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2021 | 창립 43주년 기념 예배

증언 공동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A Witnessing Community

마태복음 16:13-2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1978년에 우리 교회를 창립했던 분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권위주의나 교권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기르자는 목적을 가지고 하바드 스퀘어에 있는 11 Garden Street, Cambridge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2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2,000년 전에 말했던 ‘이 세대’는 어떤 세대였을까요? ‘세대(世代, generation)’라는 말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000년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살았던 시대 정신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본받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시대 정신이 하나님을 믿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 정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요? 2,000년에 밀레니엄을 시작되면서 많이 나왔던 말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모더니즘’이 끝난 ‘후기 모더니즘 시대’라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볼까요? “The postmodern worldview denies that there is such a thing as truth: historical, moral, or otherwise. It denies that truth exists independently of our perspectives and interests(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은 역사적, 도덕적 또는 그 밖의 진리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우리의 관점이나 관심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 Mark Earley(정치인) "Postmodernism was a reaction to modernism. Where modernism was about objectivity, postmodernism was about subjectivity. Where modernism sought a singular truth, postmodernism sought the multiplicity of truths(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객관성에 관한 것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모더니즘이 하나의 진리를 추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다양성을 추구했습니다)." — Miguel Syjuco (작가) “We live in the postmodern world, where everything is possible and almost nothing is certain(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한 곳에,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Václav Havel (Former President of the Czech Republic)

시대 정신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 시대 정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정신으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형식이 파괴됩니다. 여러분, MIT 건물 중에 ‘스타타 센터(Stata Center)를 보셨습니까? Frank Gehry라는 건축가가 2004년에 완성한 32 Vassar Street, Cambridge에 있는 건물입니다. $283.5 million이 들었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이 건물의 형식은 ‘Deconstructivism(해체주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건물의 형식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같은 사람이 ‘해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보스턴 글러브에서 이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Stata’s appearance is a metaphor for the freedom, daring, and creativity of the research that occurs inside it(스타타의 모습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구의 자유, 대담함,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은유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 그림, 조각 등 전 예술 분야에, 그리고 문학, 철학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온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는 그동안 기독교에서 믿고 있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가치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크리스천들의 존재 기반을 흔들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다, Paul Knitter, 1985)?” 이런 제목의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설교자들 중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2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전처럼 모일 수 없게 되었고, 온라인 예배라는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이 지역의 교회들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들이 대면예배를 하고 있지만, 교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의 1/3 정도가 대면예배에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이 나도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문가들의 말이 맞았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시대의 정신(흐름)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거의 다 지나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 13:11-12) 2,000년 전에 바울은 이 말씀으로 잠자고 있는 크리스천들을 깨웠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읽는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올해로 우리 교회는 창립 43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예배이지만 예전과 같은 축하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 창립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때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팬데믹 사태까지, 이 시대의 흐름을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흐름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탄이 교회를 말살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은, 비록 교회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에 ‘가이사 (Caesar,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이름)’를 숭배하는 신전(神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Who do you say I am)?” 이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6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대답을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너에게 알려 준 것이다. 너는 어느 누구에게 이 사실을 배운 것이 아니다(Because my Father in heaven has revealed this to you. You did not learn this from any human being).” (17절)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지옥의 권세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all the powers of hell will not conquer it).” (1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기를 주신 이유는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를 통하여 우리 교회가 ‘증언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신앙 고백이 있는 교회는 ‘지옥의 권세(all the powers of hell)’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고난을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처음 생겼을 때부터 교회는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공의회는 다시 사도들을 안으로 불러들여서 매질을 한 후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고 놓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뜰에서,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5:40-42)

