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2020 | In Times Of Trouble 6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Take Off Your Sandals!

여호수아 5:13-15

성경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셉, 모세,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은 정말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 (Joshua)는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땅을 정복한 사람입니다. 젊었을 때는 모세 옆에서 모세를 도왔던 ‘조력자 (assistant)’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오랜 기간 모세의 후광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던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탐했던 12명의 스파이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대표로 정탐에 참가했었습니다. 가나안 정탐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 대표로 정탐에 참가했던 갈렙 (Caleb)을 눈여겨 보셨습니다. “내 종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나를 온전히 따르고 있다.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이미 본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겠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But my servant Caleb and Joshua have a different attitude than the others have. They have remained loyal to me, so I will bring them into the land they explored. Their descendants will possess their full share of that land).” (민수기 14:24)

그때부터 여호수아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이전까지는 아주 평범했던 사람이 어떤 일을 계기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도 모른 사이에 사람들 사이에서 리더십을 갖게 됩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이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보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4년에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Montgomery, Alabama)에 있는 평범한 작은 교회의 담임 목사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평생 작은 교회의 목회자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몽고메리에서 작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로자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 (Rosa Louise McCauley Parks, 1913-2005)라는 한 흑인 여자가 버스를 탔다가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 때는 이런 일이 흔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가라앉지 않고 무려 382일 동안이나 흑인들 사이에서 ‘버스 타기 거부 운동 (Montgomery Bus Boycott, 1955)’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사건에 우연히 마틴 루터 킹 Jr. 목사가 개입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가 흑인 인권운동가가 된 계기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가나안 정탐 사건이 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사람이 여러가지 일을 계획해도 결국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 (You can make many plans, but the Lord’s purpose will prevail) (잠언 19:21)”는 성경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들은 쉽게 이루어집니다. 

