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6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자 Hear The Word And Put It Into Practice

마태복음 7:24-27

마태복음 5-7장까지의 말씀을 ‘산상설교(山上說敎)’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가셔서 설교하셨다고 해서 ‘산상설교 (Sermon On The Mountain)’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이라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산이 아니라 조금 높은 언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부뚜막 바로 옆에 소금이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금을 음식에 집어넣지 않으면 음식의 간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님의 주옥같이 귀한 말씀이지만, 그 말씀을 나의 삶에서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전에 어느 신발 공장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신발 공장에서 시장을 개척하기위해서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로 갔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신발을 신지 않고 맨 발로 다니는 모습을 본 신발 공장 판매원들은 흥분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 모두 신발을 신는다면 앞으로 매상이 많이 오를 것이라고 모두들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신발을 신으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 설명해 줬습니다. 신발을 신으면 뱀이나 독이 있는 벌레들이 물지 않으니까 안전하는 것, 그리고 신발을 신으면 숲에 갈 때도 가시에 찔릴 염려가 없다는 것, 그리고 또 비가 올 때도 신발을 신으면 발이 젖지 않아서 좋다는 것을 말해줬습니다. 신발 공장 판매원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발을 하나씩 공짜로 나누어 줬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신발을 신어 보면서 모두들 좋아하면서 돌아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신발 공장 판매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다들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신발을 신지 않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글쎄요. 우리가 왜 신발을 신지 않았지요?” 신발을 신으면 왜 좋은 지 수십 번을 말해주고, 신발을 공짜로 나누어 주었지만, 오랫동안 신발을 신지 않고 살았던 그 마을 사람들의 관습을 바꾸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르치는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실천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yone who listens to my teaching and follows it is wise, like a person who builds a house on solid rock.” “누구든지 나의 교훈을 듣고 그 교훈을 따르는 사람은 견고한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데서 끝나지 않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에 대한 말씀은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시편 1편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합니다. 그들은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새가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 (2-3절) 개역성경에는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묵상’이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meditate (깊이 생각한다)’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묵상한다’는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큐티 (QT)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서도 무엇을 묵상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말씀을 깊이 생각함과 동시에 내가 어떻게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묵상하는 것입니다.

‘mediate’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יֶהְגֶּ֗ה (yeh·geh)’입니다. 제가 ‘mediate’ 혹은 ‘meditation’의 의미가 영문 번역성경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대조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The Living Bible 이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But they delight in doing everything God wants them to, and day and night are always meditating on his laws and thinking about ways to follow him more closely.” 직역하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들을 실천하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밤낮으로 항상 생각하고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신 의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따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의도 (intention)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또 누가복음 11:28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But even more blessed are all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put it into practice)." 하나님의 말씀은 일관되게 인생의 참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에 복 있는 사람은 기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곳에 인생의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7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집을 짓되 ‘견고한 반석 (solid rock)’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인생의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삶이 참 약합니다. 깨지기 쉽고, 상처 받기 쉽고, 절망하기 쉽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찬송가 67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그 크신 사랑 늘 찬송하라 (1절).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3절).” 질그릇이 무슨 그릇인지 아시지요? 영어로는 ‘earthenware’라고 합니다. 진흙에 아무 것도 섞지 않고 그릇 모양을 만들어 뜨거운 불에 구워 내면 질그릇이 됩니다. 이런 그릇은 값이 싼 대신 쉽게 깨집니다. 조금만 어디 부딪치면 금이 갑니다. 그런데, 그릇 만드는 기술이 발달해서 지금 그릇들은 웬만하면 깨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은데, 집의 기초까지 허술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집이 거센 비바람을 만나고 풍랑을 만나면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기초가 견고한 바위 위에 세워진 집은 그런 때도 넘어지지 않고 견딘다는 것입니다. 누가 인생의 집을 견고한 바위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내 말을 듣고 그 말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많은 청년들이 출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맡겨 주신 사명이고 책임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청년 여러분들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청년들이 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청년들은 예배 다 끝난 다음에 2시나 되어서 교회에 나타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여러분들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금요일에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고 말씀 듣고, 성경 공부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주일이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성가대원으로, 오케스트라 대원으로, 교사로, 간사로 섬기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전에 어떤 어머니가 한국에서 방문 오셨습니다. 여기 계시는 동안 교회에 열심이 나오셨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저하고도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에게 MIT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많은 청년들이 나와 예배 드리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 어머니가 아들에게 교회에 가자고 사정해서 그 아들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왜 아들이 한번 교회에 나오고는 안 나오느냐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도 아들에게 계속 교회에 나가자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그 아들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What a waste of time (그건 정말 시간 낭비예요)!”