이 말씀이 시대착오적인 말씀으로 들립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the Lord)’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라는 말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Mary sat at the Lord’s feet and listened to his teaching)." (누가복음 10:39, ESV). 우리는 다시 겸손하게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 전파의 현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1806년에 Williams College의 다섯 청년들이 기도했습니다. 이 청년들의 기도 제목은 놀랍게도 “The Field Is The World(세계가 우리의 사역지이다)!”였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한 이 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이 곧 우리의 사역지입니다. 내가 일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돈을 버는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들이 우리의 사역지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점점 더 확장되어 나가는 이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들입니다. 지금은 어디든지 우리의 일터가 되고 삶의 현장들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의 증인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사명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으로 주신 말씀은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마가복음 16:15)” 이 말씀이라고 합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everyone.” 이 말씀에서 ‘go into’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누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to start working in a particular type of job or business.”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일하고, 활동하고, 얘기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주 안에서 올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에베소서 4:15)”라고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팬데믹 시기에 우리가 세울 수 있는 대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 대안들은 모두 우리가 무관심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 있고, 형식적인 믿음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이 교회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고,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결단한다면, 우리는 이 변화하는 시대를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 위기를 교회가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10/3/2021 | 세계 성만찬 주일

팬데믹에 받는 성만찬의 의미 The Lord’s Supper In The Pandemic Times

고린도전서 11:23-26

오늘 말씀은 성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공관복음서(the Synoptic Gospels)에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 마가복음 14장에, 누가복음 22장에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에는 13장에 충분히 성만찬에 대한 말씀으로 추정할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에, 서기 65-7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할 때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그 시기를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1장에 기록된 성만찬에 대한 말씀이 가장 원형(original)에 가까운 말씀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 말씀을 읽어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하셨던 말씀의 분위기를 더욱 실감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오늘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For I pass on to you what I received from the Lord himself) (23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어디서, 어떤 경로를 통해 들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주님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할 때도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했습니다(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고린도전서 15:3)”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복음이 막 전파되고 있을 무렵, 1세기 초에 입에서 입으로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사도들과 전도자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케리그마(kerygma)’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나누셨던 그날, 다락방의 식탁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바울은 그 때 있었던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on the night when he was betrayed)’ 이 말씀을 읽을 때 ‘그 날 밤’에 대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 아시지요? 예수님은 그 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로부터 배반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을 제거해야 되겠다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음모(conspiracy)가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음모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함으로써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예수님은 그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고, 유다가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마지막 만찬을 먹는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찢어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들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사람이다(요한복음 13:26)” 라고 하시면서 빵을 접시에 담긴 소스에 찍어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요한복음 13: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을 그리 심각하게 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 중 누구 한 사람이라도 유다를 붙잡고 말렸더라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 속에서 진행된 일들이었습니다. 사람이 말리고 변경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 날 밤에 있었던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고린도전서 11:23-24) 똑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은 식사 후에 잔을 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25절) 이 때는 이미 유다가 밖으로 나간 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그 날 저녁에 나눈 만찬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저녁 식사였습니다. 같은 시간에 다른 유대인들의 집에서도 모두 유월절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은 대략 이런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포도주 첫 잔을 따르고 축복문을 읽습니다. 그리고, 손을 씻는 예식이 있고, 식구들은 쓴 나물을 소금물에 찍어 먹습니다. 만찬 인도자는 대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마짜(matzah)’라는 납작한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 세 개를 포개서 가운데를 자른 후, 접시에 올려 놓습니다. 이 때 만찬에 참석한 제일 나이가 어린 자녀가 유월절에 얽힌 네 개의 질문을 합니다. 예를 들면, “왜 이 밤에는 ‘마짜’를 먹어요?”“왜 이 밤에는 쓴 나물을 먹어야 해요?” 이런 질문들입니다. 그러면 인도자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 포도주 잔을 마십니다. 다음은, ‘마짜’를 먹기 위한 축복문을 읽습니다. 아마도 이 때 예수님은 ‘마짜’를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쓴 나물을 마짜 사이에 넣어 ‘할렐 샌드위치’를 만들어 ‘하로셋’이라는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습니다. 바로 이 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마짜’를 소스에 찍어 유다에게 준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 다음에, 유월절 식사의 메인 디쉬가 나옵니다. 양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포도주 잔이 나옵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25절)” 하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할렐송’인 시편 113-118편, 136편을 불렀습니다. 각 집마다 지붕에 올라가 ‘할렐송’을 부르는 그 시간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고 합니다. ‘할렐송’을 마치고 마지막 포도주 잔을 마시면 유월절 만찬이 끝나게 되는데 그 때가 대략 밤 12시쯤 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만나요!” 하면서 헤어진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은 ‘마짜’를 찢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앞으로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가정마다 유월절 만찬이 있었고, 인도자가 ‘마짜’를 찢어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었지만, 아무도 예수님처럼 말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모두 네 잔의 포도주가 나왔지만 어느 가정에서도 예수님처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여라” 이렇게 말하면서 포도주를 마신 가정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행하던 유월절 만찬은 내가 앞으로 너희를 위해 행할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그림이 무슨 그림인지 아십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이탈리아)가 그린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입니다. 이 그림은 다빈치가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에 있는 수도원 식당 벽면에, 1495-1498년까지, 3년에 걸쳐 그린 그림입니다. 가로 8.8m, 세로 4.6.m로 상당히 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 것이다(요한복음 13:21)”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그림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여러 번 복구 작업을 했던 것이 오히려 상태를 악화시켰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NHK 방송에서 첨단 컴퓨터 기법을 동원하여 이 그림을 복원했습니다. 막상 그림을 복원해 보니 전에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선 이 그림에 나온 제자들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 옆에 있던 요한에게 누가 예수님을 배반한 사람인지 물어보라고 합니다. 다빈치는 베드로가 손에 칼을 쥐고 뒤로 감추고 있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식탁 위에 놓인 빵들은 유태인들이 식탁에 올리는 ‘마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먹는 보통 빵들입니다. 그리고 식탁에 양고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대신 접시에 물고기가 놓여 있습니다. 다빈치는 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식탁을 그리지 않았을까요? 

