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2019 | 사순절 새벽기도 설교 1

복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마가복음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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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저 10

경건생활에 힘쓰자 3 Train Ourselves To Be Godly

디모데후서 2:14-22

“경건생활에 힘쓰자”라는 제목으로 세 번째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닮는 삶이 경건생활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그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경건생활입니다.

십계명 중에 제 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in vain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는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지 마라 (do not misuse)’는 뜻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고 있습니까?

성경에 호세아 (Hosea)라는 예언자가 있습니다. 호세아는 기원전 730년경에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북왕국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했으니까 호세아가 예언자로 활약했던 때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때였습니다. 제가 호세아서를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호세아 6:1-3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다시 낫게 해 주실 것이요,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지만 다시 아물게 해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주시고, 사흘 째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 앞에서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날마다 새벽이 오듯이 주님도 틀림없이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다. 소나기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주님께서 오실 것이다.”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그게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들의 진심(眞心)은 아침 안개처럼 흩어지고, 이른 아침의 이슬처럼 쉬 사라지고 있구나.” 너희들이 말은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그 말 속에 진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하나님을 알자. 하나님을 힘써 알자!” 말은 이렇게 하는데, 그 말 속에 진심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과 기도, 성경공부, 이런 것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하다가 보면 아는 것도 많아지고, 말도 청산유수(靑山流水)같이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듣기에 “야, 저 사람 진짜 아는 것이 많구나! 야, 저 사람 믿음이 좋구나!” 이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다면 그런 말들이 모두 하나님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닮는 경건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뻔뻔한 위선자 (hypocrites)가 될 뿐입니다.

경건생활은 지금까지의 이런 잘못된 모습들을 벗어 버리고,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Coram Deo (in the presence of God)’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대면(對面)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감추거나 꾸미지 말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고쳐 나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디모데후서 본문 말씀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 (15절)”고 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ork hard so you can present yourself to God and receive his approval.”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내 보일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심을 숨길 때가 있습니다. 일하기 싫어도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원래 게으른 사람이라도 부지런한 사람처럼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방식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2:3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를 존중하는 사람을 나도 존중하고 나를 멸시하는 사람을 나도 멸시하리라.” “But I will honor those who honor me, and I will despise those who think lightly of me.”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한 말씀입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금방 알아챕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솔로몬은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잠언 3:6)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원리가 똑 같습니다. ‘황금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The Golden Rule’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12이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황금률’은 인간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기를 원하면, 우리도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만, 미가 6:8 말씀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The Lord has told you what is good, and this is what he requires of you. to do what is right, to love mercy, and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옳은 일을 하는 것, 자비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to walk humbly with your God’ 하나님과 함께 겸손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3장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는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For you are careful to tithe even the tiniest income from your herb gardens, but you ignore the more important aspects of the law-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너희들은 허브 정원에서 나오는 작은 것의 십일조를 바치는 데 열심이지만, 너희들은 더욱 중요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있다. 그것은 정의와 자비와 성실이다).” (마태복음 23:23)

제가 이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머리 속에 미가 6:8 말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에도 미가 6:8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정의를 따르고, 자비를 실천하고, 겸손하게, 혹은 성실하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는 사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경건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건생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생활이라는 것이 단순히 성경 많이 읽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생활은 하나님을 닮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경건생활입니다. 우리 믿음생활이 좀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좀 더 읽어 내려가면 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They will act religious, but they will reject the power that could make them godly. Stay away from people like that!)” (디모데후서 3:5)

