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2020 | In Times Of Trouble 16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 Abiding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

시편 91:1-2, 9-16

오늘 설교 제목은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삶 (Abiding Under The Shadow Of The Almighty)’입니다. 지금 저는 매주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말미암아 힘들어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함께하심을 전해 드리고, 왜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 있는지, 고난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크리스천의 관점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시편 91편을 모세가 썼다고 주장하는 성서학자들이 있습니다. 저는 과연 모세가 이 시편을 썼을까 하고 질문해 보면서 “그럴 것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모세 역시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서는 그토록 원했던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했지만,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살다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가장 높으신 분을 여러분의 피난처로 삼고 나의 피난처이신 여호와를 여러분의 보호자로 모셨으니 어떤 불행도 여러분을 덮치지 않을 것이며, 아무런 재난도 여러분 집에 가까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께서 천사들을 시켜 여러분을 지키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저들이 여러분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9-11절) 이 말씀이 사실일까요? 정말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을 보호자로 삼으면 어떤 불행한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요? 서울 합정동에 ‘양화진’이라는 외국인 선교사 109명이 잠들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자원해 왔다가 죽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양화진’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요. 25세에 생을 마감한 ‘켄드릭 (Miss Rubye Rachael Kendrik, 1883-1908)’이라는 선교사의 무덤입니다. 그녀의 묘비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을 모두 조선에 바치리라).” 그녀는 1905년에 캔사스에 있는 성경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선교 본부를 찾아가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22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규정보다 나이가 2살이 어리다고 해서 2년을 더 준비한 끝에 1907년 텍사스에 있는 엡웟청년회의 후원을 받아 조선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사역지는 황해도 개성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송도’라고 했습니다. ‘켄드릭’은 도착하자마자 한글을 공부하면서 개성성경학교에서 서툰 한국어로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급성 맹장염을 앓게 되어 서울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의 정성과 주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켄드릭’은 1908년 25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를 후원했던 텍사스 엡웟청년회는 그녀와 서신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그녀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했고, 맹장염 소식을 듣고는 그녀의 쾌유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전한 편지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텍사스 청년들에게 10명, 20명, 50명씩 조선으로 나오라고 일러주세요.” 놀랍게도 그녀의 말처럼 수많은 청년들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켄드릭’ 선교사는 조선에 온 지 채 일년도 되지 않아서 제대로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도 못하고 그만 맹장염으로 죽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일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헌신한 사람들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오스왈드 체임버스 (Oswald Chambers, 1874-1917, 영국)’는 그의 대표작 ‘주님은 나의 최고봉 (My Utmost For His Highest)’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은 하루하루 매일 큐티 책처럼 읽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시편 91편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연구하라. 예수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또 읽으라. 나사렛에서 조용하게 순종하며 지낸 30년의 세월을 연구하라. 3년 간의 공생애(公生涯) 사역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가 사역 중에 받으신 비방과 침 뱉음과 배신과 미움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께서 견디신 모든 것들을 생각하라. 그러면 당신이 당하는 그 어떤 아픔도 주님의 고통과 비교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의 안전과 평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상의 요란함과 분쟁과 두려움은 언제든지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온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절대로 우리의 삶의 상황들이 우리의 내면의 평강을 빼앗아갈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 (those who are under the shadow of almighty)’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이스라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방은 낮에는 햇빛이 강렬합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늘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집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시편 121편 말씀이 그런 배경으로 써졌습니다. “여호와는 여러분을 지켜 주십니다. 여호와는 여러분의 오른편에 있는 그늘이 되십니다. 낮에는 태양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하며, 밤에는 달이 여러분을 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5-6절) 

사미스트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을 달리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피난처에서 사는 사람 (1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요새로, 바위로 고백하는 사람 (2절)’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는 사람 (4절)’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으로 무장하는 사람 (4절)’ ‘하나님을 피난처로, 보호자로 삼는 사람 (9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14절)’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 (14절)’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하는 사람 (15절)’ 등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들을 지킨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불행도 덮치지 않고, 어떤 재앙도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하는 ‘재앙’이라는 말은 ‘plague’라는 말인데, 전염병을 말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본다면 그런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꾸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의 어느 목사가 교인들에게 코로나바이러스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예배 드리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에 절대로 걸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정말 오늘 성경 말씀이 그런 뜻입니까? 