다빈치가 유대인들의 ‘마짜’ 대신 보통 빵을 그린 것은, 이 그림을 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유월절 식사 때만 이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양고기 대신 물고기를 접시에 그려 놓은 것은, 더욱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양고기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에 나오는 메인 디쉬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고기를 희랍어로 ‘익투스’라고 하는데, ‘익투스’라는 말은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테오 휘오스, 소테르(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의 첫 글자만 따면 ‘익투스(물고기)’라는 말이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 물고기로 예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크리스천들은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 서로 은밀하게 보여줌으로써 서로 자기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밝혔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을 따라 다빈치가 창의적으로 양고기 대신 물고기를 그렸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식탁을 그리는 대신 보통 식탁을 그림으로써 유대교의 색채를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성만찬에 나누는 빵에 대해 이런 해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나누어 먹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빵을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은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하나의 몸인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거의 2년이 되도록 인류는 코로나바이러스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삶이 제한을 받고, 활동이 중단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온라인 수업을 받아야 했습니다. 비즈니스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런 고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계속 변이(variant)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런 중에, 인류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류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동의 운명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네 문제, 내 문제가 따로 없습니다. 내 문제는 너의 문제가 되고, 너의 문제는 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류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면서 이 교훈을 깨달은 것입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델타변이(Delta Variant)’가 미국에서도 발견되고, 영국에서도 발견되고,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고, 그렇게 폐쇄적으로 나라의 국경을 봉쇄하고 있는 북한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겠습니까? 성만찬에 참여하여 함께 그리스도의 몸인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로 연결된 사람들은 아니지만, 나와 연결된 사람들을 증오하기 보다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들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나의 형제들이 되도록,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언약에 들어올 수 있도록, 크리스천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오늘 말씀을 이렇게 마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십시오.” (26절) 바울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 메시지가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난 2년 가까이 코로나바이러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힘들어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원의 메시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을 가지려고 해도 희망을 주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려고 해도 소망을 주는 메시지가 없습니다. 모두가 무기력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가 세상에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데, 교회 마저도 무기력하게 침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교회의 사명을 다시 인식해야 합니다. 과거 코로나바이러스를 몰랐을 때는 편안하게 믿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힘든 시기에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더 커지고, 교회의 사명은 더 막중해졌습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을 바꿔보십시오. 가장 힘든 시기에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가장 힘든 시기에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은혜가 참 크고 감사하지 않습니까?


