믿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들은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39절) “Then Jesus told him, ‘I entered this world to render judgment--to give sight to the blind and to show those who think they see that they are blind.’” 마침 옆에서 이 대화를 엿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 그럼 우리가 앞을 보지 못한단 말이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those who think they see (자기들은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는 시각장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잘 봅니다. 우리가 blind라고요?” 예, 이런 사람들이 blind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앞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영적 시각장애자 (spiritual blind)’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장애자가 아니고요. 눈은 잘 보이고 좋은 시력을 가졌으나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장애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장애를 가지고 있든지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장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장애자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이런 예수님의 생각과 관점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자유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3/30/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9
아직 빛이 있을 때
요한복음 9:1-17
오늘 말씀은 복잡한 것 같지만, 요점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해 주셨다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서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많이 있지만, 앞을 못 보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헬렌 켈러 (Helen Keller, 1880-1966)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삼 일만 볼 수 있다면, 첫째날은, 나에게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준 설리번 (Anne Sullivan) 선생님의 얼굴을 몇 시간이나 바라보고 그 모습을 내 마음 깊이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둘째 날에는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 나서, 서둘러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 온 자취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저녁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 날에는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아침 일찍 큰길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리고 나서, 오페라하우스와 영화관에 가 공연들을 보고 싶다. 그리고 어느덧 저녁이 되면, 네온사인이 반짝거리는 쇼 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와, 나를 사흘 동안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아시지요?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하여 알아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시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마태복음 11:4-5절 말씀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이사야 35:5-6 말씀을 대조해서 읽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 말씀은 메시야 시대가 되면 있을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에 대한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을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관점이라는 것이 곧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이렇게 앞 못 보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 때문입니까?” (2절) 이것이 그 당시 사람들이 불행을 해석하던 방식이었습니다. 인간의 불행은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합니다. 인간의 불행을 ‘human p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모두 해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봐야 인간의 불행의 문제가 비로소 해석됩니다. 이미 보았던 요셉의 불행, 욥의 불행, 그리고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고난과 불행과 절망의 문제는 오직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해석해야 비로소 풀립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This happened so the power of God could be seen in him). 이 말씀은 곧 이 사람의 불행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우리는 비록 내 삶 속에 불행한 일, 절망스러운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나의 불행이, 나의 절망이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보세요. “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 (이사야 45:7) 나의 불행을, 나의 절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일까요?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future and a hope.” (예레미야 29:11)
셋째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것은 단순히 이 사람이 보게 되었다는 의미 이상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The Word gave life to everything that was created, and his life brought light to everyone.” (요한복음 1:4)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요한복음 1:9) 이 사람이 빛을 보게 된 것은 곧 이 사람에게 그의 생명을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의 생명이 회복된 것입니다. 집에서도 쫓겨나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고, 인간 답게 살지 못했던 이 사람에게 빛이 비쳤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의 삶에 어느 날 홀연히 인생의 낮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람은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당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 틈에 낄 수 있고, 성전에 가서 예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한 인간으로 온전히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는 낮이 계속되는 동안,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4-5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낮과 밤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셨습니다. 낮은 빛이 있는 동안입니다. 이 빛 속에서 우리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빛 속에서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곧 아무도 일 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밤에는 빛이 없음으로 일 할 수 없습니다. 밤에는 모든 사람들이 일을 쉬고 안식을 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인생의 낮이 있고 밤이 있습니다. 아무리 일하고 싶어도 일을 할 수 없는 밤이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아직 빛이 있는 낮일 때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이 무슨 일일까요?
잠깐 이 질문을 답을 잠시 뒤로 미뤄 놓고요. 그 뒤에 나오는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이 마침 안식일이었습니다. 눈을 뜨게 된 사람이 바리새인들에게 불려갔습니다. 눈을 뜬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진흙을 내 눈에 발랐습니다. 내가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면 죄인인데, 죄인이 어떻게 이와 같은 표적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규정에 매여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규정에 매여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누가복음 6:9) 이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선을 행하는 일 (doing good deeds)’과 ‘생명을 구하는 일 (saving life)’은 율법의 규정보다 더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규정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일이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설교를 온라인으로 듣고 계시는 FKCC 여러분들, 한번 여러분의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이렇게 물에 떠내려가듯이 살다가 여러분의 인생을 끝내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설마 어렵게 공부해서 학위 받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겠지요?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전부는 아니겠지요? 뭔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처럼 곧 인생의 밤이 옵니다. 제가 캘리포니아 클레아몬트로 신학공부를 하러 왔을 때 나이가 31살이었습니다. 지금 60대 후반이 되었습니다.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러갔는지 정말 빨리 지나갔습니다. 제 인생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까요? 예, 많습니다. 가끔 무슨 범죄를 저지른 붙잡혀서 포토라인에 설 때가 있습니다. 여기 저기서 플래쉬가 터집니다. 어떤 사람이 큰 소리로 물어 봅니다.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후회는 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정말 엉망으로 살았으면서도 “제 인생에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후회가 없어요? 왜 한번도 인간 답게 살아 보지 못했으면서 왜 후회가 없어요?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풀거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았으면서 왜 후회가 없다고 합니까?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곧 인생의 밤이 옵니다.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이 빛 가운데서 여러분의 인생을 계획하세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계획이 아니라 참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으세요.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으세요. 이 말씀이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하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29/2020 | In Times Of Trouble 1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God Is Our Fortress
시편 46