또 하나 성경 말씀에서 여호수아에 대하여 알 수 있는 말씀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옵니다. 광야생활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이라는 사나운 부족들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모세는 이 전쟁을 여호수아에게 맡깁니다. 모세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 (Hur)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고,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아말렉이 전쟁에서 이기는 이상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지쳐서 팔을 들지 못하게 되자 아론와 훌은 큰 돌을 가져다 그 위에 모세를 앉히고 두 사람이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올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전쟁에서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합니다. 여호수아는 이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모세도 몰랐고, 여호수아 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여호수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모세 이후를 준비할 시간도 없이 모세가 죽습니다. 그 누구도 모세의 자리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모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 이후를 치밀하게 대비하고 계셨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그 이전 세계와 분명히 같지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학교라는 시스템도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회사 시스템도 많은 부분 재택 근무형식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사회 전반이 다 바뀌는데, 교회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총연합회’라는 곳에서 5월 31일을 ‘예배 회복의 날’로 정한답니다. 이 사람들은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대표성이 있는 단체도 아닌데, 마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빨리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지금 다시 집단 감염자가 나오고 있는 비상 시국에 왜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성급하고, 판단력이 부족한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교회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 이후를 어떻게 계획하고 계시는지 신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목사도 학자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첫 번 과제는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일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훈련되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대단히 무거웠을 것입니다. 굳게 닫힌 견고한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떨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수아는 자기 앞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군이요? 적군이요?” 이 사람은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이오 (Neither one! I am the commander of the LORD's army)!” (14절)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 편도 아니라니요?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편이라고 해야 맞지 않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성실하게 믿습니까? 당신은 얼마나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감히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번 지적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너희는‘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분명히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 (마태복음 7:21-23)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의 말은 “나는 지금 어느 편도 아닌 중립(中立)이다.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의 편이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말로 들립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군대 사령관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Joshua fell with his face to the ground in reverence) 그에게 묻습니다. “주의 종인 저에게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I am at your command. What do you want your servant to do)?” (14절) “너의 신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여호수아는 그의 말 대로 했습니다.” (15절)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세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다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의미는 ‘다른 것과 구별되다’라는 뜻입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서 있는 곳이 거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여호수아가 길에서 하나님의 군대 장관을 만났다고 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선다면 우리가 무슨 말을, 무슨 행동을 할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순간 “난 더러운 죄인인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뵈었구나.” (이사야 6:5)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누가복음 5:8)”라고 고백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 ‘쓸모 없는 (worthless)’ 존재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둘째로, “신을 벗어라! 이 말이 무슨 뜻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을 벗어라”는 말을 요즘처럼 잘 지키는 때가 과거에 없었습니다. 요즘은 신을 벗고 집에만 있습니다. 어디를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요. 그냥 말로해서는 신발을 벗지 않으니까 신발을 벗을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내몬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동안 참 바쁘게 살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센트럴 스퀘어를 지나가면서 바쁜 걸음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버스를 타려고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매일 저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먹고 산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당연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이 얼마나 우스운 생각입니까?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은 네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일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인데, 그것을 중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 오면서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수도 없이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번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깊이 성찰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해서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넌 지금 여리고 성과 전쟁을 앞두고 부하들과 상의하고, 작전을 짜고, 마음이 분주하겠지만 이런 모든 활동을 중단할 수 있겠느냐? 네가 내 앞에서 신을 벗는다면 나는 이번 전쟁에서 너의 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여호수아는 그의 말 대로 했습니다 (15절)”라는 말씀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5장 말씀이 15절로 끝이 납니다. 꼭 뒤에 무슨 말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여리고 성과의 싸움은 안 되는 싸움이니까! 아무리 작전을 짜도 이건 안 되는 싸움이니까!” 하면서 신발을 벗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신발을 벗는 동시에 여리고 성과의 전쟁은 여호수아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워주시는 전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작전 명령은 절대로 사람의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작전대로 실천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졌고, 견고했던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경의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입니다. 뭔가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진 자원들 (resources)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밀알 하나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가 하신 말씀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돌아섰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인리히 호프만 (Heinrich Hofmann, 1824-1911)은 이 말씀을 모티브로 해서 ‘그리스도와 부자 청년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1889)’이라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안타까운 눈으로 이 청년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록 펠러 (John D. Rockefeller Jr. 1874-1960)가 이 그림을 사서 자신이 지은 뉴욕 맨해튼의 ‘리버사이드 교회 (Riverside Church)’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교회를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부자 청년의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5/10/2020 | 어버이주일/졸업예배/In Times Of Trouble 5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God Will Renew Your Strength

이사야 40:25-31

오늘은 어버이주일과 졸업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교회 졸업생들이 모두 47명입니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사가 19명, 석사가 15명, 박사가 13명입니다. 예전에는 졸업생들을 격려할 때 “형설의 공을 쌓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형설의 공(螢雪之功)’이라는 말은 ‘반딧불’과 ‘눈’으로 책을 읽는 노력을 했다는 말입니다. 예전 가난했던 시절에는 촛불이나 석유 등을 마음대로 켤 수 없어서 밤에는 일찍 불을 끄고 잤습니다. 책을 읽고 싶어도 깜깜해서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도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여름에는 ‘반딧불이 (firefly)’를 잡아서 수건에 싸서 그 빛으로 책을 잃었고, 겨울에는 방문을 열고 ‘눈 빛’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반딧불이’ 한 마리가 3 룩스 (lux)의 빛을 낸다고 합니다. 책을 잃으려면 적어도 ‘반딧불이’를 150마리는 잡아야 한다고 하네요. 이렇게 공부해서 학교를 마치고 졸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형설의 공을 쌓았다’라고 격려해 주곤 했습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 혼자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 (Joseph Rudyard Kipling, 1865-1936)은 ‘나의 어머니 (Mother o’ Mine)’라는 시에서 어머니를 사랑과 눈물과 기도, 세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내가 어떤 극한 상황에 있어도 나에게 흘러 온다고 했고, 어머니의 눈물은 내가 깊은 바다에 빠져도 나에게 흘러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기도는 내 몸과 영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God could not be everywhere , and therefore he made mothers (하나님은 어디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드셨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道理)를 ‘효도(孝道)’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자로 ‘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나이 많아 노인이 되신 부모님을 자식이 밑에서 떠받치는 모양입니다. 공자는 효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父母唯其疾之憂(부모유기질지우)”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부모는 그저 (자식이) 병들까 걱정할 따름이라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부모에게 무슨 좋은 것을 사 드리면 그것에 효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진정한 효도는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도록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크리스천이시라면, 우리가 부모님에게 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효도는 우리가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줄 알고,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나가고,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살면, 그것이 부모에게 드리는 최고의 효도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이사야 40장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 하던 당시의 삶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체성 (identity)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맞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가 포로생활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성전이 무너졌을까?” 이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Covid-19’으로 죽은 사람이 277,061명입니다. 미국은 78,335이고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도록 내버려 두실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일까?”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황에서 예언자를 일으키십니다. 신학자들은 이 예언자를 ‘제 2 이사야’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은 이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겠느냐? 누구를 나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누가 이것들을 창조하였느냐?” (25-26절) “‘왜 너희는 여호와께서는 나의 어려움을 모르고 계신다. 내 하나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무시하신다’라고 하느냐 (How can you say the Lord does not see your troubles? How can you say God ignores your rights)?” (27절)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his understanding).” (28절)