9/26/2021 |

들꽃이 주는 교훈 Lessons From Wildflowers

마태복음 6:25-33

오늘로 위로와 용기를 주는 설교 시리즈 마지막 설교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설교(Sermon of the mountain)’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매슬로우(Abraham Harold Maslow, 1908-1970)라는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1951년에서 1969까지 브랜다이스(Brandeis) 대학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인간의 ‘욕구의 단계설(Maslow's hierarchy of needs)’로 유명한 학자입니다. 지금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맨 밑에 생리적인 욕구(physiological)가 있고, 그 위에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가 있고, 그 위에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love/belonging)가 있고, 존중을 받고자 하는 욕구(esteem)가 있고, 맨 위에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self-actualization)가 있습니다. 매슬로우는 맨 아래 단계가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로, 그 단계가 충족되면 또 그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맨 밑에 있는 ‘생리적 단계’가 바로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이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안합니다. 염려와 걱정이 생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두 가지 삶의 양식(modes)을 말씀하셨습니다. 첫번째 삶의 양식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살기 위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늘 불안하고,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는 삶의 양식입니다. 예수님은 뜬금없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Isn'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your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ing)?” (25절) 누가 이걸 모르겠습니까? 음식이나 옷이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목숨(생명)이 먹는 것이나 입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면 자신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맞습니까?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생명)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태복음 16:26, 마가복음 8:36, 누가복음 9:25)”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누가복음 12:15)”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이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걱정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의 양식은 결국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30-32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사람들(those who have little faith)’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그 믿음이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 번째 삶의 양식은 삶의 목적을 잘못 설정하고 소유를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두 번째 삶의 양식은, 하늘에 날아다니는 새나 들에 피어 있는 꽃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새들은 씨앗을 심지도 않고, 먹을 것을 거둬들이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두지도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꽃은 옷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습니다. 랍비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말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예수님은 백합꽃이 입은 옷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새나 꽃들은 그들의 목숨(생명)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依存)하고 살아갑니다. 새나 꽃은 그들의 생명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기 때문에, 먹을 것이나 입을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새와 꽃들은 소유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나무에 열매들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오는 대로, 비가 적게 오면 적게 오는 대로, 날씨가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들의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갑니다. 백합꽃이 입은 옷이 솔로몬이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다운 이유는, 백합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옷을 입고 있지만, 솔로몬은 하나님이 지어 주신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와 명예와 지위를 자랑하는 사람이 만든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삶의 양식에 대하여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Chitrangada Sharan이라는 분이 ‘들꽃(wildflowers)’에 대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 역시 정원에서 잘 가꿔진 꽃의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런데 가끔은 들꽃들이 눈길을 끈다. 돌보는 사람도 없고, 물을 주는 사람도 없고, 관리를 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저런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저런 예쁜 꽃들을 피우는지, 들꽃들의 자태와 아름다운 색깔을 볼 때마다 경이(驚異)롭기만 하다. 들꽃처럼 우리도 스스로 어떤 환경에서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결코 그럴 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이 글을 쓰신 분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들꽃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진다고 했지만, 예수님은 들꽃의 아름다움은 창조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아가는 결과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이름 없는 새들과 이름 없는 들꽃이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을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입니다. 청교도들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위해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 ‘참새와 물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물새가 참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새야, 저 아래 땅 위에서 힘없이 걷고 있는 인간들을 좀 봐. 인간들은 왜 저렇게 염려하고 근심하는지 모르겠어. 참 이상하지 않니?”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참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우리처럼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없는가 봐!” 비록 어린 아이들에게 해 주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 감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깜짝 놀랄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0, 32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말이 26절에는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 때에 공급해 주십니다. 창세기 22:14에 나오는 ‘여호와이레(Yahweh-Yireh’라는 말이 이 말 아닙니까? “The LORD will provide(주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화면을 한번 보십시오. “Where God guides, He provides(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어느 곳으로 인도하시든지 그곳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신 광야에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있었습니까? 물과 옷과 신발과 음식이 공급되었습니다. 모세는 광야생활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지난 사십 년 동안, 우리들의 옷은 해어지지 않았고, 발도 부르트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8: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양식의 삶에 대해서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삶의 양식은 삶의 우선 순위를 바로 세우는 삶의 방식입니다.