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6/2022 | 새해 메시지3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1-8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라는 말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까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태어났을 때는 엄마, 아빠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소나 말 같은 동물들은 어미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비틀비틀하다가 이내 걷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기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엄마의 젖을 먹어야 하고, 엄마의 품속에서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일년이 넘어야 겨우 걸을 수 있습니다. 청소년 시절에도 부모의 사랑과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합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부모의 ‘도움’이 없이는 홀로 설 수가 없습니다. 결혼하고, 직장을 잡고 나서야 겨우 홀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지면 또 다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찬송가 67장 3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질그릇같이 연약한 인생 주 의지하여 늘 강건하리.” 우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친구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의 감각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하실 일은 다 깨달을 수가 없다(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but even so,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NLT).” (전도서 3:11) 개역 성경에는 ‘영원의 감각’이라는 말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주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행하게도 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I thirst for God,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stand before him)?” (시편 42:1-2)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목마름을 이보다 더 아름답게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내면의 갈급함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 목마름은 우리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 주신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아)은 그의 책 ‘고백록(Confession)’에 이렇게 썼습니다. “Because God has made us for Himself,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Him(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그 분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시편 121편 말씀을 볼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시편들은 그 용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순례의 길은 고달픈 길입니다. 여러분, ‘산티아고 순례길(Comino de Santiago)’에 대하여 들어보셨습니까? 프랑스의 ‘생장피드포르’에서 시작해서 스페인을 걸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 이르는 장장 780km에 이르는 긴 순례길입니다. 이 길을 걸으면 죄가 없어진다는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고, 스페인의 멋진 경치를 감상하면서 힐링을 목적으로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남자들의 경우 일년에 적어도 세 번은 예루살렘을 순례해야 합니다. 보통은 제물로 드릴 양을 데리고 순례의 길을 갑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가 약 140km이고,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85km입니다. 보통 걸어서 5-6일 걸리는 길입니다. 순례자들은 시편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까지 등에 양을 지고 걸어갔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가니까 순례의 길이 즐겁고 고단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순례의 목적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보십시오. 순례의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꼭 맞는 노래 아닙니까? 순례의 목적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이유는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My help comes from the Lord, who made heaven and earth, 2절)”라는 가사 속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도움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최초로 밝혀진 것은 출애굽기 3:14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이름은 ‘יהוה’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네 글자는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어서 발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네 글자로 된 하나님의 이름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I AM who I AM)’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영어식 표기로 ‘Jehovah’라고 하는데, 이것은 발음을 하기 위해서 억지로 만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주님(The Lord)’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후에 이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 ‘ego eimi(에고 에이미)’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하면 ‘I AM’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밤중에 바다를 건너가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마침 그 배에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람을 거슬러 노를 저으려고 애를 썼지만, 배는 앞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 바다 위를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유령이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가복음 6:50, 마태복음 14: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They were all terrified when they saw him. But Jesus spoke to them at once. “Don't be afraid,” he said. “Take courage! I am here!①” / ①Or The ‘I AM’ is here; Greek reads I am. 위기에 빠진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곧 ‘스스로 있는 분’ 여호와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will lift up my eyes to the hills [of Jerusalem]— From where shall my help come?”