제가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전능자의 그늘 (Shadow Of The Almighty, 1958)’이라는 책입니다. 책 표지에 한 청년이 안데스 산맥에 올라 자기 앞에 펼쳐진 미지(未知)의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이 책의 저자인 ‘Elisabeth Elliot (엘리사벳 엘리엇, 1926-2015)’이라는 여자가 고이 간직하고 있던 자기 남편의 사진입니다. 엘리사벳은 이 책 외에도 ‘Through Gates Of Splendor (영광의 문을 통하여, 1957)’ ‘A Path Through Suffering (고난의 길을 통하여, 2003)’라는 책도 썼습니다. 2019년에는 유작으로 ‘Suffering Is Never For Nothing (고난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2019)’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엘리사벳은 1974년부터 ‘고든콘웰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를 하다가 2015년 매사추세츠의 매그놀리아 (Magnolia)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엘리사벳’의 남편 ‘짐 엘리옷 (Jim Elliot, 1927-1956)’은 ‘휘튼 칼리지’를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남미 ‘에콰도르 (Ecuador)’ 선교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졸업 후에 짐은 동료 네 친구와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에콰도르’의 ‘Curaray River’의 ‘팜비치 (Palm Beach)’에 착륙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선교를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다섯 청년들이 ‘아쿠아 (Acua)’ 인디언들에게 살해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까운 청년들이 무모한 선교 계획을 실행하다가 살해당했다는 뉴스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Life Magazine에서는 10 페이지에 걸쳐 이 다섯 청년들의 죽음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제가 그 때 Life Magazine (1956년 1월 30일)을 찾아보았더니 이런 제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FIVE DO AND DIE (다섯 명이 하다. 그리고 죽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What an unnecessary waste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라며 무모한 선교 정책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엘리사벳’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닙니다. 그는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제 남편은 이제야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녀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re is nothing worth living for, unless it is worth dying for (그것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그것을 위해 살 가치도 없습니다).” 

삶에 대한 관점이 달랐습니다. ‘엘리사벳’이 본 남편의 삶은 가치 있는 삶이었고, 가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짐 엘리엇’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그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엘리사벳’은 다시 ‘아우카’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찾아갔고, 그들은 마침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내 ‘엘리사벳’이 생각하는 남편은 무모하거나 실패한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산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제목의 책을 써서 남편의 삶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서 도전을 받았고,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한 사람들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그 축복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전쟁터에 나가도 총알이 피해가고, 코로나바이러스에 걸리지도 않고, 위험에 처할 때는 천사들이 그를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믿음이 좋은 사람들도 병에 걸립니다. ‘루비 켄드릭’같이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도 급성 맹장염에 걸려 선교를 제대로 시작도 해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짐 엘리엇’과 그의 네 친구들도 무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존 파이퍼 (John Piper)’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복음에 대한 진실한 열정을 좋아합니다. 그 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There is infinite, unending security in the almightiness of God — no matter what hap-pens in this life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간에 하나님의 전능하심 속에 무한하고 끝없는 안전이 있다).” “In the darkest moments of our pain, God is hiding his weapons behind enemy lines (우리들의 가장 어두운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무기를 적의 배후(背後)에 숨기신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가장 어렵고 힘들어 할 때, 적들의 배후에 치명적인 무기를 숨기고 계시다가 결정적인 때에 ‘하나님의 작전 (God’s Operation)’을 개시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생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스러운 순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무기를 적들의 배후에 숨기신 무기는 ‘부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시작되자 단번에 모든 것이 역전되었습니다. 적들은 패배자가 되고 하나님께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한국감리교회의 ‘교리적 선언 (Affirmation of Faith)’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습니다 (We believe in the final triumph of righteousness and in the life everlasting).” 의가 불의에게 패배합니다. 불의가 의를 이기고 불의가 의를 정복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고, ‘루비 켄드릭’의 생애가 그렇고, ‘짐 엘리엇’의 생애가 그렇고, 또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오늘의 고난과 역경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어려움과 고난에서 면제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때 유일하게 보장받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의 최후 승리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지금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참고 견디고 이겨내는 사람들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7/19/2020 | In Times Of Trouble 15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 God Helps Us In Our weakness

로마서 8:24-28

우리가 가진 성경 속에 사도 바울이 쓴 편지가 무려 13권이나 됩니다. 13권은 모두 그가 교회들에게 쓴 편지들입니다. 그가 쓴 편지 속에 무슨 이야기들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주로 신앙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practical)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놓인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세상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신학적인 상상력(想像力)을 가진 천재였습니다. 1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는 그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은 바울 같은 사람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For I have a great sense of obligation to people in both the civilized world and the rest of the world, to the educated and uneducated alike).” (로마서 1:14)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How terrible for me if I didn't preach the Good News).” (고린도전서 9:16)