로버트 피어리 (Robert Edwin Peary, 1856-1920)라는 미국의 탐험가가 1909년에 개썰매를타고 북극점에 도착합니다. 피어리는 북극의 날씨를 측량하고 북극해의 깊이를 재고 싶었습니다. 30시간이나 두꺼운 얼음을 깨고 줄에 무거운 추를 달아내렸습니다. 북극해의 깊이는 생각보다 훨씬 깊었습니다. 피어리는 날마다 줄을 더 이어가면서 깊이를 쟀지만 줄은 바닥에 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기에 “북극해의 깊이는 이보다 더 깊었다”라는 식으로 기록했습니다. 훗날 첨단 장비로 재 보았더니 북극해의 깊이는 최고 4,087m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지혜의 깊이는 아무도 측량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똑 같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How unsearchable and unfathomable is the depth of the riches of the wisdom of God!” (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는 깊은 바다와 같아서 바닥을 알 수 없어 측량을 할 수 없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제가 올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축하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잠언 3:5-6 말씀을 썼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 네 자신의 지혜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의 길을 찾도록 해라. 그리하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주님이 보여 주실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Pride goes before destruction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다).” (잠언 16:18, 18:12)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간성이 겸손한 성품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합니다. 나의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늘 우리가 느끼는 혼란을 겪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너희는 왜 하나님은 나의 어려움을 모르신다고, 하나님은 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느냐? 너희 중 아무도 나의 지혜가 얼마나 깊은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지금 당장에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기택 (송강호)은 가짜 재학 증명서를 들고 과외 알바를 하러 가는 기우 (최우식)를 보면서 대견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역시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아무리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쎄서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별들을 하나씩 이끌어 내시며 각각 그 이름대로 부르신다. 그분은 매우 강하시고 능력이 많으셔서 그 이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신다 (26절)”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별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Behold, I have in-scribed you on the palms of My hands; Your walls are continually before Me.” (이사야 49:16)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는 것은 나의 이름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Your walls are continually before Me”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walls’는 무너진 성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진 성벽은 정말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느헤미야 같은 사람은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으려고 귀국을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챨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은 ‘설교자의 왕자 (The Prince of Preachers)’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한 목사입니다. 그는 매우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부모님으로부터 물려 받은 그는 존 번연 (John Bunyan, 1628-1688, 영국)이 쓴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을 100번도 넘게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열심히 성경을 읽었지만 구원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려고 노력해 보았고,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특권이 있다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던 스펄전에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정적인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850년 1월 6일, 그 날 아침에 눈이 너무 와서 모든 길이 막혔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평소에 나가던 교회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가까운 작은 감리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에는 이십 명이 채 못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눈이 많이 와서 목사도 오지 않았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한 초라한 옷을 입은 사람이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읽은 본문 말씀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바라보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Look to me, and be saved, all the ends of the earth) (이사야 45:22)”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바라보는 일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들만 바라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바라보십시오. 어떤 이는 성령이 역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기까지 말하고 난 이 사람은 강당 바로 밑에 앉아 있던 스펄젼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펄젼을 향해, “당신이 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일생 동안 힘든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청년이여, 그리스도를 바라보시오! 지금 바라보시오!” 스펄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반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스펄젼은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순간 나의 가슴에 꽉 차 있던 구름이 걷히고, 내 영혼에 구원의 빛이 비치었다. 아! 나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고 왔던 죄의 무거운 짐이 나의 어깨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순간, 나는 존 번연이 넓은 대지 위에서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싶다고 외쳤던 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둔다는 말입니다.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2,500년 전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절망적인 청년 시절을 보냈던 스펄전도 새 힘을 얻었고, 새로운 기회을 얻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목사로서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앞날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어렵고 힘든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때로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빠지기도 할 것입니다. 때로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당황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여러분의 가슴에 새겨 주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31절)  