이 시편 기자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산들(언덕들)을 보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편 기자가 보고 있는 예루살렘의 언덕들은 무슨 언덕들이었을까요? 성서 학자들은 그 언덕들이 ‘시온산(Mount Zion, 765m)’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곽 서남쪽에 ‘시온문(Zion gate, 다윗의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나가면 시온산으로 바로 연결됩니다. 시온산은 다윗 성이 시작되는 곳이고, 다윗 왕의 무덤이 있고, 베드로 통곡교회가 있고, 최후의 만찬 장소로 사용된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성지(聖地)입니다. 시온산에서 보면 예루살렘 도시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온산은 한 지명(地名)이라기보다 예루살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지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눈을 들어 시온산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시온산’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하면서 “아닙니다!” 하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이 시편 기자에게 “우리의 도움이 성전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도움은 그 어디에서도 아니고,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에고 에이미’, 예수님께서 위기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안심해라. 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여호와이심을 드러냈던, 그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나의 도움이 온다고 합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역사와 전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힘이 웅장한 성전의 건물에서 오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돕는 힘은 오직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부터 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O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How blessed is the man who takes refuge in Him!, NASB).” (시편 34:8) 이 시편을 쓴 사람이 다윗인데요. 다윗은 이 시편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고 있는 사람인지 아주 쉽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refuge(피난처)’는 위태할 때 피하는 장소를 말합니다. 위기에 빠진 사람이 ‘피난처’로 피하는 것처럼, 인생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맞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가요?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보세요. “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왕자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eople.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시편 118:8-9) 말씀을 더 볼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 very present help in trouble).” (시편 46:1)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삶의 위기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로 피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 시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346년-1352년 사이에 ‘흑사병(The Black Death or Pestilence)’이 유행했습니다. 그 때 7,500만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약 2억명이 죽었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리고, 1918년 2월-1920년 4월까지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이 유행했습니다. 그 때 전 세계 인구의 1-3%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지금처럼 인류의 지식이 발달되지 않았고, 의학적인 수준도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인류의 지식은 엄청나게 팽창했습니다. 의학적인 수준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2년을 넘어 3년째로 ‘팬데믹’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망자 수가 5.5백만명입니다. 과거에는 인류가 미개한 상태에 있어서 미처 질병에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막대한 인명 피해를 냈다고 볼 수 있지만, 지금은 어떤 가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팬데믹’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인류의 지식의 발전과 과학 문명의 발달이 결코 인류에게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류의 희망은 ‘스스로 있는 분’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불렀던 그 시편 노래 가사가 오늘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시온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왕자들(princes)’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인류의 지식과 의학의 발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움은 ‘Artificial Intelligence’에 있지 않습니다. 비록 ‘AI’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고, 삶의 질이 높이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류의 희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류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팬데믹’을 통해서 인류에게 이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 중에 ‘펜데믹’이 몇 개월 안에 끝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 대로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이 곧 끝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팬데믹’이 끝나면 인류에게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어떤 분이 시편 37:5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이렇게 은혜 받은 것을 썼습니다. “God has a reason for allowing things to happen. We may never understand His wisdom, but we simply have to trust His will(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지 하나님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의 뜻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모두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면 된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희망이 이 모든 일을 자기 통제 속에 두고 계시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92-1983, 네덜란드)은 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갖은 고난을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입니다. 함께 수용소에 있던 그녀의 언니는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코리 텐 붐은 전범(戰犯) 국가인 독일로 들어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Never be afraid to trust an unknown future to a known God(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불확실한 시대에 확실한 하나님께 여러분을 맡기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확실한 하나님을 여러분의 도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1/9/2022 | 새해 메시지2
화해의 메시지 The Message of Reconciliation
고린도후서 5:14-21
새해가 벌써 한 주일이 지났습니다. 새해에는 밝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은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들입니다. 새로운 변이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지난 1월 5일에 감염자가 30,000명이 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은 사망자 수가 전에 유행했던 바이러스보다 적다는 것입니다. 학교들이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게들도 백신 접종 카드를 보여야만 입장할 수 있도록 규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암울한 소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미처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바꾸시는 일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고, 우리의 잘못된 관행들을 바꾸고 계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를 바꾸고 계십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5장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말씀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지금 이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말씀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과 화해하라(20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Be reconciled to God(NIV, NKJV, NASB)”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New Living Translation은 이 말씀을 “Come back to God(하나님께 돌아오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reconcile’이라는 말은 라틴어 ‘reconciliāre’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하는데요. ‘make good again’, ‘repair’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좋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자기 시대를 향해서 선포했던 말씀입니다. 예언자 호세아가 자기 시대를 향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호세아 14:1)”고 했고, 요엘 선지자는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요엘 2:12)”고 했고, 아모스는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아모스 5:6)”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이사야 55:7)”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은 그만큼 그 시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그 시대를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언자들이 살던 시대에는 ‘바알’과 ‘아세라’라는 신이 축복, 생산, 풍요를 맡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은 남성 신이고 ‘아세라’는 여성 신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을 때, 그 땅에는 이미 ‘바알’과 ‘아세라’ 신이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유목민으로 살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습니다. 삶의 환경이 좋아졌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의 신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삶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습니다. 며칠 전에도 누구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음식점에 가서 30불 이상 되는 메뉴는 손이 떨려서 주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큼 잘 한다는 음식점들은 30-40불 정도는 줘야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이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나와 눈물로 기도하는 일이 옛날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인류가 앓고 있는 질병도 그렇습니다. 몇 몇 질병을 빼고는 모두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수명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살기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점 하나를 더 지적한다면, 진리(眞理)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사람들은 절대 진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모든 철학과 종교가 이 절대 진리는 찾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크게 근대주의적(modernism)인 사고 방식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리에 대한 개념과 진리에 대한 접근 방식이 ‘모더니즘’ 시대와 확실하게 구별된다는 뜻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는 ‘다원주의(pluralism)’라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말입니다. 진리도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일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진리만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풍조입니다. 바울이 “너희는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로마서 12:2)”라고 했던, 바로 이 시대의 ‘패턴(pattern)’이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풍조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현상은 이 시대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꼭 교회는 오전 11시에 가야 하는 거지?” “왜 진리는 성경 속에만 있다고 하는 거지?”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거지?” “왜 기독교만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거지?”