그는 단순히 복음만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도록 돕는 일을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이 사랑 안에서 강하여지고, 또 깊게 뿌리내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도 높은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3:17-18) 요약하면 (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기를 (Then Christ will make his home in your hearts as you trust in him), (2)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강해지고 깊게 뿌리를 내리도록 (Your roots will grow down into God's love and keep you strong), (3) 하나님의 사랑의 (머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깨닫게 되기를 (May you have the power to understand, as all God's people should, how wide, how long, how high, and how deep his love is), 이것이 그가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한동안 3D라는 말이 유행하더니, 이제는 4D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3D가 길이와 넓이와 깊이를 느끼는 입체 영상이라면, 4D는 여기에 감각까지 더해지는 영상을 말합니다. 그 장면에 맞춰 실감 나게 의자가 흔들리고, 물이 뿜어져 나오는가 하면, 냄새나 바람까지 불게 하는 등 3D 영상에 몇 가지 물리적인 자극을 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1차원적이나 2차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3차원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아니, 3D를 넘어 4D로, 하나님의 사랑의 향기를 맡을 수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크리스찬의 삶에서 가장 핵심적인 세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크리스천은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희망’이라는 말이 ‘소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 (We were given this hope when we were saved, 24절)”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을 얻지만 그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그 때를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구원을 ‘Final Salvation (완성된 구원)’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1: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마지막 그 날에 그 모든 선한 일을 확실히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어떤 사람들은 “He will finish what he started (그가 시작하신 일을 그가 이루실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God is not finished with me yet (하나님은 아직 나에 대한 일을 끝내지 않으셨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The best is yet to come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지금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대로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란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24-25절) 그러므로, 크리스천의 삶에서 소망과 인내는 항상 함께 가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어둡고 암담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Final Salvation’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참고 기다리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삶에 개입하실 때까지 우리는 소망을 포기하지 말고 참고 기다리는 삶이 쉽지 않습니다. 다행하게도 이 참고 기다리는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은 연약할 때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시간을 혼자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하나님과 함께 보냅니다. 

‘Footprints On The Sand (모래 위의 발자국)’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다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꿈 속에서 본 일이라고 하는데요. 크리스천의 삶의 핵심을 꿰뚫는 이야기입니다. 꿈 속에서 지난 세월의 장면들이 플래쉬처럼 지나갔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면 그 장면마다 발자국 네 개가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두개는 자기 것이고, 다른 두개는 주님의 발자국입니다. 그런데 몇 몇 장면들은 발자국이 두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그에게 가장 어렵고 힘든 때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에게 원망하듯이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을 때 항상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제가 힘든 시간을 보낼 때는 왜 저만 혼자 남겨 두셨습니까? 주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그랬더니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다. 네가 가장 힘들었을 때 두 개의 발자국 밖에 없는 것은 내가 너를 등에 엎고 걸었기 때문이다 (My precious Child, during your times of trial and suffering, when you see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at I carried you).”

둘째로, 크리스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심을 믿습니다. 성경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6-27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 (God’s Spirit)’ 혹은 ‘그리스도의 영 (Christ’s Spirit)’입니다. 이 말은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신다는 말입니다. 또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니까 성령께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기도해 주시니까 그 기도가 아주 효과적 (effective)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6:18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Always pray by the power of the Spirit (항상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고 기도하라, CEV)”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고, “Pray on every occasion, as the Spirit leads (모든 경우에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라, Good News Translation)”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성령을 초대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라는 말입니다. 너의 의지 대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 지도 모르는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아시니까 그분이 인도하는 대로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법입니다.

셋째로, 크리스천은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삶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좋은 일들도 있고, 기쁘고 보람 있는 일들도 있지만, 절망적인 일들도 있고, 아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일들도 있습니다. 비록 이런 때에도 크리스천은 그런 일들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주보를 한번 보십시오. 주보에 한 여자가 커피 잔을 들고 창 밖을 바라보는 사진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써 있습니까? “The Scripture that beats the Murphy’s Law”라고 써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을 이기는, 머피의 법칙을 깨뜨리는 성경”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머피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디 보니까 ‘머피의 법칙’에 대한 이런 간단한 정의(定義)가 있더라고요. “Anything that can go wrong will go wrong (무엇이든 잘못될 수 있는 일은 결국 일어난다)”라는 뜻인데요. 사람들은 이 말을 엎친데 겹치는 격으로 계속 일이 꼬여서 안 풀린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약속 시간에 맞춰서 하는데 시간이 촉박합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계속 가는 곳마다 빨간 신호등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머피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성경 안에서 ‘머피의 법칙’이 통할까요? 한번 요셉의 생애를 보십시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이집트로 팔려왔습니다. 그 때가 요셉의 나이 열 일곱 살 때였습니다 (창세기 37:2). 보디발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잠시 주인의 인정을 받는가 했는데, 주인의 아내의 미움을 받아 요셉은 감옥에 갇힙니다. 이제 감옥에 갇힌 요셉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창세기 40:23). 요셉의 삶은 계속 꼬여만 갔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요셉의 삶에 ‘머피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십 이 년 동안은 ‘머피의 법칙’ 대로 요셉은 ‘from bad to worse’ 점점 더 나빠져만 갑니다. 그런데요. 정말 그렇게 꼬여만 가던 요셉의 삶이 어느 날, 단번에 역전(逆轉)되어 그의 나이 서른 살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창세기 41:46)? 요셉보다 더한 고난의 삶을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다가 평생 고난의 삶을 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을 보면 ‘머피의 법칙’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맞아 주십니다. “나의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 하였다!” 이 한마디 말씀으로 ‘머피의 법칙’은 무너집니다. 