 


5/3/2020 | In Times Of Trouble 4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십시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시편 34:4-11, 18-19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바깥 생활이 자유롭지 않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요즘에 ‘소확행(小確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랑겔한스섬의 오후 (Afternoon in the Islets of Langerhans, 1986)’에 처음 등장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영어로는 ‘small but certain happiness’라고 하네요. 요즘에 집에만 있으니까 답답하고 짜증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요. 우리 스스로 ‘소확행’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다든지, 보고 싶었던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일, 화분에 꽃을 길러 보는 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식구들과 먹는 일, 그리고, 크리스천이라면 성경을 읽는 일 등이 모두 ‘소확행 (사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해당하는 일들입니다. 

‘소확행’에 대한 비판의 말들도 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말 중에 ‘뉴-노멀 (New Normal)’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확행’의 시간이 길어지고, 또 이것이 습관이 되어버리면 이것이 새로운 일상생활이 되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혼자 있는 것에 행복을 느끼게 되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을 멀리하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되어 버리면 인간 관계가 깨지고 반사회적(反社會的)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록 그런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뭔가 정상적이 아닌, 불안한 생활에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시편 34편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은 단순히 위로를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경험하기 위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가 책을 통해서 마음에 평안을 느끼고 위안을 받는 것은 꼭 성경이 아니어도 동양의 고전이나 좋은 책들을 통해서도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도움의 손길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위로를 받자는 값싼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 ‘어렵고 힘들 때 (in times of trouble)’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고 경험하고 도움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옆에 있는 말씀 카드를 한번 보십시오.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얼굴로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카드에 적인 글을 한번 보십시오. “가끔 나는 눈을 들어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알아요. 하나님 당신이었죠? 감사해요!”