그 강도는 다를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살던 1세기의 시대 정신 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유명한 사이먼 그린리프(Simon Greenleaf, 1783-1853, 미국), 시에스 루이스(C.S. Lewis, 1898-1963, 영국) 같은 사람들이 모두 그 시대의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들(apologists)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사(大使, ambassadors)’는 자기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외교를 맡아보는 최고 직책을 맡은 사람을 말합니다. 대사는 자기가 파견된 주재국(駐在國)에 대하여 자국(自國)의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가지며, 국가의 원수와 그 권위를 대표합니다. 바울은 ‘대사’라는 말을 사용해서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들의 사명과 역할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의 대사’의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요? 첫째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라고 합니다(17절).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 말의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창조’가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믿고 사물을 보는 ‘관점(point of view)’이 바뀐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인 관점(worldly point of view)’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Christocentric point of view)’으로 사물을 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관점’이 바뀌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누가복음 19:8) 예수님 시대에 여리고라는 마을에 살고 있던 삭개오라는 사람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삭개오는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이란 주로 ‘물질 중심의 관점’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물질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의 관점이 바뀌었습니다. 그의 눈에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전에 그가 속여 빼앗았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보인 것처럼, 이제 삭개오의 눈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관점이 바뀐 사람이라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삭개오 이야기를 읽으면서 참 인상 깊게 생각한 것은, 관점의 변화가 반드시 오랜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불과 몇 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삭개오의 관점이 바뀌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교회에 나온 지 얼마되지 않는,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지 않는 분들이 많이 있지요? 상관없습니다. 삭개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분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들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관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형식적이 아니라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여러분이 배우고 깨닫는 대로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관점’이 바뀔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될 사람들은 복음이 무엇인지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가 있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1절)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We must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us). 이 말은 곧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선포해야 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오라(Come back to God, 20절)!”는 ‘화해의 메시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은 너무 나갔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을 멀리했듯이, 이 세상도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 빠져 하나님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라는 개념 마저도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상대적인 하나님으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각자가 추구하는 진리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Come back to God(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이라는 성경 말씀이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그 시대를 향해 외쳤던 것처럼, 이제 이 시대를 향해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사들’인 여러분들이 이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가 있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For God made Christ, who never sinned, to be the offering for our sin, so that we could be made right with God through Christ so that we could be made right with God through Christ).”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는 가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사’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나 우리가 이 세상에 화해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말씀을 읽을 때, 마치 큰 결단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마치 나의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런 일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하나님과 멀어진 이 세상에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화해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일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사는 길이라고 합니다. 즉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그리고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 세상을 향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할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과 이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1/2/2022 | 새해 메시지1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God Is Making The World New
로마서 12:1-2
2022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범(호랑이) 띠라고 하지요? 범 중에서도 ‘흑호(검은 호랑이)’ 띠라고 합니다. 호랑이는 용맹과 사나움과 힘으로 상징되는 동물입니다. ‘팬데믹’ 3년째로 접어드는 2022년 새해는 부디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를 치며 하늘로 비상(飛上)하는 것처럼 몸도, 마음도 비상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팬데믹’에 대해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떤 시각(視角)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팬데믹’을 인류를 향한 재앙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희망적인 사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시각을 가지고는 새해가 되어도 절망적인 일들만 보일 뿐입니다. 반대로, ‘팬데믹’을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볼 때 현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긍정적인 사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미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하여 엄청난 일들을 하고 계신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있습니다. ‘팬데믹’ 이전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에 대한 이미지는 훌륭한 건물에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목회자들이 모두 교회에 대한 이런 꿈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몇 개월 전에 저희 교회를 방문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대뜸 서울에 있는 자기 교회에 대한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를 건축 중에 있는데, 건축 예산이 얼마라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큰 교회를 짓느냐고 물었더니, 제 질문이 이상했는지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많이 모이지 않겠습니까?” 하고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한 제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운 돌들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습니다(마가복음 13:2). 아무도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요한복음 2: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중심의 예배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건물 중심의 교회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 건물, 많은 교인 수, 그리고 많은 교회 예산을 훌륭한 교회, 성공적인 교회의 지표(指標)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더 좋은 건물, 더 좋은 시설을 갖추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이런 교회들이 생각하는 목회에 대한 개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식의 목회입니다.
