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1/2020 | In Times Of Trouble 11

나의 마음이 주의 말씀을 향하게 하소서 Give Me An Eagerness For Your Laws

시편 119:24-37

얼마 전에 재미있는 보고서를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이 보고서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1938년에 시작한 ‘The Harvard Study of Adult Development (성인 발달에 대한 하버드 연구)’에 대한 보고서였습니다. 이 연구는 1938년에 724명을 대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지금은 그들의 후손들 2000명을 대상으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본 보고서의 제목은 “What makes a good life (무엇이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가)?”였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이 궁금하시지요?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명해지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거나,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하버드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아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724명의 사람들도 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던 그 당시 2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었습니다. 그 중 미국 대통령이 한 명 나왔고, 현재 60명이 살아 있다고 합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자기들이 바라던 것들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자기가 good life를 살았다, 자기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고, 자기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본 결과,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합니다. “Good relationships keep them happier and healthier (좋은 관계가 그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었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 ‘social connection (사회적인 연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외로움 (loneliness)’은 사람을 죽이는 병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도 외로움을 경험하고, 심지어 결혼을 해서도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보고서에 의하면 ‘관계의 질 (quality)’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Good relationships don't just protect our bodies, they protect our brains (좋은 관계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두뇌도 보호한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었던 공통점은 그들에게 의지할 가족과 친구와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모두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보고서 내용을 보면서 한가지 아쉬운 것은, 여기서 말하는 관계가 모두 ‘인간 중심적인 (human centered)’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관심을 가져야 할 또 하나의 관계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버드의 보고서 내용 대로 건강한 ‘인간 관계’가 중요하지만, 이 못지않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평안을 가지고 우리는 삶의 모든 문제들을 이겨 나갑니다. 이 문제에 지난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아닙니다.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정복자 이상입니다).” (로마서 8:37)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라는 말은 그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시편 119편 말씀을 한번 보시지요. 제가 이 말씀을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말씀 속에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형편이 잘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속에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잘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가 처한 상황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습니다 (I lie in the dust).” (25절)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내 영혼이 진토(塵土)에 붙었사오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혹은 ‘진토에 붙어 있다’는 말은 “완전히 낙심하여 죽게 되었다”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 있었다 (욥기 2:8)”는 말씀이 있는데, 재 가운데 있다는 말은 욥의 슬픔을 말하는 성경적인 표현입니다. 때로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요나 3:6).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낙심하게 되었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 사미스트가 처한 상황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절망 상태입니다. 이런 성경 말씀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없는, 그야말로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이렇게 길어질지 누가 알았습니까? 그리고 이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삶을 이렇게 바꾸어 놓을지 누가 알았습니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겸손한 태도를 갖습니다. 내 삶을 내 마음대로 경영할 수 있다는 교만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미스트가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보십시오. 저는 이 사미스트의 말 속에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세 단계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중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처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원해야 합니다. 하버드 보고서에서 내린 결론처럼,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 인간관계에 공을 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위해서도 공을 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야고보서 4:8)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예레미야 29:13 말씀입니다. “If you look for me wholeheartedly, you will find me (네가 전심으로 나를 찾는다면 나를 찾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첫 번 단계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Wash your hands, you sinners; purify your hearts, for your loyalty is divided between God and the world (죄로부터 손을 씻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너희의 충성심을 나누지 마라).” (야고보서 4:8)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두 번째 단계는 지금의 삶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손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죄된 생활과 단절하라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사미스트가 고백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나의 행위를 고백했더니 주는 내게 대답하셨습니다 (I recounted my ways and you answered me).” (26절) Good News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confessed all I have done, and you answered me (내가 지금껏 해 왔던 모든 일들을 고백했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습니다).” 주께서 응답하셨다는 말은 비로소 주님과 소통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원하지만 그 일에 진전이 없는 것은 이 두 번째 단계를 간과하거나 소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이 지금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 없이 다짜고짜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찾아서 그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When times are good, be happy; but when times are bad, consider this: God has made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전도서 7:14)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13) 내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낼 때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막연한 반성이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이 올바른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반성하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이 무슨 일들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요한복음 6:29) 이 질문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유대교를 믿던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질문에 대하여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What God wants you to do is to believe in the one he sent., Good News Translation)." 