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3절) 이 말씀이 English Standard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그러나,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더하여 질 것이다).” 이 말씀에서 가장 강조되는 말은 ‘먼저(first)’라는 말과 “더하여 질 것이다(will be added)”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먼저 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 줄 알고 그것들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먼저 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놓치고 부수적인 것에 매달리는 삶에는 항상 염려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은 곧 우리의 생명을 위하는 일입니다. 이런 삶에는 걱정과 근심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렇게 우선 순위를 정해 놓고 이 우선 순위를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added to you(이 모든 것들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유명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하면서 “제가 퀴즈를 하나 내 보겠습니다” 하면서 테이블 밑에서 커다란 항아리를 꺼내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항아리 안에 주먹 만한 돌을 하나씩 넣었습니다. 돌이 가득 차자,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일제히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강사는 “정말입니까?”라고 되묻고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작은 자갈을 한 움큼 꺼내어 항아리에 집어넣고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자갈이 큰 돌멩이 사이에 난 틈을 비집고 들어갔습니다. 자갈이 가득 차자 강사는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학생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만 갸웃거렸습니다. 그러자 강사는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항아리 위에 놓고 항아리를 흔들었더니 돌멩이와 자갈 사이의 빈틈으로 모래가 들어갔습니다. “이제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자신 있게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강사는 웃으면서 물 주전자를 꺼내어 물을 항아리에 붓자 항아리에 물이 스며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한 학생이 번쩍 손을 들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삶이 아무리 바빠도 사이사이에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실험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우선 순위에 대한 중요성입니다. 만약 맨 처음에 큰 돌을 넣지 않고 먼저 자갈이나 모래를 넣었다면, 큰 돌은 넣지 못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일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더해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삶의 우선 순위가 바로 잡히면 염려와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들은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들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 삶의 우선 순서가 뒤바뀌면 우리는 다시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싸이게 됩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믿기 어려운 말씀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크리스천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유명하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사무엘하 7:8-9). 다윗도 그렇고 요셉도 유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다른 사람을 경쟁자로 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왕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게 해 주셨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이삭이 부자가 되려고 애쓴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삭을 거부(巨富)로 만들어 주셨습니다(창세기 26:12-14, 열왕기상 3:12-13). 크리스천은 높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대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낮은 자리로 내려갑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마태복음 20:26-27, 마가복음 10:43-44).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양식을 여러분의 삶의 방식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9/19/2021 |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편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편입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 시편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그 용도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이 시편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유월절 같은 큰 명절에는 전국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가면서 제물로 드린 양들을 어깨에 메고 갑니다. 고된 순례의 길이지만, 여기 저기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을 만나면 이 시편을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 시편은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움(help)’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 속에 나는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한자에서 사람을 뜻하는 ‘인(人)’자의 모양이 한 사람은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떠받쳐주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기댈 사람이 필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팬데믹의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소중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친구가 필요하고, 함께 대화할 사람이 필요하고, 함께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프랑스와 핀란드의 축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관중이 꽉 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 속에 “저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우리 모두에게는 저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이 자기 편을 응원하고, 소리 지르고, 함께 웃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다가 이런 말씀을 읽었습니다. “The Lord is greater than the giants you face(주님은 당신이 만나는 거인들보다 더 위대하시다).” (요한일서 4:4) 그래서 정말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지 확인해 보았더니 정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The one who is in you is greater than the one who is in the world(여러분 안에 계신 분이 세상에 있는 어떤 자보다 위대한 분이십니다).” 다윗과 골리앗 생각이 났습니다. 사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했을 때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알았습니다. “내 앞에 서 있는 저 무서운 거인보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더 위대하신 분이다.” 사도 바울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로마서 8:31) 놀라운 것은 이 말씀이 이미 구약 성경 시편 118:6에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The Lord is for me, so I will have no fear. What can mere people do to me)?” 