여러분 중에는 그런 말 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시간이 시간 낭비라니요? 여러 교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송 부르는 그 시간이 시간 낭비라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시간이 시간 낭비라니요?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와 예배 드리고, 기도하고, 새벽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드리는 그 시간은 시간 낭비가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의 기초가 ‘solid rock’ 위에 세워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기초가 ‘bedrock’ 위에 단단하게 세워지는 시간입니다. 이 기초만 잘 만들어지면 그 위에 어떤 집을 세워도 끄덕 없을 것입니다. 거센 바람이 불어도 견디어 낼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말씀을 배울 때는 은혜를 받은 것 같은데,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질문이 생깁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이 모두 사실일까?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이 말씀대로 따라서 하면 되는 것인가? 안 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는데 기준이 되는 것은 자기 지식과 자기 경험입니다. 내가 알면 얼마나 알고, 내가 경험을 했으면 얼마나 경험을 했겠습니까? 이렇게 완전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결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거의 예외 없이) 희생 (sacrifice)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이 희생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겁을 냅니다. 이 겁은 지금까지 한번도 걸어보지 않는 길을 걸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희생을 감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기심 (selfishness)과 부단히 싸워 이겨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그렇습니다.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으로 옮기기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뭔가 엑스트라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다음에 하지. 또 기회가 오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뒤로 미룹니다. 뒤로 미루자고 생각하면 부담스러웠던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지금 교회의 미래는 상당히 어둡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된다면 아직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old’한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생활에도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언제까지 진부한 믿음생활을 계속하겠습니까? 지난 세대 사람들은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새 시대에 맞는 크리스천의 삶의 모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 모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모델이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미래는 전적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희생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작은 일부터 행동으로 실천하는 일을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조용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2/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5

말씀의 정도(正道)를 걷자 The Right Way We Should Walk

여호수아 1:1-9

오늘 말씀은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었습니다 (Moses was the LORD's servant)”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모세의 이름 앞에 ‘여호와의 종 (the LORD's servant)’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입니다. 40년을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으니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3:11)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one speaks to a friend (하나님께서 모세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친구에게 말하듯이 말씀하신곤 했습니다).” 이 모세의 이름 앞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다른 어떤 칭호보다 가장 영광스러운 칭호가 아닐까요?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임명을 받습니다. 장로를 영어로 elder라고 합니다만, 연장자라는 뜻도 있고 선배라는 뜻도 있습니다. 권사는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직입니다. 집사는 deacon이라고 합니다. ‘deacon’이라는 말은 희랍어 ‘diakonos’에서 온 말입니다. 그 뜻은 ‘servant (섬기는 사람, 하인)’입니다. 성경에서 모세를 ‘하나님의 종 (Lord’s servant)’라고 했는데, 영광스럽게도 오늘 임명 받는 여러분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이름이 주어집니다. 오늘 임명을 받는 여러분들은 주님을 섬기는 ‘Lord’s servant’로 임명을 받습니다.
 