이 말씀에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인격과 예수님의 삶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 알게 되고, 그 일을 하게 됩니다. 마치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You are truly my disciples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요한복음 8:31-32) 이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교훈을 잘 따르고 실천하는 일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사미스트는 이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나로 주의 교훈들과 가르침들을 이해하게 (to understand) 해 주소서.” (27절) “나의 마음을 주의 말씀 (법도들)에 맞추어 놓았습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법규들을 단단히 붙들고 있습니다 (I have determined to live by your regulations. I cling to your laws).” (30-31절) “나에게 깨달음 (understanding)을 주소서.” (34절) “나의 마음이 주의 말씀들 (법규들)로 향하게 하시고, 이기적인 이익들로 향하지 않게 해 주소서. 내가 무가치한 것들에게서 눈을 떼게 해 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나를 보호해 주소서 (Give me an eagerness for your laws rather than a love for money! Turn my eyes from worthless things, and give me life through your word①. / ①Some manuscripts read in your ways).” (36-37절) 그가 ‘깨달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기 위하여 무슨 공을 들이고 있습니까? 무슨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어렵고 힘든 때를 그냥 걱정과 불안으로 보내거나, 허송 세월로 무기력하게 보내거나, 그냥 의기소침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입니다. 내 마음이 ‘이기적인 일들’을 추구하고 있지 않았는지, 내 마음이 무가치한 일들을 좇고 있지 않았는지, 자신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쫓기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껏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안과 담대함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도, 예수님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이제 우리도 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6/14/2020 | In Times Of Trouble 10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I Give My Peace To You

요한복음 14:23-28

지금은 불안한 시대입니다. 1977년에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가 ‘The Age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은 BBC 방송의 제안으로 텔레비전 시리즈로 방송된 것을 후에 책으로 출판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갤브레이스는 아담 스미스, 리카도, 맬서스, 스펜서, 베브렌, 마르크스, 레닌에 이르기까지 지난 200년 간의 ‘경제 사상사’를 소개하면서 앞으로의 세계 경제에 대한 전망을 제시했습니다. 갤브레이스는 이 책에서 지금은 과거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가도,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은 이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갤브레이스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은 지금 세 가지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미국은COVID 19에 대한 안일한 대처로 사망자가 현재 무려 118,00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세계 사망자의 거의 1/3이 미국인인 셈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뒤늦은 대처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고 있고, 연일 코로나바이러스에 무슨 약이 좋다는 둥 이상한 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 내의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입니다. 

둘째로, 지금 미국은 전에 없는 경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신규 실업자가 4,000만명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체 노동력의 1/4에 이르는 숫자라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1930년대의 대공황 (The Great Depression) 때와 거의 비슷한 상황이라고 합니다. 거기다 미국과 중국 간의 COVID 19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와 무역 패권 경쟁으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셋째로, 미국은 인종 간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흑인 조지 플로이드 (George Floyd)가 백인 경찰에 의하여 8분 46초 동안 목이 눌려 있다가 사망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미국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흑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경찰의 총격으로 죽은 사건이 많이 있었지만, 이번에 일어난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SNS를 통하여 생생하게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이 공개되면서 들불처럼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이 항의 시위가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55년 앨라배마 몽고메리에서 로자 파크스 (Rosa Parks)라는 흑인 여자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건과 흡사합니다. 그 때는 그런 일들이 늘 있는 일이었지만, 로사 파크스 사건은 그냥 묻히지 않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사건으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하여 마틴 루터 킹이라는 흑인 민권운동가가 나오게 되고, 이 사건은 흑인 민권 운동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 일어난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되어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라는 시위의 도화선이 되고 있습니다. 플로이드의 장례식 소식을 전한 AP 통신은 프로이드의 죽음이 온 세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고 하면서 ‘빅 플로이드 (Big Floyd)’라는 말로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 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3:28)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미움의 벽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함으로써 이 둘 모두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찾아오셔서, 평화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에베소서 2:16-17) 