경건생활에 대한 커리큘럼을 짠다면 ‘성결한 삶’에 대한 과목이 꼭 들어갑니다. ‘성결의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성결한 삶’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결한 삶’이란 ‘정결한 삶’ ‘깨끗한 삶’ 혹은 ‘거룩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고, 나무그릇과 흙으로 빚은 그릇도 있다. 이 중에 특별히 귀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평범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이다. 네가 악을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면, 주님이 쓰기에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이다.” (20-21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해합니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금 그릇’ ‘은 그릇’ ‘나무로 만든 그릇’ ‘질그릇’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악을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If you keep yourself pure)’ 이 구절입니다. 우리가 가진 역량 (abilities)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abilities’가 많은 사람이 있고, ‘abilities’가 적은 사람이 있습니다. 역량이 많은 사람은 비유적인 의미에서 ‘금 그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량이 적은 사람은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 그건 공평하지 않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릇마다 사용하는 용도가 있거든요. ‘금 그릇’에 담으면 알맞은 음식이 있고, ‘질그릇’에 담으면 알맞은 음식이 있습니다. 된장찌개는 ‘금 그릇’에 담으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질그릇’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는 생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돕니다. 샐러드 같은 음식은 ‘나무 그릇’에 담으면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문제는 내가 무슨 그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이 쓰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청년의 시기는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의 중요성을 모르고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는 일에 게으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젊은 청년들이 빠지기 쉬운 욕망이 있다고 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런 욕망을 ‘youthful lusts’라고 했습니다. 사전에는 ‘lusts’라는 말이 ‘very strong sexual desire (매우 강한 성적인 욕망)’라고 나와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에 충분히 이런 욕망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 마약이나 도박이나 이런 것에 빠져 중독될 수도 있고, 잘못된 이단 종교에도 빠질 수 있습니다. 보스턴에 신천지 교리를 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청년의 시기에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잘못된 길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 (22절)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pursue’라는 말은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seek’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이런 것들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중한 가치임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혼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친구들과 같이 이런 것들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시기에 ‘youthful lusts’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공동체 안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companionship’을 갖는 것입니다.

“Enjoy the companionship!”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 드리는 친구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친구들과 함께 우리는 청년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치들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청년의 시기에 빠지기 쉬운 ‘youthful lusts’를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내 삶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평화, shalom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이것이 청년의 시기에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경건생활입니다.