이 시편에 나오는 말씀이 다윗에게 전해졌고,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게 전해졌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 앞에 서 있는 무서운 자이언트를 이 성경 말씀을 가지고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을 보면 저 산에 신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는 삼각산이나 북한산, 계룡산에 가 보면 각종 신들을 섬기는 제단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했던 사마리아 여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We Samaritans claim it is here at Mount Gerizim, where our ancestors worshiped).” (요한복음 4:20)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 산들로부터 나의 도움이 온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1-2절) 이 시편을 쓰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진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의 도움(my help)’이라는 말은 그가 개인적으로 도움을 경험했던 출처(source)를 말합니다. 이 시편을 쓰신 분은 그 도움의 출처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 하나님이 바로 ‘나의 도움’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라고 믿는다면, 어렵고, 힘들고, 절망적인 일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실제적인 믿음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번역할 때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말 중의 하나가 ‘보혜사’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희랍어 ‘파라클레이토스(παράκλητος)’를 번역한 말인데요. 이 말 속에 ‘안위하다’, 훈계하다’, ‘권고하다’, ‘격려하다’, ‘도와주다’ 등 다양한 뜻이 있어서 어느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필리핀 남부의 ‘쫄로아노 모로’ 족(族)은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들은 ‘우리 영혼에 따뜻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아이보리 코스트에 사는 ‘빠울리’ 족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근심과 걱정에 싸이고, 마음이 불안해질 때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이 때는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의 흐트러진 생각을 꽉 동여매어 그의 통제 밑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 이 말 대로 실천해 보시지요. 마음이 흩어지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때 여러분의 마음을 꽉 동여매서 성령께서 통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은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 주신다(He will not let you stumble).” (3절) 원래 이 ‘stumble’이란 말은 무엇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입니다.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괜찮겠지 하면서 발을 내 딛었는데, 그만 무엇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고향’이라는 노래 가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네” 지금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시편 121편의 사미스트는 이 때 나를 붙들어주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햇빛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빛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5-6절) 이 사미스트는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는데 ‘내 오른편에서(at my right side)’ 나를 지키신다고 합니다. ‘오른쪽’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강력한 힘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미스트는 “주님께서 너를 모든 재난에서 지켜 주시며, 네 생명을 지켜 주실 것이다(7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재난’이라는 말은 ‘all harm’ ‘all evil’ ‘all danger’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일로부터, 모든 해로운 일로부터,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도움은 정해진 기한(expiration day)이 없습니다. 사미스트는 ‘지금부터 영원까지(from this time and forever)’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시편의 사미스트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시편 118:8-9)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56:3)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편 18:31)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시편 73:28)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맞이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우리는 단순히 마음에 위로를 받는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직접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의 도움만을 구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십시오(Be imitators of God, as beloved children).” (에베소서 5:1)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닮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864(?)-1943, 미국)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흑인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잃고 노예 주인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 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그의 묘비에는 태어난 날이 없고 죽은 날짜만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카버를 길러 준 주인은 참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고마운 사람을 만난 덕분인지 카버는 하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그 시대의 가장 탁월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됩니다. 그는 마태복음 5장 44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한평생 이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 1856-1915, 미국)으로부터 돈과 지위와 명예를 포기하고 나와 함께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무지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을 해 보자는 제의를 받아들여, 두 사람이 함께 학교를 짓고 교육 사업에 헌신합니다. 그 학교가 앨라배마 주 터스키기에 있는 터스키기 대학교(Tuskegee University)입니다. 카버는 그 학교 농학부 교수로 47년을 재직하면서 자기가 공부한 과학적인 지식을 농업에 접목하여 생산량을 늘리는 획기적인 연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그 당시 남부 지방은 면화 재배가 주 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면화는 땅에서 질소를 빼앗아 가는 작물이기 때문에 땅을 황폐하게 만들어 면화 수확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흑인이나 백인이나 면화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카버는 콩 종류의 작물이 공기 중의 질소를 빨아들여 땅에 질소를 공급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땅콩을 재배하도록 농민들을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땅콩을 많이 먹던 때가 아니어서 땅콩을 심어도 소비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카버는 땅콩을 이용한 요리법을 직접 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유력한 사업가 9명을 초대하여 국, 샐러드, 닭고기, 아이스크림, 과자 등을 대접했는데, 모두들 음식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카버는 그 자리에서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이 드신 이 음식들은 모두 땅콩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땅콩을 많이 소비할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라고 말해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카버는 땅콩으로 요리할 수 있는 음식 105가지를 발표해서 땅콩 소비를 늘려 농부들의 수입을 늘렸습니다. 카버는 음식뿐만 아니라 몸에 바르는 크림, 구두약, 비누, 살충제, 화장품, 염료, 샴푸, 버터, 인쇄용 잉크, 접착제 등 무려 200개가 넘는 실용품을 발명했습니다. 땅콩 외에도 고구마를 이용한 118개의 실용품을 발명하여 미국 전체를 부요하게 만드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한 푼의 로열티를 받지 않고 자기가 개발한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하였습니다.