차별이 없는 세상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 비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차별의 장벽을 몸으로 없앴던 것처럼, 우리도 차별을 없애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우리 속에 많은 차별 의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 못 가진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 못 배운 사람에 대한 차별 의식,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차별 의식이 있습니다. 이번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지켜본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차별 의식부터 없애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항의 시위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들고 있는 피켓에 “Black Lives Matter”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하고 보호되어야 합니다.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은 마땅히 철폐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생각과 함께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이 율법보다 위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입니다.

정치적인 발언이 될까 봐 조심스럽습니다만, 저는 플로이드 사건을 보면서 미국 대통령 트럼프의 머리 속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미국에서 사망자가 만명을 넘고 있을 때, 트럼프는 자화자찬을 늘어 놓았습니다. “전문가들은 모두 10만명 이상 죽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우리가 대처를 잘 하는 바람에 사망자가 5만명 밑으로 막을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플로이드 사건 때도 트럼프는 연방군을 투입해서 사태를 진압하겠다고 시위자들을 협박했습니다. 그 선언을 하고 나서 손에 성경책을 들고 백악관 근처에 있는 한 성공회 교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바이블 벨트 (The Bible Belt)’에 있는 지지층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인명을 경시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트럼프는 실제로 군대를 동원해서 시위를 진압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선거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정은이라는 한국의 소설가가 쓴 글을 읽었습니다. “...... 요즈음에 ‘임계장’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임시 계약자 노인장’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또 ‘고다자’라는 말도 있는데, ‘고르기 쉽고, 다루기 쉽고, 자르기 쉬운 사람’을 말한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큰사람인지도 알고 그 안에 얼마나 거대한 세계가 있는지도 잘 안다. 아마 다른 노인들도 그럴 것이다. 아마 다른 젊은이들도 그럴 것이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다가 문득 이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전율할 때가 있다. 오랫동안 들여다봐야 잘 알 수 있는 거대한 하나의 세계가 그 사람들 안에 있는 것이다. 도구로 쉽게 쓰이고 버려질 수 없는, 모든 사람이 각각 한 명의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큰 꿈인가.” 

미국이 이렇게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자기 나라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정책을 표방하면서 그동안 미국이 참여했던 일에서 속속 손을 빼고 있고, 스스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고 있습니다. 독일이 미국 편을 안 들어준다고 금방 독일 안에 있는 미군을 대거 철수시킨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미국에 사는 것이 무섭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I am leaving you with a gift-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27절) 

걱정과 근심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 살아!” 이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니라 걱정하지 않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의 평안을 줄 테니까 그 평안으로 걱정과 두려움을 충분히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자’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이사야 9:6)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①,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 ①Or Wonderful, Counselor ‘Prince of Peace’라는 말은 평화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Prince of Peace’로 태어나셨습니다. ‘Prince of Peace’가 예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Prince of Peace’이신 예수님은 평화에 대하여 제일 잘 아시는,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분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의 평안 (my peace)’을 제자들에게 주신하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그 ‘평안’은 어떤 ‘평안’인가?” “도대체 그 ‘평안’은 어디서 온 ‘평안’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비로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이해할 수 있고, 그 ‘평안’을 우리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그냥 물건을 주고받는 것처럼 주고받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온 ‘평안’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I pray that they will all be one, just as you and I are one-as you are in me, Father, and I am in you.” (요한복음 17:21)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명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You move us to delight in praising You; for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and our hearts are restless until they rest in You.”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이 없었다는 말은 곧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에 평안 (안식)이 찾아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교회에 아무 문제가 없고, 교회 분위기가 좋으면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의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됨 (oneness)’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안에 있는 완전한 ‘하나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중단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이 ‘하나됨 (oneness)’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my peace (나의 평안)’는 아들이 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됨’에서 오는 ‘평안’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My soul is crushed with grief to the point of death.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 (마태복음 26:38)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의 평안’을 말씀하신 예수님께 걱정도, 불안도 없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런 ‘평안’을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걱정과 불안을 이길 수 있는 ‘평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속에 걱정과 불안이 생길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심으로 하나님과 소통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의 평안’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마음에 걱정과 불안이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고, 거기에서 오는 ‘평안’으로 모든 불안을 이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perception을 주고, insight를 주고, understanding을 주고, discernment를 줍니다. 지혜가 있으신 분들은 “아,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을 소유할 수 있겠구나!” 하고 이미 깨달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다고 말씀하신 ‘나의 평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불안할 때마다, 걱정이 있을 때마다 조용히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나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약속하신 ‘평안’이 우리의 마음에 흘러 들어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요한복음 16:33), 우리도 이 ‘평안’을 가지고 세상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6/7/2020 | In Times Of Trouble 9