요셉이 형들 앞에서 했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You intended to harm me, but God intended it for good to accomplish what is now being done, the saving of many lives (형들은 저를 해치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 즉 많은 생명들을 구원하시려고 이렇게 (형들의 나쁜 의도를 가지고) 선한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창세기 50:20) 여러분, 이 말씀과 오늘 읽은 로마서 8:28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모든 것이 함께 일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창세기 50:20말씀과 로마서 8:28 말씀, 이 두 말씀은 완전히 같은 말씀 아닙니까? 정말 성경 안에서는 ‘머피의 법칙’이 통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 않습니다. 참고 견딥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의 짐을 함께 지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크리스천은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7/12/2020 | In Times Of Trouble 14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고린도후서 12:7-10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눈에 띄는 말씀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꼭 짚고 가야 할 말씀이 있는데, ‘내가 교만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to keep me from becoming conceited) (7절)’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굉장한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울이 받은 ‘계시’의 내용은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갔는데,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한 나의 ‘종교적인 체험’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니던 때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현신애 권사’가 화제였습니다. 마침 그분이 병을 고치는 장소가 서대문에 있어서 저희 집과 가까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평생 다리가 불편하셨는데, 어느 날 ‘현신애 권사’에게 가서 다리에 안수를 받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에게 안수받고 어떠셨어요?” 하고 물었더니, “글쎄, 좀 좋아진 것 같기도 하고....” 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다른 사람들도 다리에 안수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짧은 한쪽 다리가 길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그 때는 많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때여서 그런지 ‘현신애 권사’의 신유집회는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의 이름이 차츰 사람들에게 잊혀졌습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한다는 말들이 들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죽었다가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자기가 본 천국에 대해서 간증 집회들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을 보았다고 합니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보았던 셋째 하늘이 ‘낙원 (paradise, 고린도후서 12:4)’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체험을 한 것 같습니다. 바울이 왜 이런 체험 이야기를 하는지 그가 처했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란 사람 말만 뻔지르하지 내 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그가 체험했던 일을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십 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이끌려 올라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떤 사람 (I know a man in Christ who was caught up to the third heaven fourteen years ago)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2:2) 이것이 고린도후서 12장이 써진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때부터 바울의 몸에 심한 고통을 느끼는 증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서 ‘내 몸 속에 있는 사탄의 가시 (a thorn in my flesh, a messenger of Satan, 7절)’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Three times I pleaded with the Lord to take it away from me.” (8절) ‘three times’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세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문제를 놓고 기도했다는 관용적인 표현 (idiomatic expression)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참고 견디며 꾸준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백의의 천사’로 알고 있는 ‘나이팅게일 (Florence Nightingale, 1820-1910, 영국)’은 1837년 17살 때 교회에서 기도하는 중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간호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가족들의 온갖 반대를 이겨냅니다. 그녀가 정식으로 간호사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은 것은 1851년 그녀의 나이 31살 때였습니다. 무려 14년 동안 나이팅게일은 간호가가 되기 위한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이팅게일’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도해서 얻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네가 지금 고통을 겪고 있지만, 이 때도 너는 나의 은혜 안에 있다는 응답을 들은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과 아픔은 단순한 아픔이 아니구나! 나는 그것을 모르고 이 고통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구나! 내가 받는 이 고통 속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자신이 고난 속에 있을 때, 아픔과 고통 속에 있을 때,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정말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에게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주어집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제가 크리스천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하마터면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체험을 했다는 사실이 바울을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잠언을 쓴 솔로몬도, 또 야고보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잠언 3:34, 야고보서 4:6) 또 잠언 6:16-19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일곱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만한 눈 (haughty eyes)’입니다. 남을 무시하고, 남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고, 내려다보는 ‘교만한 눈’을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빌립보서 2: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개역성경) “무슨 일을 할 때, 이기적이거나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다른 사람을 더 존중해 주십시오.” (쉬운성경) 이 말씀이 대부분의 영어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 nothing out of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 but in humility 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 (NIV) 무슨 일이든지 이기적인 욕망이나 헛된 자만심에서 나온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계획하는 일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것이 이기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추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들을 추진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의 경고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뒤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중국의 갑부 중에 ‘마윈 (Jack Ma, 1964)’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에서 갑부 순위 1위이고요. 세계 갑부 순위는 18위라고 합니다. ‘알리바바 (Alibaba Group)’라는 회사를 차려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그 회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담 제가 본 기사에서는 ‘지금은 물러날 때’라고 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주 패기만만한 사람이고, 그의 말에 거침이 없습니다. 우연히 ‘마윈의 명언’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가난한 사람과 일하지 마라”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용기도 없고 패기도 없고, 부정적이고, 그들은 기다리다가 인생이 끝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일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강연 밑에 여러 개의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역시 마윈!”이라는 댓글도 있었고, “아니 자기도 예전에 가난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이런 댓글도 있었고, “마윈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하고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이런 댓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어보니까 마윈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지칭한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칫 용기가 부족하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보는 관점에서 “가난한 사람과 일하지 마라”는 그의 말은 명언이 아닙니다. 약자에 대한 배려의 마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성경의 가치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오류는 자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知彼知己百戰不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입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적을 깔보니까 적을 모릅니다. 또 교만한 사람은 자기 분수를 모르니까 자기를 정확하게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백 번 싸우면 백 번 다 집니다. 성경에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 not think of yourself more highly than you ought, but rather think of yourself with sober judgment, in accordance with the measure of faith God has given you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 준 믿음의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진지하게 혹은 냉철하게 평가하라.” (로마서 12:3)