문제는 교회에 대한 이런 개념이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자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내가 전도할 것이다. 내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 왔다.’” (마가복음 1:37-38) 예수님의 전도 방식은 제자들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고, 숙소를 구해야 했습니다. 여간 힘들고 피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온 것입니다. 돌아다니지 않고 그냥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한 두 세 달 전에 이 지역 목사님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마침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 앞에서 무슨 설교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팬데믹 시대’에 대해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나누기로 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교회에 대한 기존 개념이 바뀌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팬데믹 시대’를 통하여 도저히 바뀌지 않는 교회에 대한 고정된 개념을 바꾸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팬데믹 시대’가 끝나면, 그 때 교회는 현재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서 빨리 ‘팬데믹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하겠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형태의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교회형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를 바꾸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매우 조심스럽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섬기는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고, 건물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기동성(機動性, mobility)을 갖춘 교회의 모습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니까 꽤 많은 목사님들이 제 설교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섬기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는 말하지 않았다고 지적하기도 했고, 어떤 목사님은 케임브리지교회부터 한번 확 바꿔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무슨 특별한 목사도 아니고, 무슨 주목받는 목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학식이 많고 존경받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계시는데, 그런 목사님들이 ‘코로나 시대’ 혹은 ‘코로나 시대 이후’에 대한 대안을 마땅히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최근에 우연히 한국에서 매우 주목받고 있는 한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교를 잘 하신다고 알려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설교 내내 하시는 말씀이 교회 출석이 예전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아서 속이 상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목사님이 ‘팬데믹 시대’에 대한 대안(代案)을 가지고 있겠지 하면서 설교를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코로나 시대에 교회들이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이런 현상을 그대로 보고만 있으면 결국 교회는 서서히 죽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변회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는 죽습니다. 교회 예배가 역동적(力動的)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도저히 교회에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도록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팬데믹 시대’에 대한 그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대안이었습니다. 예배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역동적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역동적인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목사님의 결론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보는 사람들을 모두 교회에 나오게 해서 교회당을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목사님이기에 상당히 기대를 가지고 설교를 들었는데, 좀 실망했습니다. 그 목사님뿐만 아니라 많은 목사님들이 어서 빨리 ‘팬데믹’ 이전으로 교회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교회를 힘들게 하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사실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의 교회가 너무 좋았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의 설교에 열광하고, 여기 저기서 은혜 받았다고 하고, 목사님은 방송국에 나가서 영상 설교를 내보내고, 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하지만,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이 교회가 살 길이라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교회들을 힘들게 하는 것입니까?
‘팬데믹’ 시간을 벌써 2년째 겪고 있고, 3월이면 3년째로 들어갑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변했습니까? 사람들의 의식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까? 사람들의 근무 형태가 바뀌었습니다. 일하는 형태가 바뀌니까 그 전에 그렇게 바꾸고 싶어도 바꾸지 못했던 것들이 지금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재택 근무를 많이 하게 되니까 출퇴근 때 교통의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도시 집중의 인구를 교외로 분산하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섬기는 교회’는 제가 처음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가복음 10:45 말씀을 보세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나도(even the Son of Man)’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배소서 1:23, 4:12, 5:30, 고린도전서 12:27)’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에베소서 1:22, 5:23, 골로새서 1:18)’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께서 섬기는 삶을 사셨다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당연히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께서 동네 동네를 찾아다니셨던 것처럼, 교회도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기동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금의 교회는 사람들을 찾아가는데 알맞은 구조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도록 하는데 최적화된 구조입니다.
한스 큉(Hans Küng, 1928-2021, 스위스)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원래는 카톨릭 신학자이지만, 교황의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을 비판하는 등 카톨릭 신학의 개혁을 주장했던 학자입니다. 결국 한스 큉은 1979년에 그가 몸 담고 있던 튀빙겐(Tübingen) 대학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합니다. 한스 큉은 천재적인 신학자였습니다. 한스 큉 외에도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헨리 나누엔(Henri Nouwen, 1932-1966, 네덜란드)같은 학자들이 모두 신학적인 상상력이 뛰어난 천재 신학자들입니다.