한번은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카버에게 만약 그가 자기 회사로 온다면 새 연구소와 연봉 1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카버는 에디슨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비평가들이 카버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모든 돈을 가진다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카버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만약 그 돈을 전부 갖는다면, 나의 사람들을 잊어버릴 지도 모르죠.” 조지 워싱톤 카버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명성과 부를 가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상관하지 않았고, 오직 세상을 돕는 일에서 행복과 명예를 찾고자 했다(He could have added fortune to fame, but caring for neither, he found happiness and honor in being helpful to the world).”

저는 교우 여러분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하게 구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도움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나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을 닮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지 워싱턴 카바 같은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렇게 확정(確定)해 놓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조지 워싱턴 카바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9/12/2021 |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The Lord Gives Me Strength

이사야 40:26-31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이 바빌로니아(Babylon)라는 강대국에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 갔던 매우 절망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Zedekiah)는 신흥 제국이었던 바빌로니아를 무시하고 이집트와 동맹을 맺었다가 결국 BC 586년에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의 두 아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처형을 당했고, 그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파괴되어 잿더미가 되고, 노약자와 장애인을 제외한 청년들과 유능한 기술자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 지식인들과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아무도 나의 어려움을 몰라.”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 때, 얼마나 힘들고 외롭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 같은 생각을 하면서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받는 것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지 않아(27절)!” 하고 말입니다.

이런 절망 중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영원한 하나님이다. 나는 온 세계를 창조하였다. 나는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다. 아무도 나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다(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my understanding).” (28절) 여러분, 이 짧은 네 문장으로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일일이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만들 때 재료(材料, material)를 가지고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것도 없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Everything is possible for him who believes. 마가복음 9:23)”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입을 통해 고백이 되는 날이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고 피곤하지도 않으시다고 합니다. 반대로, 우리는 얼마나 쉽게 지치고 피곤해합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직장에서 힘들게 일하고, 퇴근하면 지치고 피곤하지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할 과제가 많을 때는 더 지치고 피곤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으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아시지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마태복음 11:28-30)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금방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치지 않는 활기찬 삶의 비결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나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交際, fellowship)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은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말은 ‘understanding’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discernment’ 혹은 ‘percep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말을 “그의 명철(明哲)은 한이 없으며”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같은 뜻으로 시편 147:5에는 “His understand¬ing has no limit(그의 지혜는 한계가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우리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우리가 지금 어떤 곤경에 처해있는지, 지혜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시편 121편을 읽어보면 ‘watch over(지키다)’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Indeed, he who watches over Israel never slumbers or sleeps(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신다).” (4절)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심지어 너희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아신다(마태복음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even the very hairs of your head are all numbered [for the Father is sovereign and has complete knowledge].”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다 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얼마나 구체적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이렇게 관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요.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이렇게 관계하고 계시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런 분인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께서 나의 삶에 어떻게 관계하시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움 당할 때, 힘들고 마음이 불안할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이 방법들은 모두 성경에 나와 있는 것들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슬퍼하며 울부짖으십시오. 웃음을 울음으로,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야고보서 4:8-10)