오늘 성경 말씀을 잘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그의 종 바울이 교만한 사람이 될까 염려해서 바울에게 교만한 생각이 들 때마다 가시가 그의 몸을 찌르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겸손하게 남을 배려할 때는 아무 고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생각이 들 때는 예외 없이 가시가 몸을 찌르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말씀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삶에 개입하고 계십니다. 감동입니다. 어찌 바울 한 사람에게만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나는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I am glad to boast about my weaknesses, so that the power of Christ can work through me)” 이렇게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10절)

청년들이 좋아하는 찬양 중에 이런 가사의 찬양이 있습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나의 보배가 되신 주/주 나의 모든 것/주 안에 있는 보물을/나는 포기할 수 없네/주 나의 모든 것(You are my strength when I am weak/You are the treasure that I seek/You are my all in all/I'm seeking You like a precious jewel/Lord, to give up I'd be a fool/You are my all in all) 이 찬양 가사처럼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약할 때 힘이 되시는 분 맞습니까? 그런데, 이 찬양을 부르면서도 모두들 강한 사람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이지 성경이 보여주는 논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아침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세상 논리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논리, 성경의 논리를 따를 것인지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하나님의 논리를 따르겠다는 결단에서부터 나와야 합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모세가 팔십 세가 되어 힘이 빠지고 약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잘 가고 있던 출애굽 행렬의 방향을 바꾸어 홍해 바다를 마주 보고 캠프를 치게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와 홍해 바다 사이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군사의 수가 너무 많다고 모두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시고, 삼 백 명만 가지고 사나운 아말렉 군대와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 힘이 강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선교 사역에 부르지 않았습니다. 약하고, 힘 없고, 내 놓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모두 내가 약할 때가 가장 강한 때라는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FKCC 교우 여러분들, 지금 무슨 일 때문에 걱정하고 있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절망하고 있습니까? 모든 일이 나의 계획대로 잘 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내가 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오히려 내가 약할 때, 나의 계획대로 일이 풀려지지 않을 때,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내가 약할 때, 그 때가 내가 강한 때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논리입니다. 내가 약한 사람인 것을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힘이 되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상관없이 “God’s grace is sufficient for me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7/5/2020 | In Times Of Trouble 1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I Will Give You Rest