그러면, 오늘 시편을 쓴 다윗은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어떻게 체험했을까요? 이 시편은 다윗이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하고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고 한 밤중에 ‘놉 (Nob)’이라는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수행원도 없고, 몸에는 아무 무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도 먹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 (Ahimelech)’을 찾아 갑니다. 아히멜렉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번에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고 다윗에게 먹을 것을 내 줍니다. 그리고, 마침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칼을 내 줍니다. 이 칼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전리품이었는데, 그 칼을 아히멜렉이 보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막 떠나려고 하다가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됩니다. ‘도엑(Doeg)’이라는 사울왕의 ‘목자장’으로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아차 싶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 도엑이라는 사람이 사울왕에게 자기가 여기 왔었다는 것을 보고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땅에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습니다. 다윗은 죽기 아니면 살기다 식으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블레셋 땅에 숨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은 틀림없이 변장을 하고 블레셋 땅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정체가 탄로나서 다윗은 블레셋 왕 ‘아기스(Achish)’에게 끌려갔습니다. 사람들이 아기스에게 말합니다. “이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처럼 따르는 자입니다.” “이 자를 죽여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이 자는 우리 땅을 정탐하려고 들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생명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이 아기스 왕 앞에서 갑자기 미친 척을 했습니다 (David heard these comments and was very afraid of what King Achish of Gath might do to him. So he pretended to be insane, scratching on doors and drooling down his beard) (사무엘상 21:12-13)”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는 것입니다. 그 때 아기스가 다윗을 죽였더라면 지금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역사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기스는 거드름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어디서 이런 미친 놈을 데려왔느냐? 썩 이놈을 데리고 물러가라!”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했던 것은 기발한 신의 한 수였습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정작 그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그가 발휘한 신의 한 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위기의 순간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니까 안심이 되고 마음에 위로가 되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으로 직접 들어오신 것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니까 상황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왜 두고두고 후환이 될 사람을 살려주었을까요? 왜 아기스는 그 때 상황을 잘못 판단했을까요? 아까 말씀 카드에서 읽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Sometimes I just look up, smile and say ‘I know that was you God. Thank you!’” 하나님께서 그 상황 속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경에 똑 같은 상황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도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놓고 분을 참지 못한 이집트의 왕 ‘바로 (Pharaoh)’는 자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추격합니다. 바로는 왜 이스라엘 백성 추격해서 결과적으로 자기 군대를 모두 홍해바다에 수몰(收沒)시켰을까요? 성경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내가 바로의 고집을 꺾지 않고 그대로 둘 터이니, 그가 너희를 뒤쫓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와 그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출애굽기 14:4, 로마서 9:18)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셨으면, 그래서 나를 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시편은 책상 앞에 앉아서 쓴 시가 아닙니다. 그의 시편은 모두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온 시들입니다. 한 편 한 편마다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의 시편에 나오는 구절들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찾아 도움을 청했더니 내게 대답하시고, 내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습니다.” (4절) “이 불쌍한 사람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In my desperation I prayed, and the LORD listened; he saved me from all my troubles).” (6절)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자기 정체가 탄로나고, 아기스 왕 앞에 끌려갔을 때, ‘아기스’의 말 한마디에 그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다윗은 온 몸에 식은 땀이 났을 것입니다. 그는 긴급했던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며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더 놀랍습니다. “여호와의 천사들이 주님을 높이는 사람들 둘레에 진을 치고,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angel of the LORD is a guard; he surrounds and defends all who fear him.” 주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을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이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서 그를 지키신다고 합니다. 다윗은 위기의 순간에 그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형식적인 믿음생활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이 실제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그의 편지에서 ‘산 믿음’과 ‘죽은 믿음’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2:17, 26).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우리의 믿음이 산 믿음인지 죽은 믿음인지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또 불안한 이 상황 속에서 나의 믿음이 나를 지켜주는 ‘산 믿음’인지, 아니면 이 상황에서 아무 소용없는 ‘죽은 믿음’인지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in times of trouble)’ 내 믿음이 나를 지켜주지 못하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쳐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 집은 반석 (firm foundation) 위에 세워진 집이다.” (마태복음 7:25)