앞서 가시는 하나님 The Lord goes Ahead Of You

신명기 31:1-8

오늘 말씀의 배경을 잠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을 이끌었던 지도자 모세의 나이가 120살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생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이 여기까지인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조상들의 땅 가나안 땅의 입구에까지 와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일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여호수아에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세가 부탁한 말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afraid or discouraged, for the Lord will personally go ahead of you. He will be with you; he will neither fail you nor abandon you.” (7-8절) 그냥 단순히 용기를 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냥 단순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보다 앞서 가실 테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3절에도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보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시고, 그곳의 나라들을 물리칠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잘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시혼과 옥에게 하신 일들을 이 나라들에게도 하실 것이오.” (4절) 시혼과 옥은 아모리 족속들의 왕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싸우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또 다시 너희보다 먼저 요단강을 건너고, 너희를 위해 싸워 주실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러분, John Newton (1725-1807, 영국)이 가사를 쓴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 305장)’ 모두 좋아하시지요? 저는 그 찬송 가사 중에 3절 가사가 제일 좋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Through many dangers, toils and snares I have already come: 'tis grace has brought me safe thus far, and grace will lead me home).”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천국에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찬양 가사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금 모세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의 온갖 어려움과 고난 중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은혜로 지키시고, 먹이시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그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단강을 건너게 할 것이고, 적들을 물리칠 것이고, 조상들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제 설교 제목이 ‘앞서 가시는 하나님’입니다. 설교 제목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믿는다면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저는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앞서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왜 우리는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모르는 길을 갈 때,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화면에 나오는 대로 따라가면 되니까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비게이션에 비할 바가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앞서 가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세요? “네가 깊은 물속으로 지나갈 때 내가 너를 데리고 함께 건너가겠다. 네가 고난의 강을 건널 때에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네가 고난의 불을 통과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삼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When you go through deep waters, I will be with you. When you go through rivers of difficulty, you will not drown. When you walk through the fire of oppression, you will not be burned up; the flames will not consume you. For I am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your Savior).” (이사야 43:2)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위험하고 위기에 빠져 있을 때, 아무 것도 나를 위해서 할 수 없는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그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교육하기 위하여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통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광야생활 내내 구름 기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가면서 길을 인도했습니다. 밤에는 구름 기둥이 불 기둥처럼 보였습니다 (민수기 9:16).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으로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3:21).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고,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도 있는데, 무려 40년을 구름 기둥을 따라 길을 가는 훈련을 받았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성경에서 재미있는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민수기 9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구름 기둥이 성막 위로 걷혀 올라갈 때가 있고, 성막 위에 머무는 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이 성막 위에서 걷혀 올라가는 때는 길을 갔고,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때에는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구름이 성막 위에서 이틀을 머물기도 하고, 한 달을 머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년을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9:22).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규정을 지키면서 길을 가기도 하고 머물기도 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규정을 적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 규정을 잘 따를 수 있을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이 규정을 잘 지켰는데, 우리는 이 규정을 지킬 수 없을까요? 그 이유는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 밖에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디가 어딘지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방향도 알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대안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어야 하는데, 대안들이 많은 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신뢰하는 것들을 모두 내려 놓고, 하나님을 믿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장담하건대 하나님 외에 내가 신뢰하는 것들을 내려 놓을 수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가 신뢰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앞서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을 ‘아바 (Abba)’라고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 14:36). 예수님에게 배웠겠지요? 바울도 그의 편지에서 ‘아바’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했습니다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 (father)’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아바’라는 말이 사용된 세 차례의 경우를 살펴보면 모두 이 ‘아바’라는 말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친밀한 말로 (as an intimate term to characterize their personal relationships with God)’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아바’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친밀한 (intimate) 분입니까? 며칠 전 한국에서 나온 뉴스를 보니까 앞으로 ‘외국인 등록증 (Alien Registration Card)’에 ‘에일리언 (alien)’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에일리언 (alien)’이란 말이 E. T.같은 ‘외계인’을 뜻하는 말이잖아요? 지금은 미국에서 ‘영주권자’를 ‘Permanent Resident’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Resident Alien’이라고 했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씌어진 카드를 받았습니다. 그 때는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었던 말인데, 지금은 이런 말이 외국인들을 차별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혹시라도 우리 중에 하나님을 ‘에일리언 (alien)’처럼 낯선 분으로, 외계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로 알까 봐 경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이런 걱정은 이방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필요한 줄을 아신다.” (마태복음 6:30-32)