‘servant’라는 말을 생각하면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누가복음 22:27) 오늘 임명 받는 여러분들은 섬김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 (servants)’입니다. 여러분들은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서서 시중드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자기 자신을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서서 시중드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자신을 시중드는 ‘servant’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식탁에 앉아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오래 전에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음식 값이 꽤 비쌌습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식사 시간 내내 한쪽에 검은 색 옷에 나비 넥타이를 매고 흰 타월을 팔에 걸친 웨이터가 서 있었습니다. 식사하는 손님에게 필요한 것이 없는지 살피고 있다가 필요한 내색만 하면 금방 와서 요구를 들어줍니다. 그런 레스토랑이 처음이어서 약간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대접을 잘 받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servant’였던 모세는 섬기는 사람으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잘 감당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Moses was certainly faithful in God's house as a servant., 히브리서 3:5)”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서번트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 (qualification)이 있다면 그것은 ‘faithfulness’입니다. 우리 말로 ‘성실함’ ‘신실함’ 혹은 ‘충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실함,’ 그 사람의 ‘신실함,’ 그 사람의 ‘충성’입니다. 바울도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고린도전서 4:2)”라고 했습니다. ‘충성’이라는 말이 바로 ‘faithfulness’입니다. 오늘 임명 받는 여러분들도 여러분이 가진 ‘능력’으로 섬기려고 하지 말고, ‘성실함’으로, ‘신실함’으로, ‘충성’으로 주님의 교회를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본래 모세의 ‘조수 (assistant)’였습니다 (출애굽기 33:11).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 중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로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들어갔던 스파이였습니다. 열 두 사람의 스파이 중 유다 지파와 갈렙과 여호수아 두 사람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보고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다른 스파이들과 달랐던 것은 이 두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믿음이 두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민수기 14:6-9).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하여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 외에 여호수아가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 나가서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 17:9). 그 때 그 전쟁은 이상한 전쟁이었습니다. 전력의 크고 작음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이 아니라,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올리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가면 아말렉이 이기는 그런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엄숙한 교훈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현장에 여호수아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다음 세대의 역사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는 이 청년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 이후 다음 세대를 그렇게 은밀하게 준비하고 계셨지만, 광야생활 40년의 역사 중에 여호수아의 역할은 눈에 띌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습니다. 모세의 죽음 앞에 이스라엘 민족은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슬픔을 넘어 그것은 절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할 것이며, 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너를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결코 너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는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장차 너는 백성을 이끌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땅은 내가 이 백성의 조상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땅이다.” (여호수아 1:5-6)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I will be with you as I was with Moses. I will not fail you or abandon you. Be strong and courageous, for you are the one who will lead these people to possess all the land I swore to their ancestors I would give them.”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난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여호수아 너는 이 백성을 이끌고 내가 네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소유할 사람이다.”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 7-8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종 모세가 너에게 준 모든 가르침을 빠짐없이 지키도록 하여라. 네가 그 가르침대로 행하며 왼쪽으로나 오른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그대로 지키면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다. 언제나 율법책에 씌어 있는 것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소리 내어 읽어라. 그리하여 거기에 씌어 있는 모든 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또 성공할 것이다.” “Be careful to obey all the instructions Moses gave you. Do not deviate from them, turning either to the right or to the left. Then you will be successful in everything you do. Study this Book of Instruction continually. Meditate on it day and night so you will be sure to obey everything written in it. Only then will you prosper and succeed in all you do.” (New Living Translation)
 
아무리 하나님께서 모세 이후를 준비하셨다고 해도 여호수아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들었을 때 그가 가졌을 두려움과 불안감이 얼마나 컸을 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반복해서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용기를 내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호수아에게 주신 사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호수아에게 탁월한 리더십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관심을 가지고 성경 여호수아 말씀을 읽어 보면 여호수아의 리더십이 보입니다. 그 리더십은 어떻게 보면 무모할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따라가는 리더십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 그런 리더십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좌(left)로나, 우(right)로나 치우치지 않는 말씀의 정도를 걷는 리더십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믿음을 테스트하셨습니다. 말도 안되는 말씀을 주시면서 여호수아의 믿음을 테스트하셨습니다. 그들 앞에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서 있는 여리고 성의 주민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전쟁에 나갈 사람들에게 할례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어쩌다 보니까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할례를 받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호수아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말씀의 정도를 걷는지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테스트하신 하나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그의 자녀들을 테스트하십니다. 여러분, 구약 이사야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비록 주께서 너희에게 슬픔의 빵과 고통의 물을 주셨으나, 여호와께서 여전히 너희와 함께 계시며 너희를 가르치실 것이다. 너희가 직접 너희를 가르치시는 분을 뵙게 될 것이다. 너희가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잘못된 길로 가려 하면 뒤에서 ‘이 길이 옳은 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는 소리가 너희 귀에 들릴 것이다.” (이사야 30:20-21) 지금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가르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요한복음 14:17). 우리가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때 “이 길이 옳은 길이니 이 길로 가거라” 하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정상적인 크리스천들은 모두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확신합니다. 말씀 (진리)에서 벗어나 좌로나 우로 치우칠 때 정상적인 크리스천은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인생을 짧게 보면 내 생각이 옳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길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옳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여호수아는 그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내 말 대로 하면 너는 성공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서 성공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말씀에 대한 청지기직(職) (stewardship)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지기직’의 핵심은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은 것들을 다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시간 (Time)과 섬김 (Serving), 베품 (Giving), 영적인 삶 (Spiritual Life), 이 네 영역에서 크리스천의 ‘청지기직’을 말해 왔습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잘 관리해서 그 시간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섬김은 우리가 가진 talents (gifts)를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베품은 내가 가진 재물 (treasure)를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나누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적인 삶을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개, 기도와 성경읽기, 성경공부, 하나님의 은혜, 자기 부정 (self-denial), 믿음의 성장 등이 영역에 들어갑니다.  
 