한스 큉이 남긴 업적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회의 본질(本質)을 연구한 ‘The Church, 1967)’라는 책은 그의 업적 중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교회는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세상 속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는 교회가 사람들을 받들어 섬기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있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며, 교회의 제도와 교리가 목적이 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본연의 사명에서 벗어나게 되면, 결국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위기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교회는 하나님을 섬겨 인간을 섬기며, 인간을 섬겨 동시에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The church should serve God and serve man, and serve man and serve God at the same time)”고 했습니다. 지금 그의 말 대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지 않습니까?
네덜란드의 선교 신학자 요하네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 1912-1975)가 ‘The Church Inside Out(흩어지는 교회)’이라는 책을 출판한 것은 1966년이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보다 활발한 ‘기동성(mobility)’과 ‘다양성(diversity)’을 갖추어야 하며, 평신도가 선교가 주체가 되어야 하며, 소집단들의 활용과 상호 협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관심은 교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다고 하면서 기존의 하나님-교회-세상 대신 하나님-세상-교회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교회는 더 이상 선교의 주체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샬롬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 안에 안주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 세상 속으로 흩어져야 한다는 것이 호켄다이크의 주장입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두 사람의 신학자가 거의 같은 시기에 예언자적인 책을 냈지만, 그 때는 아무도 귀 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들의 주장을 듣지 않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듣기에 교회는 비대해 졌고, 교회는 세상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원로인 홍정길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거대한 공룡에 비유했습니다. 지금 50여년 전의 케케묵은 두 신학자의 주장을 꺼내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팬데믹 시대’에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의 주장을 통하여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은 이 시대를 본받지 말고 이 시대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합니다. 이 시대의 겉모습만 보지 말고, 이 시대를 통해서 하나님께 일하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새롭게 바꾸고 계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이 ‘팬데믹 시대’를 통해서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교회를 바꾸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전의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에는 ‘깨시민’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는데, ‘깨어 있는 시민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갈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깨어 있는 크리스천들’이 되어서 교회를 바꾸고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12/31/2021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God Calls for Repentance
로마서 13:11-14
지금은 2021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시간입니다. 우리 앞에는 2022년 새해가 다가와 있습니다. 팬데믹을 3년째 맞이하는 이 시간, 목사인 나에게는 교우들에게 무슨 설교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제일 힘든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고통의 시간을 겪었습니다. 모두가 처음 겪는 일에 낯설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에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더욱 암담한 것은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다시 규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몇 명 이상 모일 수 없습니다. 가게도 문은 열지만 손님들이 뚝 끊어졌을 것입니다. 중국은 얼마 전까지 코로나바이러스를 완전 퇴치했다고 선언하더니, 지금 난리가 났습니다. ‘시안(西安)’이라는 도시는 인구 1,300만명이 넘는 대도시인데, 지금 완전 봉쇄령(封鎖令)이 내렸습니다. 내년 2월에 베이징에서 열릴 동계 올림픽에 악영향을 줄까 봐, 시안 주민들을 일체 집에서 나올 수 없도록 시 전체를 봉쇄한 것입니다. 한 가구 당 한 명만 이틀에 한 번씩 생필품 구입을 위해 마켓에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에 있는 3,574개 학교가 문을 닫아 200만 명의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발표된 내용을 보면 누적 확진자 수가 250명을 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발표를 믿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도시를 봉쇄할 정도면 그 도시 안은 이미 생지옥이 되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 우리에게 닥칠 지 알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매사추세츠 주에도 지난 월요일에 확진자 수가 13,791명이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 수는 25명 정도입니다. 도대체 이 코비드 바이러스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지, 앞으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전문가들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팬데믹 시대’에 대한 고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이 ‘팬데믹 시대’를 어떤 눈으로 봐야 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교회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벌써 이 문제가 여러분의 고민거리가 되고, 함께 토론하는 주제가 되고, 하나님께 묻는 기도 제목이 되었어야 합니다. 다들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저는 ‘팬데믹 시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많이 있지만, 우리가 이 송구영신예배에 생각해야 할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어떤 식으로 예배를 드려왔는지에 대한 반성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율법의 한 조항이라도 어기지 않고 지키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항상 감시자(監視者)의 눈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주시(注視)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들의 감시의 눈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허기진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었습니다. 그 때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 와서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정결예식’을 어기고 있다고 거칠게 항의했습니다(마태복음 15:2).