사순절을 은혜롭게 보낸 중에 이 사달이 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런 중에도 사순절 새벽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다음 주일이 종려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 부활절 때까지 지금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고, 그 때까지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끔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지금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리더는 위기의 때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줘야 합니다. 하지만, 그 희망에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은 ‘COVID-19’ 사태가 아직 최고 (apex)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에 도달하고 커브가 꺾이려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평소에도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리고, 이 변화가 목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관심 때문입니다. AI가 미래의 삶을 바꾸는 중심에 있습니다. 10년, 20년 후의 인류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지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삶은 진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COVID-19’ 사태가 터졌습니다. 제 눈에는 이 ‘COVID-19’이 장차 변하게 될 인류의 삶을 실험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번 ‘COVID-19’ 사태가 진정이 되고 나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선 trans¬portation이 엄청 달라질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해외에 나가나 장거리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가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직접 현지에 가지 않고 원격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시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face to face로 이야기 하거나 상담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고 온라인 화상으로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COVID-19’ 사건으로 교수들은 온라인 수업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어, 온 라인 수업이 괜찮은데?” 하게 되면 많은 수업들이 온라인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사실 의과대학의 수업들은 일찍부터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는 것을 사람들은 꺼리게 될 것입니다. ‘COVID-19’ 사태가 진정이 되어도 말입니다. 수 백 명씩 모이는 세미나, 극장, 오페라, 연극 같은 공연장, 서로 따닥따닥 붙어 앉는 경기장, 레스토랑, 마켓, 카페 같은 곳들이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벌써 오페라는 관객 없는 공연을 하고 있고, UFC (종합격투기)도 관객 없는 경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가는 것 대신 delivery system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존이나 Whole Food같은 곳이 일찍부터 독자적인 delivery system을 발전시킨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신들이 한국에 대하여 신기하게 보는 것 중에 한국은 사재기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 사재기가 없는 것은 delivery system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잘 모르실 지 모르지만 이곳 보스턴에도 작은 delivery system을 갖춘 회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물건 몇 개라도 free로 배달해 줍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벌써 언론에서는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무용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것은 섣불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과연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를 온라인 예배가 대신할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예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미쉬들 (Amish)’입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지 않습니다. 마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걷습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삽니다. 교회에 예배 드리러 갈 때 그들은 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갑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힘들어도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입니다.” 저는 그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예배를 온라인 예배가 대신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교회의 온라인 찬양, 온라인 예배, 온라인 새벽기도, 온라인 성경공부가 상당히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당장에 호응이 있다고 해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가 교회에서 모여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말씀 듣고, 성도의 교제를 대신 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은 지금의 현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당하면서 우리교회가 그동안 해 온 media ministry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덕분에 우리교회는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은 고라 자손이 쓴 시편입니다. 고라 자손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성경에서 찾아 보시거나 구글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편은 그 주제가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항상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도와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두 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때는 그룹 혹은 공동체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는 개인의 의미가 강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백성이라는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셨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각 개인과 인격적인 언약을 맺으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가 너희와 맺는 ‘새 언약 (the new covenant)’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라 자손이 시편 46편을 쓴 이유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시를 써서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관계에서나, 적들로부터 추격을 받고 도망을 다니거나, 빚쟁이들에게 독촉을 받거나, 불안에 싸여 있거나...... 고라의 자손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COVID-19’으로 가장 취약하게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의료진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이 이런 사태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방호복’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을 보세요. 의사나 간호사들이, 또는 방역하는 사람들이 모두 우주인들이 입는 것 같은 ‘방호복’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방호복’을 입으면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는 하지만 바이러스의 공격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의료진 중에 이런 사태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 아마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미국은 의료진들이 지금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마스크 한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시편 46편을 쓴 사미스트는 ‘in times of trouble’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신다는 시를 썼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가 ‘in times of trouble’ 속에 있을 때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교회에도 의료진들이 많습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앞으로, ‘COVID-19’보다 더 심한 재난이 우리 앞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정말 우리가 ‘in times of trouble’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practically)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신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냥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는 정도로 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 (cheap grace)’ ‘값싼 위로 (cheap consolation)’입니다.
꼭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 삶에 실제적인 것이 되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설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인격적인 관계 설정인지 잘 모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내가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마태복음 7:22-23) 이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들의 삶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을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 (evildoers, NIV)’이라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뒤에서는 악한 일을 하는,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생활 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생기기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in times of trouble’ 속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5절) “아,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새벽부터 밤까지 지키시는구나. 나를 보호하시는구나!” 이것이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 주변의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것이 우리의 막연한 기분이나 느낌이라면, 이것은 ‘값싼 위로’ ‘값싼 은혜’입니다. 제발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이 나의 고백이 되고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내게 맡기신 것을 세상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That is why I am suffering here in prison. But I am not ashamed of it, for I know the one in whom I trust, and I am sure that he is able to guard what I have entrusted to him until the day of his return.”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가 주님을 아는 일과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는 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차근차근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배운 대로 말씀을 실천하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믿음이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 됩니다. 우리가 ‘in times of trouble’에 있을 때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는 실제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우리가 맞고 있는 ‘COVID-19’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기도하게 되었고, 그동안의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게 되었고, 실제적인 믿음을 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