3/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9

경건생활에 힘쓰자 2 Train Ourselves To Be Godly

디모데전서 4:9-16

오늘 설교는 지난 주 설교의 속편(續編)입니다. 지난 주에는 ‘육체의 훈련’과 ‘경건의 훈련’이 어떻게 다른 지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집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지금 이대로 계속되기는 쉽지만,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삶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합니다. 에베소서 5:1에 보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십시오 (Therefore 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경건의 삶’이란 정확하게 하나님을 본받는 삶입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godly life’입니다. ‘godly’라는 말은 하나님을 닮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잘 따라 사는 삶을 ‘경건의 삶’이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삶’을 겉으로 드러나는, 혹은 눈에 띄는 말이나 행동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에베소서 5장 말씀을 읽다가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어, 하나님 앞에 향기나는 희생 제물이 되셨습니다.” (2절) ‘경건의 삶’이란 하나님을 닮는 삶인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사방에 났습니다. 시리아에도 예수님의 소문이 나서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리스에도 예수님의 소문이 났습니다. 아마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나 상인들 (caravans)을 통해서 예수님의 소문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은 대번에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지혜’를 들으러 온 것입니다. 그들은 ‘소피스트들 (sophists)’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법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히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한복음 12:24-25)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화롭게 하였고, 또다시 영화롭게 할 것이다 (I have already brought glory to my name, and I will do so again).” 와! 정말 굉장한 말씀 아닌가요? 성경의 진리는 ‘소피스트들’이 찾아 다니는 말 장난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야,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긴데?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어?” 성경의 진리는 그런 진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핵심은 한 알의 밀알처럼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진리입니다. 밀 알 하나가 땅에 심겨 죽으면 거기서 싹이 나고 줄기가 돋고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희생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이 진리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너는 이미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였다. 그리고 네가 십자가를 질 때 내 이름이 다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의 삶’이란 우리의 겉 모습이 전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희생을 닮은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건의 삶’입니다. 이 ‘경건의 삶’의 핵심을 모르고 자기 만족을 위해 ‘경건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성경 읽고, 내가 이만큼 기도한다는 자기 만족을 위해서 ‘경건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할 뿐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그대가 젊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그대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범을 보이십시오. 말과 행동, 사랑과 믿음, 그리고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12-13절) 이 말씀을 잘 보세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나이가 젊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이가 많다는 것이 더 문제가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믿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초를 누군가에게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아직도 젖을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You have been believers so long now that you ought to be teaching others. Instead, you need someone to teach you again the basic things about God's word. You are like babies who need milk and cannot eat solid food).” 히브리서 5:12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오래 되신 분들은 모두 이 교회에서 ‘영적인 리더십 (a spiritual leadership)’을 가진 지도자들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을 올바른 길로 잘 인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 중에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가이드 (guide)’를 만나는 것입니다. 좋은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지에서 꼭 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빠뜨리지 않고 모두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명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이드’를 잘못 만나면 여행에서 꼭 봐야 할 곳을 빠뜨리게 됩니다. 제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면서도 못 가 본 곳이 두 군데가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가 살았다는 ‘베다니 (Bethany)’ 마을을 못 가 봤습니다. 제가 ‘가이드’에게 가자고 했더니,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가 봐야 별 것 없다고 하면서 지금 이 시간에는 차가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또 에베소 (Ephesus)에서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던 곳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이드’에게 마리아의 집에 가자고 했더니, 가 봐야 별 것 없다고 하면서 갈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 지도자’는 여행지의 ‘가이드’와 같습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 것은 공동체가 받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영적 지도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 대부분이 큰 교회의 목사들입니다. 모두 설교를 잘 하는 분들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있다고 어디를 가든지 팬들을 몰고 다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존경받는 ‘영적 지도자’로 남아 있는 분들이 별로 없습니다. 모두 설교는 잘 하지만, 삶이 뒷받침이 되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보세요. 지금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디모데에게 하고 있습니다. “네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것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성경의 진리를 잘 깨우쳐서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범이 되는 삶을 보여주기 바란다.” (12절) “Be an example to all believers in what you say, in the way you live, in your love, your faith, and your purity.” ‘in what you say (네가 하는 말에서)’ ‘in the way you live (네가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in your love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에서)’ ‘in your faith (네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in your purity (너의 깨끗한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라고 합니다. 모범이 되라는 말은 말과, 삶의 방식과, 사랑과, 믿음과, 성결한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닮고 있는지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 리더십’입니다. 이런 사람은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상관없이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Until I get there, focus on reading the Scriptures to the church, encouraging the believers, and teaching them.” (13절) 예전에는 개인용 성경이 없으니까 성경 두루마리 (scrolls)를 펴서 교인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이제 성경 찬송이 전화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저도 심방 갈 때 꼭 성경 찬송을 들고 가지 않아도 전화기 속에서 찾아서 찬송도 부르고, 성경도 읽을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경건생활’은 성경을 읽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성경 읽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분들은 성경을 읽는 목적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성경을 알려고 성경을 읽습니까?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어서 성경을 읽습니까? 성경을 읽는 목적은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 말씀을 읽었으면 이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을 닮으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내 주시고, 희생하신 하나님을 닮으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변화되지 않겠습니까?

“Focus on encouraging the believers.” (13절) 주변의 크리스천들을 격려하는 데 집중하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0:24-25 말씀이 생각납니다. “서로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며 선한 행동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처럼 교회의 모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 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볼수록 함께 만나며 서로를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경건생활’의 한 방편입니다. 성경을 읽고 덮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배우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 격려가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로마서 12:15-16)”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의 ‘경건생활’이 들여 다 볼 수 있습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을 귀하여 여기고”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이고,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을 닮는 ‘경건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는 우리의 경건생활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어디까지 발전하고 성장해야 하는지 목표가 있습니까? 성경에 ‘경건생활’의 목표가 있습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여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15)

이번 사순절이 나의 ‘경건생활’을 반성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경건생활’이 나의 만족을 위한 천박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정말 내가 하나님을 배우고, 닮고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이번 사순절이 나의 ‘경건생활’을 총체적으로 반성해 보고, 새로워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24/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8