마태복음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우리 모두에게 아주 친숙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구약성경 이사야 55:1-2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너희 목마른 사람아, 다 와서 마셔라. 돈이 없는 사람도 와서 마셔라. 포도주와 우유를 마시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마셔라. 어찌하여 너희는 진정한 음식이 못 되는 것을 위해 돈을 쓰느냐? 어찌하여 만족시켜 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애쓰느냐?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너희가 영혼을 살찌우는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하신 말씀이 400년이 지나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이사야 두루마리 속에 있는 말씀을 떠올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눈에 비친 그 시대의 사람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those who are weary and carry heavy burdens’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쉼 (rest)’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신다면 예수님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요? 2,000년 전과 지금은 세상이 너무나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지식은 엄청나게 확장되었고, 인간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편리해졌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본질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쉼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 쉼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길을 잃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하게 여기셨다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had compassion on them because they were confused and helpless, like sheep without a shepherd).” (마태복음 9:36, 마가복음 6:34) ‘confused’ ‘helples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자가 없는 양들이 어떻게 길을 알겠습니까? 목자가 없는 양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인류 역사 속에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수님같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나에게 오라고, 내가 안식을 준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무슨 근거로 나에게 오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I have been given all authority in heaven and on earth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마태복음 28:18) 또 요한복음 12:49에는 “I don't speak on my own authority. The Father who sent me has commanded me what to say and how to say it (나는 나의 권위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말씀해 주신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초대에 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초대를 거절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큰 잔치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Great Banquet)’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 14장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받은 사람들이 일제히 핑계를 대면서 잔치에 갈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밭을 샀는데, 급히 가 봐야 하겠습니다.” “내가 소를 열 마리 샀는데, 소를 잘 샀는지 테스트를 해봐야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집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이것들을 지혜롭고 영리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보여주셨으니 감사합니다." (25절) 모든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자신이 똑똑하고 잘 났다고 자신한 사람들은 모두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같은 사람들은 초대에 응했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사람 (the childlike)’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성경에는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나타내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 (27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이해력을 훨씬 뛰어넘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초대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 (쉼)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평생 교회생활은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지난 주에 ‘마음으로 믿는다 (believe in your heart, 로마서 10:9)’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머리로는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삶을 온전히 ‘commit (의탁)’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까?  

그 다음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볍다.” (29-30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내게 와서 배우고, 내가 지워주는 짐을 지고, 내가 주는 멍에를 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시길래 이런 말씀을 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humble and gentle at heart)’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마음은 이렇다고 말씀하셨습니다.

‘humble and gentle’이 말과 반대되는 말을 성경에서 찾는다면 아마 ‘harsh’라는 말일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은 종이 나옵니다. 이 종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Master, I knew you were a harsh man, harvesting crops you didn't plant and gathering crops you didn't cultivate.” (마태복음 25:24) 이 말 속에 나오는 ‘harsh’라는 말은 ‘혹독한’ ‘가혹한’ 이런 뜻입니다. 이와 달리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그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가 지워주는 짐을 지고,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을 때,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힘들어 멜 수 없는, 우리가 지쳐서 질 수 없는, 그리고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을 가르치는 마음이 ‘harsh’한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많이 읽은 주석책이 ‘윌리엄 버클리 주석 (The Commentary of New Testament by William Barclay)’이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는 사람들은 윌리엄 버클리라는 분의 해박한 인문학적인 지식에 놀라게 됩니다. 그분이 쓴 마태복음 주석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해오는 전설이라고 하는데요.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멍에’를 제일 잘 만드는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지금처럼 가게에 간판을 달았다고 하는데요. 예수님의 목공소 간판에 이런 글이 씌어 있었다고 합니다. “My yokes fit well (내가 만든 멍에는 잘 맞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목공소에는 항상 손님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멍에 (yokes)’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멍에’ 사진 한번 볼까요? 소 한 마리가 혼자 메는 ‘멍에’도 있고, 소 두 마리가 같이 메는 ‘멍에’도 있습니다. 이 ‘멍에’가 소에게 잘 맞지 않으면 소의 목덜미가 벗겨져 상처가 나고 소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소를 목공소에 데려가서 먼저 치수를 재고 제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멍에’가 다 만들어지면 또 소를 데리고 가서 소의 몸에 잘 맞는지 메워본다고 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 ‘멍에’를 만들어 주시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예수님께서 지워 주시는 짐도 우리에게 알맞은 짐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는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 속에 엄청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맡기신 책임과 사명이 힘들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의 생명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책임을 지워 주시고, 사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의 관점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관점을 바꾸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의 삶이 완전히 다른 색깔의 삶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하게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William Barclay의 말입니다. “Whatever God sends to us is made to fit our needs and our abilities exactly; God has a task for every one of us, which is made to measure for us. Jesus said ‘my burden is light.’ It is not that the burden is easy to carry; but it is laid on us to love; it is mean to be carried to love; and love makes even the heaviest burden light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위해서 우리를 보내시든지 그 일은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능력에 정확하게 맞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일이 있다. 그 일은 우리에게 잘 맞도록 잰 (measure) 것이다. 예수님은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지워 주시는 짐이 지기 쉽다는 말이 아니라 그 짐이 사랑으로 우리에게 지워졌기 때문에 사랑으로 그 짐을 지라는 말이다. 사랑은 무거운 짐을 가볍게 만든다).” 