여러분, ‘Catfish Effect (메기효과)’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The catfish effect is the effect that a strong competitor has in causing the weak to better themselves (강한 경쟁자가 약한 경쟁자들을 더 끌어 올리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이론입니다). 다윗에게는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메기였습니다. 이 메기 덕분에 다윗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9편에도 “고난 받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좋았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주의 말씀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71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미스트에게도 고난이 ‘메기효과’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살피고 맛보십시오. 그분께 피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Taste and see that the LORD is good. Oh, the joys of those who take refuge in him)!” (8절) 보통 음식을 맛본다는 말은 많이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맛을 보라는 말은 참 독특한 표현입니다. 제 선배 목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요. 그 아버님도 목사님이셨는데, 아버님 목사님이 성경 말씀을 재미있게 가르치기로 소문이 나셨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새벽 기도 때마다 작은 성경을 한 손에 들고 “이 말씀이 뜻인고 하면......” 하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들도 말씀을 들으면서 입맛을 다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마치 음식의 맛을 보듯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렇게 구체적으로 그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그의 피난처가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그의 위로가 되시고, 그의 기쁨이 되시고, 도움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꿀같이 단 말씀으로, 어떤 때는 징계의 말씀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끝으로, 다윗은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들이여, 이리 와서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를 높이고 두려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습니다.” (11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 되겠지!” “봉사를 열심히 하면 되겠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성경을 많이 읽으면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법이 있거든요? 다윗은 나쁜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나쁜 길에서 돌아서라고 하고, 착하게 살라고 하고, 평화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사이 좋게 지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4/26/2020 | In Times Of Trouble 3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O Lord, Listen Closely To My Prayer

시편 86:1-12

오늘 시편 말씀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그 중에서 다윗처럼 매력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다윗에 대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이 말씀은 사무엘상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요. 이 말씀의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괜찮은데요. 알고 읽으면 소름이 끼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직을 감당하던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사울 왕을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처음에는 겸손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나오는데요. 점점 그는 교만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왜 그런지 그의 마음은 초초해 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사울은 블레렛 사람들과 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 특화된 사람들입니다. 그 때 벌써 철기 문화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쇠로 만든 칼과 창을 사용했습니다. 숫자도 많고요.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쇠로 만든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상 13:22). 

이런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멀리 블레셋 군인들이 보이는데, 한 눈에 봐도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습니다. 그걸 본 이스라엘 군대는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초초한 사울은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사울이 이미 제사를 드린 것을 안 사무엘은 자기가 늦게 온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이제 끝이 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3:13-14) 

“For the LORD has sought out a man after his own heart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이 살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신 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다윗을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 (unfailing love), 성실, 자비, 긍휼, 정의, 인내, 용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다윗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모형(模型)’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 많이 나옵니다. 땅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같은 것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계 (genealogy)를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다윗은 그 후손으로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 (shadow)’ ‘replica’ ‘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For David had done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and had obeyed the LORD's commands throughout his life, except in the affair concerning Uriah the Hittite.” (열왕기상 15: 5)

완전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다윗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그 주변에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 (the brokenhearted)’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윗에게 몰려왔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빚을 진 사람, 그리고 마음에 억울함을 가진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몰려온 사람들은 사백 명가량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2:2) 예수님 주변에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a glutton (먹보)’ ‘a drunkard (술꾼)’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마태복음 11:19)’였습니다. 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거든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거든요.

예수님께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의 ‘모형’인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주로 그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이 받은 고난도 그가 모시고 있던 왕 사울로부터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받은 고난의 특징은 두 사람 모두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기회는 된 것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어린 다윗은, 형들에게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전해 주려고 전쟁터에 갔다가 블레렛의 적장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말도 안되는 싸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로 다윗은 단번에 유대나라에서 유명하게 됩니다. “사울이 죽인 적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적은 만만이라네.” (사무엘상 18:7) 사람들은 이렇게 다윗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에게 고난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는 사울 왕의 미움을 받게 되고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많습니다. 이유라도 알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이유를 알 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고난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은 사람이 202,213명입니다. 미국은 53,397명이고요. 우리나라는 240명입니다. 제 질문은 “이렇게 죽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고요. 죽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부주의한,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건전하지 못하게 살던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왜 괜찮은 것이지요? 그 사람들보다 뭔가 더 살아야 이유가 있는 사람들인가요? 왜 그 사람들은 죽고, 우리는 살아 있는지 어디서도 정답이 찾을 수 없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아마 그 대답이 최선의 대답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 (favor)’를 베풀어 주신 것 아닙니까?