경건생활에 힘쓰자 1 Train Ourselves To Be Godly

디모데전서 4:4-8

사순절이 가까이 가까웠습니다. ‘사순(四旬)’은 40이라는 뜻입니다. 환갑을 ‘육순(六旬)’이라고도 합니다. ‘순(旬)’은 ‘10일’이라는 뜻입니다. ‘환갑’은 60세 생신을 말합니다. 교회에서 ‘사순절’이라고 할 때는 예수님의 부활절부터 거꾸로 계산해서 40일째 되는 날을 계산해서 그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계산할 때 주일은 빼고 계산합니다. 영어로는 ‘렌트 (Lent)’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사순절’에 금식과 참회와 절제를 하면서 마음과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도록 권장해 왔습니다. 이 기간에는 육식(肉食)을 피하고, 생선류만 먹도록 했습니다. 처음에는 음식뿐 아니라 이 기간에 연극이나 무용, 연애 소설, 영화 등을 보는 오락이 금지되었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선(慈善)이나, 예배 참석, 기도 등을 권장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것들이 많이 완화되어서 각자가 이 기간을 의미 있게 보내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개신교 (Protestant)에서는 ‘사순절’의 의미를 그 동안 크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 ‘사순절’을 의미 있게 지키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수십년 동안 ‘사순절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이 기간을 교회의 ‘영적각성 (spiritual awareness)’의 기간으로 삼아왔습니다. 새벽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식사하고, 학교나 직장으로 가고, 청년부는 저와 팀별로 티타임을 하면서 서로 가까워지는 소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올해는 청년부만 아니라 코아부까지 티타임을 갖도록 하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전서의 기록 연대는 대략 서기 63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견해가 다르긴 합니다만, 서기 63년이면 바울이 로마에서 투옥되었다가 잠깐 석방되었던 때입니다. 디모데후서는 그보다 좀 더 늦게 바울이 다시 투옥되었던 때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때 디모데가 몇 살이나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디모데후서 2:22)”고 한 것으로 보아 대략 25살, 많아야 30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디모데전서나 후서는 디모데가 교회를 섬기는 데 필요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이단 사상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분류할 때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를 ‘The Pastoral Epistles (목회서신)’로 분류합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특히 눈 여겨 봐야 할 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경건의 훈련 (training for godliness)’에 힘 쓰도록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훈련’과 상대적인 훈련은 ‘육체의 훈련 (physical training)’입니다. 우리 교회에 청년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는데, 청년들 중에 ‘physical training’을 꾸준하게 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길에 gym에 가서 꾸준하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에 근육이 생기고, 뼈가 튼튼하게 되고, 힘이 세지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이 자신감이 생깁니다. 저도 청년 때에 ‘Physical training’을 열심히 했습니다. 어디가면 “야, 몸이 좋으시네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몸이 튼튼하게 되고, 자신감이 생기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도움을 준다 (For physical training is of some value, NIV)”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는 특히 올림픽 경기로 유명합니다. 고대 올림픽 경기가 기원전 776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까 그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들은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도시 곳곳에 훈련장들 (gymnasiums)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의 경기 모습들이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모두 기원전 400-500년 경의 것들입니다. 미론 (Myron)의 ‘원반 던지는 사람 (Discobolus)’은 원래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2세기경에 대리석으로 카피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때도 여전히 사람들의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디모데가 교회를 섬기고 있던 에베소에서도 사람들의 몸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디모데도 그때 청년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의 몸에 대한 관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는 어느 gym에 등록을 하고 physical training을 열심히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저께 ‘암을 일으킬 수 있는 15가지 음식’이라고 해서 읽어 봤더니, 이것도 좋지 않고, 저것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마이크로 오븐에서 튀긴 팝콘도 좋지 않다고 합니다. 캔에 들어 있는 음식은 무조건 다 안 좋고, 생선도 바다에서 wild catch한 것을 먹어 야지 farm (농장)에서 기른 것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Wild catch한 것과 farm에서 기른 것은 생선 색깔이 다릅니다. farm에서 기른 것은 핑크 빛이 돌고, wild catch한 것은 검붉은 빛이 돕니다. 그런 것을 먹어야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건강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높아지고 있는데, 막상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주변에 별로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건강한 몸을 소유하는데 쏠려 있을 때,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디모데, 최근에 gym 회원권을 끊었다는 말을 들었다. 열심히 운동하고 있다지? 건강 하고 아름다운 몸을 소유하기 위하여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운동에 빠져 영적인 훈련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네가 육체적 훈련을 하는 만큼 영적인 훈련에 마음을 쏟는다면 더 많은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인생의 참된 목적과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도 이런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다면 인생의 참된 목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언젠가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의 말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유럽의 철학자들과 견줄 만한 철학자가 별로 없습니다. Emerson은 미국이 자랑하는 철학자입니다. 보스턴에서 태어났고, Concord에서 살았습니다. 이곳 케임브리지에서는 약 30분 정도 가면 콩코드 (Concord)가 나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the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성공이란 무엇인가? 많이 웃고, 지성인들의 존경을 받고, 어린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정직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고, 나쁜 친구들의 배반을 참고,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건강한 아기를 낳든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든지,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지 해서 좀더 나은 세상을 남기는 것, 그리고,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았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더 행복하게 된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성공적으로 인생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하고 싶었던 말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성공적인 삶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자에게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공적인 삶’이란 ‘거룩한 삶 (a holy life)’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참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마도 대답을 못하고 주저할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두가지 이유입니다. 정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대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보세요. “God has called us to live holy lives, not impure lives (하나님은 우리가 (성결 하지 못한 삶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데살로니카전서 4:7)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But you must be holy in everything you do, just as God who chose you is holy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위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베드로전서 1:15)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으로 76억 8천 6백만명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은 우리를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불러내신 것 (He has called us out of the world)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저와 여러분을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 살지 말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불러내신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속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4-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ince everything God created is good, we should not reject any of it but receive it with thanks.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①Or made holy