문제는 우리가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버지처럼 친밀하게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사전 이해 (preunderstanding)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성경에 대한 ‘편견 (prejudice)’이 있으면 하나님의 인격적으로 경험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꼭 붙들고 있으면 진정 나의 제자이다. 그 때에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복음 8:31-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47)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다고 할 때 우리는 쉽게 ‘belong to’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많은 번역성경들이 ‘whoever is of God’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성경에 대한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말씀이 디모데후서 3:16-17 말씀이었습니다.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이라는 구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영감을 받은 말씀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혹은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out”이라고 번역한 성경들이 많이 있습니다 (NIV, ESV, Berean Study Bible, International Standard Version, New Heart English Bible, Young's Literal Translation).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숨결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을 때 성경에 대한 느낌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그 속에 좋은 말씀이 많이 들어 있는 고전(古典, classics)이 아닙니다. 고전을 읽고 사람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어렵고 힘든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그 말씀을 읽으면,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내 삶에 대한 insight를 주고, perception을 줍니다. 왜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도해 줍니다. 마치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광야의 한복판에 서 있는 여러분의 삶을 여러분보다 앞서 가시며 인도하실 것입니다.


5/31/2020 | In Times Of Trouble 8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II) The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느헤미야 8:1-10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나라를 다시 세우는 운동을 벌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에스라는 탁월한 율법학자이고,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가 임명한 총독입니다. 에스라는 학문과 영성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느헤미야는 열정이 넘치고 추진력이 있는 행정가 (정치가)였습니다. 두 사람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두 사람 모두 바빌로니아 포로 시기에 바빌로니아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 때, 2차 귀환자들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에스라 7:8).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3차 귀환 때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 2:1). 단순하게 귀국 연대만 본다면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약 13살 정도 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에스라, 느헤미야 두 사람을 보면서 바울과 바나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동역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초대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나바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사울의 회심 (conversion)을 의심하고 있을 때, 사울의 회심의 진정성을 인정했던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고향으로 내려가 은둔하고 있던 사울을 불러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인정받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리아 안디옥 (Antioch of Syria)에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에서 일년을 같이 사역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안디옥 교회가 파견한 선교사로서 1차 선교여행을 같이 합니다.