어떤 여행사가 런던에서 에든버러 (Edinburgh)까지 약 400마일 되는 거리를 가장 빨리, 지루하지 않게 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에게 상품을 준다는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비행기로 가는 것이 제일 빠르다, 기차로 가야한다, 아니다. 길이 막히니 버스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다 등의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사에서 1등으로 뽑은 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먼 길을 가장 빨리 가는 길,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초대에 응하는 것입니다. Sarah F. Adams (1805-1848)는 빼어난 미모에 연기력까지 겸비한 당시 영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여배우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그만 폐결핵에 걸려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날로 수척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보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마음의 위로를 받으려고 성경을 읽다가 여행에 지친 야곱이 돌을 베고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그 자리에 돌 단을 쌓고 감사를 드린 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다는 창세기 28장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녀는 그동안 헛된 꿈을 붙들고 살아왔던 자신의 지난 삶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병으로 인해 육신의 아름다움과 세상을 향한 꿈은 사라졌지만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꿈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황폐할 대로 황폐해진 그녀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야곱이 기도했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하게 함은 (Nearer, My God, to Thee)’입니다. 

이제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통하여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나에게 오라고요. 내가 너에게 쉼을 주겠다고요.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의 꿈이 사라지고, 우리의 영혼이 지치고 피폐해졌을 때,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revive), 우리에게 새로운 꿈과 용기를 심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여러분의 눈을 돌리십시오. 그분을 진심으로 믿으십시오. 그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을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안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6/28/2020 | In Times Of Trouble 1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The Lord Is My Shepherd

시편 23편

오늘은 시편 23편을 함께 읽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이 시편 23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이 시편을 언제 썼을까?” 하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한 때는 “그가 어렸을 때, 초원에서 양을 치면서 이 시편을 썼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다윗이 이 시편을 쓴 것은 그의 삶이 가장 어렵고 힘든 때였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든 일이 잘 되고, 아무 걱정이 없을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 않나요? 어렵고, 힘들고,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더 큰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크리스천의 삶에 ‘고난’이라는 주제는 ‘필요악(必要惡)’과 같습니다. 누가 ‘고난’를 좋아합니까? 누가 ‘고난’을 환영합니까? 모두 싫어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특히 크리스천의 삶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가 고백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고난이 나에겐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71절) 다시 야고보서 5: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만약 ‘suffering’이 없었더라면, 만약 나에게 ‘affliction’이 없고, ‘hardship’이 없고, ‘trouble’이 없었더라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시간이 있었을까요? 내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까요?

성경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 성경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너희 모두는 내가 이집트 백성에게 한 일을 다 보았다. 그리고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어떻게 나에게 데리고 왔는지도 보았다 (You have seen what I did to the Egyptians. You know how I carried you on eagles' wings and brought you to myself).” (출애굽기 19:4) 그리고, 오늘 말씀에 나오는 ‘목자와 양’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요한복음 10:1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했는데요. 다윗이 고백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양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말씀을 보실까요? 1절에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빌립보서 4:11-13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만족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가난을 이겨 낼 줄도 알고 부유를 누릴 줄도 압니다. 배가 부르거나 고프거나, 넉넉하거나 궁핍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내게 힘을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나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에 간섭하시면서 항상 나에게 최선의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고난도, 가난도 모두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바울이 발견한 ‘the secret of living in every situation (빌립보서 4:12)’입니다. 

둘째로, 목자이신 하나님은 그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위험한 길’을 통과해 봐야 합니다. 그 ‘위험한 길’을 통과해 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나를 안전하게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지만 아무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우리 말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나와 있고, NLT 성경에는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라고 시제 (tense)가 ‘미래형’으로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나의 삶을 이렇게 인도하시겠구나!” 하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the dark valley of death)’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일종의 ‘메타포 (metaphor)’입니다. 그의 삶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언제 생명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순간들이 있었나요?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유일한 사람 다윗의 삶에 이런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참 크다고 생각합니다.