예외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acceptable)’ 것이 되려면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양육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의 삶은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나와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갈급하다’는 말은 목이 마르다는 말입니다. 시편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습니까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시편 42:1) 목마른 사슴처럼 말씀을 갈급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한가하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으로 치열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간절히’라는 말은 ‘earnestly’ ‘intently’ ‘urgently’ ‘fervently’라는 말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런 기도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기회가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에 성경 말씀을 읽다가 마음에 큰 도전을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큰 기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There is a wide-open door for a great work here, although many oppose me).” (고린도전서 16:9)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가 꼭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큰 기회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wide-open door’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가기 위해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잠도 이겨야 합니다. 게으름도 이겨야 합니다. “뭐,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하는 마음도 이겨내야 합니다. 이번 사순절에 말씀과 기도로 양육을 받으십시오. 우리의 삶이 변화될 수 있는 “wide-open door’가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2/17/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7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자 Acknowledge God In Everything You Do

시편 118:5-16

오늘은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시리즈 설교 일곱 번째로,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오늘 설교 제목을 보면서 잠언 3장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할 것입니다. 잠언 3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슬기를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스스로 지혜로운 체하지 마라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Don’t be impressed with your own wisdom. Instead, fear the Lord and turn away from evil).” (5-7절)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 말씀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 것 같은데, 이게 어렵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신뢰하기는 쉬운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국에서 사용하는 동전이나 지폐 뒷면에 작은 글씨로 “In God, we trust”라는 글이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혹은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다른 것도 아닌, 돈에 그런 글이 쓰여 있다는 것이 참 아이로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입니다. 돈의 가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의 김영철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미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북한도 핵무기를 폐기하면 이렇게 미국처럼 잘 살 수 있다고 회유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납니다. 북한은 밤에 전력 사정이 나빠 불을 켤 수조차 없는데, 한 밤 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빌딩 숲 (skyscraper)을 보면서 북한의 실력자 김영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미국의 자본주의의 힘을 목격하면서 자기 조국은 언제 이렇게 살게 되나 싶어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았을까요? 이런 미국에서 사용하는 돈에 “우리는 돈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글이 쓰여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위에 나라를 건설했던 미국의 건국 이념을 반영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돈의 힘을 믿고, 지식의 힘을 믿고, 권력의 힘을 믿는 것은 쉽습니다. 이런 시대의 조류 속에서 이런 것들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이제 이런 주장은 박물관에나 전시되어 있을 법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나를 신뢰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냐?” 저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를 신뢰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들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과 지식과 명예와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은 ‘trust in’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은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acknowledge’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acknowledge’라는 말은 앞의 ‘ac’이란 말과 뒤에 ‘knowledge’라는 말이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knowledge’라는 말은 ‘know (알다)’라는 동사에서 ‘knowledge (지식)’이라는 명사가 파생되었습니다. 앞에 나오는 ‘ac’이라는 말은 ‘accord’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accord’라는 말은 ‘조화를 이루다’ ‘합의하다’ ‘동의하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상상력을 동원해서 설명한다면, ‘acknowledge’라는 말은 내가 아는 지식과 조화를 이루어 사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동의(同意)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 외에 다른 곳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계시(啓示, revelation)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중대한 오류(誤謬, error)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배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그들의 예배는 희극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만든 생각을 마치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가르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7: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사야 