‘동시대(同時代)’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라는 말입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을 영어로 ‘contemporaries’라고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동시대를 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초대교회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동시대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에 소개했던 류성룡과 이순신이 동시대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당파싸움으로 기진해 있던 조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고, 일본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축복을 받고, 이 시대가 축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산다는 일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에 에스라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에 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성벽 재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사마리아의 관리들은 끊임없이 공사를 방해했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절대로 성벽 재건 공사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이 성벽을 쌓아봐야 그까짓 성벽은 여우 한 마리만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 공사가 반이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이들은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지금 당신에 대한 나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당신이 성벽 공사를 마치고 왕이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페르시아의 왕이 이 소문을 들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일단 만나서 얘기합시다. 몇 시까지 ‘오노 평야 (the plain of Ono)’에 있는 한 집에서 만납시다.” 하지만, 느헤미야는 이것이 그들의 술책인 것을 알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이들은 느헤미야를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한번은 예언자들을 매수해서 “오늘 저녁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으니 오늘 저녁은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도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느헤미야 6:10).” 그렇지만 느헤미야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라 자기를 함정에 빠뜨릴 음모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 말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스마야의 말을 들으면서 그것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아니라 뇌물을 받고 나에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I perceived that God had not spoken to him, but that he had uttered this prophecy against me because To-biah and Sanballat had hired him).” (느헤미야 6:12, NASB, NKJV)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어떤 성경에는 “I realized that.......” 이렇게 번역한 성경도 있지만, 많은 성경들이 “I perceived that.....”이라고 했습니다. ‘perceive’의 명사형이 ‘perception’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을 하자면 ‘지각(知覺)’이라고 할까요? 사전에 ‘perception’에 대한 설명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act or faculty of perceiving, or apprehending by means of the senses or of the mind (생각이나 감각적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이나 행위)’ ‘immediate or intuitive recognition or appreciation; insight; intuition; discernment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 능력)’ 제가 이렇게 이 구절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은 그만큼 느헤미야가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그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솔로몬이 쓴 잠언 말씀에 ‘discernment’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네가 은이나 숨은 보물을 찾는 것처럼 지혜를 찾는다면, 네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If you seek her as silver, and search for her as for hidden treasures; Then you will discern the fear of the LORD, and discover the knowledge of God).” (잠언 2:4-5, NASB) ‘perception’ ‘discernment’ ‘intuition’ 이것은 노력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열심히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insight (통찰력)’를 얻도록 위해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17-18).

이제 오늘 저의 설교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성전과 성벽이 재건되고, 이제 나라를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공동의 비전을 가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입니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Go and celebrate with a feast of rich foods and sweet drinks, and share gifts of food with people who have nothing prepared. This is a sacred day before our Lord. Don’t be dejected and sad,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느헤미야 8:10)

이 말씀을 직역하면, “주님의 기쁨이 여러분의 힘입니다” 이런 말니다. 그런데, 우리 성경에는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곧 여러분에게 힘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가 주로 소유를 나타내는 전치사이지만, 때로는 원인, 이유, 기원 (origin)을 나타낼 때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주님 때문에, 주님으로 인하여 오는 기쁨이 곧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는 “주님의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Delight in Jehovah is a strong refuge for you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너희에게 강력한 피난처가 됩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입니까? 바로 지금과 같은 때, 답답하고, 우울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억누를 때, 경제적인 문제를 염려해야 할 때, 직장을 염려해야 하고, 비즈니스를 염려해야 할 때, 모든 활동이 중지되었을 때, 오늘 읽은 이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깊은 뜻을 잘 몰라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된다는 말씀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지 않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쁨 (the joy of the Lord)’이라는 말은 매우 광범위한 말이지만,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문’ 앞에 모인 때가 바로 ‘속죄의 날 (The Day of Atonement)’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일곱째 달이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자기 마을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물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1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곱째 달 10일을 ‘Yom Kippur (욤 키퍼)’라는 이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 날 백성들은 자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줬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회개의 울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atonement’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at onement in harmony’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다른 어떤 일보다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할 것이다.” (누가복음 15:7) 이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어느 글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메모해 놓았습니다. 다윗이 쓴 시편 32편에 대한 말씀입니다. “From David’s experience, we know that he is not talking about sinless perfection. Rather, he means the righteousness that God confers on the repentant believer and the uprightness of the one who confesses and forsakes his sins (다윗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죄 없는 완전에 대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올바름에 대한 것이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The children of Israel were never known for their perfect behavior. They were known for being the peo-ple of God (이스라엘의 자녀들은 한 번도 완전한 행동으로 알려진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된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런 하나님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의 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가서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음료수를 드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을 주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오.” 느헤미야는 계속 금식하고 슬퍼하지 말고 집에 가서 이 날을 축하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 혼자만 축하하지 말고 축하하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그냥 아무 뜻없이 성경에 쓰여진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가 이 말을 한 것은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代辨)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생활은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라는 말을 한번 보십시오. 한 개인을 말하는 말이 아니라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한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말씀이 없습니다. 항상 공동체의 구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할 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This will continue until we all come to such unity in our faith and knowledge of God's Son that we will be mature in the Lord, measuring up to the full and complete standard of Christ).” (에베소서 4:13)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5/24/2020 | In Times Of Trouble 7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 (I) The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느헤미야 8:1-10