끝으로 베드로전서 4장에 나오는 청지기직에 대한 말씀을 같이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또한 각자에게 특별한 다른 선물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선한 청지기같이 남을 돕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남을 도우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에게 영광과 능력이 영원토록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4:10-11)

1/27/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4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2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로마서 12:1-2

하나님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예배자, ‘the true worshiper’에게 호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고 하는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the true wor-shiper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 (the true worship)’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에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나오는 이 말은 바울이 독창적으로 만든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입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4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4: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time is coming - indeed it's here now -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참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게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과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과연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를 ‘the true worship (참된 예배)’라고도 할 수 있고, ‘a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요? 저는 ‘영적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4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영적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 말씀이 ‘영적예배’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놓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인 당신네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나, 우리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예배합니다. 그것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22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버지 (the Father)’께 예배드릴 때가 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the Father)’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Abba, Father, 마가복음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바 (Abba)’는 아람어로 ‘아빠 (dad)’라는 뜻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때 가지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의 감정, 그리고 의존(依存)의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예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예배를 잘 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요한복음 10:15)”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True Christian worship addresses God, not merely as Creator and Preserver, or as the great Lord of the Universe, but as one who is very near of kin to us, our Father, beloved of our souls (참된 크리스천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단순히 창조주, 보호자 혹은 우주의 주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매우 가까운 분, 우리의 영혼의 사랑을 받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사용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예배’는 예배 드리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곧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은 ‘영 (Spirit)’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엄청난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in spirit and in truth’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을 모아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금 송아지를 경배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모세는 들고 있던 십계명 돌 판을 던져서 금송아지를 깨뜨려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3,000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송아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35)”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죽은 것도 큰 일이지만, 이보다 더 큰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 이상 동행(同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을 테니, 너희끼리 가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잘못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영과 진리 (in spirit and in truth)’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쉬운 말로 ‘진정으로’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진정으로’ 혹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Charles Spurgeon은 ‘영으로’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To worship God spiritually, a man must give up his sins, must overcome his pride and lust, and his evil concupiscence must be cast out of him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포기해야 하고 교만과 욕망을 이겨야만 하고, 성에 대한 욕망을 내쫓아야만 합니다).” “True worship lies in your heart paying reverence to him, your soul obeying him, and your inner nature coming into conformity to his own nature, by the work of his Spirit in your soul (참된 예배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존경을 드리고,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당신의 내면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진실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3-24)”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서 ‘몸’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Expanded Bible에서는 이 말씀을 “I beg you to offer your lives as a living sacrifice to him (내가 권합니다. 당신의 삶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 방식은 짐승을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대속물(代贖物, ransom)’로 드리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짐승의 목숨이 어떻게 나의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배가 형식적으로 되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 마리 양을 기뻐하실까? 강줄기 만 개를 채울 만한 기름을 기뻐하실까?” (미가 6:7) “이 사람아,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미가 6:8)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이제는 짐승이 아니라 예배자 자신이 제물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의지, 나의 생각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리라는 (굴복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living sacrifice (산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Let all that I am praise the Lord; with my whole heart, I will praise his holy name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1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O my soul; all my inmost being, praise his holy name (오, 나의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의 모든 속에 있는 것들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읽을 때 “네 모든 마음과 (with all your heart)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마태복음 22:37)”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예배’는 예배와 삶이 일치(一致)되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2) 저는 이 말씀을 예배자의 삶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자의 삶입니다.