참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바리새인들’의 열심 하나만은 인정을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의(義)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보다 휠씬 낫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20) 하지만, 그들의 열심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에는 이 ‘바리새인들’이 형식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위선자(僞善者, hypocrites)들로 보였습니다. 겉에서 봤을 때는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올바른 정신과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믿음을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이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려고 하는 열심과 노력이 있습니까? 주일마다 교회를 출석하는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저는 그 말씀을 읽을 때마다 늘 마음에 걸리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2:21-22에 있는 말씀입니다.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다른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만 생각하고 예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여러분에게 보내려고 하는)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솔직히 우리가 예수님의 일에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이 성경 말씀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우리가 그동안 어떤 믿음생활을 했는지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형식화되었을 때, 나라가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시리아로, 바빌로니아로 잡혀갔습니다. 성전 물건들을 약탈당했고, 성전은 이방인들의 손에 파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비판하신 대로 종교 지도자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믿음이 되었을 때, 또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제 구실을 못했을 때, 성전은 다시 로마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그 때가 서기 70년입니다. 지금 성전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이슬람의 ‘황금 돔 사원(The Dome of the Rock)’이 들어섰습니다. 성전은 서쪽 벽만 겨우 남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벽을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라고 부릅니다.
저 역시 ‘팬데믹 시간’을 보내면서 목사로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지난 2년 동안 얼굴을 한 번도 못 본 교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유아 세례를 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그동안 많이 자란 것입니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같은 말을 합니다. 아이들이 안 본 사이에 엄청 많이 자랐다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팬데믹 시간’을 보내면서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과거에 우리가 했던 믿음생활을 그리워해야 합니다. 온 식구들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고, 끝나면 친교 시간이 있고, 청년부 모임 시간이 있고, 금요일에는 다같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하고, 찬양하고, 간사님들이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서로 토론하고 했던 시간들이, 그 때는 몰랐지만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일부는 대면예배에 나오고, 일부는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하여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잘 깨닫지 못했지만, 그동안 우리는 참 복된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는 우리에게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동안의 우리의 믿음 생활에 대하여 반성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열정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열정들이 다 사라졌는데도 우리는 주일이 되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진한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성가대가 찬양을 부르면 “오늘 참 잘하는데?”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져도 그 말씀에서 은혜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시간이 되면 늘 그런 말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내가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는 만족감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예배가 내 삶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기억하고 계시나요? “Your worship is a farce, for you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너희는 사람이 만든 생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너희가 드리는 예배가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냐).” (마가복음 7:7, 이사야 29:13에서 인용) 예수님께서 너희 예배가 잘못되었다고, 너희 예배가 죽어 있다고, 너희 예배가 형식화되어 있다고 뼈아프게 지적하시기 전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그렇게 믿음 생활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 ‘팬데믹 시간’을 통해서 우리의 회개를 원하고 계십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철저한 회개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동안 형식적이고 죽어 있는 믿음생활을 해 왔던 우리의 지난 삶을 철저하게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Here there is no Greek or Jew, circumcised or uncircumcised, barbarian, Scythian, slave or free, but Christ is all, and is in all.” (골로새서 3:11) 무슨 말인가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를 받은 사람도 받지 않은 사람도, 야만인도, 스키타이 사람도, 노예도, 자유인도,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런 구별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과 이방인들을 구별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들이 최고의 문화 민족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은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모든 것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만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그리스도만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에서도 모든 것이 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전부(everything)’가 되고 있습니까?
‘You Are My All in All’이라는 노래를 다 아시지요? 1991년에 나온 노래인데요. Dennis Jerni-gan이 부른 노래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입니다.