29:13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는 약 700년이 시간적인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신 것을 보면 700년 동안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700년이면 세상이 변해도 몇 번이 변했을 기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700년 동안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이런 유대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보시면서 “목자 없는 양 같아 측은하게 여기셨다 (마태복음 9:36, 마가복음 6:34)”는 말씀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잘못하면 ‘farce (코미디, 희극)’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께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는 모든 행위가 진실되지 못한 종교적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웃기는 일’이 되고, ‘코미디’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사님들이 아무리 강단에서 사람을 (나를)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설교해도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면 으레 목사들이 그런 설교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를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이 신자들의 삶에 아무 effect가 없습니다.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나오면서도,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어차피 하나님이 누군지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나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우리들의 믿음생활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118편 말씀을 볼까요? 이 시편은 누가 쓴 것인지 저자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저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이 시편을 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고 나를 풀어주셨습니다.” (5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6절)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 나는 승리 가운데서 나의 적들을 바라볼 것입니다.” (7절) 재미 있는 것은, 사도 바울도 어렵고 힘든 읽을 겪을 때 이 시편을 많이 읽었던 것 같습니다. 보세요. 그가 세상을 향해서 이렇게 선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로마서 8:31)
 
여러분, 시편 118편이나 로마서 8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구체적인 삶에 적용되는 지식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처럼, 아무리 하나님께서 대한 심오한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이 실제적인 지식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렇고, 시편 118편의 자자도 그렇고, 그들은 하나님을 책에서 읽고 배워서 안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나면 그들은 즉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셨습니다. “In my distress I prayed to the Lord, and the Lord answered me and set me free. The Lord is for me, so I will have no fear. What can mere people do to me?” (5-6절,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믿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신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10년 후에, 아니 20년 후에,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여러분의 예배와 기도가 ‘farce (코미디, 희극)’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믿음생활에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Religion doesn’t save you, change you, heal you, or set you free. Jesus does (종교는 당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변화시키지 못하고, 치유하지 못하고, 당신을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중단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요한복음 14: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 (the way)”입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J. I. Packer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 (Knowing God)’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청년들을 보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또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기도하는 청년들을 보는 것입니다. 몇 년 전까지 J. I. Packer의 책이 많이 유행했었는데, 이제는 이 책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 말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고 잘 번역되어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시편 118:8-9)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왕자들을 찾아갑니다. 개역성경에는 ‘왕자들’이라는 말을 ‘고관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사람들을 ‘고관들’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을 쓴 저자는 우리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을 더 신뢰하고 고관들을 더 신뢰하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더 신뢰합니다. 시편 118편의 저자와 우리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시편 저자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이론적인, 단순히 신학적인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적인 지식이었습니다. 머리 속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에 적용되는 지식이었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Dave Willis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Faith isn’t a feeling. It’s a choice to trust God even when the road ahead seems uncertain (믿음이란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앞에 놓여 있는 길이 불확실하게 보여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하는 선택입니다).” ‘모든 일에 (in everything you do)’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길에 ‘certainty (확실성)’가 보일 때도, ‘uncertainty (불확실성)’가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의 저자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소원합니다.” (마가복음 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