끝으로,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9-407)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크리소스톰이 자기 교구 내에 있는 동 떨어진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예배를 인도할 사제가 없어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농부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킨 다음 사제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잘못 사제의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이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짧은 설교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열광적으로 빛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 크리소스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말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 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무식한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1/20/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3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1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마가복음 7:31-37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입니다. ‘호의(好意)’라는 말은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고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살았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성경을 찾아보니, 노아 (Noah)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은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6: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 favor with the LORD).” ‘그러나 (but)’이라는 말은 앞에 나오는 말을 뒤 엎을 때 사용하는 접속사 아닙니까? 노아가 살던 시대는 죄가 관영(貫盈)한 시대였습니다. “The LORD observed the extent of human wickedness on the earth, and he saw that everything they thought or imagined was consistently and totally evil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의 범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완전히 악한 것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노아라는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창세기 6:9)
 
노아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favor를 얻을 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 말씀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풍조가 어떻든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한 반석 (foundation) 위에 자기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노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고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삶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어 본다면, 청년기는 ‘foundational period’입니다. ‘formational period (형성기)’라고도 합니다. 이 때가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시기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기초가 잘 닦여 있는지 잘못 닦여 있는지는 보통 때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는 지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뉴욕 맨해튼 (Manhattan)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은 1930년 3월 17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1931년 4월에 마쳤습니다. 1929년에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되었잖아요?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지어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준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입니다. 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지어진 지 88년이 되었지만, 지금 봐도 반듯하고 참 아름답습니다. 맨해튼의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앞으로 백 년이 지나도 끄덕 없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려고 믿음의 기초를 잘 닦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죄가 관영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할 때도 노아는 그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또 하나, 노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하나님과 소통(疏通)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소통은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通路)와 같아서 소통이 끊어지면 두 사람 사이가 막힌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통이 잘 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 discernment)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의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창세기 6:9)’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또 한 사람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윗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런 말을 합니다. “주께서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주님 앞에서 진실되고 공의로우며 정직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You showed faithful love to your servant my father, David, because he was honest and true and faithful to you. And you have continued your faithful love to him today).” (열왕기상 3:6) 이 말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삶을 정직과 진실과 성실, 세가지로 요약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이라는 말을 신학적인 용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한 마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지를 알고 하나님께도 그렇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이 사람은 나의 마음을 꼭 빼닮았다”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 마음을 닮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열려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편 19편은 다윗이 쓴 시편인데요. 그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는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내게는 순금보다 더 귀하고 송이 꿀보다 더 답니다.....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to you, O LORD).”(시편 19:7-10, 14)
 
이 말씀이 눈 앞에 확 펼쳐지지 않습니까? 날마다 이른 새벽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때는 그 말씀이 율법으로, 어떤 때는 확실한 증거로, 어떤 때는 교훈으로, 어떤 때는 계명으로, 어떤 때는 도(道)로, 어떤 때는 법도로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그렇게 귀하고, 입에 달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이제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다시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방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방에 있는 갈릴리 호수로 가셨습니다 (31절)”라고 했습니다. ‘다시 (again)’이라는 말은 그런 일들이 반복해서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페니시안들 (Phoenicians)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에서 북서쪽에 있는 해안 지역입니다. 성경에는 ‘베니게 (사도행전 11:19)’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자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페니시안들이 살고 있는 두로 (Tyre)와 시돈 (Sidon)을 떠나 ‘데가볼리(Decapolis)’ 로 가셨습니다. ‘데가볼리’는 ‘열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갈릴리 호수 남쪽에 붙어 있는 지역이니까 예수님께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먼 거리를 걸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가볼리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사람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32절).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에 넣으신 뒤에,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다 (Ephphatha)”는 열리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Aramaic)입니다. 다른 말들은 모두 헬라어로 번역해서 기록했지만, 몇 몇 말들, 예를 들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같은 말들은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예수님 시대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보인 반응입니다. 그 말씀이 3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놀라워하며” “They were completely amazed.” (NLT) “People were overwhelmed with amazement.” (NIV) “And they were astonished beyond measure.” (NKJV)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하다!”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이 사람을 고쳐 주신 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훌륭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비난받을 일들, 흠 잡힐 일들, 남들의 구설수에 오를 일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까? 저는 예수님께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데,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고,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신 분입니다. 한번은 흥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집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잖아요? 지지자들의 요구를 뿌리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한번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지지자들의 환호소리를 외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강제로 데려다가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곳을 떠나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 6:15) “혼자 산으로 가셨다”는 성경의 표현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1:35, 누가복음 4:42, 5:16)”는 표현과 같은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서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끝까지 한 길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소통하심으로 자신의 생각과 사역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노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 (마태복음 3:17, 마태복음 17:5)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삶이 힘들고 버겁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호의 (favor)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인간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시편 118:8-9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나와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열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꾸준하게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꾸준하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소통의 채널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십니다.