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 (내가 약할 때 주님은 나의 힘이예요)
You are the treasure that I seek (주님은 내가 찾는 보물이예요)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예요)
Seeking You as a precious jewel (귀중한 보석처럼 주님을 찾고 있어요)
Lord, to give up I'd be a fool (주님을 찾는 일을 포기한다면 저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말거예요)
You are my all in all (주님은 나의 전부이니까요)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그 이름이 합당해요)
Jesus, Lamb of God worthy is your name (예수, 하나님의 어린양 그 이름이 합당해요)
어느 새 우리는,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라는 고백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고백을 잊어버린 채 우리는 교회를 드나들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여러분 중에 중학교 때나 고등학교 다닐 때, 아니면 대학에 다닐 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계신가요?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던 주님을 향한 고백은 어디로 갔습니까?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시대를 탓해야 할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가슴이 식어가고, 나는 형식적인 크리스천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 아니라 나의 많은 것들 중에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노래 가사는 내가 주님을 찾는 일을 포기한다면 나는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라고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찾기를 중단해버린 바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13장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1-12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 시간’ 속에 주님의 의도(意圖)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이 ‘팬데믹 시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팬데믹 시간’에 대한 주님의 의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깨닫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가혹한 말로 들리겠지만, 우리가 주님의 의도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팬데믹의 시간’이 계속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의 우리의 믿음생활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셨으면 우리에게 ‘팬데믹 시간’을 주셨겠습니까? “This is all the more urgent, for you know how late it is; time is running out.” (11절) 그냥은 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팬데믹 시간’을 통해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시면서 회개하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말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새로워져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둠의 옷을 벗고 주님이 입으라고 하시는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오늘 제가 못다한 설교를 이번 주 새해 설교에서 계속하겠습니다.
12/26/2021 | 송년예배 메시지
다시 읽어보는 달란트의 비유 Rereading The Parable Of The Talents
마태복음 25:14-19, 24-30
팬데믹 시간을 보내면서 두 번째 맞이하는 송년예배입니다. 아직도 위험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도 좀 느슨했던 규제가 다시 심해지고 있고,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 제일 신뢰를 얻고 있는 앤서니 파우치(Anthony Fauci) 미국 전염병 연구소(NIAID) 소장은 NBC, CNN 방송에 나와 새로운 변이 ‘오미크론(Omicron)’의 확산으로 미국은 힘든 겨울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오미크론에 관해 매우 분명한 한 가지는 그것의 놀라운 확산 능력과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미크론은 현재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산을 하나 넘었다 싶으면 다른 산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미크론’이라는 산을 넘으면 또 어떤 산이 우리 앞에 나타날 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는 2021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주인이 자기 종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잘 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21, 23절) 우리는 이 말을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암울한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했던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시간입니다.
저는 이 팬데믹 시간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준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의 삶에 벌어지는 어떤 일도 주님의 허락이 없이 벌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욥에게 준 사탄의 시험도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신 일이었습니다. 맞습니까? 유명한 이사야 45:7 말씀을 아시지요?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I create the light and make the darkness. I send good times and bad times. I, the Lord, am the one who does these things).” 좋은 일에만 주님이 관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어둡고 절망적인 일에도 주님이 관계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일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주님의 목적과 의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 ‘달란트의 비유’를 읽어보면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잘 하였다” 이 주님의 말씀이 조금은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방관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다시 읽어보는 달란트의 비유’라고 정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뻔한 말씀으로 듣지 말고,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읽어보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를 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누가 ‘달란트의 비유’ 속에 나오는 키워드를 ‘reward’ ‘faith’ ‘service’ ‘risk’ ‘obedience’ ‘gifts’ ‘diligence’ ‘talents’ 이렇게 여덟 개로 뽑아 올린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말들이 ‘달란트의 비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시나요? 본문 말씀에 나오는 ‘달란트’는 화폐 단위가 아니라 무게를 다는 단위입니다. 한 ‘달란트’는 약 75파운드, 34킬로그램입니다. 은 한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 시세(市勢)로 알아보았습니다. 지금 은 한 파운드에 326달러거든요? 75파운드면 약 24,000달러입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줬다고 하니까 122,000달러를 준 것입니다. 또 한 종에게 두 달란트를 줬다고 하니까 48,000달러를 준 것입니다. 한 달란트가 24,000달러니까 한 달란트 받은 종도 결코 적은 돈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종들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겼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자기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He divided his money in proportion to their abilities(New Living Translation)”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의 능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자기 재산을 나누어 준 것입니다. 주인은 치밀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 종들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가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기 돈을 맡긴 것입니다. 혹시 지금까지 왜 주인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신 분들은 주인이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겼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인은 전체 자기 재산을 여덟 개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능력이 많은 종에게 다섯 개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종에게는 두 개를 맡겼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종에게는 나머지 한 개를 맡겼습니다. 