오늘 말씀을 처음 읽으신 분들은 이 말씀의 배경이 무척 궁금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두 사람,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는 바벨론 포로시대에 태어난 2세들입니다. 에스라는 율법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제사장 집안의 학자 (scribe)였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 I)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셨으므로, 그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왕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 7:6)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자들은 영성이 좀 떨어지기 쉽습니다. 책만 읽고 페이퍼 쓰고, 강의하다 보면 영성이 메마르기 쉽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같이 학문에 정진하는 청년들이 많은 곳에서는 에스라를 더욱 관심 있게 봐야 합니다. 담임목사로서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에스라와 같은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에 얽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에스라가 왕 아닥사스다의 호의로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왕이 귀국하도록 허락한 이유도 잘 이해가 안 갑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잘 지켜지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에스라, 당신을 그 쪽으로 보내기로 했다.” (에스라 7:14)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말 밖에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귀환하는 길에 온갖 보물과 또 필요한 물자를 가지고 갑니다. 그런데, 조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가다가 도둑떼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길 수도 있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왕에게 군대를 요청할까 하다가 군대를 요청하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전에 그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 생각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순조롭게 도와주십니다.” (에스라 8:22) 에스라는 군대를 요청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기 위해서 같이 귀국하는 사람들에게 금식을 시키고 여행하는 동안 안전하게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귀환자들과 함께 네 달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에스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에스라 8:23).” “길을 가는 동안 우리 하나님께서 원수와 도적들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에스라 8:31)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실에서 왕이 마시는 술을 관리하는 사람(the king's cup-bearer)이었습니다. 그 자리는 왕이 신임하는 사람만 올라갈 수 있는 자리입니다. 포로 2세 유대 사람으로 그 자리에까지 올라 간 것을 보면 느헤미야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느 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그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느헤미야 1:3) 조국의 소식을 듣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자기를 조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때 왕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하지만 언제쯤 돌아올 수 있겠소? 그대가 여행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소?” (느헤미야 2:6) 우리는 이 말 속에서 왕이 느헤미야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왕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페르시아로 돌아갔다가 다시 허락을 받아 조국으로 돌아왔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느헤미아 13:6).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요셉도 그렇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왕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성실함과 정직함, 그리고 탁월함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선한 영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큰 일에 이르기까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필요한 때에 불러 사용하십니다. 성경에 “여러분은 모든 말과 행동을 우리 주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7)”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이 하는 일 속에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읽은 느헤미야 8장 말씀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같이 등장합니다. 그 때의 상황은 성전은 1차 귀환자들로 말미암아 재건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침체되고 하나님과 멀어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가 귀국하여 백성들의 영적부흥을 위해서 노력했지만, 부흥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고, 성벽 재건을 하려고 했지만 이 일 역시 반대에 부딪쳐 진전이 없었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가 귀국하여 마침내 성벽 쌓는 일을 마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성벽을 다시 쌓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느헤미야는 그가 페르시야 왕실에서 누리고 있던 모든 지위와 명예와 부를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을까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느헤미야가 네 달이나 하나님께 기도하며 (느헤미야 2:1) 응답을 기다렸을까요?