다윗은 이유 없는 고난을 받으면서 사울 왕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께서 누구를 잡으려 하십니까? 왕이 뒤쫓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께서 왜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사람을 뒤쫓고 계십니까?” (사무엘상 24:14) “Who is the king of Israel trying to catch anyway? Should he spend his time chasing one who is as worthless as a dead dog or a single flea?” 다윗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복수를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가 쓴 시 속에 그의 억울한 심정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요. 원수에 대한 미운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점이 다윗이 훌륭한 점이고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86편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시편 속에 그의 초조하고 다급한 심정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시오.” (1절) “내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2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3절)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6절) “내가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습니다.” (7절) 

여기까지만 보면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형편이 어렵고 다급하니까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 외에 다른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아, 이래서 다윗의 시편이구나!” “다윗이 이런 사람이니까 그리스도의 ‘prototype (모형)’이라고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강철 같은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많이 힘들어 하시면서 불안한 마음을 제자들에게 숨지 않으시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되 먹지 않은 사람을 보면 “그게 인간이냐?”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참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참 인간’이 됩니다. 사랑할 줄 알고, 올바른 말을 할 줄 알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며,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줄 알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 봅니다. 반성과 회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묻습니다.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5절)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주의 진리 가운데 걸어가겠습니다. 나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주셔서 내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해 주십시오.” (11절) 다윗은 ‘자기의 길 (his ways)’을 묻지 않고 ‘주의 길 (His ways)’을 묻고 있습니다. 이래서 다윗의 시편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의 길’을 묻지 않고 ‘자기의 길’만 주장했더라면, 그의 시편은 이기적인 평범한 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prototype (모형)’입니다. 다윗의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기도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가복음 14:36) 제 귀에는 이 예수님의 기도 소리가 쟁쟁하게 들립니다. 