“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 노력을 게을리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 말씀을 읽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으신(God-breathed, 디모데후서 3:16)’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부지런히 읽는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해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밖에 있는 것들을 사랑했던 삶을 고쳐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도표를 한번 보세요. 첫 번째 원은 내 마음의 중심에 내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내 마음 밖에 있습니다. 내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점들은 혼란스러운 나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가운데 원은 내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 밑에 있습니다. 내 주변의 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어, 질서가 잡힌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 번째 원은 내 마음의 의자에 내가 앉아 있고, 그리스도는 내 주변의 점들 중 하나입니다. 여전히 내 삶은 혼란스럽습니다. 이 잘못된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어떻게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지 성경이 제시하는 길을 잘 따라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31절) 개역성경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희망을 둔다(hope in the LORD)’는 말입니다. NASB에는 ‘wait for the Lord’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새 힘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새 힘을 얻습니다. 

여러분, 유명한 빌립보서 4:13 말씀을 아시지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I can do everything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이 말씀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through him(그를 통하여)’ 혹은 ‘in him(그 안에서)’이라는 말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스스로 힘을 얻는 삶이 아니라, 능력을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반드시 그분을 통해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새 힘(new strength, 31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통해서 얻는 힘과 하나님을 통해서 얻는 힘을 구별하기 위해서 ‘새 힘’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는 사람은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그런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31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한번 하늘을 향해 치솟아 올라가는 독수리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새 힘’이 필요합니다.

요즘은 스마트 폰이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스마트 폰이 대중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마트 폰이 항상 충전이 되어 있어야 사용할 때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스마트 폰을 충전시킵니다. 우리가 ‘새 힘’을 얻는 원리도 똑 같습니다.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분을 통해서 충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교제하면서 그분의 생각과 말씀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로라 월킨슨(Laura Ann Wilkinson, 1977-)은 2000년 9월에 있었던 시드니 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 여자부에서 36년 만에 미국에 금메달을 안긴 선수입니다. 대부분의 사진 기자들은 중국이 메달을 싹쓸이할 것으로 보고 카메라 앵글을 중국 선수들에게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월킨슨은 예선에서 5위를 했고, 준결승에서도 5위를 했기 때문에 메달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쌍쉐와 리나는 준결승까지 9차례 다이빙을 모두 1, 2위를 했습니다. 결승전 직전까지 월킨슨과의 점수는 무려 43점이나 벌어져 있었습니다. 5번 다이빙을 하는 결선에서 월킨슨은 1, 2차 시기에서 역시 5위를 차지해 메달 가능성은 희막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3차 시기에서 난이도 2.7짜리 리버스 다이빙을 완벽하게 소화해서 최고 점수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4차와 5차 시기에서도 모두 1위을 차지하며 대역전에 성공하여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월킨슨이 이렇게 극적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상을 무릅쓰고 경기에 임하는 투혼과 여유, 그리고 그녀가 가진 신앙의 힘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연습 중 오른쪽 발이 세 군데나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발등 쪽으로 뼈가 불쑥 튀어나와 걸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연습에 지장이 있을까 봐 올림픽 후로 수술을 미루고 경기에 출전했습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는 도약 직전 미소를 머금은 채 관중석을 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를 응원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때 오히려 불안감이 없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이빙을 할 때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을 외우면서 자신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투혼과 여유 그리고 신앙 외에 우리가 주목할 것이 하나가 더 있는데요. 그것은 친구와의 우정(友情)입니다. 결선에서 4차 시기를 하기 위해 플랫폼에 올라가기 직전에 그녀의 코치는 월킨슨의 귀에 대고 “힐러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라”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힐러리는 윌킨슨과 함께 다이빙을 하는 친구였는데, 3년 전에 그만 교통사고로 숨진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코치의 주문에 그녀는 깜짝 놀랐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경기에 임했고, 결국 역사적인 금메달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능력이 크신 분이라도 우리가 매일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둡고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똑 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 저는 주를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욥기 42:5) 하나님을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부디 보스턴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