고대 사회에서 성벽을 튼튼히 하는 것은 곧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을 가능한 높고 두껍게 쌓아서 적들의 침입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 때 쌓은 바빌로니아의 성은 높이가 22.86m, 두께가 9.7m로 성벽 위로 마차 두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그런 목적으로 쌓은 것인데, 높이가 평균 7.3m, 폭은 5.8m라고 합니다. 에스라도 나라를 지킬 목적으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려고 했고,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놓고 응답을 얻기 위하여 무려 네 달을 기도합니다 (느헤미야 2:1). 그리고, 마침내 귀국을 결심합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돈을 많이 가진 귀족들에게 성전 재건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지만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의 정부 관리들은 적극적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대 사람들이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방해에도 느헤미야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성벽을 쌓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십시오 (Lord, strengthen my hands).” (느헤미야 6:9)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엄청난 공사가 52일만에 완성이 됩니다 (느헤미야 6:15). 성벽 공사를 반대하던 사람들마저 이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느헤미야 2-7장에 성벽 재건의 긴박했던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려고 할 때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움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사명은 쉽게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고,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5)”고 하신 예수님의 사명은 온갖 반대에 부딪칩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가 있었고, 제자들 안에서도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어려움을 이겨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지금 이 사명을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아무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고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히려 어려움과 고난이 없을 때 “왜 이 과정에 어려움이 없지? 이 일이 정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맞는가?” 하고 의심해 봐야 합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수문 (The Water Gate)’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이 모임에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함께 등장합니다. ‘수문’ 앞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긴장 속에서 성벽을 쌓느라고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두 지도자는 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치유해야 할 필요성을 공감했습니다. 이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이제 조국을 새롭게 건설해야 할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성전이 재건되고, 성벽재건 공사가 끝났습니다. 이제 조국을 새롭게 재건해야 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 일은 성전재건보다 더 어렵고, 성벽을 쌓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두 지도자는 이제 이 일에 착수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합니까?

몇 년 전에 ‘징비록 (懲毖錄)’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도 재미있게 그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임진왜란이 조선의 선조 때에 일어납니다. 그 때 영의정으로 있었던 사람이 류성룡(柳成龍)이라는 사람인데, 뛰어난 경세가(經世家)였다고 합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을 예감하고 미리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하여 수군을 지휘하게 한 사람이 바로 류성룡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임진왜란 후에 벼슬을 잃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임진왜란의 전모를 기록한 책이 ‘징비록’입니다. ‘징비’라는 말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삼 년 선배인 류성룡과 이순신은 같은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류성룡은 일찍이 이순신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순신이 전사한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징비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사람됨이 말과 웃음이 적고 단아한 용모에다 마음을 닦고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며 속에 담력과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는 곧 그가 평소에 이러한 바탕을 쌓아온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 가지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류성룡과 이순신이 서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이순신이 실의에 빠진 류성룡에게 ‘재조산하(再造山河)’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라를 다시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류성룡이 영의정에서 파직되던 바로 그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합니다. 이순신과 류성룡이 그랬던 것처럼,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나라를 다시 만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많은 계획들이 있지만, 그 계획들이 모두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계획들이 성취된다 (잠언 19:21)”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알고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의 삶은 길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한정된 삶을 어떻게 가치 있고, 보람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그만큼 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합니다. 한 사람은 인생의 정도(正道)가 무엇인지 알고 살고, 한 사람은 바른 길을 찾지 못해 먼 길을 돌아돌아 갑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수문’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에스라에게 “우리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읽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한 것입니다. 에스라는 단상에 올라가서 모세의 율법책을 읽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낮 12시까지 읽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펴면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이 계획한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까? 에스라가 그렇게 백성들의 영적 부흥을 위해서 애썼지만 큰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사람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는지, 비로소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