1/1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자 Kowing God's Point Of View

마가복음 8:31-33

오늘 말씀의 요절(要節)은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는구나).”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이란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했더라면 그 같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갖게 되는 관점으로, '성경의 관점 (a point of the Bible)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도 제자들은 딴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보다 앞서서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9:51)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뒤따라 가던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울 정도였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0:32).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he talked about this openly with his disciple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primand him for saying such things①.” / ①Or began to correct him  ‘reprimand’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견책하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사전에는 이 말에 ‘to reprove or rebuke severely, especially in a formal way (공식적으로 심하게 꾸짖다)’라는 뜻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압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제자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야, 베드로, 역시 너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고맙다,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그렇지? 꼭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제자의 만류를 사탄의 유혹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 (바울)의 행동에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그럴듯한 스펙 (specification)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또 그 집안 (부모)은 어떤 집안입니까? 그가 남긴 업적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책 한 권도 제대로 쓰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지 30-40년이 흐른 후에 그의 제자들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변두리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갈릴리 부랑배들을 끌고 다니면서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닙니다. 사울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총대를 메기를 자청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도행전 8:3)

이런 사람이, 관점이 바뀌니까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4-8)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관점이 바뀌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박해자 (persecutor)였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사람 (apologist)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사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서 핍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대에 사울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쓸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드라마틱하게도 사울 같은 사람을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 (instrument)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15). 여러분이 좋아하는 시편 중에 42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절) 시편은 시(時)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라의 자손들 (the descendants of Korah)입니다. 고라는 광야생활 중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땅이 갈라져 빠져 죽은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민수기 26:11). 드라마틱하게도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Brooks Atkinson 이란 사람이 관점이 바뀌는 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ost fatal illusion is the settled point of view. Since life is growth and motion, a fixed point of view kills anybody who has one (가장 치명적인 환상은 고정된 관점이다. 우리의 삶은 유동적이며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은 누구든 그것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또, Toba Beta라는 사람은 “We begin to learn wisely when we're willing to see world from other people's perspective (우리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세상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지혜롭게 배울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Understanding is not absolutely final. What's now right could be wrong later (이해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옳은 것이라도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더니 전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은 노력을 통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는 일을 성경에서는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conversion’입니다. 사전에는 ‘conversion’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무관심, 불신, 반대로부터 수용, 믿음, 열성적인 후원으로 태도, 감정, 혹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사울이 회심해서 관점이 바뀌는 말씀이 사도행전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관점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심으로 일어났습니다. 2018년 1월 4일 밤에 눈보라가 치고 강풍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뾰족탑 (steeple, 종탑)이 강풍에 흔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안전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이 뾰족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Local TV에서는 이 뉴스를 ‘Divine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상황을 아시고 미리 큰 사고를 막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Divine Intervention’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게 해 주신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Divine Intervention’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만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관점’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빌립,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그 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데나리온은 약 20,000불 정도 되는 큰 돈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빌립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의견을 따랐다면 5,000명을 먹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19년 한 해를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읽어가면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빌립을 떠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6)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은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인간적인 관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는 (overcome)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믿는 사람들은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마태복음 19:26)”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케임브리지에 있는 Museum of Science의 마케팅 슬로건 “Museum of Science, where your horizons broaden (뮤지엄 오브 사이언스, 당신의 시야(視野)가 넓어집니다)”였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선물이요,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