캘리포니아 동부 북쪽에 네바다 주 접경 지역에 ‘Death Valley (죽음의 골짜기)’라는 곳이 있습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 중 하나로 섭씨 56.7도까지 기록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화씨로 134도입니다. 이곳을 다녀온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사진을 찍다가 전화기가 녹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합니다. 척박한 환경에 적응한 생물과 식물들이 자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이 이런 ‘죽음의 골짜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뢰 아니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 죽음의 골짜기에 있지만,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신다!” 이런 믿음 아니겠습니까? 이 때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엄마와 아들이 기차를 타고 있었습니다. 이 아들은 5살 정도의 어린 아이였습니다. 이 아이는 지루했는지 자기 자리에 계속 앉아 있지 못하고 기차 안을 여기 저기 돌아다녔습니다. 저쪽에 물먹는 곳이 있는 것을 안 이 꼬마는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물을 마십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금방 또 가서 컵에 물을 따라옵니다. 옆 좌석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아주머니가 이 꼬마에게 말을 건넵니다. “얘야, 옷이 참 멋있구나. 해군 아저씨들이 입는 옷하고 똑같네!” 이 꼬마가 신이 나서 말합니다. “맞아요!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거예요.” “정말? 직접 만들어 주신 거야? 네 엄마는 정말 좋으신 분이구나!” “우리 엄마가 이 단추도 달아 주셨어요!” “그 멋있는 줄무늬도?” “예, 그 것도 우리 엄마가요!” 꼬마는 신이 나서 자기 엄마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차가 터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방이 깜깜해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이 아이는 자기 엄마 다리를 꼭 붙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엄마!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죠? 무섭지 않죠?”

다윗이 쓴 시편 23편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1-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He’라고 3인칭으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4절 말씀에서 ‘음침한 죽음의 골짜기’를 말할 때는 하나님을 ‘He’라고 3인칭으로 말하지 않고 ‘You’라고 2인칭으로 표현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잘 나와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Even when I walk through the dark valley of death, I will not be afraid, for you are close beside me. Your rod and your staff protect and comfort me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나는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 옆에 계시고 당신의 지팡이가 나를 지키고 위로할 것이 때문입니다).” 마치 엄마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던 꼬마가 자기 엄마 자랑을 한창 늘어 놓더니 막상 깜깜한 터널을 지나갈 때는 엄마 달려와서 엄마 무릎을 꼭 잡았듯이, 다윗이 어렵고 힘들었을 때 그를 지켜 준 것은 하나님을 붙들었던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다윗을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 앞에서 그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니, 그의 잔이 넘쳤다고 합니다 (5절). 사방에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적들이 우글거렸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먹이시고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목자가 양들을 돌보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Why do shepherds put oil on sheep (왜 목자는 양들에게 기름을 바르는가)?” 이런 제목의 매우 흥미 있는 글이었습니다. 그 글에 보면, 목자는 3가지 경우에 양들에게 기름을 바릅니다, 첫째는, 숫양 (rams)들이 암양들 (ewes)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울 때입니다. 이 때를 대비해서 목자는 숫양의 뿔에 기름을 발라줍니다. 그러면 치명적인 부상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는, 양의 코에 기름을 발라 준다고 합니다. 양의 코에 알을 낳으려는 파리들이 꾄다고 합니다. 이걸 그냥 방치하면 양이 병이 들거나 치명적인 병에 옮기도 하고 아픔으로 앙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목자는 양들의 코에 올리브 오일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셋째는, 목자는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기름을 바르면 ‘scab disease’라는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병은 양의 머리에 기생충이 서식하는 병인데, 양들이 서로 머리를 비비거나 할 때 다른 양들에게 전염된다고 합니다.

다윗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신다고 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의 사정을 잘 알고 세심하게 양들을 돌보는 것처럼, 다윗은 자기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은혜와 축복을 “나의 잔이 넘친다”는 말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And this same God who takes care of me will supply all your needs from his glorious riches.” (빌립보서 4:19)

우리가 이 하나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계시는구나!” 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서 5:8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 읽으면 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슴으로 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10:9) 이 말씀에 ‘마음으로 믿으면’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If you believe in your heart’란 말입니다. 예수님을 머리로만 믿지 말고 가슴으로 믿으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5:8 말씀도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머리로 읽으면 큰 감동이 없지만, 가슴으로 읽으면 큰 울림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로마서 5:8 말씀을 가슴으로 읽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I loved you at your darkest (나는 네가 어둠 속에 있을 때 너를 사랑했다)!” 

구약 말라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너희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너희를 좋아하겠느냐?” (1:8) 하나님을 총독만큼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결함이 있는 제물들을 바칩니다. 바치는 시늉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평생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을 것입니다. 내가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