매주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FKCC 교우 여러분, 지금의 이 상황이 얼마나 더 오래 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The Second Wave of Covid 19’이란 말이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8)”는 말씀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FKCC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19/2020 | In Times Of Trouble 2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편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어려운 시간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한국의 상황이 상당히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총선도 잘 끝났고요. 그래도 다시 재발하는 일 없이 이 상황이 잘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있는 매사추세츠 주는 미국에서도 확진자 수가 상위 다섯 개 주에 드는 주입니다. 인접한 뉴욕이 가장 상황이 안 좋고요. 인접한 코네티컷 주도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로칼 뉴스 중에 염두에 둬야 할 소식이 있는데요. 확진자 수가 많은 10개 타운을 발표했는데요. 지금 우리가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조심해야 할 뉴스라고 생각합니다. 1위가 Chelsea, 2위 Brockton, 3위 Randolph, 4위 Williamstown, 5위 Lawrence, 6위 Everett, 7위 Longmeadow, 8위 Braintree, 9위 Revere, 10위 Norwood입니다. 우리 FKCC 교우 여러분들, 무사하게 이 사태를 잘 이겨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나라들이 미국과 유럽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나라들입니다. 각 나라마다 이 사태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 독일 총리가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ASEM, The Asia-Europe Meeting)에서 우리가 서로 연대하여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자로 ‘위기’라는 말을 설명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위기’를 한자로 ‘危機’라고 쓰거든요? ‘危’ 자는 위태하다는 뜻이고, ‘機’자는 어떤 일의 ‘실마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기’라는 말에 위험과 기회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위’자는 영어로 하면 ‘danger’이고 ‘기’자는 ‘opportunity’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간다면,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진정이 되면 리더십 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상황을 맞이했지만 현명하고 지혜롭게 위기를 잘 대처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리더십과 사태를 가볍게 보고 방관하다가 나중에 가서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 무책임한 리더십이 구별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상황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에게 ‘위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저는 우리 FKCC 교우 여러분들에게 이번 사태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뭔가 계획을 세우고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위기는 그냥 위기일 뿐 절대로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위기’라는 말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만, ‘위(危)’자는 사람이 높은 낭떠러지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機)’자는 방아쇠 뭉치를 글자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고, 화살이 발사됩니다. 화살이 발사되어 어떻게 되었는지 그 마음 단계가 매우 궁금하지 않습니까?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이 화살을 발사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우리에게 친숙한 시편입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시편의 용도는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부르는 노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면서 이 노래를 부르며 갔습니다. 그 광경이 머리에 그려지시나요? 순례자들이 집을 떠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갑니다. 어깨에 제물로 드릴 어린양을 메고 갑니다. 가면서 이 시편 121편을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들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나의 도움은 여호와로부터 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에게서 옵니다.” 길을 가다가 다른 순례자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또 같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까지 순례의 길을 갑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배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의 본질(本質)은 연약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리고 그 분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그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B. C. 354-430)은 그가 쓴 ‘고백록 (Confesssion)’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하지 않습니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you).” 어거스틴은 이 고백 속에서 예배란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강한 것 같지만, 인간은 모두 연약합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 시켜주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답답합니다. 학교도 그렇고, 취직도 그렇고, 비지니스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정상적인 활동들이 모두 중단되고 평소에 하던 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을 전처럼 만날 수도 없습니다.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되던 일들이 틀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윌리엄스타운 (Williamstown) 같은 곳은 매사추세츠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시골 마을에 감염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기사를 찾아 봤더니 그곳에 양로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집단적으로 감염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1세기에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한 미국에서, 또 유럽의 선진국에서 오히려 사망자가 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시편 말씀이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저는 목사로서 이런 상황을 주시하면서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마음들이 더 많이 생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하면서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선물입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내가 눈을 들어 산들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산을 숭배하는 문화나 전통이 있습니다. 인종을 초월해서요. 한국의 삼각산(三角山)이란 산이 있습니다. 그곳에 수많은 예배처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것들도 있고, 불교적인 것도 있고, 온갖 잡신을 섬기는 예배 장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나를 믿으시오.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당신네들이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오.” (요한복음 4:21) 이 사마리아 여자가 말하는 산은 사마리아 땅에 있는 ‘그리심산 (Gerizim Mount)’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예배 장소를 만들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시온산 (Zion Mount)’이 있고, ‘성전산 (Temple Mount)’이 있고, ‘감람산 (Ol-ive Mount)’이 있습니다. ‘시온산’에 다윗성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 산을 신성시합니다. ‘성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던 ‘모리아산 (Moria Mount)’과 같은 산이라고 하는데요. 이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나의 도움이 산에서 온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폭넓게 해석한다면, 이 사미스트는 심지어 성전이 있는 ‘성전산’에서 나의 도움이 온다는 사실도 부정하고,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이 선언이 참 경이롭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어느 장소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엘 샤다이 (El Shaddai)’라고 불렀습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엘 샤다이’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느 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국한하는 것을 거부하시면서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오 (요한복음 4:21, 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 장소를 부정하셨고, 사미스트도 예배 장소를 부정하면서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온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도움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그 어느 것도 개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소, 시간, 또는 환경, 이런 것들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떤 도움을 주시는지 한번 보실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십니다 (3절).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그 하나님은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6절). ‘낮의 해’라는 말은 한낮의 뜨거운 더위를 말합니다. ‘밤의 달’이라는 말은 밤의 추위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유목민들에게는 더위와 추위가 생명과 관계될 만큼 큰 걱정거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재앙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7절). 

이 세가지 하나님의 도움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무 대책 없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낮의 더위와 밤중의 추위를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재앙도 나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것이 ‘환난 (tribulation)’이고, ‘재앙 (harm)’이고 ‘재난 (disasters)’이고, ‘위험 (dangers)’입니다. 

여러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심한다고 코로나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조심한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부터 감염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숭배에 빠져 사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사람이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God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Since h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he doesn't live in man-made temples, He himself gives life and breath to everything, and he satisfies every need, 사도행전 17:24-25)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도움 (help from)’은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마치 우리가 자연스럽게 코로 숨을 쉬듯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