이것이 ‘in proportion to their abilities(능력에 따라)’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주인은 공정하게 종들의 능력에 따나 자기 재산을 나누어 준 것이지 결코 종들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주 저지르는 오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어쩌다가 운이 좋아 저런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운이 없어서 그렇지 나도 저런 자리에 앉으면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이거든요? 그 일이 내 능력 밖의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겼더라면 아마도 그 종은 다섯 달란트를 잘 관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종에게 그만한 능력이 없었으니까요. 이 사실만 잘 알아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열등의식에 빠지지 않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몇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처음에는 출마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정당 안에서의 경선을 치르면서 후보자가 추려졌습니다. 군소 정당의 후보까지 모두 여섯 일곱 명의 후보가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마다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잘 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을 아무나 할 수 있습니까? 대통령으로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갖춘 사람이라야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냉철한 판단을 가지고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십시오.” (로마서 12:3) 이 말씀이 New American Standar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has allotted to each a measure of faith.” 또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has apportioned to each a degree of faith [and a purpose designed for service.]" 달란트의 비유에는 종들의 재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겼다고 나옵니다. 로마서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할당(割當)해 주셨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내가 이런 일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할당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믿음의 분량이 많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한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언제 온다는 말도 없이 자기 돈을 종들에게 맡기고 떠났습니다. 도대체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종들에게 자기 돈을 맡겼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그리고, 두 달란트 받은 종이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은 얼른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였다. 그래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Immediately the one who had received the five talents went and traded with them, and gained five more talents, NASB).” (16절)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똑 같이 했습니다. ‘immediately(즉시)’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주인은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주인이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 돌아왔다고 한 것을(19절) 보면 종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떠나자마자 그렇게 서둘러서 ‘즉시’ 장사를 시작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달란트의 비유’는 말 그대로 ‘비유(比喩, parable)’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느 집에서 있을 법한 일을 예로 들면서 “하늘 나라는 여행을 떠날 때, 종들을 불러서 자기 재산을 맡긴 사람과 같다(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재산을 맡은 종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잘 보고, 또 그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잘 보고 주인에게 칭찬받도록 하라는 것 아닙니까? 주인의 돈을 맡은 종들이 즉시 그 돈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 전진(前進)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하는 시급한 일입니다(누가복음 9:62, 60).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주인의 은 돈을 숨겼습니다(19절).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이 무서워서 그렇게 했다고 했습니다(24-25절).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읽어보면, 주인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이 주인을 오해(誤解)한 것입니다. 주인이 이 종에게 묻잖아요? “너는 나를 그런 사람으로 알았느냐?” (26-27절)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장사에 실패할 것이 두려워했고 주인에게 실패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받은 돈을 땅 속에 묻어 둠으로써 주인의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착하고 신실한 종(21, 23절)’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는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고, ‘쓸모 없는 종(30절)’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착하고 신실한 종이고, 어떤 사람이 쓸모 없는 종입니까? 주인의 의도를 잘 알고 주인의 뜻대로 즉시 장사를 했던 종들은 모두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주인을 몰인정한 사람으로, 주인을 무서운 사람으로 알았던 종은 ‘쓸모 없는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 (빌레몬 1:11)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Formerly he was useless to you, but now he has become useful both to you and to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또 NKJV에는 “He once was unprofitable to you, but now is profitable to you and to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useless vs. useful’ ‘unprofitable vs. profitable’ 워드플레이처럼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리스 원어 성경에도 ‘아크레토스(achrēstos) vs. 유크레스토스(euchrēsto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앞에 ‘a’가 붙으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 책망을 받게 되고, 앞에 ‘eu’가 붙으면 유익한 사람이 되어 칭찬을 받습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되면 우리는 ‘쓸모 없는’ ‘무익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모두 ‘유크레스토스들(유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느냐, 두 달란트를 받았느냐, 한 달란트를 받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즉시 나가서 장사를 해서 한 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두 달란트를 내 놓았다면, 그 종도 ‘유크레스토스’라는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2021년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새해에도 계속해서 힘든 팬데믹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지치기 쉽고 의욕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힘든 시간 속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든지, 두 달란트 받았든지, 아니면 한 달란트를 받았든지, 우리는 주님의 뜻을 알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먼 나라에 여행을 갔던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서 세 종을 불러 각자에게 맡긴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물은 것처럼(19절),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것을 맡아 어떻게 관리했는지 물을 것입니다. 우리는 ‘큰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특히 ‘적은 일(a few things, 21, 23절)’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적은 일들’을 소홀하게 생각하고 낭비하기 쉽습니다.
George Vaillant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신과 의사이고, 하버드 메디컬 스쿨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Our lives are like the talents in the parable of the three stewards. It is something that has been given to us for the time being and we have the opportunity and privilege of doing our best with this precious gift(우리의 삶은 세 청지기 비유에 나오는 달란트와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당분간 맡겨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선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하는 기회와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